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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퀄리브리움 (Equalibrium, 2002)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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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퀄리브리움’의 레써피는 다음과 같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전설적인 작품 '화씨 451'의 158 페이지를 한 장씩 찢어 불에 태운 다음 재를 내어 모은다. 이것을 채로 걸러 정제수에 희석하고 워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1999)’ DVD를 넣고 휘젓개로 빠르게 저어준 다음 센 불에서 세 시간 동안 끓인다. 이후 건더기를 모두 건져 낸 다음에 다시 홍콩 느와르의 전집 CD을 집어 넣고 한쪽 방향으로 어어주면서 다시 세 시간 더 끓인다. 기름을 걷어내고 상온에서 차갑게 식혀서 단단하게 굳힌다. 마지막으로 깍뚝 썰기를 하여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올리고 ‘아메리칸 사이코(2000)’의 스타 크리스찬 베일을 훌렁 밀어 넣고 소금과 후추를 친 다음에 약한 불로 빠르게 볶아준다. 그러면 완성. 보기에도 맛이 별로일 것 같지만 실제로도 맛이 별로다. 

  '매트릭스는 잊어라'라는 도전적인 카피와 함께 제법 호기롭게 시작한 이 작품의 패착은 궁한 논리와 빈약한 철학을 액션으로 덧칠하여 넘어가려고 했다는 부분에 있다. 자가당착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개개인의 감정이 곧 욕망의 추구와 사회 통합 저해로 귀결된다는 전제 하에 감정을 억압하고 통제한다는 무채색의 제정일치 미래 도시 - 하지만 이 작품은 정작 그 '감정'의 정의와 범위에 있어 치명적으로 빈약한 인식을 드러낸다. 첫째로 취향이나 기호의 유무 혹은 문화생활의 영위 여부(모나리자, 베토벤, 마더 구스 등)가 감정의 인식 여부를 가르는 경계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둘째로 감정의 범위에 대한 규정 또한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이를테면 대부분의 사랑은 감정인 듯 보이지만 어떤 미움과 어떤 질투는 감정이 아닌 것처럼 그려지는 식이다. 셋째로 감정에 대한 인물의 반응을 묘사하는 부분도 다소 안이하다. '감정을 느끼는 자'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자'를 기계적으로 이분하고 후자들을 단지 무표정한 얼굴와 음조없는 대사만으로 표현하는 연출은 썩 정교하지 못하며 결과적으로도 우발적 각성을 통해 반대쪽의 극단으로 치닫은 프레스턴의 차가운 복수극을 미적지근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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