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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토어 (Superstore, NBC, 2015~2021) B평

불규칙 바운드/TV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1.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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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브 카렐은 ‘디 오피스(The Office, NBC, 2005~2013)’의 리부트 혹은 리유니언을 열망하는 팬들의 목소리에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저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지만 한편으로는 시대가 바뀌었다는 점을 이해하셔야 한다.” 곱씹어보면 이는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위기를 예감하게 하는 결정적 증거처럼 들린다. 전통적으로 코미디는 사회적 용인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건드리면서 (좋은 쪽이로든 나쁜 쪽으로든)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는데 지난 10년간 달라진 소수 약자들의 목소리에 대한 조명과 포스트 미투 시대의 윤리로 인하여 이 경계가 전례 없이 크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결과 옛날엔 다 같이 웃고 즐겼던 재미있는 조크가 어느 순간에 불편하게 느껴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는 짧은 러닝 타임 안에 주어진 상황에서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웃음을 끌어내어야 하는 시트콤의 기본 플레이북 자체를 무력화시키는 부분이 있다. 


  이 대목에서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지는 이유는 워크플레이스 시트콤이라는 성격 때문이다. 사실 ‘디 오피스’는 평범한 월급쟁이들의 꽤 소박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였고 솔직히 미국판 리메이크는 선을 넘는 유머를 따지자면 그 강도와 빈도에서 순위권에도 들지 못할 정도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쇼이고, 한때 재방송만으로 코미디 센트럴을 먹여 살릴 수준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가장 많은 재생 수를 기록하는 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카탈로그 계약이 종료되었을 때 넷플릭스가 휘청할 정도였다는 소문도 있다). 그럼에도 이렇듯 조심스러운 이야기가 나오는 까닭은 이 쇼에서 벌어지는 주요 사건들이 다름 아닌 직장을 무대로 벌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는 ‘오피스 유머’라는 때로는 부적절했고 때로는 무감각했던 것들을 희화화하는 전략으로 구성되었을지언정 이따금은 그 상황 묘사를 전제하는 자체에 잠재적 위험성이 따라올 수 있는 부분도 물론 있었다. 가령 그 당시에는 드와이트 슈르트(레인 윌슨)의 행동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맞아. 어느 직장에는 저런 괴짜 캐릭터들이 있지"라는 식으로 웃고 넘겼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면 도가 지나친 '직장 내 괴롭힘'처럼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직장 내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의 문제로 직결되는 부분에서는 더 조심스러워진다. 장난꾸러기 지점장 마이클 스캇(스티브 카렐)은 지루한 교육 시간을 모두가 즐거워할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직장 내 성차별과 인종차별에 대한 교육이라면 웃고 넘길 수 없는 일이 된다. 실제 현재 NBC 유니버셜의 자체 스트리밍 서비스 ‘피콕’에서도 몇몇 에피소드는 편집되거나 삭제되어 있다. (물론 다들 짐작하시는 그 에피소드들의 그 장면들이다.) 이쯤 되니 비단 이 TV 쇼의 리부트/리유니언이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워크플레이스 시트콤의 성공 가능성 자체를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으로 보았던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슈퍼스토어(Superstore, NBC, 2015~2021)’의 분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7년 동안 작가로 또 프로듀서로 ‘디 오피스’의 영광을 함께 했던 저스틴 스필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시점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타입의 새로운 워크플레이스 시트콤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딱히 스타 배우가 없었다는 점에 먼저 놀라야겠지만 당장은 현재 시점의 엄격한 정치적 공정함에 대한 요구를 유연하게 녹여냈다는 점이 더 놀랍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전략적 성공이 있어 보인다. 첫째는 무대를 ‘월마트’나 ‘타겟’을 연상하게 하는 ‘클라우드 나인’이라는 가상의 빅-박스 스토어로 설정한 것이다. 평범한 마트 직원들이 일상적인 비즈니스 데이에 겪는 사건들에 대한 묘사는 화이트칼라 직원들이 경험하는 정적인 사무 업무와 분리된 공간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건들의 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하고 개방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익숙한 상품들이 익숙한 모습으로 진열되어 있는 이 공간이 시청자들에게도 친근하게 다가오는 점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배역에 있어 문화적 다양성을 의식한 설정과 배치이다. 라틴계 여성을 중심으로 유대계 남성, 오버사이즈 백인 여성, 장애를 가진 흑인 남성, 아시아계 동성애자 남성, 아시아계 여성, 네이티브 하와이안 등으로 구성한 배역은 사실 상당히 전략적이라 처음에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물론 현실 세계에서 스토어 점원들의 인종 구성이 어떻느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인상적인 그룹 플레이를 통해 성공적으로 물음표를 지워나갈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다음 세 번째로는 상하 관계를 느슨하게 만들거나 전복시킨 선택이다. 주요 캐릭터 중 유일한 중년 백인 남성인 지점장은 극도로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있으며 (코미디언 마크 맥키니의 원래 목소리는 그렇게 징징거리는 톤이 아니다) 상사로의 귄위나 지배력이 제거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던더 미플린 왕국의 스크랜턴 영주처럼 거의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모든 사건에 개입하였던 마이클 스캇의 행동과는 대조적이다. 몇 년 전부터 모큐멘터리 포맷의 유행이 한 풀 꺾인 점도 있지만 이 작품의 이러한 구도를 보면 (상사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카메라에 대고 속내를 드러내야 할 이유가 굳이 없기도 하다. 네 번째는 점원들 중 여성 캐릭터들의 목소리에 무게를 더 실은 부분이다. 조금이라도 솔직하고 직선적이고 경계에 걸치는 유머는 대개 여성 캐릭터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구도를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 스토어 점원들의 성별 비중이 어떻느냐고 반문한다면 역시 할 말은 없다.) 극 속 상황으로 보아도 주인공 에이미(아메리카 페레라)나 다이나(로렌 애쉬)가 거의 상황 주도하는 역할을 하고 시즌이 진행됨에 따라 이들은 실제 플로어 슈퍼바이저나 부지점장 등 높은 직급으로 올라가기도 한다. 로맨스에 있어서도 에이미와 조나(벤 펠드만)의 관계를 누가 리드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하며, 인종과 성별과 교육정도와 결혼 이력 등 인구통계학적 요소를 뒤집는 이들의 사내 연애는 과거 꽤 현실적으로 보였던 짐-팸 로맨스를 마치 페어리 테일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이와 같은 영리한 전략과 다양한 캐릭터들의 앙상블을 통해 ‘슈퍼스토어’는 지난 6년간 성공적인 족적을 남겼다. 여섯 시즌 동안 이어지며 113편에 이르는 에피소드가 제작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성공을 정의하는데 증거가 필요하지는 않을 듯 하다. 요즘은 척 로어, 그렉 다니엘즈, 그리고 마이클 슈어 같은 시트콤 거물들조차 다섯 시즌을 넘게 이어지는 장수 시리즈를 만들기가 여간 쉽지 않기 때문이다.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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