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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뱅커 (The Banker, 2020)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1.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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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놀피의 ‘더 뱅커’는 어쩌면 다소 운이 따르지 않은 작품이라 볼 수 있겠다. 미국 역사 최초의 흑인 은행가들의 성공과 스캔들을 다루는 내용은 ‘블랙 스토리즈’ 혹은 ‘블랙 보이시즈’가 하나의 영화 분류 카테고리로 자리 잡은 오늘날 ‘그린 북(피터 패럴리, 2018),’ ‘히든 피겨스(시어도어 멜피, 2017),’ 헬프 (테이트 테일러, 2011)’ 등의 사례들처럼 인종 문제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는 소재였다. 게다가 컨텐츠 사업으로 지평을 넓혀가는 애플이 배급하는 두 번째 영화이자 첫 번째 메인스트림 작품으로 프로모션도 어느 정도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AFI 페스트 공개를 앞둔 시점까지만하더라도 흥행은 물론 작품의 소재나 성격상 다가오는 어워드 시즌까지 기대해볼만 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이 작품이 다루는 실존 인물 버나드 S. 개럿 시니어의 ‘아들'이 과거 이복 여동생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논란이 터진 것이다. 물론 끔찍한 일이지만 인물 본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니 처음에는 영화와 별개의 이슈처럼 보였다. 하지만 뒤이어 밝혀진 문제는 알고보니 그 ‘아들’이 이 작품의 제작에 관여했으며 심지어 제작자 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다시 뒤이어 밝혀진 사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실제 버나드 S. 개럿 시니어는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로스엔젤레스로 넘어와서 두번째 부인을 만나 재혼했는데 (제작자로 참여했었다는 아들은 첫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이다.) 영화에서는 마치 단 한 사람의 배우자가 평생 고락을 함께 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언뜻 이루어지는 흔한 각색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두번째 부인(린다 개럿)의 역할을 첫번째 부인(유니스 개럿)에게 부여하였다는 부분에 있었다. 즉, 첫번째 부인의 아들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데 관여하면서 그 과정에서 새 어머니의 존재를 지우고 자신의 어머니로 그 역할을 대체했다는 사실이 새로운 논란이 된 것이다. 이후 공개 및 개봉이 연기되며 문제의 ‘아들’은 이 작품과 관련된 모든 크레디트에서 제외되었지만 이와 별개로 개럿의 성공을 실질적으로 내조한 두번째 부인의 기여도가 부당하게 왜곡되었다는 가족들의 문제 제기는 여전히 쟁점으로 남아 있는 상태다. 


  이 일련의 복잡한 소란에는 소위 ‘실화에 바탕한 영화’들이 갖고 있는 기묘한 역설을 드러내는 부분이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극화의 과정에서 윤색은 있기 마련이다. 실화에 바탕했다고 하여 설마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린 북’ 역시 소름끼칠 정도로 유사한 진통을 겪었다. (a) 토니 립의 아들이 제작자와 스크린라이터로 참여해서; (b)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아버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는데; (C) 그 과정에서 돈 셜리의 가족들이 사실 왜곡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며 큰 논란이 되었던 바 있다. (심지어 그 중에는 작품의 핵심 요소인 두 남자의 우정 자체에 대한 의구심을 갖게 하는 증언마저 있다.) 결국 이 두 작품을 둘러싼 문제를 키운 발단은 공통적으로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한 차례 검증을 거친 원작이 없이 누군가의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영화제작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한편으로는 ‘Based on a true Story’라는 문구를 적시하는 의미가 점점 퇴색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 


  ‘더 뱅커’ 역시 작품 자체는 재미있다. 볼륨도 적당하고 속도감도 알맞은 편이다. 가장 훌륭한 것은 역시 세 남자의 캐릭터가 조화를 이루는 부분이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과묵하고 진지한 멘티와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는 수다스러운 멘토의 (물론 그분이다) 조합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들 아래 도제로 들어간 평범한 백인 청년이 이 두 블랙 마스터를 대신하는 화이트 프론트맨이 되어 ‘그럴-의도는-없었지만-어쩌다보니-하이스트-무비’를 완성하는 전개도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롭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냇 킹 콜 같은 슈퍼스타도 로스엔젤레스 백인 커뮤니티에 주택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정도로 인종 주거 분리는 뿌리 깊은 문제였다. 실제 버나드 S. 개럿이라는 남자가 그문제의 해결에 얼마나 기여를 했는지는 (혹은 정말로 큰 이상을 품고 그 일을 벌였는지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백인처럼’ 돈을 벌고 싶었을 뿐이었던 흑인 사업가가 여러 제약과 모순을 발견하며 은행 대출이 평등한 기회의 근간임을 발견해가는 일련의 과정 묘사는 인종 문제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파헤치는 흔치 않은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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