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 전 부치는 남자들
by 김영준 (James Kim)
뭐? 나보고 전을 부치라고?, 박유범(Park, You Bum)씨는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절대적인 소리의 크기만 놓고 본다면 제법 큰 소리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크기만큼 힘이 실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피스톤을 뒤로 천천히 당겼다가 다시 미는 것처럼 힘이 실리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사람의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른 분노가 뒤통수로 찬란히 연기를 뿜어대며 튀어나갈)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그게 충분치가 않았다. 오버히트를 알리는 경보등을 켤 시간도 없었고, 뇌압과 안압이 평상시 보다 높은 상태라는 사실을 미처 깨달을 시간도 없었다. 전을 부치라는 소리는 갑자기 귓구멍을 들어와서 재빨리 뇌의 특정 영역으로 전달되었고 미치 생각할 틈도 없이 그는 너무나 황당한 나머지 '파블로프의 개' 마냥 저절로 쇼파에서 튀어 올라야 했다. 그러다 보니 소리를 질렀지만 힘이 달려서 제대로 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그러고 보니 무심결에 약한 모습을 보였군, 하고 그는 엉거주춤 일어선 상태에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종아리에서부터 허벅지, 엉덩이, 그리고 등허리에 이르기까지 푹신하고 안락한 쇼파의 질감이 못내 그립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 그래, 당신이 전을 부치라고.
유범씨와 법률상, 사실상, 도의상 혼인관계에 있는 전소민(Chun So Mean)씨는 마치 말에 스타카토라도 찍은 듯 한 음절, 한 음절 다시 또박또박 발음해 주었다. 저 똑 부러지는 발음으로 어째 아나운서 같은 걸 안 했는지 몰라, 유범씨는 그 참에 한숨을 돌렸다. 처음 전을 부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제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졌던 신경들이 한 올, 한 올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기를 보내 가만히 온몸의 혈이 제대로 돌아가는지를 점검해 보았다. 다행히 이상이 있는 곳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세상에. 나보고 전을 부치라니. 피스톤이 서서히 뒤로 당겨졌다. 공기가 팽창하면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오늘은 추석이다. 다름아닌 추석이다. 추석이 어떤 날이냐. 한국의 최대 명절 중의 하나이다. 곡식과 과일이 막 수확된 절기에 위치했으니 정녕 축복받은 날이다. 한 해간 땀 흘려 일했던 농부들도 추석 때만큼은 신선이 된다. 거 왜 텔레비전 카드 선전도 있잖아,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고. 떠나지는 않아도 좋으니 아무 생각 안 하고 쉬겠다고요. 올해 들어 하늘에 맹세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한 유범씨는 푹신한 쇼파와 텔레비전 리모컨, 그리고 최장 9일이라는 이번 추석 연휴가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천절은 화요일, 추석 연휴는 목금토, 그야말로 마술 같은 배열이었다. 많은 회사들이 내친김에 수요일도 휴무일로 정했다. 어떤 회사들은 에헤라디야, 월요일까지 휴무일로 정해서 9일 연휴를 만들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9일을 쉬는 인간들도 있는데 자기는 4일밖에 쉬지 못한다. 유범씨와 불과 5미터 떨어진 곳에서 책상을 쓰는 최 과장이 개천절과 추석연휴 직전인 그 다음날까지 나와서 밤새도록 일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망할 놈, 기러기 아빠면 기러기 아빠답게 주남저수지로나 끼룩끼룩 날아갈 것이지. 남들 다 쉬어야 할 때 거기서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있으면 어디 부담스러워서 당최 퇴근할 수가 있나, 150원짜리 커피 자판기 앞에서 유범씨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욕을 퍼부었었다. 덕분에 10월 3일 개천절날 용인 골프장에 잡아두었던 '단군할아버지 배(杯) 라운딩'도 물 건너가 버렸다. 뭐, 그런데 그렇게 불쌍한 나보고 전을 부치라고? 이 집안의 가장인 나보고 전을 부치라고? 남들은 연휴 4일째로 접어들었다는 오늘에서야 막 처음으로 쉬는 건데?
유범씨는 잠시 뜸을 들인다. 도대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치고 나가야 이 위기를 무사히 모면하고, 식용유 묻혀가며 전을 뒤집지 않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중이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싸움이란, 그게 친구사이건, 연인사이건, 아니면 부부사이건, 무림 고수들의 대결 같은 것이다. 상대의 수준과 마음가짐의 정도 (너를 꼭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이를 벅벅 갈고 있는지, 아니면 혹시나 이기더라도 너그러이 목숨만은 살려줄 의사가 있는지) 모르고 덤볐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 게 무림의 불문율이다. 그걸 지키지 않았던 수많은 무부들이 이름 없는 넋이 되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요컨대 만약에 그냥 장난처럼 해 본 말이라면 선수를 치면 된다. 버럭 일갈을 한번 질러주면 적은 (이 대목에서 적은 아내 소민씨다) 이내,
- 농담 한 번 했기로소니 그렇게 화를 내요?
라며 입을 삐죽대고 조용히 본거지로 (본거지는 부엌이다) 물러갈 것이다. 그럼 유범씨는 다시 푹신한 쇼파와 텔레비전 리모콘을 장악하고 마네의 '올랭피아'처럼 요염하고 권태로이 누운 자세로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보낼 것이다. 냉장고 문짝에서 턱이 얼얼할만큼 차가운 맥주를 꺼내어 승리를 자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훨씬 더 많이 화가 나있는 경우라면? 이 경우에는 도리어 역효과가 난다. 섣불리 버럭 화를 내면 불벼락이 돌아올 수도 있다. 지금 상황은 서로를 노려보며 똑같이 새총을 당기고 마주서 있는 것과도 같다. 나는 이만큼 고무줄을 당겨 놓고 협박하는데, 알고보니 상대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이 - 이따만큼 고무절을 당겨놓은 것이다. 그럼 동시에 쏘면 내가 죽는다. 아니, 죽지야 않겠지만 꼬리를 내리고 빌어먹을 전을 부쳐야 한다. 끝내 전을 부치지 않더라도 공포에 떨면서 저녁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사실 유범씨는 아주 예민한 사람이다. 다른 건 몰라도 밥만큼은 심기가 편안한 상태에서 먹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어코 탈이 나버리는 체질이다. 게다가 오늘은 추석, 먹을 것도 많고 병원도 다 쉬는 추석에 탈이 나면 그거야말로 낭패 중에서도 참으로 낭패다.
- 내기… 내기를 하자.
- 뭐라고요?
그때 왜 내기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을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연휴 내내 기인들만 우르르 몰려나오는 텔레비전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첫 번째 기인이 나와서 말한다. 나는 자동차를 이빨로 끌 수 있습니다, 정말 그는 자동차를 이빨로 끈다. 정유회사와 자동차회사, 그리고 보험 회사가 모두 싫어할만한 인간이다, 박수가 터진다. 뒤이어 두 번째 기인이 나와서 말한다. 나는 핫도그 100개를 먹어치울 수 있습니다, 방청객들이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정말 그는 핫도그 100개를 씹어 넘긴다. 표정을 보니 살작 맛이 갔는데, 그래도 자기가 핫도그를 100개나 먹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 하는 듯 보인다. 사회자가 요란스럽게 외친다. 여러분 첫번째 기인은 1번 버튼, 두번째 기인은 2번 버튼입니다. 둘 중에 오늘의 진정한 기인을 가려주십시오. 두구두구둥. 두 명의 기인 중의 하나를 골라라. 이것도 일종의 내기다. 민족의 명절이랍시고 방송국 사람들도 홀랑 고향에 갔는지, 매일같이 저따위 프로그램 천지다. 어쨌든 내기. 내기를 하자고 해버렸다, 나도 모르게. 유범씨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그 말을 조금 후회하고야 만다. 그래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 그래, 내기를 하자고. 내가 진다면 기꺼이, 기꺼이 전을 부칠께.
- 그래요? 아무튼 좋아요. 그럼 무슨 내기를 하는데요?
소민씨는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앞치마 끈을 풀었다. 보아하니 단단히 작정을 했구먼, 아까 그냥 못하겠다고 버텼더라면 큰 사단이 났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범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들키지 않게 뒤통수로, 몰래. 속 마음을 숨기기 위해 퀴즈 프로그램의 사회자마냥 너스레를 떨어본다.
- 상식, 요즘은 상식이 풍부한 사람이 성공해요. 그러니까 상식 퀴즈를 내서 맞추자고. 당연히 많이 맞추는 쪽이 이기는 거겠지. 삼판 이선승제. 텔레비전에서 많이 봤을 거 아냐.
- 하기야, 미디어의 수준이 결국 대중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겠죠. 바람직하진 않아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죠.
유범씨는 아내의 그런 농담이 싫었다. 그건 마치 '이렇게 배울만큼 배우고 똑똑한 나는 하루 종일 허리가 부러저라 무 썰고, 파 다듬고, 밤 까고, 송편 빚고, 계란 풀고, 있는데 너는 도대체 뭐가 잘 났다고 쇼파에 돼지처럼 누워서 빈둥대는거냐? 이거 쳐 먹을게 니네 조상이지 내 조상이냐? 내가 이럴려고 대학에 대학원까지 비싼 돈 내고 다닌 줄 아냐?'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잠시 움찔하였으나 속으로 꾸욱 눌러참고 방에서 ‘생활상식대사전'을 들고 나왔다. 지하철 잡상인에게 단 돈 2천원을 주고 사온 책이다. 이게 쓸모있을 날이 있었군, 하고 유범씨는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또르르르르 책장을 빠르게 넘기더니 한 페이지를 떡 골라잡는다.
- 자아, 잘 들어주세요. 적도 부근의 동태평양에서 해수면 온도가 비정상적으로 낮아지는 현상을 뜻하는 서반어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온수층이 서쪽에서 두꺼워지고 동쪽에서 얇아지기 때문이죠. 이와 같은 기상 이변을 뭐라고 부를까요?
소민씨는 아주 차갑고 똑 부러지는 말투로 대꾸한다.
- 라니냐. 그럼 내 차례지? 당원이나 국가공무원을 농촌과 공장에 보내 노동에 종사케 하고, 도시의 학교 졸업생들을 변경지방에 배치, 긍국적으로 그곳에 정착케 함으로써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벽을 헐고 지식인집단으로 하여금 낙후된 변경지방의 농촌 근대화에 참여하도록 독려한 중국정부의 운동을 뭐라고 한답니까?
유범씨는 잠시 침묵. 애써 눈을 피하며 머리를 굴린다.
- 그런 게 상식이란 말이야?
역시 이번에도 소민씨는 아주 차갑고 똑 부러지는 말투로 답한다.
- 백팔십구 쪽. 못 믿겠으면 이따 찾아보던가.
아주 내가 전을 부치게 하려고 작정을 했구나, 작정을. 이를 으드득 갈면서 유범씨는 첫 번째 문제에서 너무 봐주었다는 생각을 하고야 만다. 오냐, 이번에는 정말 어려운 문제를 내줄 테다. 각오해라.
- 기업의 안정성을 판단하는 팩터 중의 하난데. 총자본에서 부채를 뺀 자기 자본이 총자본에서 차지하는 비율이야. 뭐 이게 높을수록 기초가 튼튼한 기업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은행감독원에서는 30대 그룹의 계열기업을 대상으로 지난 3년 동안 이것의 평균치를 계산하여…….
- 자기자본지도비율. 이제 2 대 0.
울컥. 유범씨는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어떤 스산한 것이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이 여자가 집에서 밥은 안 하고 도대체 뭘 한 거야? 반격은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이어진다.
- 1991년 12월 11일 네덜란드에서 열린 유럽공동체 통합조약. 주요 내용은 유럽통화통합에 관한 일정, 유럽 중앙은행 설립, 서유럽 연맹 주축의 군사정책 수행, 유럽의회에 EC조약 개정 승인권 부여, 유럽시민권 도입. 92년 2월 7일 정식 조인. 93년 11월 1일 발효. 이 조약의 이름을?
- 뭐가 어째? 그 딴걸 어떻게 알아?
유범씨는 드디어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고야 만다. 덤벼라, 더 이상 나도 못 참겠다. 그냥 칼을 뽑으련다. 사내대장부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그런데 칼집에서 칼을 빼기도 전에 뭔가가 날아와 얼굴을 덮는다. 꽃무늬 앞치마다. 앞은 안 보이지만 소리는 들린다.
- 여전히 2 대 0. 삼판이선승이라고 했으니 남은 결과와 상관없이 게임 종료. 이제 약속대로 서방님께서 전을 부치셔야겠죠?
그리하여 유범씨는 쇼파가 아니라 마룻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았다. 꽃무늬 앞치마를 어정쩡히 입은 채다. 프라이팬 위의 기름이 지글지글거렸다. 텔레비전 안에선 여전히 기인들이 뛰어다닌다. 콧바람으로 백개나 되는 촛불을 끈다. 유리겔라도 아닌 게 눈으로 숟가락을 구부린다. 정수기 용 생수통에 몸을 구부려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손의 감촉만으로 지폐뭉치가 얼마인지 알아낸다. 정말 세상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텔레비전에 정신을 팔다 보니 반죽이 흘러내린다. 이거 모양을 동글동글하게 유지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발코니의 유리에 전을 부치는 자신의 모습이 그림처럼 고스란히 비쳤다. 그 광경이 그림이라면 그 그림의 제목은 '전 부치는 남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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