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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회식의 역사: 아주 오래 전부터 아주 오랜 후까지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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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식, 이 빌어먹을 습속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0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익히 알려진대로 당시 인류는 수렵과 채집으로 먹거리를 구했다. 수렵을 하고 채집을 하는 목적이 먹고 마시기 위함이었으므로 하루 일과는 자연스럽게 먹고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먹고 마심은 물론 즐겁고 즐거운 일이나 이를 위해 노동과 피로를 지불해야 했다는 진실은 언제나 슬픈 것이었다. 내일의 풍요를 위해선 내일 아침에도 연장을 벼려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숙명은 눈물 나도록 지겹다. 잉여의 축적이 없었기에 이들은 매일 이 고단한 야생의 생존술을 반복해야만 했다. 배를 곯지 않으려는 노력은 절박했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들을 습격하는 야생 맹수들은 위험했다. 때로는 상처를 입었다. 몇몇 동료를 잃기도 했다. 그러나 배를 채우기 위해선 사냥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여 이들은 작업의 결과를 누림에 있어 얼씨구나, 축제적 성격을 부여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회식이라 부르는 문화의 시초다. 라도니아(Ladonia: 스웨덴의 설치미술가 라슈 빌크스가 1996년에 세운 사이버 가상국가, 註1) 국립연구소의 드류 P. 위너(Drew P. Wiener)가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200만 년 전의 지구에서 데려온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이름은 '창조적 흥분' - 사람들이 지어준 짓궂은 이름이다. 


- 사냥이 끝나면 우린 술을 처먹었지요. 
  창조적 흥분의 말을 우리말로 옮긴 통역가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 사냥한 고기나 과일, 그리고 야채는요? 
- 술안주였지요. 
  좌중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설마 식사가 주가 아니었다는 뜻인가? 
- 고기와 과일을 얻고자 당신들은 하루간 그토록 고생했던게 아니었습니까? 
- 물론이지요. 
- 그런데 술안주라니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냥을 하고나니 목도 타고 해서 술을 마시게들 된 겁니까? 아니면 술을 마시려고 사냥을 한 겁니까? 도대체 무엇이 주였습니까? 
- …… 술이 주였지요. 
- 앞 뒤가 안맞는게 아닙니까? 
- 앞 뒤가 아주 잘맞지요. 하루동안 고생했으니까 술로 피로를 씻자는 얘기지요. 아무 것도 없이 맨 속에 술만 깔 수는 없으니까 고기도 먹고 야채도 먹자는 얘기지요. 
- 당시에도 술이 있기는 했습니까? 
- 물론이지요. 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나란히 궤적을 그려왔지요. 
  뿔테 안경을 쓴 곱슬머리 연구원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 당시의 양조술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 …… 물론이지요. 


  그로부터 15초 후. 창조적 흥분은 유리창을 깨고 도망쳤다. '도망쳤다'기보단 '도망치려고 했다'라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당시 창조적 흥분을 연사로 모시고 세미나를 열었던 역사적 장소가 라도니아 국립 연구소의 3층 대강당이었기 때문에, 창조적 흥분은 다리가 골절된 채 아스팔트 바닥에 처참히 엎어져 신음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엄습하는 고통의 와중에서도 그는 뭐라 몇 마디를 뱉었는데 예의 통역가가 재빠르게 내려가 (물론 지난 200만 년간 진화해 온 문명인답게 엘레베이터를 타고 유유히 내려가) 창조적 흥분의 말을 신중히도 경청하여 엄숙히도 옮겨주었다. 
- 수…… 술은 없습니까? 


  이 일로 곤경에 처한 것은 창조적 흥분을 세상에 공개한 드류 P. 위너 연구원이었다. 그는 졸지에 사기꾼으로 몰려 라도니아 국립연구소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고야 말았다. 사람들은 창조적 흥분의 정체를 만천하에 밝힘으로써 일거양득으로 드류 P. 위너의 거짓말까지 단죄할 수가 있을거라고 믿었다. 다음 날로 드류 P. 위너는 대기발령 처분을 받았다. 전신이 캐스트로 둘둘 말린 채 병실에 누워있는 창조적 흥분의 고백여하에 당장 짐을 쌀 수도 있을 처지란 뜻이다. 
- 분명히 라콘타역에 굴러다니던 알콜중독자 홈리스를 하나 데려온 걸게야. 
  곱슬머리가 말했다. 그는 원시의 양조법을 물었던 자신의 질문이 창조적 흥분이 200만 년 전의 남자가 아님을 폭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옛말에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직접 라도니아의 중앙역인 라콘타로 나가서 창조적 흥분과 닮은 생김새의 홈리스를 몇몇 찾아서 데려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여기 또 다른 200만 년 전의 남자를 데려왔도다" 라며 허풍을 떠는 것도 잊지 않았고. 그러나 이게 웬걸, 징계위원회가 채 꾸려지기도 전에 거짓말쟁이 드류 P. 위너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부활을 공언했다. 
- 며칠만 기다려보슈. 새로운 역사가 씌여질테니.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비웃었다. 
- 며칠만 기다리면 없던 수가 생기나? 200만년 전의 홈리스와 세트로 도망치지나 않음 다행이지. 
  과연 드류 P. 위너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람이라기보단 미이라에 가까워진 200만 년 전의 남자 창조적 흥분도 함께 사라졌다. 거짓말처럼 누구도 다시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


  회식, 이 빌어먹을 습속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200만년 후까지도 앞질러 올라간다. 


  아직 알려진 바가 부족하여 어쩌면 당신은 알지 못할테지만 후대의 인류는 채집과 수렵으로 먹거리를 구하게 된다. 응? 그럼 200만 년 전이나 200만 년 후나 같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럼 자그마치 400만 년 동안 인류라는 가련한 족속들은 당최 뭐가 달라진 것인가?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기에 부연하자면 그 '수렵과 채집'은 이 '채집과 수렵'과 성질이 다르다. 순서만 반대인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다르다. 200만 년 후의 인류는 생존이 아닌 유희를 위해서 채집과 수렵을 한다. 말하자면 좀 더 쾌락지향적이라고나 할까. 즐기고 또 즐기니 과연 즐겁지 아니한가, 라는 모토 아래 그들은 즐기고 또 즐겼다. 낮동안 열심히 즐긴 그들은 밤이 되자 일간 축적된 노곤함을 풀기 위해 얼씨구나, 회식을 마련했다. 그렇게 처놀고 또 어떻게 더 놀 기운이 남아있느냐? 이해를 위해 미래의 인류는 그런 쪽으로 월등하게 발달한 존재들이라는 점을 밝혀야만 하겠다. 


  라도니아(Ladonia) 국립연구소의 I. C. 위너(I. C. Wiener) 연구원이 (드류 P. 위너와 성이 같지만 아무 상관이 없다)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가 200만년 후의 지구에서 데려온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의 이름은 ‘흥분적 창조' - 사람들이 지어준 짓궂은 이름이다. 


- 놀이가 끝나면 우린 술을 처먹었지요. 
  '흥분적 창조'의 말을 우리말로 옮긴 통역가의 목소리는 낭랑했으나 옮겨지기 전의 목소리가 더 낭랑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들게하기엔 충분했다. 정말 그렇다면 인간이란 진화될수록 성대가 발달해 보다 더 낭랑한 목소리를 가지게 되는 포유류인 것이 아닐까. 
- 유사 이래 인류는 늘 노동에 시달리지 않았습니까? 그럼 일은 언제 합니까? 
- 안 하지요. 
- 안 한다고요? 
  좌중의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설마 모두가 일이 없어 손을 놓고 에헤라디야 - 놀다, 놀다, 놀다가 죽을 때까지 노는 음습한 백수들의 디스토피아가 정녕 인류의 미래인 것인가. 
- 로보트들이 하지요. 
  브라보. 어딘가에서 박수가 터졌다. 위대한 과학기술 만세! 
- 그럼 시간이 많이 남겠습니다. 여가 시간에는 보통 무엇을 하십니까? 
- 모두가 모여 술을 처먹지요. 아닌 게 아니라 회식이지요. 
- 잠시만요. 일을 하지않는데 어떻게 회식이 성립할 수가 있습니까? 일의 피로를 누그러뜨리고 조직의 결속력을 단단히하려고 벌이는 게 회식인데, 앞 뒤가 안 맞는 게 아닙니까? 
- 앞 뒤가 아주 잘맞지요. 일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놀아야 하고 불행하게도 노는 건 일하는 것만큼 피로하지요. 그 피로를 풀어주려 우리는 회식을 하지요. 
- 그렇지만……. 
- 과거의 인류께서는 회식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지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회식은 이렇게 정의되어 있지요.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함께 음주가무를 코가 삐뚤어지도록 즐김, 혹은 그런 자리나 모임.’ 일하고 술 처먹어도 회식이고 일 안하고 술 처먹어도 회식이지요. 
- 그렇게 먼 미래에도 술은 인류의 벗으로 남아있군요. 
- 물론이지요. 술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가 쫑나지 않는 이상 킵 고잉하는 것이지요. 
  곱슬머리 연구원 한 사람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 당시의, 아니 후대의, 아니 미래의 양조술을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 …… 물론이지요. 


  그로부터 15초 후. '흥분적 창조'는 유리창을 깨고 도망쳤다. '도망쳤다'기보단 '도망치려고 했다'라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당시 '흥분적 창조'를 모시고 세미나를 열었던 역사적 장소가 라도니아 국립 연구소의 3층 대강당이었기 때문에 - 바로 얼마 전 '창조적 흥분'을 모셨던 바로 그곳이다 - '흥분적 창조'는 골반이 박살난 채 아스팔트 바닥에 처참히 엎어져 신음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엄습하는 고통의 와중에서도 그는 뭐라 몇 마디를 뱉었는데 예의 통역가가 재빠르게 내려가 - 물론 200만 년이나 뒤쳐진 온 과거인으로는 조금 멋쩍지만 엘레베이터를 타고 유유히 내려가 '흥분적 창조'의 말을 신중히도 경청하여 엄숙히도 옮겨주었다. 
- 수…… 술은 없습니까? 


  라도니아 국립연구소의 사람들은 그제야 'I. C. 위너'과 도망친 '드류 P. 위너'의 이름이 꽤나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거시기하게 닮았다. 콧수염을 빼고 안경을 그려 넣어보니 영락없이 드류 P. 위너가 I. C. 위너요, I. C. 위너가 드류 P. 위너이다. 이런 난감할 데가. 그제야 그들은 퍼뜩 200만 년 전의 원시인 '창조적 흥분'과 200만 년 후의 미래인 '흥분적 창조'의 용모파기(容貌疤記)를 구해다가 나란히 비교해 볼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똑.같.다. 

 

   모두가 제 자리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아뿔싸.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을 당하다니! 허나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때 이미 I. C. 위너과 온 몸에 캐스트를 두른 '흥분적 창조'는 사이좋게 사라진 다음이었으니까. 한편 연타석으로 드류 P. 위너(혹은 I. C. 위너)의 음험한 사기수법을 저격한 곱슬머리 연구원은 의기양양한 태도로, 
- 거 봐. 내가 뭐랬어! 처음부터 그 놈은 사기꾼 같았다니까. 
라고 외쳤다. 또한 다시 그제서야 그들은 200만 년 전의 혹은 200만 년 후의 남자를 현실로 데려올 수 있는 '타임머신'이라는 장치가 실재하는지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누구 실제로 본 사람 있어? 모두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드류 P. 위너인지 I. C. 위너인지가 5차원에 양자역학이 어쩌고 웜홀이 저쩌고 했는데…… 어떻게 누구도 그걸 의심하지 않았을 수 있지? 역시 모두가 묵묵부답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이상하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지만 나무에 몰두하다 보면 숲의 실체를 잃어버리는 건 한 순간이다. 라도니아에서 제일 똑똑한 양반들이 모였다는 이 곳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있지도 않은 코끼리의 존재를 믿었고 만졌던 자신들의 아둔함을 탓하며 무거운 한숨을 내뱉던 그들은 뉘엿뉘엿 해가 저물자 연구소 서문 근처의 퓨전 주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하나 둘씩 모였다. 아닌 게 아니라, 회식을 하기 위해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고단할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없이 - 심지어 이유가 없으면 이유를 만들어서 - 회식하는 그들은 이런 이유로 또다시 회식을 하고야 만다. 그리하여, 인류의 회식사는 오늘도 이어진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아주 오랜 후까지.

 

(2007년 10월)

 
(註1) 스웨덴의 설치미술가 라슈 빌크스가 1996년에 세운 사이버네이션(마이크로네이션, 가상국가). 스웨덴 정부가 자신의 설치미술을 철거하려고 하자 일대 토지를 매입하여 자기 맘대로 건국하였다. 당연히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국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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