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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Rien Ne Va Plus, 1997)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0.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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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데리코 펠리니 시절의 사기꾼들은 농부를 등쳐먹고 살았다. 하지만 샤브롤 시대의 사기꾼들은 전국의 학회장 및 세미나장을 돌며 먹잇감을 찾는다. 왜일까? 어리숙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이라서?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베티(이자벨 위페르)와 빅토르(미셀 세로)의 첫번째 목표물은 기업체 고위 간부였고 그 다음 작업 무대로 내정된 '실스 마리아(Sils Maria)'는 치의학 세미나가 예정된 곳이었다. 어리숙하고 만만하고 잘 속기까지 하는 사람이 회사에서 ‘임원급’까지 승진하거나 다른 의사 아닌 ‘치과 의사’가 되었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크지 않아 보인다. 게다가 굳이 학회, 세미나 따위의 공간에 모여든다면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그래도 아직은 빠릿빠릿하게 이재와 타산에 반응하는 사람들이란 뜻일 듯 한데 아무래도 헐리우드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은퇴한 노인네 손목 비틀기와는 느낌이 다르다. 그렇다면 돈의 문제일까? 하지만 사실 그것도 이상하다. 기업체 임원이 아무리 돈이 많아봐야 사장님보다 많을 수는 없다. 치과 의사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봐야 날라리 재벌 2세만큼 펑펑 쓸 수는 없다. 큰 돈을 노린다면 베티와 빅토르는 학회장이 아니라 호화 휴양지나 고급 리조트를 찾아갔어야 옳았다.

  이들 사기꾼 커플에게는 두 가지 눈에 띄는 특징이 있다. 하나는 60대 아버지와 40대 딸쯤 되는 나이 차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기 수단으로의 사칭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칭'이 무지하고 판단력이 흐린 사람들을 속여 넘기는 사칭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동류 의식을 자극하는 쪽의 사칭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보험회사 중역, 대령 등의 구체적 직업을 제시하는 이들의 버릇은 단순히 상대를 안심시키 위함만은 아닌 듯 보인다. 상대로 하여금 "나와 비슷한(혹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구나"하는 공유감을 갖게하는 쪽에 더 가깝다. 그들 나름에게는 보호색인 셈이다. 그렇다면 고급 정보가 오가는 학회, 세미나라는 특수한 공간 설정도 설득력이 있어보인다. 멍청해서 당한다기 보다는 똑똑해서 당하는 것이고 세상 물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아서 당하는 것이다 (물론 이자벨 위페르의 지적인 미모 역시 그 자체로 효과적인 장치일 것이다).

  이야기는 베티와 빅토리가 기존의 활동 범위를 깨고 엉뚱하게도 범죄조직의 검은 돈에 눈길을 주면서 급변한다. 예상치 못한 전개 아래서 선수(베티)와 감독(빅토리) 사이의 긴장이 스물스물 흘러나오고 치열한 수읽기 싸움이 전개된다. 샤브롤 특유의 나른하고도 무심한 화면이 정중동의 미학임이야 말해 입 아픈 것일테다. 분명 느슨한데 속도감이 느껴진다는 것 - 바로 샤브롤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침묵으로 웅변하고 무행동으로 행동하는 샤브롤의 인물들은 그래서 포커 페이스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포커 페이스'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샤브롤의 50번째 작품인 <사기>를 도박판의 모습과 동등하게 읽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고보면 이 작품이 카지노에서 시작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200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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