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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민족기록화: 살수대첩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9.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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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세상만사란 각에 달린 것이 아닐까? 예컨대 당구가 그렇다. 각을 볼 줄 아는 놈이 장땡이다. 사진도 그렇다. 예쁘게 찍히는 각이라는 것이 있다. 싸움도 마찬가지다. 더 아프게 때리는 각이라는 것이 있다. 반대로 각을 못 잡으면 때리지는 못하고 맞기만 한다. 112층쯤 되는 높이의 빌딩의 설립 허가는 말할 것도 없다. 각이 안 나오면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생긴다. 그리고, 그게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각이 나와야 하는 그것. 무슨 일이 있어도 각이 틀어져서는 안되는 그것. 무슨 일이 있어도 흘려선 안되는 그것. 흘렸다간 청소 아줌마에게 밀대로 먼지나게 얻어맞을 그것. 무슨 일이 있어도 다쳐선 안되는 그곳. '더 빨리, 더 멀리, 더 높이'라는 올림픽 슬로건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것. 정확히 맞출수록 나프탈렌 냄새가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그것. 비로소 일을 마쳐야 시원하고 편안하고 상쾌해지는 그것.


  문제가 생긴 것은 지난 3월 2일. 아주 오랫동안 그러했듯 3월 2일은 다름 아닌 새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날, 새 학기만 우리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름부터 초(超) 강해 보이는 강건신(Gang, Gun Sin)이라는 녀석이 불쑥 나타난 것이다. (이름부터 완전 느와르 아닌가?) 건신은 서울에서 초(超) 제일간다는 체육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고 했는데, 과연 그 말대로 신체조건이 초(超) 범상치가 않았다. 우리 중 대부분은 새 학기 첫날, 새 담임선생님이 당연히 그인 줄 알았고 그가 당연히 새 담임선생님인 줄 알았다. 뭐야 알고 보니 우리랑 동갑이야? 아니, 초등학교 4학년이 도대체 뭘 먹고 컸길래 다 자란 성인 남성보다 초(超) 압도적으로 건장하단 말인가. “그래서 신체발부는 오, 수지 큐라는 거야.” 문자 쓰길 초(超) 좋아하는 김유석(Kim, You Suck)이가 그렇게 설명했는데 우리 중 아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건신은 말이 없고 점잖았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무척 ‘신사적’이었다. “신사동 그 사람이군.” 문자 쓰기를 좋아하는 유석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 표현에 동의했다. 더구나 수줍음이 많았다. 낯을 가렸다. 정말? 저렇게 신체 건장한 남자애가 부끄럼을 타다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건신은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 먼저 말을 시켜야 입을 열었고 응, 아니, 그래, 알았어 외의 반응은 보이질 않았다. 처음엔 그 덩치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며칠이 지나며 차츰 알게되었다. 자신들이 그렇게까지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하나둘씩 피하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둘씩 말도 걸어보게 되었다. 또한 피할 필요도 없고 말을 걸어도 됨을 알게 되자 하나둘씩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시도했고 그것마저 성공하자 드디어 찐짜를 놓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시비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란 참 이상한 족속이지. 일단 그가 나한테 해를 주지 않는 대상이라고 파악하여 안심한 다음에는, 돌변하여 기어코 상대를 해코지하려고 드니 말이야. 덩치만 큰 쑥맥 건신은 그렇게 서서히, 그러나 아주 분명히 반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침몰해갔다. 첫인상만으로는 당장 ‘전교 짱’이었던 그는 일주일이 지나자 ‘전교 물’이 되었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전교 밥’이 되었다. 둥둥둥둥둥. 인디안 밥! 


  신기한 것은 건신의 태도였다. 물리적 외형으로만 본다면 분명 상대가 되지도 않을 법한 꼬맹이들이 건드리는데도 그는 묵묵히 웃기만 했다. 대개는 그 사람 좋은 웃음이 녀석들의 화를 돋구었음에도 그의 처세법은 바뀌지 않았다. 쥐똥만한 놈들에게 머리도 맞았고, 어깨와 무릎과 발도 맞았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성한 곳이 없었다. 한주먹 짜리들에게 빵을 사다가 바치는가 하면 한주먹도 안될 것들에게 삥을 뜯기기도 했다. "어른이 동네 애들한테 다구리당하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좀 그렇군." 우리들 대부분은 그 낯선 광경을 그렇게 평가했다. 문자 쓰길 좋아하고 아는 척하기도 좋아하는 김유석은 "마치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속 한 장면 같군" 이라고 했다. 과연 키가 무려 183 센티미터라는(3월 마지막 주 금요일 신체검사에서 알게 되었다) 거구가 고만고만한 애들에게 둘러싸여 농락당하는 장면은 어째 마음 한구석이 짠하게 불편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고, 어느 날 돌연 영화 같은 반전이 일어나지는 않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우리 중 대부분은 건신을 깔보고 무시하는 아이들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전교 밥’을 깔아 뭉개는데 함께 동참하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흔히 사람들은 ‘전교 짱’이 주먹으로 결정될 거라고 믿는다. 부분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맞다. 진정한 ‘전교 짱’이 되기 위해선 주먹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학교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 학교의 경우엔…… '오줌발의 비거리(飛距離)'다. 이소룡과 성룡과 이연걸이 나란히 울고갈 강한 주먹을 가졌어도 비거리가 안 나오면 결코 ‘전교 짱’이 될 수가 없는 것이 전통적으로 실용을 중시했던 우리 학교의 관습이다. 주먹은 체력의 일부분만을 반영하는데 반해 오줌발은 체력의 총체를 반영한다는 생각에서다. 주먹은 현재 지표지만 오줌발은 미래지표라는 생각에서다. 그로 인하여 실제로 많은 강자들이 고배를 마시고 이인자로 살았던 바 있다. 지금도 그렇다. 태권도, 유도, 검도, 우슈, 합기도, 특공무술, 킥복싱, 무에타이 합이 19단인 6학년 박유범(Park, You Bum)은 우리 학교의 ‘전교 짱’이 아니다. 대신 태권도, 유도, 검도, 우슈, 합기도, 특공무술, 킥복싱, 무에타이 모두 할 줄 몰라도 오줌발 비거리가 395 센티미터에 이른다는 4학년 최돈호(Choi, Don-Hoe)가 ‘전교 짱’이다. 이런 395 센티미터라니! 과연 짱으로 손색이 없는 기록이다. 3년째 도전자가 무릎을 꿇었다. 우리 학교의 누구도 자신의 포물선을 최돈호보다 멀리까지 보낼 능력이 없었다. 최돈호는 짱의 자리를 수성하기 위해 방과 후에 쉬지 않고 고강도의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고 들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도 엄숙한 의식인 비거리 대결은 학교에서 십오분거리인 광룡모래톱에서 이루어졌다. 고운 모래사장이 끝나는 구석에 풍화 침식의 오묘한 조화로 세워진 커다란 괴석이 바로 성스러운 대결의 장소였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그 공간을 ‘오줌의 무대’라고 불렀다. 우리의 의식을 어찌 예견했는지 대자연은 딱 한 사람만이 올라설 수 있는 무대를 나란히 두 개 깎아두었다. 짱이 먼저 올라가 이렇게 외친다. "천지신명이시여! 우리 광룡초등학교를 굽어살펴주시옵소서!" 아래의 우리들도 입을 모아 외친다. "허이! 허이!" "광룡산 정기받아 천만년 푸르게 해주시옵고!" (허이! 허이!) "구름처럼 모인 동문들 앞길을 창창히 비춰주옵소서!" (허이! 허이!) 의식이 끝나면 짱은 자신의 자리를 걸고 기꺼이 도전을 감수한다. "용기 있는 자 앞으로 나서라!" 도전자는 '오줌의 무대’에 올라가 나머지 하나의 자리에 선다. "모 학년 모반 아무개, 전교 짱에게 도전을 청합니다." 그럼 둘은 일제히 짙푸른 바다를 향해 돌아서 엄숙히 혁대를 풀고 바지를 내린다. 이것이 바로 여자 아이들의 참관이 허락되지 않은 이유다. 반짝반짝 햇살을 산란하며 저 멀리 퍼저가는 두 개의 아름다운 노오란 물줄기. 우리 중 일부가 미리 헤엄쳐 들어가 기다리고 있다가 정확히 포물선이 닿는 곳에 부표를 띠운다. 짱은 노란색 도전자는 하얀색. 승부는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다. 


*


  여느 때와 다름없었던 엄숙한 의식의 와중에서 강건신이가 번쩍 앞으로 나선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더구나 특히 올해는 ‘전교 짱’ 최돈호의 경쟁자가 없을 것이라 여겨졌던만큼 우리들은 순간 충격에 빠졌다. 정신을 차린 누군가가 급히 건신의 귀에 속삭여주었다. "모 학년 모반 아무개, 전교 짱에게 도전을 청합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건신은 이렇게 말했다. "모 학년 모반 아무개, 전교 짱에게 도전을 청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곳곳에서 웃음이 터졌다. 덩치는 태산만한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찐따 같아서다. 오늘에서야 처음 그 소문을 눈으로 확인한 다른 반 아이들은 특히 더 흥미롭단 표정을 지었다. 몇몇의 안내를 받아 건신은 ‘오줌의 무대’에 올라섰다. 그리고 ‘전교 짱’ 광돈호와 나란히 섰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아." "그걸 여러분 부자되시라는 거야." 누군가의 평에 문자 쓰길 좋아하는 김유석이가 훈수를 두었다. 돈호와 건신은 일제히 혁대를 풀었다. 바지도 내렸다. 우리들은 입을 모아 큰 소리로 외쳤다. "허이! 허이!" 먼저 터진 것은 돈호의 물줄기였다. 챔피언의 명성에 걸맞게 시원스럽게 뻗어나갔다. 예년 기록을 능가할 거란 예측이 우리 중 누군가에 의해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몇 초 간격을 두고 건신의 물줄기가 터졌는데 순간 우리 중 몇몇이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 유량 및 유속이 결코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흡사 상수도가 터진듯한 느낌이었다. 부표를 세우러 들어갔던 도우미들이 자기 머리 위로 향하는 타구를 발견한 야구 경기의 외야수들마냥 황급히 뒤로 헤엄쳤다. 건신의 물줄기는 하늘을 완전히 갈랐을 뿐만 아니라 끝내! 돈호의 그것을 앞질렀다. 돈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럼에도 결연하게 양 다리에 힘을 주고 허리를 뒤로 살짝 굽혔다. 유심히 그의 중요한 부분을 관찰하던 우리 중 눈썰미가 가장 좋은 누군가가 말했다. “38.4도다! 38도.4로 나가고 있어!" 현재 전설이 되어버린 그의 기록 오줌발 비거리가 395 센티미터 역시 38.4도 발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시 돈호의 물줄기가 건신의 물줄기를 앞질렀다. 역시 ‘전교 짱’다운 관록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건신은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총알을 피하듯 허리를 뒤로 뉘였다. 림보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 눈에는 그 모든 광경이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우리 중 눈썰미가 가장 좋은 누군가가 "42도!" 라고 말했다. 과연 정확히 42.0도였다. 38.4도 발사와 42도 발사 중 어느 쪽이 더 멀리까지 뻗어나갈 것이냐를 두고 모래톱에선 아이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 중력과 공기저항 등 초등학생에겐 다소 버거운 개념들이 총동원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힘이 떨어지기는 커녕 더욱 매몰차진 건신의 물줄기는 폭발적인 속도로 돈호의 그것을 압도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살짝 앞선 것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제쳐버렸다. 부표를 띠우지 않고서도 건신에게 승기가 넘어갔음을 알 수 있는 지경이었다. ‘전교 짱’ 돈호는 마지막 힘을 다해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물줄기를 쏘아보내려고 힘을 주었으나 이미 방광이 비었는지 끝물이었다. 아무리 힘을 줘도 더 나올 것이 없음을 알게 된 그는 말없이 가만히 먼 산을 바라보았다. (친구야, 그래도 이제 바지는 올려야…) 그리고도 건신의 물줄기는 무려 5분이나 더 이어져 우리들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저게 사람의 방광이야? 아님 돼지 방광이야?" 문자 쓰길 좋아하는 김유석은 패배한 ‘전교 짱’의 쓸쓸한 뒷모습에 혀를 끌끌차며 "살수대첩이로고" 라고 말했다. 차후 최종적으로 공식 집계된 건신의 오줌발 비거리 기록은 615 센티미터. 뭐라고? 6 미터가 넘는다고? 눈을 비비고 귀를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는 전대미문의 충격적 결과였다. 전교는 하염없이 충격의 도가니로 빠져들었다. 


*


  전학생 강건신은 그렇게 ‘전교 짱’이 되었다. 최돈호가 물러나는데 이견이 없지야 않았지만 우리 광룡초등학교에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엄숙함 전통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건신은 문제의 '살수대첩'이 있었던 날에도 변함없이 어리숙하게 행동했다. "이제 네가 ‘전교 짱’이다" 라는 말에도 비실비실 웃기만 했다. 어쩌면 좋지? 걱정하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전교 짱’이 찐따처럼 굴면 학교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바로 다음날부터 건신이 돌변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건신은 거짓말처럼 하루에 한 반씩 차례차례 접수했다. '오줌발 비거리'로? 아니 주먹으로. "일단 ‘전교 짱'이 되었는데 왜 다시 굳이 주먹을 써서 애들을 제압하고 다니는거지?" 의문을 가지는 아이들이 생겨났지만 함부로 입에 담지는 못했다. 하루에 한 반씩 그의 주먹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처럼 완전 느와르적이었다. 예전에는 몰랐던 사실인데 일단 맞짱을 붙어보니 6개 학년 42명의 재학생 중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비참했다. 그만큼 건신은 강했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교장선생님한테 제지당하지만 않았다면 반패마저 싸그리 떼어갔을 것이다. 만약 반마다 현판이 있었다면 현판도 떼어갔을런지도 모른다. 절망적이었다. 학교 분위기가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우리는 그날의 '살수대첩'이 잠들어있던 괴물의 봉인을 풀어버렸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우리가 괴물을 만들었어.” 그 덩치만 큰 쑥맥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놈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쩌면 그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지도 몰라." 우리 중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런 말을 했다. "그럼 손을 써야지." "어딜?" "거길." 좌중이 조용해졌다. ”네가 할래? 난 안해. 그 놈은 몬스터야. 각이 안 나와."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문자 쓰길 좋아하는 김유석이가 탄식했다. “그야말로 묘항현령(猫項縣鈴)이로다." 

 

(2009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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