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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유령 (Goya's Ghosts, 2006)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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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야는 찌질하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세계적인 화가 중 한 사람에게 찌질하다니! 하지만 정말이다. 밀로스 포먼의 신작 '고야의 유령'에 등장하는 프란시스코 고야(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찌질한 예술가다. 대외적으로 그는 귀족과 성직자들의 타락을 고발하는 괴이한 그림으로 유명세를 얻었지만 한편으로는 '궁정화가'라는 안락한 지위에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도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감지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용기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가령 그는 억울하게 종교 재판소에 끌려간 어린 딸 이네스(나탈리 포트만)을 구하려는 상인 토머스 노력의 앞에서 적절한 중재자를 자처하는 동시에 종교 재판소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몸을 사린다. 상인과 로렌조 신부(하비에르 바르뎀)의 격정적인 논쟁 앞에서 "당신 말도 맞고 신부님 말도 맞다"며 책임을 회피하기에 급급할 뿐이다.

  밀로스 포먼은 새로운 타입의 고야를 창조하면서 마냥 뜨겁고 격정적인 고발자로 그려내기를 거부한다. 대신 미숙했던 그의 시선과 무력했던 행동력이 어떤 사건을 통해 어떻게 대가의 그것으로 성숙해나가는지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기구한 이네스의 운명과 욕망으로 빚어진 로렌조 신부를 둘러싼 하나의 작은 소용돌이, 그리고 이에 결부된 당대 혼란하고 어지러운 스페인의 커다란 소용돌이의 접경지대에서 고야는 새롭게 거듭난다. 철저하고 빈틈없는 관찰자로 시대를 호흡하고 비극을 체감한다. 청력을 잃어감에도 눈은 보다 번뜩이어 참상을 기억하고 손은 보다 정밀하게 절망을 그려낸다. 

  사실 이 작품이 뒤늦게 우리나라에 개봉하게 되는데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덕이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코엔 형제, 2007)'의 돌풍으로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를 휩쓸며 일거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그의 유명세가 바로 2년 전에는 없었던 이 작품의 셀링 포인트인 셈이다. 사실 바르뎀은 이미 이 작품에서 살인귀 안톤 쉬거 못지 않은 인간 막장의 연기를 톡톡히 보여준다. 교인으로의 숭고함과 인간으로의 욕망 사이에서 어지럽게 번뇌하다가 완전히 눈 까 뒤집고 정신 줄을 홀랑 놓아버리는 이 양반의 섬뜩한 고잉-크레이지 연기는 특유의 특수지명수배형 인상과 결합하여 막강한 파장을 낳는다. 한편 상인의 딸로 분한 나탈리 포트만도 이에 질세라 무려 1인 2역을 맡아 청초하고 고혹적인 부잣집 아가씨 '이네스'에서부터 고문과 십오년의 감옥생활 끝에 정신이 나간 '미친 버전의 이네스', 그리고 거리의 매춘부로 전락한 이네스의 딸 '앨리시야'까지 파죽지세로 소화해낸다. 이 작품의 고야가 찌질하게 보이는 이유 중에는 필경 스카스가드가 이 둘에 비해 미친 연기를 좀 덜 한 탓에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져 보인다는 것도 있으리라. 스카스가드에게 굴욕적일 바르뎀과 포트만을 중심으로 한 몇몇 포스터의 구도 배치는 이런 심증을 굳히게끔 하는 결정적인 증거다.

  '아마데우스(1984)'의 거장 밀로스 포먼의 연출을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겠다. 그는 '고야의 유령'의 원작을 쓰고 자신의 원작을 직접 영화화하느라(혼자서 북치고 장구도 치는 새로운 컨텐츠 창출법이다) 몹시도 정신없고 바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는 고야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이 창의적인 이야기를  '카를로스 4세의 가족', '마법사들', '만틸라를 쓴 젊은 여인', '정신병원', '1808년 5월2일(마드리드에서)', '1808년 5월3일(총살)'등의 그림을 촘촘히 엮어 완성해냈다.

(2008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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