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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결국 우리 모두는 소모품이구나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8. 17.

본문

  마침내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바퀴 모양의 문고리가 삐그덕거리며 돌아갔을 때 B-13 격납고 3번 창고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스스로에게 애도를 표했다. 어떤 이는 절대자를 향해 기도를 올렸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진에 입을 맞추었으며, 어떤 이는 눈을 감고 자기 일생의 마지막 편집본을 감상했다. 물론 몇 발 남지 않은 총알을 총신에 밀어 넣으며 무의미한 항전을 준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침내 문이 열리고 그들과 똑같은 형상을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팽팽했던 긴장은 순간 사그라들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안도해야만 했다. 마치 격렬히 회전하던 롤러코스터에서 방금 내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 다들 여기서 뭐하는 겁니까?
  방금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가 물었다.
- 보면 몰라요? 숨어 있지. 그러는 댁은 누구요?
  십년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누군가 대꾸했다.
- 제 3 정찰연대 소속의 윌리엄 앤더슨 대위입니다. 이 부근을 정찰하던 중에 우리 함선이 보이길래 다가왔습니다.
  대위는 자기 등 뒤의 방금 막 격납고에 착륙한, 아직 엔진이 식지 않아 따끈따끈한 랩터를 건성으로 가리켰다.
-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기 숨어서 뭐하시는 겁니까?


  무리의 뒷편에서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자가 일어났다.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래서 가장 지위가 높아보이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 보겔만 대령이네. 이 함선 ‘에레혼’의 부함장이었지. 아무튼 말 그대로일세. 우린 숨어있는 중이야.
  반사적으로 대위는 거수 경례를 했다. 오랜 군생활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 제 3 정찰연대 소속의 앤더슨 대위입니다. 여기 뭐가 있습니까? 도대체 뭐로 부터 숨어들 계신 겁니까?
- 뭐든 있지. 뭔들 없겠나.
  쓸쓸한 체념조의 대꾸만을 던져 놓고 대령은 시선을 피했다. 앤더슨 대위는 휴대용 정보 단말기를 꺼내어 검색을 시도했다. ‘에레혼’라는 이름의 중형 함선도, 보겔만이라는 이름의 영관급 장교도 정부의 중앙 데이터베이스 안에 있기는 있다. 그런데,
- 기록에 따르면 20년 전 작전 중 실종된 함선으로 나오는군요. 제 권한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그 정도인 것 같습니다. 당시 함장은 드와이트 레드먼 대령님. 그리고 부함장은 유진 보겔만 중령님. 정말 보겔만 대령님이 맞으시다면 당시 최종 계급은 중령님이셨고 말입니다.
- 죽은 사람으로 치고, 정부 놈들이 일계급 특진시켜주지 않았던가?
- 그건 그렇습니다.
- 그러니까 대령 맞지.
  대령은 실없이 웃어보인다. 깊고 두틈하게 파여 들어간 주름이 방금 전의 긴박한 상황과는 또 다른 인상을 주었다.
-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대령님. 아직 제 질문에는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밖에 뭐가 있습니까? 다들 무엇을 피해 숨어 계신 겁니까?
  사람들 얼굴에는 다시 근심이 서렸다. 공포와 두려움의 이산화탄소가 B-13 격납고의 3번 창고를 가득 채웟다. 비릿한 공포의 쇠맛이 났다. 약간의 뜸을 들인 후 대령은 이렇게 물었다.
- 자네 랩터는 멀쩡한가? 그러니까, 비행이 가능하냐는 말이야.
- 아닙니다. 가스성운을 통과하던 중 길 잃은 운석에 좌측 날개가 타격을 입어 동체 안정성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때마침 이 함선을 찾지 못했다면 저는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대령은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 아직은 살아남았다 장담하기는 이르네. 이렇게 밖에 반가움을 표할 길 없으니 나도 정말 유감일세.

 

*

 

  잠시 후 환풍구 덮개가 천천히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찢어진 타이어에서 바람이 새는 소리가 시작이었다. 이어지는 소리는 뱀이 스르륵 거리며 지나가는 듯한 차갑고 소름끼치는 것이었다. 순간 B-13 격납고 사람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딸깍. 나사가 굴러 떨어졌다. 나왔다. ‘나왔다’기보단 흘렀다. ‘흘렀다’기 보단 넘쳤다. 피가. 뒤이어 고무 호스와 케이블, 노끈과 와이어로 얼기설기 감겨진 금속 막대기가 가벼운 정전기를 일으키며 등장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오! 하나님!),

사람의 손이 있었다. 정말로 손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기계 손이나 로봇 손이 아니었다. 분명히 사람의 손이었다. 손목 관절이 있어야 할 부분에 청색 덕트 테잎이 덕지 덕지 붙어 너덜거린단 사실만 제외하면 진짜 혈색을 띄고 움직이는 사람 손이다. 창백하고 검푸르게 툭 튀어나와 두드러진 혈관만 아니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생긴 모양을 보면 왼손…….. 그럼 오른손은 어디있지? 피카부! 거짓말처럼 다른 한 쪽 팔도 삐뚤빼뚤 바느질 자국으로 도배가 된 오른손을 달고 반대편 환풍구를 뚫고 등장했다. 왼손과 오른손의 두드러진 차이점이라면 후자에는 의료용 메스가 들려있더란 것. 가물거리는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메스의 끝은 날카롭게 반짝거렸다.
- 도망쳐! 뛰어!


  누군가의 외침을 신호로 하여 사람들이 뛰기 시작했다. 앤더슨 대위도 따라 뛰었다. 거의 본능적인 결정이었다. 몇몇이 총을 꺼냈지만 쏘지는 않았다. 사실 맞춘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단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으나……. 대위는 사람들이 총기 사용을 겁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총을 꺼내려 할 때 보겔만 대령이 제지했던 것 역시 한 가지 증거였다. 대신 대령은 짧은 길이의 나이프를 꺼내 들어 휘둘렀다. 몇 번인가 은빛 궤적과 궤적이 충돌하며 맑지만 섬뜩한 소리를 내었다. 닥터 랭던의 손이었던 그것들은 다시 한 번 환풍구를 통해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 그게 대체 뭐였습니까?
  대령이 대꾸했다.
- 닥터 랭던의 손이네. ‘에레혼’호가 가장 먼저 우리에게 빼앗아갔던 것 중의 하나지.
- 빼앗아갔다고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말입니까?
- 그 양반 실력이 좋았거든.
-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의 손처럼 보이는거죠? 피도 돌지 않을텐데. 심지어 그 혈색하며 자연스러운 움직임하며……..

  충분히 도망쳤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멈추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령이 말했다.
- 대위, 여기 벽에 귀를 대보게.
  벽은 생각보다 미끈미끈했고 또 끈적끈적했다. 우주선에는 어울리지 않는 축축한 습기. 막연히 생각하기에는 보통의 선체 내벽과 같은 특수 세라믹 재질로만 보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분명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피부를 대하는 느낌이랄까. 대위의 귀를 통해 울림이 전해져왔다. 멀리서였지만 분명 존재하는 울림이었다. 소리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벽 안 어딘가 펌프 따위가 있지 않은가 싶었다.
- 이건 무슨 소리죠?
- 두번째 희생자. 우리 함장님 심장이 뛰는 소릴세. ‘에레혼’ 호는 닥터 랭던의 손을 얻고나서 곧바로 레드먼 함장님의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냈지. 바로 그 심장이 작전 통제실(Combat Information Center; CIC) 메인 프레임 컴퓨터에 이식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분당 88회씩 뛰고 있다네. 가끔 85회까지 떨어지긴 해도 평균 그 정도는 될꺼야. 원래는 아주 건강한 친구였는데 말이야. 이식하는 과정에서 약간 빈맥 끼가 생겼는지 조금 박동이 빨라진 것이 아닌가 싶어.
- 죄송합니다만 방금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 드와이트 레드먼 함장. 그 친구의 심장이라고. 정말로? 못 믿겠으면 또 그 잘난 귀관의 잘난 단말기 톡톡 두들겨보던가.
- 함장님의 심장이라고 하셨습니까? 이 배가 함장님의 심장을 가져갔다는 말씀입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말입니까?
- 함장님은 ‘에레혼’ 호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분이셨다네.
- 심장이나 다름없는 분이라서 심장을 꺼냈다는 말입니까?
- 어떤가? 정말 대단한 유머감각을 가진 놈이지?

 

*


  대위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부정할 수 없는 건 ‘에레혼’호가 20년만에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유령선? 괴물배? 아니면 둘 다?) 그는 스스로의 눈으로 살아 움직이는 괴물 손들을 목도하였으나 그것이 눈 앞에 닥친 현실인지 아니면 고약한 장난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 외람되지만 다시 한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대령님. 저로서는 그간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저 괴물 손이, 닥터 랭던의 손이라고 했던가요? 아무튼 우릴 쫓아오는 이유가 뭡니까?
- 글쎄. 정확히 뭘 필요로 하는지 모르겠네. 눈? 코? 뼈? 치아? 피부? 하지만 뭐가 되었든 빼앗아가는 게 그것들의 목적일세.
- 빼앗아가서 뭘 어쩌겠단 겁니까?
- 사용하지. ‘에레혼’호의 자기주도복구시스템을 작동하기 위해. 여기 내벽도 외벽도, 천장도 바닥도, 다 그렇게 복구되고 관리되어 있는 걸세. 오늘 벌어진 일도 아니고 어제부터 시작된 일도 아니지. 지난 20년 동안 끊임없이 진행되어 온 일이야. 저 복도 끝에 폐쇄회로 카메라 보이나? 그 안에 뭔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겠나.
- 저건 …….
- 맞아. 사람 눈이야. 그러니 부디 조심하게. 귀관이 저걸 망가뜨리기라도 하면 ‘에레혼’호는 결손부를 메우려 또다시 누군가의 눈을 필요로 할테니까.
- 하지만 그건…….
- 익숙해지도록 하게.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남의 폐를 통과했던 산소로 호흡하고 남의 신장에서 걸러진 물을 마시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네. 그게 이 배의 법칙이야.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겁니까?' 라고 대위는 묻고 싶었지만 대령은 이미 그 질문이 나올 줄 아는 눈치였다.
- 사건 당시 블루 다이아몬드 회랑의 알파-13 구역에서 우리는 다른 함선들과 동시에 워프하지 못했어. FTL (Faster-than-light) 드라이브의 과열이 문제였지. 모든 크루가 매달려 동원 가능한 방법을 다 시도해 달아오른 디스크를 간신히 식혀놓을 수 있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거지. 뒤늦게 집결지의 입력 좌표로 워프했는데도 함대 본진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네. 모든 통신 채널을 다 열어도 함대와의 교신점을 찾지 못했어. 그러다 항법 기능이 마비가 되었고 다시는 FTL 드라이브를 돌릴 수 없게 되었지. 그게 귀관도 아는 20년 전 ‘에레혼’호 실종사건의 전말이라고 할 수 있겠네.
- 그랬군요.
​  대령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 우린 외부 공급 없이 20년을 버텨냈다네. 대단하지? 이상하기도 하고. 이상하면서도 대단한다고 해야할까? 당연히 그 사이 물자도 원재료도 바닥이 났을테니 말이야. 함선 꼴이 문자 그대로 말이 아니었지. 하지만 귀관도 알다시피 ‘에레혼’호에겐 자기주도복구능력이 있었어.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함선이 알아서 결손부를 복구한다는 뜻이지. 사람의 상처 부위가 서서히 자연스럽게 아물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네.
- 알고 있습니다. 모든 함선에 적용되고 있는 기술이니까요.
  대위는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요’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 처음엔 그럭저럭 있는 원재료를 운용해서 버텨나갔네. 틸륨, 티타늄, 센트륨, 미스릴, 아다만티움, 어드미니스트리움, 뷰로크라티움을 싣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길 잃은 함선이 손상을 입을 일은 하나 둘이 아니었고 자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자원도 바닥이 드러났지. 몇 번인가 우리는 인근 행성에 착륙해서 필요한 자원을 조달해보려고도 했어. 몇 번은 성공했지만 몇백번은 실패했다네.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워프로 떨어진 장소가 하필 이런 곳이었단 사실은 이 함선과 이 함선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불운이라면 불운이었을 것이다.
- 그래도 ‘에레혼’호의 생존 알고리즘은 그때마다 용케도 복안을 찾아내더군. 그렇게 순간 순간은 버틸 수 있었고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 배에 진심으로 감사했어. 하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더군. 결국 이 놈이 최후의 수단으로 택한 것이 사람이야. 남은 건 사람 밖에 없으니까 사람에게서 필요한 재료를 얻어 사용하자는 생각을 한 걸세.
​- 예?
​- 귀관이 들은 그대로일세. 이 배는 사람에게서 필요한 재료를 얻어간다고. 그게 눈이든 코든 귀든.
-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대령님, 말이…….
- 물론 말은 안되지. 하지만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인 걸 어쩌겠는가.
- 그럼 ‘에레혼’호가 취해간 눈이든 코든 귀든 뭐든 시간이 흘러 다 닳아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 또 다른 멀쩡한 사람의 쌩생한 것을 빼앗아 대체하지.
  저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써 먹히고, 그 효용이 다하면 버려지는,
- 결국, 우리 모두는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로군요.


*

 

  환풍구를 울림통 삼아 ('에레혼'호의 모든 환풍구는 훌륭한 울림통이었다) 저 멀리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어딘가에 주크박스가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6세기는 지난 옛날 노래, 스모키 로빈슨과 더 미라클스의 'The Tracks of My Tears'였다.

 

♬ Since you left me
if you see me with another girl
Seeming like I'm having fun
Although she may be cute
She's just a substitute
Because you're the permanent one

So take a good look at my face
You'll see my smile looks out of place
If you look closer, it's easy to trace
The tracks of my tears
I need you, need you ♬


  이 흥겨운 노래가 (just a substitute) 이렇게 오싹하게 들릴 줄은 (the permanent one) 몰랐다. 스모키 로빈슨과 더 미라클즈의 멤버들이 끈끈한 애드립을 주고 받으며 살점이 덜렁거리는 기계 팔을 스르륵 스르륵 뻗어 온다. 아이 니 쥬. 니 쥬.

 

*



  대령의 설명을 다시 요약하자면 이랬다. 최초 사고 직후 ‘에레혼’호의 38%가 파괴되었지만 자가복구에는 문제가 없었다. 고쳐라 말아라 간섭하지 않더라도 배는 제 알아서 필요한 자재를 알아서 가공, 알아서 이동시켜, 알아서 사용했다. 소재기술의 진보와 관료행정의 전산화가 만나 이뤄낸 결정적 쾌거, 소위 '자기주도복구시스템' 덕분이었다. 처음 몇 년간 ‘에레혼’호는 별무리 사이를 유랑하면서도 아무 문제 없이 제 할 일을 수행했다. 결손부가 발생하면 원재료를 가공했고 적소로 이동시켜 감쪽같이 복원해 놓았다. ‘에레혼’호에 상주하던 7천 5백명에 이르는 각계각층의 사람들 중 누구도 그 효율적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민간은 물론 관료와 군 관계자들까지도 (워낙 알아서 잘했으니 그럴만도 하지).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수급에 눈에 띄게 문제가 생겼다. 뒤늦게 주변 행성군에 군인과 학자들을 내려보냈지만 시간적으로도 늦었고 공간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노란불. ‘에레혼’호는 제 알아서 재활용 모드를 가동시켰다. 함선 내 수많은 사람들이 소모하고 버리는 각종 생활 폐품들을 재가공하여 아쉬운대로 수요와 공급을 맞춰나갔던 것이다.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작업이 마치 '알뜰한 주부'와도 같았다고 말했다. 잠시 상황이 좋아졌으나 머지 않아 다시 한계가 왔다. 확실히 재활용만으로는 상황의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했다. 그러다,

 

​분열이 시작되었다. 어떤 이들은 더 큰 위기가 닥치기 전에 빨리 모성 지구를 찾아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반대하는 이들은 10년 넘도록 찾지 못한 모성을 무슨 수로 당장 찾아내냐며 현실을 직시하자며 목소리를 높였다. 논쟁이 일어났고 파벌이 발생했다. 누구도 적절한 타개책을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그 사이 ‘에레혼’호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재활용만으로는 현상 유지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변변한 수리 보수 한 번 받지 못한 채 장기간 쉬지 않고 가동되어 온 선체는 곳곳이 노후화의 징후로 가득했다. 무슨 수를 써도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주황불. 이윽고 ‘에레혼’호는 생존을 위해 직접 세 번째 수단을 가동시켰다. 이번에도 제 알아서. 선체 내에서 효용성이 낮은 영역을 포기하고 그 부위에 있던 가용 재료를 악착같이 수집, 재가공, 운송하여 복원작업을 수행하는 식이었다. 처음에는 주로 문화, 종교, 오락 등 생존에 부차적인 구역을 폐쇄하고 격리하여 해체하는 식으로 필요한 재료를 수급했지만 종래에는 거주시설, 상업시설까지 여파가 전달되었다. 피부를 잠식하는 위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에게 공격성을 드러내게끔 만들었고, 그 어지러운 틈바구니에서 민과 관과 군은 나란히 제 기능을 상실하고 공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거대한 함선은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현상유지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빨간불. 최후의 생존 알고리즘. 그 결과 또 다른 재료를, 생각보다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어떤 것들로부터 얻어내야겠다는 결정을 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 재료는 다름 아니라 인간.

 

  이후 벌어졌다는 상황을 이 자리에서 직접적으로 기술하기엔 많은 제약이 따른다. 그간 ‘에레혼’호의 생존을 위해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기계 손들이 (의심의 여지 없이 이 것은 사람의 손을 모방하여 설계 고안된 것이다) 사람의 눈, 코, 귀, 혀, 치아, 뼈, 연골, 체모, 손톱, 발톱, 혈액, 피부, 간, 폐, 위, 방광, 신장 등을 취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군인인 앤더슨 대위마저도 그 과정을 묘사하는 생존자들의 설명에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에레혼’호는 본래 제 할 일을 했다. 인간의 눈을 취해 눈의 용도로 인간의 폐를 취해 폐의 용도로 사용했다. 특히 뼈와 치아, 그리고 체모는 아주 훌륭한 소재였다. 수집한 재료를 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효율적 형태로 바꿔나갔다. 나아가 더 많은 인체유래소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선체를 점점 더 생물에 가까운 형태로 갈음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선채 내벽은 촘촘히 조직으로 덮히게 되었다. 동축케이블과 혈관이 함께 흐르게 되었다. 계기 등속은 끈적끈적한 피부로 덮여졌다. 불과 십년도 걸리지 않은 반생물-반기계 함선의 탄생 과정에서 ‘에레혼’호의 거주자의 수는 7천5백명에서 186명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섬뜩한 증언이 더해진다.

 

​#1. 어떤 사람들은 '에레혼'호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다. 차라리 우주 미아가 될지언정 이 배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듯이. 용감하고 무모하게. 하지만 성공한 이는 거의 없었다. ‘에레혼’호의 시스템이 능숙하고 교활하게 그런 이들의 의도와 소재를 파악하여 탈출을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이 배는 (유령선? 괴물배?) 탈출 실패자들의 몸을 자원화하는데 있어 절대 망설이지 않았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명을 재촉하는 격이었던 셈.

 

#2. 출산률은 곧 그 사회의 미래를 말해주는 법. 급격한 인구 급감에 위기를 느낀 '에레혼'호는 미래의 자원 부족 및 원활한 소재 수급을 위해 인간들의 번식을 독려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가가호호 아이둘셋. 하하호호 에레혼호'와 같은 표어. 이런 사례는 이 배의 시스템이 거의 인간에 견줄 지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


  지난 몇 세기 동안,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인류는 기계로 자연을 대체하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의안이나 보청기, 혹은 인공 관절과 같은 보다 직접적인 용도의 발명품들은 물론 컴퓨터 또한 인간의 뇌를 목표로 발전해 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격리 상태의 '에레혼'호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완전히 거꾸로다. 말인 즉, 자연으로 기계를 대체하는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기계로 자연을 대체하려던 인류의 목표는 잃어버린 자연성의 회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지 효율이었다. 인류가 어떤 기술을 고안하면서 자연을 모방하겠다 선언하는 것은 곧 그 안에 있는 효율성(몇 겁의 우연이 촉발한 것이든 절대자의 권능으로 빚어진 것이든)을 취하고 싶다는 의미였을 뿐이었다. 다른 이유는 깨끗하게 무시했다. 효율이 곧 상품이고 이윤인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어떤 조건 하에서도 살아남아 효율을 추구하도록 주문하고 또 주문한 인류의 가르침. 그것을 이제 이 거대한 함선은 그 과정을 거꾸로 되밟고 있다.

*


  보겔만 대령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 '에레혼'호의 판단력은 항상 정확했네. 원재료를 가져다 가공하여 적소에 사용했고, 재료가 떨어지자 재활용 재가공하여 적소에 사용했고, 그마저 떨어지자 불필요한 곳의 자원을 해체 재가공하여 적소에 사용했고, 그마저도 떨어지자 아쉬운대로 자기 안에 있는 다른 재료(설령 그것이 사람이라 하더라도)들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지. 어쩌면 큰 맥락에 있어서는 과거 조난자들이 생존을 위해 동료를 잡아먹었더라는 이야기와 하등 다를 바가 없는지도 모르네.
-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7만 5천명이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당했답니까.
- 귀관도 잘 알겠지만 숫자는 숫자일 뿐이라네. 오히려 이성적으로 사고하기 어려운 상황일수록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지. 미우나 고우나 우리 배 아닌가. 우주가 우릴 살갑게 맞아줄 거라 생각하지 않네. 어차피 우리는 이 배에 매어있는 인생이고 이 배가 멈추면 우리의 운명 또한 끝일테니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약간의 희생을 치루더라도 지구를 찾을 때까지 전진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우리라고 대책을 강구해보지 않았겠는가. 자기주도복구시스템을 수정하려고도 해봤고, 비활성화시키려고도 해봤고, 해체시켜버리려고도 해봤지만 모두 실패했지. 어느새 이 배는 이 시스템과 그 자체로 하나였던 거야. 그것이 진화이든 퇴화이든 그냥 돌연변이든 그 밖에 무엇의 결과이든 간에. 그리고,
- 사람들도 그에 맞춰서 변해갔군요.
- 정확하네. 사람이 참 무서운 동물인 것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할 방법은 찾아낸단 말이야. 언젠가 기계 손, 기계 팔이 환풍구를 뚫고 나타나 자길 잡아가 뼈와 살을 발라버릴지 모른다고 할지라도. 설마하는 그 날이 올 때까진 남들보다 더 잘 먹고 살고 싶어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바로 이 배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네.
  몇몇 생존자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 아이러니한 것은 사람들을 잘 먹이는 일에 '에레혼'호가 인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왜냐고? 최후의 소재 공급원들이 20세기 아프리카 난민들처럼 말라 비틀어져 가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양분을 충분하게 섭취한 젊고 건강한 몸에서 나온 재료들일 수록 질이 좋았으니까. 그런 재료는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후한 가격에 거래되고는 했지.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고. 어쩌겠는가. 먹고는 살아야지. 그러다가……. 
  이번에는 대위가 침을 삼켰다.
- 사냥철이 돌아왔지. 너도 나도 남의 몸의 전부 혹은 일부를 취하러다니기 시작한거야. 기계 손, 기계 팔이 나타나 잡아가기도 전에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여 그 앞에 갖져다놓고 머릴 조아리는 꼴사나운 풍경이 반복되었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네. 전문 헌터들이 생겨났고 신체 매매 조직도 생겨나고, 또 그 조직에 하청에 하청에 하청에 하청에 서수남 하청일에……. 마치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기분이었지.
- 대령님은 다행히 무사하셨습니다.
- 나야, 쓸모가 없었으니까. 일흔이 다 된 노인을 어디에 쓰겠나. 눈에는 백내장이 있고 코에는 비염이 있고 귀는 반쯤 먹은지 오래라네. 간은 경화고 폐는 삼십퍼센트만 멀쩡하고 이빨은 다 썩고 뼈는 다 삭았지. 온 몸은 낱낱이 분해해봐야 똥값도 받기 힘들지. 소모품으로도 가치가 없기에 용케 살아 남았네.
  대령은 껄껄 웃었다.
- 자넨 어떤가? 건강한가?
- 물론입니다. 파일럿이지 않습니까.
- 그렇담 자넨 각별히 조심 좀 해야겠구만 그래.
  일행 중 몇몇이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전염이라도 된 듯 더 많은 사람들이 웃었다.

 

*


  그들은 쉬지 않고 이동했다. 이동한다고 딱히 도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멈춘다고 묘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
- 아까 대령님께서는 '에레혼'호가 원할한 소재 수급을 위해 아기 만들기를 장려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마도 실패했나 보군요. 우리 일행이 이 배 안의 생존자 전부라면.
- 귀관이라면 이런 배 안에서 아이를 갖고 싶겠나. 당연한 결과지.
- 하긴 그렇습니다.
- ‘에레혼’호는 아기를 원했어. 미래를 위해. 아기 많이 태어나길 바랐지. 신선하고 깨끗한 부속을 그 작은 몸 안에 가득 담고 태어나는 셈이니 중요한 일이었겠지. 하지만 정책적으로 장려하는 방법이 틀렸었어. 순전히 돈으로만 해결하려고 했거든. 사람들이 아기 갖기를 두려워 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리스크와 불확실성을 지니는 사회라는 뜻이 아니겠나. 난 그렇게 생각하네. 낳는대로, 머릿 수만큼 돈을 쳐준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지. 사실 그거야말로 책임없는 행동이지. 생각해보게. 자기들도 빨대 꽃힌 채로 쭉쭉 빨리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겠는가. 설령 낳아도 그 아이의 미래는 걸어다니는 배양접시를 벗어나지 못할텐데. 소모품의 자식은 끝내 소모품의 운명을 피해갈 수가 없어.
- '에레혼'호도 인공수정 같은 방법을 생각해봤을텐데요. 그게 성공하면 인체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으니.
- 그러지 않아도 중앙통제실 아래 층을 싹 뜯어내고 인공수정센터를 만들었네. 한 3년쯤 되었나. 별 소득은 없었던 걸로 알고 있네. 결국 그게 기계 덩어리들의 한계지. 예술가의 손을 잘라간들 지들이 예술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



    미세한 지직거림에 이어 다시 노래가 흘러나왔다. 도대체 주크박스는 이 배 안 어디에 있는 걸까? 6세기 전 가수 마돈나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1985년의 히트 곡 'Material Girl'이다.

 

♬ Living in a material world
And I am a material girl
You know that we are living in a material world
And I am a material girl ♬


  바로 그때였다. 환풍구를 뚫고 문제의 기계 팔이 나왔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무리 중 하나를 덮쳤다. 10초나 걸렸을까. 입을 벌리고 마취제를 놓은 다음에 윗 입술을 째고 얼굴 가죽을 들어 안구 두개를 들어내고 다시 가죽을 씌워 바느질까지 마쳤다. 그리고는, 돈을 뿌렸다. '눈값'이라는 얘기다. 눈을 빼가면 눈값을 주고, 코를 빼가면 코값을 주고, 폐를 빼가면 폐값을 주고, 밥을 굶기고 밥값을 주고, 잠을 재우지 않고 잠값을 주고, 매를 때리면 맷값을 주고, 그게 자본사회의 법칙이라면 할 말 없다. 이걸 끔찍하다 해야할까? 기계 특유의 능률성이라 해야할까? 저 사람 이름이...... 머피 상사. 순식간에 두 눈을 잃은 상사의 얼굴은 마치 낡고 지직거리는 저화질 비디오물에 나오던 외계인 모습과도 닮아있었다. 미간을 중심으로 나타난 그 커다란 두 개의 구덩이 사이로 찔끔 찔끔 피를 흘리며 (오! 하나님!) 바닥에 떨어진 돈을 줍기 위해 버둥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아하니,
- 이건 뭐, 절개법과 매몰법의 문제가 아니로군요.
- 젠장, 저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우린 계속 움직여야 하네.

  그들은 달렸다. 마돈나의 노래가 배경음악처럼 그들 뒤를 따랐다.

 

♬ Living in a material world (material)
Living in a material world ♬


  리빙 인 어 머터리얼 월드. 리피트, 리피트, 페이드 아웃 없이 또 리피트. 이상한 일이지만 어쩐지 무섭기보다는 흥겨웠다. 돈나 누나가 헉, 헉, 헉, 헉, 헉 할 때마다 그들도 숨이 차서 헉, 헉, 헉, 헉, 헉, 달리니, 모든 게 연출된 영화의 식상한 한 장면 같았다. 아니, 뿅뿅뿅뿅 컴퓨터 게임 같았다. 뿅뿅뿅뿅. 대위는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종래에 하나의 음악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따위의 과거 어디선가 읽었던 조악한 문장을 기억해냈던 탓에 달리며, 얼굴이 붉어졌다. 달려라, 달려.

 

♬ Living in a material world (material)
Living in a material world ♬


  두 눈을 잃어 앞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린 머피 상사는 무리를 따라가려다 넘어졌다. 돈과 피에 뒤엉켜 바닥에 널부러졌다. 걱정스러웠지만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계속 달렸다. 이제 머피의 운명은 그대로 기계 팔에 끌려가서 냉동 보관 된 다음 언젠가 적시 적소에서 사용되기 위해 해동되는 것일테지. 마치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뿅뿅뿅뿅. 그들은 벽의, 바닥의, 천정의 일부가 된 수많은 머터리얼, 아니 머피들을 스치며, 달렸다. 흩날리는 머터리얼, 아니 돈 쪼가리가 징그럽게 아름다웠다.

 

♬ Living in a material world (material)
Living in a material world ♬


  달리며, 대령이 말했다.
- 그래도, 옛날보다 많이 좋아졌어. 사람이 많을 땐 쟤들도 인적 자원 귀한 줄을 몰랐거든. 눈이 필요하면 눈만 빼가고 버렸지. 폐가 필요하면 폐만 도려내고 버렸지. 그런데 요즘은 워낙 사람이 귀해지니 재들도 '잘 보관했다가' 최대한 쪼개고 쪼개서 낭비 없이 활용하려고 하더군.
- 효율적으로 말입니까?
- 그렇지, 효율적으로.
  그러니 달려.

 

♬ A material, a material, a material, a material world

Living in a material world (material)
Living in a material world ♬


  뿅뿅뿅뿅. 머터리얼, 머터리얼, 환풍구마다 기계 팔들이 튀어나와 그들을 덮쳐왔다. 아이 니 쥬! 아이 니쥬! 오! 스모키 로빈슨. 부디 내게 Substitute가 아니라고 말해줘요. Permanent One이라고 말해줘요. 기계 팔, 기계 손의 절도있는 군무. 사악한 마법에 걸린 나뭇가지처럼 구불구불 흘러나와 억센 힘으로 그들을 낚아채어갔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구나. 물량 확보에 적신호가 켜진 날. 비상대기, 전원야근, 제발 긴장 좀 타자. 그리고 누군가 외쳤다. 혹시,

살아남았다면 달려.

 

♬ A material, a material, a material, a material world

Living in a material world (material)
Living in a material world ♬



  뿅뿅뿅뿅. 피가 튀었다. 깔끔하고 효율적인 메스의 움직임에 따라 적출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통통한 손이 나타나 돈을 뿌렸다. 눈값, 코값, 귀값, 혀값, 치아값, 뼈값, 맷값이라는 뜻이다. 마치, 정육점 같아. 자기 몸의 일부가 빠져나간 상처를 부여잡고 그들은 허우적거리며 돈을 잡으려고 애썼다. 차라리,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는 표정에 가까웠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대위는 어릴 적 보았던 솔리비젼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바깥은 춥고 냉정한 곳이니 넌 이 모멸을 감사하며 견뎌라, 기왕이면 니가 해라. 사람 사서 쓰려면 돈 드는데 니가 하면 개값이잖냐, 싫으면 말아라, 너는 누구로도 '대체'될 수 있는 하찮은 존재다, 그러다 결국엔 늙고 병든 노예를 문 밖으로 내치며 은화 몇 닢 던져주는 고대 귀족의 위엄. 하긴, 효용이 다했으면 그것도 감지덕지지. 그래도,

아직 살아 남았으니 달려.

 

♬ A material, a material, a material, a material world

Living in a material world (material)
Living in a material world ♬

 

*



  달리기를 멈추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왔는지도 알지 못했다. 일행은 이제 앤더슨 대위와 보겔만 대령, 그리고 또 두 남자만이 전부였다. 함선 내 온도는 10.5도에 35%로 항온 항습 유지되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비오듯 땀을 흘렸다. 어느새 마돈나 노래도 멈춰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했다. '에레혼'호의 심장이 뛰는 소리와 벽마다 묻혀있는 혈관과 케이블이 두근거리는 소리만이 그들의 귓전을 울렸다.
- 이제, 어떻게 될까요?
- 모르지. 귀관의 랩터는 가망이 있겠나?
- 모르겠습니다.
- 해 볼 가치가 있을까?
- 지금으로서는 물론입니다. 어차피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 우리가 3 킬로미터는 족히 왔을걸세. 그런데 지금 온 길로 되돌아가긴 어렵고 한 바퀴 돌아서 반대쪽으로 가야할 거야.
  대령은 백 팩에서 땅콩초코바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 먹어두게. 앞으로 또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니.
-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제가 땅콩 알러지가 있습니다.
- 그래? 혹시 다른 알러지가 없나? 있다면 지금 알려주게.
- 다른 알러지는 없습니다. 무슨 이유로 물어보시는 것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아닐세. 그렇다면 땅콩 초코바는 저기 저 친구들에게 갖다주게. 민간인처럼 보이는데 아무래도 군인인 우리보다 곱절은 힘들지 않겠는가.
  대위는 남자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 이름이 뭡니까?
- 저는 쭈앙 꾸완 리 똥. 이 친구는 찐 누압 시에 짜. 토론에서 온 중국계 장사꾼입니다요.
- 그렇군요. 우리 식으로 읽으면…… 통장관리씨와 자진납세씨. 우리와 함께 하겠습니까?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린 B-13 격납고로 돌아가 탈출을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 물론입니다요.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라면 가만히 앉아 죽긴 싫습니다요.
- 좋습니다. 갑시다.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마돈나의 노래를 뚫고, 기계 팔과 기계 손의 추격을 뚫고, 헉, 헉, 헉, 헉, 헉, 그래도 우리 맘을 알아주는 건 돈나 누나 밖에 없어. 숨이 목까지 차고 심장이 쿵쾅거리도록 뛰고 또 뛰다보니 대위는 진작에 낙오한 일행들의 의외로 편안한 표정이 이해가 갈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속삭임이 들렸다. '그냥 포기하면 편해'라고.  



  다시 돌아온 B-13 격납고에는 대위의 랩터가 없었다. 마술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 귀관이 랩터를 세웠다는 곳이 여기가 확실한가?
- 물론입니다. 그것도 기억 못하는 자가 어찌 파일럿이라 하겠습니까.
- 그것 참 이상한 일일세. 누가 장난을 치지 않고서야…… 어? 저기 보이나.
- 어디 말입니까?
- 저기 말일세. 에어 락 하고 락-앤-락 사이에 저 하얗게 빛나는 주광색 판넬. 저거 보이나?
- 예, 대령님. 보입니다.
- 읽어보게. 위에서부터. 이 늙은이는 눈이 워낙 침침해서. 아, 그런데 왼쪽 눈은 여기 숟가락으로 가리고.
- 4, 2, 7, 5, 3, 4, 6, 2, 7, 3, 4, 7, 6, 그리고 그 밑으로는 안 보입니다.
- 그렇구만. 오른쪽 눈 가리고 그 옆에 문자도 한 번 읽어보게.
- 그, 가, 느, 스, 구, 그, 가, 니, 느, 구, 시, 그리고 안 보입니다.
- 잘했네. 어이, 쭈앙 꾸완 리 똥. 이 친구 눈 쓸만하지 않나?
  쭈앙 꾸완 리 똥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답했다.
- 악마적 품질입니다요.


  보겔만 대령이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 자네 병은 없지? 하긴 파일럿이니. 혹시 집안 병력은 어떻게 되나? 부모님은 모두 건강하셨나?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에 쭈앙 꾸완 리 똥이 뒤에서 대위를 덮쳤고 아차 하는 순간에 찐 누압 시에 짜가 뭔가를 꺼내 그의 코와 입을 막는가 싶더니만 이내 클로로포름의 강렬한 분자들이 그의 의식을 뒤덮었다. 안돼, 안돼,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대위는 몸을 돌려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이미 몰라보게 무거워진 눈꺼풀은 아래로 아래로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2008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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