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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즈 앤 올 (Bones and All, 2022)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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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할 수 있는 분량은 한 사이드에 30분, 45분, 그리고 60분이었다. 그러니까 양 사이드를 가득 채우면 60분, 90분, 그리고 120분이 된다. 딸을 버리고 떠난 비정한 아비가 녹음한 아빠-캐스트(Pa-cast?)는 아마 그리 긴 분량이 아니었을 것이다. 120분 공 테이프는 80년대에 구하기도 어려웠고, 가격도 더 비쌌고, 심지어 잘 늘어나서 쉽게 망가지기도 했다. 그러니 아주 높은 확률로 아빠의 선택은 일반적인 60분 분량 테이프였을 가능성이 크다. 설령 앞면과 뒷면을 가득 채워 녹음했어도 겨우 60분이다. (다행히 징글징글한 광고 남발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딸은 그걸 굳이 조금씩 나누어 듣는다. 그레이하운드를 몇 번 타면서도 워크맨의 배터리가 남아있음을 보면 정말 조금씩 나누어 들었던 것 같다. 요즘 아이들이 긴 분량 컨텐츠에 집중력이 취약하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지만, 워크맨 시대의 18세 소녀를 두고 요즘 아이들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면 소녀는 왜 한 번에 테이프 내용을 다 듣고 확인하지 않았을까? 한편 아빠는 왜 딸에게 남기는 메세지를 굳이 빈센트 프라이스의 라디오 호러 프로그램처럼 녹음했을까? 이 부녀의 이해할 수 없는 장군과 멍군은 티모시 샬라메의 청바지 구멍 크기만큼 큰 의문을 남긴다. 


  카미유 드엔젤리스의 동명 원작 소설에 바탕한 루카 구아디아노의 신작은 같은 비밀을 공유한 소녀 모린(테일러 러셀)과 소년 리(티모시 샬라메)의 만남과 여정을 그린다. 그들의 비밀이란 바로 인육으로만 채울 수 있는 ‘기이한 허기(Strange Hunger)’에 시달리는 것이다. 이제까지 뱀파이어도 있었고, 위어울프도 있었으며, 심지어 좀비도 있었지만 식인 성향을 지닌 존재들의 등장은 영 어덜트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경지가 아닐까 싶어 조금은 당황스럽다. 물론 이 또한 외로운 영혼 사이의 연결과 유대를 이야기하기 위한 또 하나의 상징적 설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여기에서 그들의 식성을 불치병으로 간단히 치환하기만 해도 우리는 앞서 등장했던 수많은 유사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비록 캐니발리즘이 다소 극단적인 소재이기는 하나, 제목이 담고 있는 중의적 의미처럼 이 장르의 핵심 주제와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부분이 있음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註1). 그 결과 (우아한 디졸브가 환기하는) 고전 공포 영화의 정서, 20세기식 로드 무비의 요소, 그리고 21세기식 성장물(Coming-of-age)의 포맷이 혼합되어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했다. 

 

  다만 문제의 ‘기이한 허기’를 다루는 방식은 다소 혼란스럽다. 이들은 (다른 상상 속 크리쳐들과 다르게)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지만 반-사회적인 식인 본능 때문에 사회로부터 용인되거나 사회에 속할 수 없게 된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소년과 소녀는 동질감을 느끼는 서로에게서 이해와 위안을 찾게 되지만 그 결과는 '보니와 클라이드(아서 펜, 1967)'를 연상하게 하는 반-사회적 행위의 가속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뭔가 이상하기도 하다. 반면 이들이 인간 관계와 소속감을 원함에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문제의 갈망에 대해서는 그 발현 기작이나 정도가 묘사되는 방식이 상당히 모호하고 건조한 편이다. (가령 이들은 매 끼 반드시 인간 사냥을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팬케이크도 먹고, 맥주도 마시고, 다른 보통의 음식도 먹는다. 단지 가끔은 '기이한 허기'가 반드시 채워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이 어느 정도의 주기인지는 알 수 없다. 의지로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만약 채워지지 않는 경우 어떤 증상이나 갈망이나 혹은 고통이 동반되는지도 설명되지 않는다. 심지어 개인차마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충동 발현의 결과로 등장하는 식인 장면에서의 묘사는 '탐미'라는 단어를 떠올릴 수 밖에 없을 정도의 과도하다. 이 부분 역시 어떻게 생각하면 말이 되는 것 같지만 또 어떻게 생각하면 뭔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물론 문제의 ‘기이한 허기’가 외로움의 은유라고 전제한다면, 이렇듯 이들의 정체에 대한 설명을 아끼고 베일에 가려진 상태로 남겨두는 선택도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다만 문제는 그 은유가 모든 부분에서 맞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니발리즘의 의미와 상징 역시 항상 일관되지는 않다. 마치 어딘가에 모양이 맞지 않는 작은 퍼즐 조각 하나가 잘못 들어가서 전체 그림을 흐트러뜨리는 듯한 느낌이 있다.

 

(2022년 12월)

 

(註1) 'Bones and All'이라는 표현에는 '(뼈까지) 깨끗하게 남김없이 먹어치운다'는 의미와 그로부터 파생된 '상대의 전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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