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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드롭아웃 (The Dropout, Hulu, 2022) B평

불규칙 바운드/TV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2.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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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스타트업 괴담들은 거의 20세기의 연쇄살인마 스토리에 해당하는 지위를 확보한 것처럼 보인다. 충격과 공분을 일으키는 한편으로 묘하게 유혹적인 부분이 있는 소위 ‘팔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는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홈즈와 ‘테라노스’ 사건 역시 2015년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며 뉴스를 도배한 이후에 책(Bad Blood, 존 캐리루, 2019)으로, 팟캐스트(The Dropout, 레베카 자비스, 2019)로, 또 다큐멘터리(The Inventor: Out for Blood in Silicon Valley, HBO, 2019)로 이미 실제 테라노스의 기술보다 훨씬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 바 있다. 올해 서치라이트 텔레비전이 제작하여 훌루 오리지널 시리즈로 공개한 ‘더 드롭아웃’은 동명의 팟캐스트에 바탕하여 여덟 에피소드의 TV 시리즈로 완성되었는데, 크게 새로운 이야기는 없음에도 묘하게 매력적인 것은 역시 앞서 언급한 유혹적 요소들이 극화될 때 발생하는 강력한 자장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논픽션 위주 컨텐츠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픽션의 측면에서 이 사건을 다루는 이 작품에는 몇 가지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두드러지게 매만져진 부분이 이 ‘팔리는 이야기’의 치명적 뇌관이 숨어있는 위치임은 물론일 것이다.


  첫번째는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홈즈의 캐릭터이다. (당연히 이 부분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캐스팅이 최적의 선택이었는지는 물음표가 남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이프리드의 기존 여성스러운 이미지와 의도적으로 중성적인 모습을 연출했던 홈즈의 이미지가 묘한 혼선을 일으켜 (의도했든 아니든) 블랙 코미디로의 성격을 극대화하는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일례로 실제 홈즈처럼 중저음의 페이크 보이스를 따라 하는 사이프리드의 모습에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이처럼 가면을 쓰는 모습과 가면으로부터 빠져나가는 모습을 연결선상에서 그려낼 수 있는 픽션에서는 홈즈의 경쟁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성향과 의존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성향의 소름 끼치는 미스매치가 논픽션과 비교하여 보다 극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두번째는 홈즈의 성공 스토리와 여성 창업가로의 아이덴티티가 연결되는 지점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녀는 이 점을 적극 활용하여 어필을 하고 투자를 받았으며 당시 많은 여성들이 그녀의 성공을 동경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실리콘 밸리의 첫 번째 여성 테크 빌리어네어 스토리의 추악한 진실은 이후 업계에서 여성 창업가들이 투자를 받기가 훨씬 더 어려워지는 불행한 결과를 낳았다. 이 TV 시리즈는 본래 이 이야기의 핵심 키워드였던 '셀프-메이드 빌리어네어가 된 대학 중퇴생' 보다는 '첫 번째 여성 테크 빌리어네어' 라는 요소에 조금 더 무게를 싣는 느낌이다. 심지어 존 캐리루나 레베카 자비스가 사용한 적이 없는 '페미니즘/페미니스트'이라는 단어도 대사 속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홈즈와 테라노스에 처음 의구심을 제기한 사람 중 하나인 스탠퍼드 약대 필리스 가드너 교수와 테라노스의 내부고발자 중 하나인 에리카 챙을 연결하는 세 가지 다른 세대 및 배경의 여성들의 극적인 대립 구도까지 만들어 이 부분을 부각하려는 특정한 의도를 내비친다.


  세번째는 테라노스의 2인자 서니 발와니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워 전체 스토리를 재구성한 부분이다. 특히 후일 비로소 드러나기 시작했던 홈즈와 발와니의 (그야말로 수목극과 일일극을 오가는) 로맨스 관계를 처음부터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하여 파트너 인 크라임, 그러니까 마치 실리콘 밸리판 ‘보니와 클라이드’처럼 느껴지게 한다. 가장 충격적인 점은 (물론 ‘로스트(ABC, 2004-2010)’의 꽃미남 나빈 앤드류스가 평범한 동네 아저씨가 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랩 테스팅 등에 아무런 관련 배경이 없는 이 남자가 홈즈와 태그 팀을 이루어 회사를 장악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 관계는 조직으로 테라노스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전술한 홈즈 개인의 병적인 문제를 동시에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후일 재판 과정에서 이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전략을 취했다.)

 

  마지막은 탐사저널리즘 주제의 정의극처럼 일련의 사건 전개 과정을 스릴감 있게 압축한 점이다. 세부적인 사실 관계의 선택과 일부 주요 인물의 제외, 그리고 몇몇 장면에서의 윤색에 오해의 소지가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외부의 잡음과 충돌이 커져가다가 끝내 저널리즘의 사정권에 포착되는 과정의 속도감과 흡입력이 적절한 편이다. 사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스타트업 괴담이 공유하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이상의 상상을 초월하는 거짓말 같은 요소들도 있다. 대학 2년 중퇴생이 존재하지 않는 기술로 총액 7억 달러 이상의 투자를 받아 무려 100억 달러에 달하는 기업 가치를 만들어 내도록 진실이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영화보다도 더 영화 같고 TV 쇼보다 더 TV 쇼 같다. 자료와 증언의 분석에 바탕한 논픽션의 냉철함은 없지만 인상적인 감정적 강렬함을 불러 일으킨다.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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