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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Babylon, 2022)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3.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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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라 랜드(데이미언 셔젤, 2016)’가 20세기 대중문화 르네상스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바빌론’은 그 르네상스가 도래하기 이전의 전설을 조명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려하고 방탕한 문화로 유명하던 클래식 헐리우드가 '죄악의 도시(Wicked City)'로 일컬어지던 고대 바빌론과 종종 비교되었다는 사실로부터 제목을 가져온 만큼, 그 전설의 초점은 정사와 야사를 넘나드는 어두운 이면에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영화란 신비로운 마법으로 빚어진 숭배의 대상이라고 믿는 셔젤이 단순히 소돔과 고모라의 묘사를 위해 일을 벌이지는 않았을 터. 그는 미스버스터스(Mythbusters)가 되어 자신이 생각하는 바빌론의 진짜 모습을 재현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새로 정의 내리려고 한다. 마법의 왕국을 동경하는 젊은 남녀가 우연히 만나며 시작되는 일장춘몽 같은 이야기에서 전작과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 이 작품의 두 주인공 마누엘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와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의 캐릭터는 세바스찬 와일더(라이언 고슬링)와 아멜리아 “미아” 돌란(엠마 스톤)에게 부분적으로 연동되어 있다. 그렇다면 시계를 약 85년쯤 앞으로 돌린, 어두운 버전의 R등급 ‘라 라 랜드’라고 이해하면 되는 걸까? 이 질문의 답은 간단하지 않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플롯이 뒤엉켜 들어가는데 바로 고전 명작 ‘싱잉 인 더 레인(스탠리 도넌 & 진 켈리, 1953)’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즉,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가 실패한 버전의 돈 록우드(진 켈리)를, 그리고 스타덤에 오른 이후의 넬리 라로이(로비)가 더 비참한 버전의 리나 라몬트(진 헤이건)에 대응되는 격이다. 단순히 무성영화 시대에서 유성영화 시대로 넘어가는 해프닝을 공유하는 정도가 아니라 상당 수의 에피소드를 재구성하고 급기야 직접 지칭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넬리 라로이가 독특한 목소리 때문에 녹음에 애를 먹는 장면과 (註1) 잭 콘래드가 첫 유성영화 출연에서 관객들의 혹평과 비웃음을 사는 장면이다 (註2). 하지만 ‘바빌론’의 잭 콘래드는 돈 록우드처럼 타고난 싱어이자 댄서이지 않았고 그에게는 코스모 브라운(데니스 오코너) 같은 좋은 친구나 캐시 셀던(데비 레이놀즈)과 같은 사랑스러운 행운이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시계를 약 20년쯤 앞으로 돌린, 어두운 버전의 R등급 ‘싱잉 인 더 레인’라고 이해하면 되는 걸까? 이 질문의 답 또한 간단하지 않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상기 두 가지 플롯을 연결하는 설계는 아주 불가능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황금기 헐리우드의 이름 모를 드리머(Dreamer)들과 대변혁 시대에 사라져 간 이들의 오버랩은 어쩌면 매혹적인 랩소디로 완성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셔젤은 여기에 너무 많은 것들을 끼워 넣는다. 도입부 와일드 파티 장면의 압도적인 선제 타격에서부터 시대적 맥락을 한참 넘어서는 통찰과 인식까지 단 한 가지도 과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의도적으로 고약하게 생리 현상을 묘사하거나 생리적 거부감을 일으키기를 서슴지 않는 자의식 발현 역시 지나친 편이다. 간혹 ‘피리어드 드라마(Period Drama)’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오늘의 관점에서 현미경을 대고 들여다보는 느낌이 강하지만, 정작 당대의 변혁을 촉진하였던 사회적 배경(대공황, 세계대전, 그리고 텔레비전의 등장 등)까지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분석하지는 않는다. 한편 두 이야기의 사실상 연결 고리인 매니 토레스를 활용하는 일관되지 않은 방식 역시 의아함을 남긴다. 그를 시대의 관찰자로 두며 라로이에 대한 순정을 간직하게 하는 것은 (그때마다 저스틴 허위츠는 관객들에게 ‘라 라 랜드’를 기억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맙소사!) 꽤 적절한 선택처럼 보였는데 어느 순간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면서 혼란을 가중시킨다. 이미 전작들에서 드러난 것처럼 구조, 균형, 대칭 등을 그다지 고려하지 않는 자유로운 전개와 어떤 이야기에 한 번 꽂히면 바로 궤도를 이탈해 버리는 스타일은 마치 꿈의 내러티브나 아니면 재즈의 즉흥연주와도 같아 매력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확실히 부작용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물론 이 190여분에 이르는 롤러코스터 경험이 흥미로움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만약 의도한 결과물이 ‘시네마천국-혹은-라라랜드에서-아티스트와-브로드웨이-멜로디를-따라 사랑은-비를타고-이천일-스페이스-오딧세이’를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도대체 어디서부터 오해가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다. 마침 셔젤의 아이폰에 2시간 분량으로 편집한 버전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하는데 (어째 농락당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 내용과 구성을 확인하고 나면 이 오해를 풀 수도 있을 것 같다.

 

(2023년 02월)

 

(註1) 사실 '싱잉 인 더 레인'이 다루는 이야기 일부는 최초의 사운드 필름인 '더 브로드웨이 멜로디(헤리 보먼트, 1929)'의 제작 과정에서 벌어졌던 해프닝에 바탕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진 헤이건이 연기한 리나 라몬트의 실제 모델도 애니타 페이지로 알려졌다. 그녀는 무성 영화에서 훨씬 나았다는 평을 들었고 실제 자신도 무성 영화 출연을 선호하였다고 한다.

(註2) "I Love You" 대사에 관객이 웃음을 터뜨리는 해프닝은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 존 길버트의 실제 사건에 바탕한 것이었고 피트가 연기한 존 콘래드 역할의 실제 모델 역시 존 길버트라고 알려졌다. 역시 무성 영화 시대에서 유성 영화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를 다루는 또다른 영화 ‘디 아티스트(미셸 하자나비시우스, 2011)’에서 장 뒤아르댕이 연기한 조지 발렌타인 또한 이 남자에 바탕하여 만든 캐릭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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