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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블루스 네버 페이드 어웨이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2.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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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지난 주 목요일이었던 것도 같고 금요일이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십년은 지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목요일인가 금요일인가, 그날 나는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일이 이리 될 줄 진작에 알았다면 그런 심통은 부리지 않는게 좋았을 것이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그런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며 나는 육교를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쿵쿵쿵. 계단을 울리는 소리는 불편했던 내 심사와 다름이 아니었다. 시장 골목에서 6차선 도로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육교였다. 비록 애꿏은 계단에 분풀이를 하고는 있지만 그리로 건널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순전히 누구 탓도 아닌 내 탓이었다. 육교를 건너야 하는 이유는 내가 엉뚱한 버스를 탔기 때문이고 다시금 원하던 길로 돌아가려면 반대편 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근방에는 횡단보도도 지하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횡단보도나 지하도도 없을 그런 한적한 곳에 내린것은 말 그대로 누구의 탓도 아니었겠으나 그 답답함을 풀지 못해 나는 저주를 퍼붓고 악담을 외웠다. 정말이지 아니 그랬다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육교를 거의 다 올라갔을 무렵, 막 육교에서 내려오려는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혹은 그랬다고 한다. 그림자의 주인은 많아야 열일곱, 적어도 열다섯, 그러니까 열여섯으로 보이는 딱 그렇게 보이는 딱 고만한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그런 아이들이야 온 세상에 널리고 깔렸을 테니 별반 특별하게 느낄 것도 없지만, 불균질하게 퍼져있는 얼굴의 근육이나 심하게 이지러져 마치 고정쇠가 고장난 컴퍼스처럼 흉하게 맞물려 있는 두 다리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중학교의 것으로 보이는 감색 교복 아래로 뼈만 앙상한 두 다리가 어긋난 각도로 계단을 짚었다. 위험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위험해 보이는 순간이었노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내게 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그때 나는 몹시도 골이 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위험함을 진심으로 판단할만큼 이성적이지 못했다. 별로 신경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텔레비전의 한 장면처럼 무심히 지켜 보았을 뿐이다. 또 그렇게 지나쳐 갔을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그저 빨리 반대편으로 가서 빨리 버스를 잡아타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감당할 수 없는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올 줄은 정말 몰랐다. 

 

*

 

  가끔은 그렇다.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 정말이지 그런 것이다.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그 당시 빨리 버스를 타고 돌아가지 않았다면 나는 필경 회사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절대 빈말이라고는 하지 않는 악의 화신 박팀장이 그렇게 엄포를 놓았으니 아마 정말이었을 것이다. 그 놈의 휴대전화가 문제다. 언제 어디에 있던 회사로부터 나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도망치다가도 전화가 걸려오면 돌아가야 하고. 자다가도 전화가 걸려오면 나와야 하고. 분명히 인류는 휴대전화가 없는 시절을 살았을진대 그때 월급쟁이들은 얼마나 편했을까. 일단 정문만 벗어나면 귀신이 곡을 해도 잡을 수가 없었던게 아닌가. 그때는 참 좋았을 것이다. "아무개씨. 속히 복귀하길 바랍니다." 전화를 끊기 전 박팀장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하여 나는 황급하게 회사로 돌아가는 1001번 버스를 잡아 탔던 것이다. 버스가 금방 왔지만 반대방향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다시 서둘러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찾았다. 없었다. 지하도를 찾았다. 그것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육교가 있었다. 이거라도 있으니 되었다. 그래서 육교로 걸어 올라갔던 것이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그런 저주와 악담을 툴툴툴 퍼부으면서. 그때 몸이 불편한 여자아이를 지나치기는 했으나 마음이 워낙 급해 그리 오랫동안 기억에 담아두지는 못했다. 

  버스를 타고 회사로 돌아갔을 때 박팀장은 한 시간에 가까운 연설을 늘어놓았다. '팀장의 고충과 성실한 팀원의 자세'가 연설의 주제였다. 재미없었다. 그러나 당신 말이 재미없다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자리라면 애초에 서둘러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의 덩어리들을 묵묵히 견디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 사회생활이라는게 그런 것이다. 출근하고, 일하고, 호출받고, 달려오고, 고개를 숙이고, 퇴근하고. 연설이 끝나자 박팀장은 선약이 있어 먼저 퇴근하겠노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방식인가? 사람을 불러다놓고 자기는 퇴근해버리는 것은. 진짜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 뭐, 사회생활이라는게 그런 것이다. 출근하고, 일하고, 호출받고, 달려오고, 욕먹고, 삭히고, 고개를 숙이고, 퇴근하고…… 아니, 남의 퇴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자리에 앉아 등을 기댔다.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애꿎은 종이컵만 질겅질겅 씹으며 달력을 살폈다. 조금만 더 버티면 주말이다. 주말, 그게 마지막 희망이다. 그렇지만 주말이 지나면 또 쳇바퀴다. 다음주래봐야 특별할 것은 없었다. 똑같은 날들일 것이다. 마치 오늘이라는 공테이프에 어제를 카피 뜬 것처럼. 

 

*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처음 깨달은 것은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에서 몇몇 사람들이 내 쪽을 힐끔거렸다. 뭔가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길이었으나, 나는 그게 설마 나를 향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내 옆에, 내 뒤에, 내 주변의 누군가를 쳐다보는 줄로만 알았다. 사실 그런 것이다. 출근하고, 일하고, 호출받고, 달려오고, 욕먹고, 삭히고, 고개를 숙이고, 퇴근하는 평범한 사람을 쳐다볼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내 옆의 누군가도 출근하고, 일하고, 호출받고, 달려오고, 욕먹고, 삭히고, 고개를 숙이고, 퇴근하는 중이었을 것이고, 내 뒤의 누군가도 출근하고, 일하고, 호출받고, 달려오고, 욕먹고, 삭히고, 고개를 숙이고, 퇴근하는 중이었을테다. 내 주변의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출근하고, 일하고, 호출받고, 달려오고, 욕먹고, 삭히고, 고개를 숙이고, 퇴근하는 중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온전한 보호색을 가진 남자. 나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이 사회의 일상이었다. 그런 나를 괜히 사람들이 쳐다볼리는 없는 것이다. 

  그때 전화를 받았다. 고등학교 동창놈의 것이었다. "여보세요" 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이번에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감도가 좋지 않은가 싶어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에 녀석이 말했다. "쓰레기같은 놈." 한편으로는 잘 들린다는 사실에 안도했으나 한편으로는 ‘쓰레기’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두 번, 세 번 곱씹어 보아도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야, 임마. 갑자기 왜 그래?" 녀석은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걸 몰라서 물어? 새끼야? 니가 인간이냐? 인간이야?" 저기, 나는 뭔가를 말하려 했으나 녀석의 윽박지름은 계속 이어졌다. "넌 친구도 아니다. 앞으로 아는 척 하지말자. 알아 듣냐? 지금 나 니 번호 내 휴대폰에서 지운다. 너도 동시에 지워라. 다시는 연락하지 마라." 저기, 다시 나는 뭔가를 말하려 해으나 녀석은 단호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뚜뚜뚜뚜뚜. 의미없는 신호음만이 세상을 맴돌았다. 휴대전화를 반으로 접고나니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녀석의 고함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리라. 그 바람에 나의 보호색이 벗겨져 나갔다. 역시 눈에 띄는건 부담스럽다. 이럴땐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뻔뻔하게 아무 것도 신경쓰지 않는 척 호기를 부려야 하는 것일까?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는 것일까? 그건 그렇고 녀석은 도대체 왜 나에게 그런 전화를 했던 것일까? 일방적으로 말하고 끊어버리니 대꾸할 길이 없다. 역시 휴대전화가 문제다. 그것 때문에 호출받고, 달려오고, 욕먹고, 삭히고, 고개를 숙이고. 휴대전화만 없었어도 세상은 그럭저럭 살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

 

  집에 돌아와 거실에 불을 밝혔다. 혼자 사는 집에 돌아오는 일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쑥스럽다. 혼자서 문을 열고, 혼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혼자서 전등을 켠다. 작은 거실과 작은 주방과 작은 작업실과 작은 다용도실로 이루어진 18평의 아파트는 작으면서도 혼자 살기에는 커다란 공간이었다. 윗옷을 벗어 쇼파에 걸쳐놓고 냉장고를 열었다. 콜라병을 꺼내어 오른쪽으로 두 번 돌려 따고 유리컵에 따랐다. 촤촤촤촤촤. 탄산이 이글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렸다. 뚜껑을 닫아 콜라병을 냉장고에 넣었다. 콜라를 마셨다. 목이 따끔거리더니만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병원에서는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이나 탄산 음료를 피하라고는 했지만, 이렇게 자극을 주지 않고서야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야 비로소 나는 정말로 내가 살아있고,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자극에 반응할 수 있는 몸이다. 차갑게 목을 흩고 지나간 탄산 음료의 아릿함에 코까지 매웠다. 살아있다.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이다. 

  쇼파에 앉기가 무섭게 리모콘을 찾았다. 텔레비젼을 켰다. 어제와 다를바없는 저녁 시간이다. 여유가 생기는 그제야 녀석의 전화가 떠올랐다. 이유모를 윽박지름끝에 절교를 선언하고 끊어버린, 뚜뚜뚜뚜뚜. 녀석이 왜 그랬는지 정말 나는 알 수가 없다.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녀석은 아직까지도 연락이 끊어지지 않은 유일한 고등학교적 친구였다. 더러 떠나고 더러 사라지는 동안에도 우리는 세차게 그 끈을 놓지 않았다. 폭풍으로 넘실거리는 바다에서도 녀석이 옆에 있더라면 든든할 것만 같았다. 비록 둘이 함께면 못할 것이 없다고 호언하던 열아홉 시절은 아주 먼 기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고작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말에 나란히 앉아 비디오를 빌려다 본다던가 가끔씩 산악 동호회에 함께 나간다거나 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혼자보다는 둘이 나은 것이다. 오늘 아침까지도 아무 일 없었던 녀석이 왜 그랬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알다가도 모를……,

  텔레비젼에 내가 나왔다. 

 

*

 

  텔레비젼에 내가 나온다면 정말 좋겠네에. 정말 좋겠네. 텔레비젼에 내가 나온다면 정말 좋겠네에.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텔레비젼에 내가 나온다면 정말 좋겠네에. 정말 좋겠네. 

  하지만 텔레비젼 속의 나는 춤을 추지도 않았고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다. 육교를 올라가고 있었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촬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뭐가 그리 심통이 났는지 퉁퉁 부은 얼굴이었다. 어깨는 삐딱하고 허리는 구부정했다. 넥타이는 풀러버린 채였고 바지 밖으로 빠져나온 와이셔츠가 펄럭거렸다. 종아리에 모래주머니라도 차고 있는듯 발걸음은 무거웠다. 약간 위쪽에서 내려다보는 화면이었지만 분명히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나는 나였기 때문에 내가 나인지 아닌지 쉽게 알 수가 있었다. 타자를 바라보듯이 내가 나를 본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워낙 현실적이지 않은 일이어서 마치 엷게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퉁퉁퉁 걸어올라가는 내 앞에는 한 여자아이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 아이로구나. 이제 기억이 난다. 심하게 이지러져 흉하게 맞물려 있는 두 다리가 기억이 난다. 감색 교복을 입고 나사 풀린 로보트처럼 비틀비틀 걸어오던 그 모양새가 기억이 난다. 불균질하게 퍼져있는 얼굴의 근육마저 기억이 난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위태로운 걸음걸이다. 한 순간 한 순간 마다 무게중심을 새로 잡아야 하는 듯, 높다란 장대 위에서 곡예를 하는 듯, 실로 위태롭다. 육교의 계단을 위로 오르던 (영상 속의) 나는 그 아이를 쳐다본다. 무생물을 쳐다보듯 무심한 눈길이다. 그 아이는 다시 휘청. 나는 눈길을 떼지 않으면서도 결코 다가가지 않는다. 또다시 아이는 휘청. 나는 지나쳐간다. 아이는 휘청. 내가 지나가는 찰나에 그 아이와 스친다. 아주 살짝이었지만 몸과 몸이 맞닿았다. 부딪쳤다. 육교의 계단을 내려오려던 아이는 갑작스럽게 해일을 맞은 야자나무처럼 무너져 내린다. 주저앉는다, 차라리 쓰러진다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모로 쓰러진다. 위험하다. 육교의 계단은 높다. 다리와 다리간의 고정쇠를 잃어버린 가련한 아이게게 육교의 계단은 너무 많다. 서너 계단을 굴러내려와 가까스로 난간을 붙잡는다. 한 다리는 세로로 나머지 한 다리는 가로로 눕는다.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불균질하게 퍼져있는 얼굴의 근육이 더욱 불균질하게 번져간다. 어느 부분은 더 많이 모이고 어느 부분은 더 적게 모인다. 그러나 어떤 표정인지는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우는 표정이다. 화면이 확대된다. 운다. 눈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남들처럼 매끈하지 못한 피부의 굴곡을 타고 흘러내린 물줄기는 턱 끝에 모여 아래로 아래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린다. 젖는다. 감색 교복이. 자주색 체크 치마가 젖는다. 

  그러는 사이에도 (영상 속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육교의 정상을 힘차게 걸어간다. 높이 이는 바람에 윗옷이 펄럭인다. 넥타이 없이 풀어져 있는 와이셔츠 칼라도 덩달아 펄럭거린다. 급히 어딘가를 가야한다는 듯 급한 걸음이다. 자기가 방금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모른다는 얼굴이다. 근육이 미묘하게 떨린다. 아니, 안다는 얼굴이다. 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 또 떨림이 일어난다. 미묘하다. 화면이 확대된다. 입꼬리가 길게 올라간다. 웃는다. 아주 기분 나쁘게 씨익 웃는다. 씨익. 누가 봐도 그건 - 씨익이다. 끝에 다다른 나는 육교의 계단을 힘차게 내려간다. 더할 나위 없이 가벼운 발걸음이다. 나는…… 정말이지 나는……

 

(200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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