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히어로즈 (Heroes, NBC, 2006~ ) B평

불규칙 바운드/TV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12. 15.

본문

관련 에피소드: Season 1 Episode 23 "How to Stop an Exploding Man"

 

  <히어로즈>의 피터 페트렐리(밀로 벤티지글리아)는 단연 선한 사람이다. 그것도 평균 이상의 좋은 사람이다. 그는 세속적 영달에 치중하는 형과는 달리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숭고한 가치를 추구한다. 직업마저 호스피스다. 피터는 꿈에서 본 환상을 바탕으로 세상을 구하기 위한 믿음을 실행에 옮기지만, 모두가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문제는 특별한 능력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이 작품에서 가장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이 친구라는 사실이다. 세상을 구해야겠다는 사명감은 그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부여받았는데 실상 결정권을 지닌 능력이 없는 셈이다. 물론 그에게 능력이 없지는 않다. 다만 '고유의 능력'이 없을 뿐이다. 피터는 근거리에 능력자들이 있는 경우 그 능력을 똑같이 복제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화해내는 능력을 가졌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하늘을 날 줄 아는 능력자와 만나면 그는 하늘을 날게 된다. 시간 여행을 할 줄 하는 능력자와 만나면 그 역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치유력을 가진 능력자와 만나면 그 역시 치유력을 발휘하게 된다. 장단점의 무게 비교는 앞으로의 전개 양상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겠지만, 어쨌든 제어력을 갖추지 못하는 이상은 가장 실속이 없는 능력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어느 능력자보다도 먼저 소명을 인지했지만 독자적으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설정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쓰러운 피터의 능력이 이 이야기의 빌런 사일러(재커리 퀸토)의 악함에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사실이다.


  피터의 거울상인 사일러는 일종의 구조 분석력을 지녔다. 그는 두개골을 잘라 능력자를 죽이고 그 뇌의 구조를 이해하면 상대의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친다. 그리고 실행에 옮긴다. 특별한 능력이 특별한 뇌구조에 기인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어쨌든 사일러 자신은 그걸 내추럴 셀렉션(자연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우승열패(優勝劣敗). 즉, 능력을 가질 가치가 없는 열등한 존재들로부터 빼앗아 자신을 우등한 존재로 진화시킨다는 것이다. 사일러의 논리는 원능력자인 상대와의 공존이 불가능함을 전제로 한다. 상대의 소멸을 통해 능력을 체화하니, 해당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한 사람 뿐이다. 하지만 피터는 (실은 자기도 원치 않는 사이에) 남의 능력을 복제해 내기 때문에 원능력자인 상대와의 공존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해당 능력을 가진 사람이 둘이 되는 상생의 방식으로 공동의 진화가 도모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식의 싸움이 제어 없이 연속적으로 진행된다고 예상해보면 어떨까? 아마도 종래에 살아 남을 수 있는 능력자는 피터와 사일러 단 두 사람만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포커 게임을 가정해보자. 여럿이 포커게임을 하는데 한 사람은 남의 패를 강제로 빼앗아올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남이 가진 패를 무조건 똑같이 복사해서 들고 있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결과는 뻔하다. 전자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후자뿐이다. 결국엔 바로 그 둘이 마지막까지 테이블을 지키고 앉아 있을 수 있는 플레이어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신화 속의 영웅들이 세 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고 강조했다. 소속된 과거로부터의 이탈(1단계), 힘의 원천에 대한 통찰(2단계), 자아 발견을 통한 귀향으로 세계를 구원(3단계). 피터는 과거로부터 이탈하는데 많은 혼란을 겪었고, 힘의 원천을 통찰하고 제대로 발휘하는 방법을 배우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무수히 꿈을 꾸었고 소위 말하는 ‘요나의 뱃속’에도 수도 없이 들어갔다가 나왔다. 반대로 사일러는 이 두 단계를 가뿐하게 뛰어 넘었다. 달리 갈등할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힘의 원천을 부여받은 무체적, 영적 능력이 아닌 상대의 '뇌'라는 실체적, 해부학적 분석 대상으로 이해하는 사일러의 관점에선 윤리적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피터의 의문은 근원적인 확신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그가 영웅인지, 아니면 영웅이 아닌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카드놀이의 비유를 계속해보자면 이렇다. 테이블 위의 어떤 카드 하나가 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폭탄이다. 당장 터지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시점이 되면 터진다. 테이블에 둘러 앉은 모든 플레이어의 생명이 달린 문제다. 누구도 무엇이 문제의 카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판은 돌아간다. 충분한 시간이 흘렀을 때 폭탄 카드를 들고 있는 것은 아까 말했듯 끝까지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두 사람 - 피터 아니면 사일러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일러는 그게 자기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피터는 그렇지 않다. 자기 때문에 뉴욕이 폭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번뇌를 안긴다. 자신만 희생하여 게임을 끝냄으로써 폭발을 막을 수 있다면 아마도 피터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피터는 자기가 세상에 선한 영향을 미칠지 악한 영향을 미칠지 잘 모르는 상태의 선(Good)이다. 사일러는 스스로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설사 악하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악(Evil)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이 이야기는 점점 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로버트 스티븐슨, 1886)'의 선택을 연상케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07년 12)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