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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 년의 기다림 (Three Thousand Years of Longing, 2022)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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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연구하는 학자와 이야기에서 튀어나온 정령(Djinn/Genie)의 만남이 쉬울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정령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고 해방되기를 원하지만 학자는 ‘소원 설화’의 상징적 의미와 교훈을 너무도 잘 이해한 나머지 소원 빌기를 원하지 않는다. 학자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현실을 살고 있다며 오히려 정령의 존재와 의도마저 의심한다. 졸지에 트릭스터(Trickster) 취급을 받으며 난처해진 정령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병 속에 갇혀 지내온 3천 년 동안의 사연을 들려줌으로써 학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註1). 그렇게 네 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처음에 그는 시바 여왕을 연모하였으나 솔로몬 왕의 마법에 의해 병 속에 갇힌다(기원전 9세기). 이후 총 세 번의 기회가 있었다. 오트만 제국 슐레이만 대제의 시대(16세기), 무라드 4세의 시대(17세기), 그리고 19세기 튀르키예. 그러니 21세기인 지금까지 병 속에 갇혀 지낸 전체 시간을 다 합하면 거의 3천 년쯤 되는 것이 맞기는 맞다. 이 기간 동안 소원 세 개를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깨끗하게 정산하자는 사례가 없었는데, 거의 2세기만에 찾아온 네 번째 기회가 하필 구비문학 전문가에게 걸렸다는 기구절창할 사연이 되겠다. 그동안 '2만 피트 상공의 악몽’과 ‘4만년 동안의 꿈(조지 밀러, 1997)’ 등 남다른 스케일을 자랑하는 남자 조지 밀러는 A. S. 바이엇의 단편 ‘나이팅게일 눈 속의 정령’에 바탕하여 ‘3천 년의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를 무려 6천만 달러를 들여 완성하였다 (註2).


  학자(틸다 스윈튼)와 정령(이드리스 엘바) 사이의 줄다리기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탐구할 인상적인 기회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여기에 온전히 힘을 싣지 못하는데 아마도 두 캐릭터가 대등한 위치에서 게임을 벌일 수 없다는 근본적 한계가 원인처럼 보인다. 정령의 병'을 소유하는 학자가 당연히 내내 칼자루를 쥐고 있다. 정령은 이야기의 규칙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이지만 학자에게 이야기의 규칙은 객관적 관찰과 연구의 대상이니, 말 그대로 소원을 빌지 않음으로써 이야기의 규칙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 그만이다. 그것이 원인인지 결과인지 모르겠으나 (그럴듯하게 몇 합 겨루는 시늉만 한 채) 중반부를 기점으로 이 흥미로운 가능성을 완전히 접고 결국 다른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 때 장르와 내용과 형식이 크게 한 번 비틀어지는데 아마도 이 지점에 있어 평가 또한 엇갈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무모하거나 과감한 전개는 (정령의) 개인적 경험으로의 이야기나 (학자의) 학술적 대상으로의 이야기를 넘어 더 큰 차원에서의 '이야기'와 그것이 지닌 신비로운 '힘'에 대해 논하려는 포석으로 짐작된다. 심지어 과학기술이 발전한 현대에 이르러, 나아가 앞으로의 사회에서 '이야기'가 지니는 의미를 다루려는 암시마저 내비친다. 마법의 시대에서 출발하여 첨단 기술의 시대까지 포괄하려는 밀러의 야심찬 설계는 충분히 존중할만하지만 사실상 이 모든 내용을 다루는 것은 다소 무리한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 전반부와 후반부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고, 또한 어느 지점은 과부하 상태인데 다른 어느 지점은 거의 진공 상태인 당혹스러운 결과가 도출된다. 일련의 흥미로운 질문들 역시 가득 담아놓기는 하였으나 아쉽게도 대부분은 제대로 다루지도 못한 채 마무리하고 만다. 

 

(2023년 1월)

 

(註1) 학자는 여러 문화권에서 이런 소원 이야기가 하나 같이 교훈적인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욕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혹은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처럼. 정령은 꼭 그렇지 않고 세 가지 소원을 빌어도 괜찮다고 설득할 심산이었는데 정작 그의 과거 이야기들도 비슷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註2) 네 감독의 협업으로 완성된 'Twilight Zone: The Movie (스티븐 스필버그 외, 1983)'에서 조지 밀러는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 '2만 피트 상공의 악몽(Nightmare at 20,000 Feet)'을 영화로 옮긴 세그먼트를 연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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