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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 (Evil, CBS/Paramount+, 2019~ ) B평

불규칙 바운드/TV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2.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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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레비젼 쇼에서 에피소딕(episodic) 요소와 시리얼라이즈드(serialized) 요소 사이 힘의 균형은 시대 변화와 유행에 따라 조정되고는 했다. 전통적으로 가을 시즌에 시작하여 봄 시즌까지 한 주에 한 편씩 24편 내외가 방영되는 패턴에서는 각각의 에피소드에 독립적 완결성을 부여하는 구조가 더 유리했다. 이후 케이블 텔레비젼의 주도 아래 한 시즌을 13편 단위로 (또 그리고 다시 10편 남짓으로) 조정된 환경에서는 압축적으로 연결되는 강렬한 스토리에 대한 선호쪽으로 무게중심이 실렸다. 하지만 스트리밍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된 지금은 완전히 게임의 법칙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사실상 동시 다발적으로 주간 단위 신작이 데뷔하고 또 동시 다발적으로 빈지-워칭(binge-watching)으로 소비되는 컨텐츠 과잉 사태 아래 균형은 전과 같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전문직 캐릭터의 절차적인 요소가 중요한 프로시듀얼(procedural) 성격의 쇼(그러니까 수사물, 법정물, 의학물처럼 특별한 ‘케이스 오브 더 워크(Case of the Week)’를 다루는 경우)를 제외하면 전통적인 에피소드 단위 구성은 앤솔로지 시리즈, 시트콤, 혹은 애니메이티드 시리즈에나 해당되는 포맷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존 TV의 스타 크리에이터/쇼 러너들은 이런 상황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반응했는데 그 중에서도 로버트 킹과 미셀 킹 부부의 대처법은 상당히 흥미로워 보인다. 이들은 여전히 최소한의 시즌 단위 연결성은 유지하되 각 에피소드에서 주제를 선명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하는 전형적인 올드스쿨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전히 최고의 시리얼라이즈드 요소는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믿는다. 물론 그동안 ‘더 굿 와이프(CBS, 2009 - 2016)’와 그 스핀오프인 ‘더 굿 파이트(CBS All Access, 2017 - 현재)’처럼 주로 변호사들을 주인공으로 한 ‘케이스 오브 더 위크’ 스타일의 쇼를 제작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정물이 아닌 다른 소재를 다루는 경우에도 본연의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들의 새로운 성공작인 ‘이블(CBS/Paramount+, 2019-현재)’은 이 질문의 답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제시한다. 다름 아니라 일단 장르가 슈퍼내추럴이기 때문이다. 킹 부부가 이런 유형의 소재를 다루는 시리즈를 제작한다는 것도 당혹스럽게 들리는 일이지만 일단 그 전에 2020년 전후로는 이런 소재의 시리즈가 제작된다는 것부터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다. 범죄 심리학자와 카톨릭 신학도와 기술 컨트랙터가 팀을 이루어 초자연적 현상을 조사한다?  영락없이 70년대에서 90년대 사이 텔레비젼에 어울렸을 법한 시리즈처럼 들린다. 실제로 종종 크리스 카터의 ‘엑스파일 (FOX, 1993-2002)’과 ‘밀레니엄 (FOX, 1996-1999)’과 같은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 후계자라고 할 수 있었던 ‘프린지 (FOX, 2008 -2013)’가 시청률에 있어 고전을 거듭했다시피 이런 이야기 자체가 오늘날 유효할거라고 장담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종교적 색채까지 더한 부분은 그다지 좋은 소식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 상당히 난이도 있어 보이는 미션을 성공으로 이끌어낸 몇 가지 비결이 있다. 첫째는 물론 캐릭터이다. 전술한 것처럼 킹 부부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최고의 시리얼라이즈드 요소라고 믿는 사람들이고, 일찍이 ‘더 굿 와이프’와 ‘더 굿 파이트’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묘하게 공감하게 되는 섬세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범죄 심리학자이자 네 딸을 키우는 엄마인 크리스틴 부샤드(카챠 헤르베스)는 앨리시아 플로릭이나 마이아 린들처럼 처음에는 연약하고 수동적이었지만 사건을 거듭하며 차츰 강인한 내면이 드러나는 여성 캐릭터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 또한 그녀는 종교적 배경이 없는 인물로 초자연적 현상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논리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말하자면 데이나 스컬리와 비교할만한 역할을 한다. 반면에 카톨릭 신학도 데이비드 어코스타(마이크 콜터)는 폭스 멀더의 주관적 경험과 신념 대신에 종교적 믿음에 의거하여 초자연적 현상을 이해하고 그 자신도 환영이나 계시를 통해서 신의 의지를 수행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들의 구도는 각각 심리학과 카톨릭 가르침에 배경을 두고 있으므로 스컬리와 멀더처럼 이성과 감성 혹은 과학과 직관으로 대립항을 이루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세 번째 캐릭터인 기술 컨트랙터 벤 샤키르(아시프 맨드비)의 역할이 더해진다. 이 중동 출신의 냉소적인 기술자는 (조사원 칼린다 사르마나 멜리사 골드의 테크니션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초자연적 현상이 인위적으로 구현된 실질적 방법을 찾으려는 입장을 취한다. 이 점이 닥터 부샤드와 어코스타의 접근법의 사각지대를 커버하며 팀의 균형만이 아니라 작품의 균형까지 맞추는 역할을 한다.  


  두번째 비결은 2020년에 좀처럼 어울리지 않게 느껴지는 이야기를 위해 2020년에 어울리는 소재를 발굴한 것이다. 악한 존재가 VR 게임이나 스마트 스피커를 도구로 삼는다던가 괴담이 인터넷 밈의 형태로 혹은 인플루언서를 이용하여 유튜브와 팟 캐스트를 타고 전파된다던가 하는 등은 이런 이야기를 오늘날에 다루는 영리한 방법이다. (솔직히 우리 모두 유튜브 알고리즘에 어떤 고약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종종 하지 않는가. 또한 요즘 어떤 유튜버들은 마치 귀신들린 사람들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세번째 비결은 두 말 할 것 없이 킹 부부 특유의 유머감각이다. ‘더 굿 와이프’와 ‘더 굿 파이트’에서 이미 검증이 된 것처럼 이들은 무거운 상황을 부드럽게 만드는 독창적인 유머 코드가 있다. 그것은 법정 케이스나 기업 비지니스를 다루면서도 물론 효과적이었지만 기적, 악마, 빙의, 엑소시즘 등 일반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듯 보인다. 어둡고 무거운 사건을 다루고 집에 돌아온 닥터 부샤드가 말괄량이 네 딸의 밝은 엄마 역할로 돌아가는 극적 전환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대목에서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이 숨어서 호러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다른 한 가지 사례로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이 작품의 빌런 역할을 하는 릴런트 타운젠트(마이클 에머슨)를 지목할 수 있을 듯 하다. 타운젠트는 세 주인공을 자극하고 조사를 방해하는 일을 서슴치 않는데 그 과정에서 자진해서 엑소시즘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엑소시즘의 효과가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시늉을 하는데 이후 큰 뿔 염소와 마주 앉아 상담받으며 그 경험을 털어놓는다. 이런 묘사가 너무 가볍거나 지나치게 과장된 코미디처럼 보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이야기의 일부처럼 보인다는 신기한 사실은 이 작품의 독특한 색깔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블’의 성공 비결은 에피소드 중심의 시리즈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결국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전통적으로 ‘케이스 오브 더 위크’ 시리즈의 매력은 매 회 (매 주) 흥미로운 케이스의 등장 (물론 게스트 스타의 등장도 빼놓을 수가 없다)을 통해 신선한 동력을 불어 넣는 것이었다. 또한 (리미티드 시리즈와는 다르게) 장거리 경주가 가능하도록 완급 조절을 하면서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서서히 만들고 다듬어가는 것이었다. 킹 부부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설정과 기술들 역시 TV 쇼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 두 가지 요소의 조화를 이루는 지극히 기본적인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그들만의 레서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였고 말이다.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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