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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못말리는 미스터 에이치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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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아침이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즐거운 등교길이었습니다. 가을하늘은 퍽이나 공활하였고, CD 플레이어 속의 마이클 볼튼은 내 귀에 대고서 너 없이 내가 어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고 끊임없이 외쳐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미안하지만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이클볼튼은 싱어송라이터고 채식주의자이기 이전에,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쪽 생명은 그쪽이 알아서 나름대로 유지를 하시고, 나는 나대로 이성애자로서의 소신을 지켜가야 합니다. 참으로 안되었지만, 그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이클 볼튼을 보내고, 이번에는 글렌 메데로스와 함께 그렇게 캠퍼스 서쪽의 쪽문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친구도 너를 향한 나의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외쳐대었습니다. 정말이지 피곤한 일입니다. 나는 왕년의 꽃미남 하와이 키드의 열렬한 구애를 뿌리치고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비록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신입생 때처럼 한달음에 달려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모두가 부러워할만큼 우아하고도 경쾌했답니다. 라라 라라랄라.


  이런, 내가 지나쳐 갈때마다 모든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익숙치 않습니다. 감탄과 경이의 눈길, 신이 창조한 최고의 피조물을 쳐다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감내해야 하는 입장에선 정말이지 피곤하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다들 까맣게 잊어버리셨겠지만, 나에게도 사생활이라는 것이 있답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생활도,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모두가 나를 좋아하는 탓이지요. 아, 정말 나는 왜 이리도 잘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옆에 가던 여학생이 저를 힐끔 쳐다봅니다. 한 번의 눈길로는 나를 온전히 담아두기가 부족했던지, 또 한 번, 두 번, 세 번, 이젠 아주 대놓고 쳐다봅니다. 그때마다 그녀의 눈동자 아주 깊은 곳에서 버섯 구름이 몽실몽실 피어 올랐습니다. 완전히 반해버렸다는 뜻이죠. 어떻게 알았느냐고요? 실은 다 보고 있었습니다. 은근히 즐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그 심정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그래도 너무 쳐다보더란 말입니다. 저런, 그러더니 결국 홱 하니 앞으로 고꾸라집니다. 쿵. 굉장히 아프겠네요. 건물이 휘청거릴 정도거든요. 계단에서는 앞을 똑바로 보면서 다녀야지요. 많이 다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가서 물어볼 수는 없습니다. 손을 잡아 일으켜 줄 수도 없습니다. 모두가 나를 원하는데, 누구만 특별히 잘 대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오히려 저 여학생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마음은 아프지만 매정하게 그냥 가던 길을 가렵니다. 라라 라라랄라. 


  잔인하다고 힐책하지는 마세요. 냉정하다고 욕하지도 마세오. 나도 이런 내가 너무도 안타깝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이 타고난 미모와 우아한 자태, 감추려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저주받은 고귀함,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마구 드러나는 능란한 미소와 세련된 화술, 어찌하여 저들을 반하지 않게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름다움에 끌리는 것은 본능적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 누구도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서 나도 내 완벽한 모습에 놀라서 기겁을 합니다. 그 바람에 매일 아침 물컵을 하나씩 깹니다. 어제는 참다못해 거울을 치워버렸습니다. 이젠 거울을 보기도 두려운 까닭입니다. 누가 이해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나의 아픔을. 이런, 방금 막 건물로 들어섰는데, 또 한 여학생이 나를 쳐다보다가 계단에서 넘어졌습니다. 지은 지가 워낙 오래된 곳이라서 계단이 부실하고, 매우 가파른 곳인데 참으로 걱정입니다. 데굴데굴. 내 옆으로 굴러내려갑니다. 마치 경사면을 구르는 바람돌이 소닉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정말 가슴이 아프지만 이번에도 그냥 가겠습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계단의 모서리에 특수 논슬립을 갖다 붙일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라라 라라랄라.

 
  그래도 여학생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라도 갖습니다. 하지만 남학생들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예, 믿기시지 않겠지만 개중에는 남학생들의 구애도 있습니다. 워낙 어디하나 빠지는 데가 없다 보니 종종 그런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는데, 그들에게는 그다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아까도 마이클 볼튼과 글렌 메데로스에게 분명하게 선을 그었습니다만, 아무리 내가 무한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기로소니, 그렇게 세상의 상식과 윤리에 벗어나는 마음까지 받아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오, 저런. 아까부터 힐끔거리면서 따라오던 여학생이 바닥에 엎어집니다. 이번에는 계단도 아닌데 말입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일부러 넘어진 것이네요. 연기치고는 참 어설픕니다만, 몸을 사리지 않는 그 투혼만큼은 높이 사겠습니다. 참 많고도 많았죠. 내 관심을 끌어보고자 일부러 넘어진 아이들. 특히 아주 고전적인 수법, 잉크 들고 넘어지기. 정말 고등학교적에는 교복에 잉크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뚜껑을 제대로 닫지도 않은 잉크통을 들고 그 숱한 난장판을 걸어왔으면서도, 꼭 내 앞에서만 비틀거리다 넘어지는 아이들이 그렇게 많았답니다. 아무튼 베버의 법칙이랄까요? 이런 일이 하도 많다 보니 자꾸만 감흥도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처음 이런 일을 겪었을 때는 머릿속이 감동으로 소용돌이쳤었는데, 이제는 그냥 시큰둥해집니다. 잘난 것도 하루 이틀의 이야기이지, 매일같이 잘난 사람으로 살다 보니까 이제는 도리어 피곤합니다. 라라 라라랄라.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지나갑니다. 이 놈의 인기는 식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집으로 향하는 길에 하루를 정리해 봅니다. 나 때문에 눈길을 빼앗긴 아흔 아홉명의 여학생들, 나 때문에 계단에서 구른 다섯 명의 여학생들, 그중에서 열서넛쯤은 영원토록 헤어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려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피곤하고도 귀찮은 일입니다. 아아,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리도 가혹한 형벌을 내리신다는 말입니까? 어째서 그네들의 영혼이 상사(想思)의 불구덩이로 빠져드는 광경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균형잡힌 식사, 적절한 운동, 끊없는 지적 탐구,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이었습니다. 물론 용모나 두뇌에 있어서는 일면 타고난 감도 없지 않지만. 혹자는 묻습디다. 그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으면서 사는 것이 싫으냐고. 그럴리가요. 나도 사람일진대 숱한 여학생들의 구애가 싫을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네들은 무수히도 여럿이고 나는 한 사람이기에, 그 애달픈 마음을 모두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 그 마음, 얼마나 아플까요? 언젠가 내가 그렀던 것처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제대로 잠이 들지도 못할지도 모릅니다. 다 나 때문입니다. 다 너무도 잘나고 완벽한 나 때문인 것입니다. 마음이 아파요. 라라 라라랄라. 


  바로 그때 한 여학생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 저기요.  

  오, 용감하기도 하지. 하지만 고백하기에는 좋은 타이밍은 아니야.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지 않니. 날씨도 춥고. 바람도 많이 부는걸. 아무튼 알지만 모르는 척, 한번은 시치미 떼어야겠죠?

- 예? 무슨 일이시죠?
  그녀는 몹시 쑥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누가 장난을 쳤는지, 등에 쪽지같은게 붙어있네요. 아무래도 모르시는 것 같아서……


  그리고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피식피식 웃으면서 저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오른손을 등 뒤로 뻗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펄럭거리는 종이쪽지가 하나 만져졌습니다. 뜯어지는 감촉으로 보건대,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놓았나 봅니다. 도대체 뭘까요? 뭐라고 쓰여있을까요? 아주 고전적인 ‘애인구함’에서부터 아주 범세계적인 'Kick My Ass'까지 수백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두근두근, 너무 긴장되어 차마 볼 수가 없었지만, 차마 보아야만 했습니다. 뭘까요? 설마 또 러브레터? 하나, 둘, 셋, 마음속으로 외치고. 큰 시상식에서 영예로운 수상자를 발표하는 마음으로 종이쪽지를 뒤집어 보았습니다. 라라 라…… 


용할머니 원조 불갈비 곱창전골 (신속배달)

 

(2002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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