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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후의 동창회

쇼트 펀트 포메이션/쇼트 펀트 포메이션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2.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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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프엠 라디오를 듣자 하니, '십 년 후의 동창회'에 대한 사연이 흘러나왔다. 애교 넘치는 앳된 목소리의 디제이는 분명히 '십 년 후의 동창회'라고 말했다. 우리 나중에 십 년 후 몇 월 몇 일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거다, 새끼 손가락 꼭꼭 걸고 (물론 동창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일일이 새끼 손가락을 걸지는 않는다. 그러려면 꽤나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굳게 굳게 다짐했던 그런 아름다운 (혹은 아름다울법한) 약속들 말이다. 아직도 이런 걸 하는 애들이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아직도 있다는 것이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이는 아직 순진한 초등학생으로 그 장기적 언약이 언젠가는 낭만적으로 실현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글쎄, 그게 쉬울까. 그러고 보니 나한테도 '십 년 후의 동창회'라 이름 붙여진 약속이 있었다. 곧바로 방을 홀랑 뒤집어 엎어서 옛 일기장을 찾았다. 누렇게 색이 바래어진 그 재생공책을 뒤적거리면서 그 옛날 우리의 단순하고 분명하면서도 이유 없이 맹목적이었던 동창회 계획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그 페이지는 언제든지 눈에 잘 띄도록 색연필과 사인펜으로 요란스레 치장되어 있었다. 재빨리 눈을 굴려서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를 확인했다. "2000년 5월 5일 2시 ○○국민학교 운동장" 이런,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런데 만약 내일이라면, 내일이 2000년 5월 5일이라면, 나는 그 '십 년 후의 동창회'에 나갈까? 막상 지났다니 안타까워 하기는 했는데 그러고 보니 잘 모르겠다. 조용히 옛 일기장을 덮고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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