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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카르도 가족으로 산다는 것 (Being the Ricardos, 2021)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1.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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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텔레비전과 영화는 완전히 다른 리그였다. TV 스타와 무비 스타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대접을 받았던 시절이 생각만큼 아주 오래 전이 아니다. 브라운관에서 성공한 스타가 스크린으로 넘어가는 자체가 하위 리그에서 상위 리그로 넘어가는 크게 난이도가 있는 일이었고, 불과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단역이나 아역은 조금 경우가 다르니 제외하고) TV에서 성인 레귤러 롤을 맡아 성공을 거둔 다음에 영화로 넘어가서 톱 스타 반열에 오른 사례가 조지 클루니와 덴젤 워싱턴 등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대개 이는 배우들에 해당되었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TV 시리즈의 크리에이터, 쇼러너, 감독, 작가 등에 대해서도 조금 경우는 다를지언정 마찬가지로 비슷한 중력이 작용했을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구독형 스트리밍 서비스가 텔레비젼과 영화의 경계를 사실상 무너뜨린 시대라서 영화와 TV를 오가는 것이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브라운관을 완전히 정복하고 스크린으로 진군하여 성공한 스크린라이터이자 감독으로 완전히 입지를 굳힌 아론 소킨의 사례는 그래도 특별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일단 에미 트로피 다섯 개를 안고 오스카와 골든 글로브 수집에 나서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겠는가.)  

 

  이번 세 번째 연출작에서 소킨은 50년대의 인기 시트콤 ‘아이 러브 루시(CBS, 1951-1957)’를 둘러싼 한 주의 소동을 소재로 삼는다. ‘아이 러브 루시’는 실제 부부인 배우 루실 볼과 데시 아나즈가 루시와 리키 리카르도 부부로 출연하는 30분 분량의 홈 시트콤이다. 언뜻 이것이 소킨의 입맛에 맞는 주제인지 의아할 수도 있지만 그 문제의 한 주에 벌어졌다는 소동의 내막을 보면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a) 일단 평범한 중산층 가정 주부 루시 역할로 인기 상종가를 올리던 루실 볼이 공산당원이라는 폭로가 나오면서 인기 절정의 쇼가 좌초할 수도 있는 상황 봉착한다. (냉전시대와 그 당시 만연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감안하면 지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큰 사건이라는 설명이다.) (b)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가쉽 타블로이드지가 데시의 외도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현실 부부이자 극중 부부인 그들의 관계 또한 위기에 빠진다. (c) 한편 부부는 루실의 실제 임신 사실을 쇼에 알려야 하는데 이것이 극중 루시의 캐릭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보수적인 방송국 경영진과 스폰서들이 썩 반가워하지 않는 일이다. (시청자들이 임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궁금해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였다는 황당한 설명이 되겠다.) 즉, 이 한 주의 소동은 ‘리카르도 부부’가 되기 위해 오해를 바로 잡고 잘못된 인식과 가치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했던 내용을 담고 있고, 이는 소킨의 대표작들이 다루었던 주제로부터 생각만큼 멀리 있지 않은 이야기일 수 있다. 나아가 구조적인 부분을 보면 더욱 흥미롭다. 이 작품은 TV 역사상 가장 사랑 받았던 커플의 폭풍 같았던 한 주의 쇼 제작 과정을 고스란히 따라가면서 다루는데 (그러니까 테이블 리딩에서부터 리허설을 거쳐서 라이브 관객 앞에서의 녹화에 이르기까지) ‘정신 없고 끔찍한 일주일’을 하루 하루 따라가면서 터져 나오는 사건을 하나씩 헤쳐나가는 전개는 그가 ‘웨스트 윙(NBC, 1999-2006)'을 비롯하여 TV 시절에 매우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다. 특히 ‘스튜디오 60 온 더 선셋 스트립(NBC, 2006-2007)’와 ‘뉴스 룸(HBO, 2012-2014)’처럼 방송 제작을 다루었던 작품들의 선례에서 역동적인 ‘비하인드 더 씬’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 또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화제를 모은 출연진의 훌륭한 연기다. 루실 볼로 분한 니콜 키드먼과 남편 데시 아네즈로 분한 하비에르 바르뎀, 그리고 극중 리카르도 부부의 친구 부부 프레드와 에설로 등장하는 J.K 시몬스와 니나 아리안다 모두 인상적이다. 특히 50년대의 TV 스타로 분한 현재의 무비 스타 니콜 키드먼과 하비에르 바르뎀 모두 실제 인물들과 (전혀) 닮지 않아 미스캐스팅 논란이 있었는데 결과를 놓고 보면 아주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먼저 니콜 키드먼의 변신은 신기하기는 하다.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목소리도 완전히 다르게 들린다. 간혹 톰 크루즈와 키스 어반이 팀으로 나서도 구분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이 있다. 물론 그래도 '아이 러브 루시'의 루시와 닮았느냐면 그건 아닌 듯 하지만, 시트콤 캐릭터 루시만이 아닌 강박적이고 완벽주의 성향의 루실 볼 실제 모습까지를 함께 고려한다면 이 노련한 여배우여서 안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인다. 하비에르 바르뎀 역시 실제 데시 아네즈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지만 (일단 체형부터 완전히 다르다) 중요한 것은 자신감 넘치는 히스패닉계 남성으로의 매력이 흘러 넘친다는 사실이다. 즉 이는 외모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이미지의 총합을 고려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들은 카메라 안에서의 시트콤 주인공 루시와 리키를 재현하기 위한 캐스팅으로는 적절하지 않았을 수는 있다. 하지만 카메라 밖에서의 루실과 데시를 되살려내기 위한 캐스팅으로는 필요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또 결과적으로 그 이미지를 필요한 순간에 성공적으로 전달하기도 하였다.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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