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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이 따로 없다

쇼트 펀트 포메이션/쇼트 펀트 포메이션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7.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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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최고 기온이 35도를 찍는 지옥 같은 무더위에 크고 작은 도심 공원 내에 무료 생수 냉장고가 등장했다. 폭염 속 시민들의 탈수 발생을 방지하려는 요량으로 나온 생각이라고. 처음에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물론 세금이 들어가는 사안을 곱게 보기는 어렵긴 하지만 (생수값이야 그리 대단하지 않겠지만 굳이 이 더운 날 야외에서 냉장고를 돌린다고?) 노약자 안전을 위한 취지라면 마냥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이다. 무엇보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큼 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사태는 황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양잿물은 커녕 시원한 얼음 생수. 한 사람이 두 개를 가져가고, 세 개를 가져가니, 너도 나도 여러 개 넉넉하게 챙겨놓기 시작했다고. 산책 가는 길에 한 번, 집에 가는 길에 한 번, 이유 없이 돌아서 또 한 번, 집에서 마실 물도 가족 수대로 가져가고. 내일 먹을 물도 가져가고, 냉장고 문이 끝도 없이 열리고 닫혔다. 급기야 트롤리를 가져와 생수를 가득 담아가는 빌런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어느 사이엔가 기준이 희미해진 시민의식. 쟤는 많이 가져가는데 나도 그러면 왜 안 되느냐는 경쟁적 마인드. 나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병적인 불안감. 그야말로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관할 구청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 어르신들에게 생수 냉장고를 지키는 일을 부탁드린다. 마치 고대의 보물을 수호하는 드래곤처럼 생수 냉장고를 지키고 있다가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나누어주는 일이다. 생수를 공정하게 하나씩 분배하고 나아가 비양심 종자들과 생수 도둑들을 막는 한편, 지킴이로 나선 어르신들께 소일거리까지 제공하는 나름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폭염 속 노약자 보호를 취지로 시작한 일이 맞는지 조금은 갸우뚱해지는 시점이다.) 하지만 이 대책은 앞선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 심각하게 만드는데, 이유인 즉, 생수 지킴이 어르신이 지나치게 감당하게 어려울만큼 큰 힘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어르신은 지극히 사적인 기준으로 생수 분배를 하기 시작하신다. 그러니까 아는 사람에게 두 개를 챙겨 주고 세 개를 챙겨 주는 식으로. 당연히 친한 사람에게는 몰래 여러 개 챙겨 주고. 그 결과 엉뚱하게도 생수를 더 받기 위해 어르신과 친해지려는 사람들의 노력과 경쟁이 시작된다. 친한 사람이 아는 사람을 소개하고.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끌고 가고.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을 끼워 넣고.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의 이름을 팔고. 누구는 여러 개 받아가는데 나는 하나만 주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생겼다. 볼썽 사나운 언쟁과 다툼도 벌어졌다. 결국 이 해프닝은 생수 냉장고가 철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상당 수의 인근 주민들이 겨우 생수 몇 병에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듯한 꼴이었는데, 공원에서 겨우 몇 분 거리의 마트와 편의점에 충분히 재고가 있는 생수를 두고 그것도 충분한 구매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그런 추태를 보였다는 사실에는 분명 무더워보다 더 숨막히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2017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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