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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리갈 (Boston Legal, ABC, 2004-2008) B평

불규칙 바운드/TV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6.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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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에피소드: Season 2 Episode 1 "Black Widow," Season 2 Epsiode 7 "Truly, Madly, Deeply," Season 2 Episode 3 "Finding Nimmo" 외 다수

 

  데니 크레인은 말한다.

자네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줘.
그게 재판과 인생에서 모두 승리하는 비결이라네.
(Pull a rabbit out of your hat. That's the secret both to trial law and life.)

 
  앨런 쇼어(제임스 스페이더)는 40대 백인 남성이고, (심정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며 변호사이다. 데니 크레인(윌리엄 샤트너)은 70대 백인 남성이고, (심정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하며 변호사이다. 앨런이 다른 로펌에서 사고치고 쫓겨 온 평직원인데 반해 데니는 '크레인, 풀, 앤 슈미트'의 설립 기명 이사이다. 데니는 가난이 개인의 무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앨런은 오히려 시스템의 결함이 가난의 씨앗이라고 생각하여 사회보장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앨런은 자기가 거대 로펌에서 몇 억불 연봉을 받는 스타 변호사일지언정 어렵고 약하고 딱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데니는 그렇지 않다. 데니는 개인의 총기 소지를 당연히 허가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하지만 앨런은 총기 그 자체에 반대한다. 앨런은 명분 없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지만 데니는 가끔은 명분없는 전쟁조차 국가를 위해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의 공통점은 딱 세 가지다. 상류층 백인이라는 것. 변호사라는 것 (혹은 그 사실을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몹쓸 바람둥이라는 것. 앨런은 한 번, 데니는 자그마치 일곱 번을 이혼했다. 비록 나이로는 삼촌과 조카뻘이지만 아름다운 여성을 탐지하는 이들의 가공한 레이다망은 그야말로 상한과 하한이 없이 공통으로 돌아간다. 분명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처럼 세대도 다르고, 지위도 다르고, 관점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이 두 남자의 사이에 어떻게 '우정'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우정'을 정의하기에 전제도 많고 제약도 많은 우리 관점에서는 아무래도 그런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시리즈의 난리굿을 주도하는 앨런은  데이비드 E. 켈리의 자기 패러디 총체다. 적당히 부정하고 적당히 정의로운, 적당히 천박하고 적당히 이지적인, 적당히 영웅같고 적당히 사람다운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서 있는 법정을 무대로 만들고 깜짝쇼를 진행한다. 뻔뻔스레 궤변을 쏟아내어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어놓고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원점으로 돌아와 진지하게 시침을 떼는 그의 변론술은 가히 이 시리즈의 백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앨런의 상사이자 대선배이자 멘토이자 친구인 데니는 한술 더 떠서 "모자 안에서 토끼를 꺼내어 보여주게. 그게 재판과 삶에서 모두 이기는 비결이야" 라고 주장한다. 데니는 젊은 시절 명민하고 날카로운 전설적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허풍으로 가득 찬 노쇠한 변호사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광우병까지 걸려 기억력마저 엉망진창이다. 그런데도 변호사 노릇을 잘 만하고 있으니 그 또한 우스운 일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데니 스스로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판단과 기억이 무너져가는 자신을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데니의 기행은 희미해져가는 영광을 붙들어두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말 끝마다 '데니 크레인, 데니 크레인'하고 자기 이름을 주문처럼 읊어대는 것 역시 일종의 자기 암시다. 그 이름 안에 담겨 있는 과거의 명성과 화려했던 전설을 잊고 싶지 않다고 질러대는 비명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

  감히 단언하자면 '보스톤 리갈'은 이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한 쇼다. 어쩌면 처음에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와서는 분명 그렇다. 앨런과 데니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무슨 '맨 인 블랙'의 요원들이나 되는 양 나란히 거리를 활보하던 순간부터, 손에 손을 맞잡고 블루스를 추던 때부터, 플라멩고 복장을 하고 법정에 나타나 쇼를 펼치던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이 두 남자가 서로의 과거이자, 서로의 미래로 아주 끈끈하게 묶여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둘이 굉장히 닮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완전히 다른 세대, 다른 지위, 다른 관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닮았다는 얘기다. 이유가 뭘까? 앨런과 데니를 통해 흐르는 피가 미국 백인 남성 모두의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보스턴, 그 중에서도 당해업계인 로펌과 법정 바닥에서 흐르는 것이었기 때문일까? 

  이 작품이 보여두는 앨런과 데니의 극적인 대비와 교감은 오늘날 미국사회가 직면한 고민과 한계, 그리고 불안과 위기를 폭로하는 탁월한 밑그림이다. 이러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법정 시리즈물의 거장 데이비드 E. 켈리는 보스턴에서 가장 큰 로펌 중의 하나로 무대를 설정한다. 과거 'The Practice: Boston Justice (1997~2004)'시절처럼 매달 월세도 지불하지 못하면서 정의감으로 충만한 이상주의자들의 작은 회사가 아닌, 연봉으로 우습게 몇 억불씩 받는 소위 '잘 나가는 변호사들'이 모인 거대 로펌. 당연히 주 고객은 거대 기업과 전문직, 부유층, 그리고 셀러브리티들이다. 화려한 성공, 돈, 여자, 명예. 거대 로펌으로 옮겨온 무대는 법정에서 소수의 권익을 보호해야 할 장본인들이 거대 기업의 일원으로 세속화되어 버린 현실을 보여준다. 물론 때때로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기본적 양심과 권리를 위해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기업화된 그들’의 고객은 독점과 담합과 책임회피로 무장한 또 다른 기업이다. 진실과 정의를 '고객'을 위해 덮어야 하는 일은 더 이상 한 줌의 고민거리도 되지 못한다. 더 이상은 정의도 숭고함도 없다. 그리고 쇼에는 끝이 없다. 거짓과 세속됨, 그리고 궤변만이 변호사로서의 성공을 보장한다면, 그들은 기꺼이 그 길을 택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 일을 무감하게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앨런과 데니는 매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마천루의 발코니에 앉아 성공의 전리품인 값비싼 와인을 마시고 고급 시가를 피우며 둘 만의 대화의 시간을 갖는다. 조금은 알쏭달쏭한 이야기다. 어떤 면에서는 후회나 반성처럼 들리기도 하고, 회의와 자조가 느껴지는가 하면, 허풍과 허세처럼 들리기도 한다. 앨런의 생각과 데니의 생각은 비슷할 때도 있고 다를 때도 있다. 앨런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중추를 짊어지고 있는 세대를 대표하고 데니는 이젠 한발 물러선 과거 세대를 대변한다. 둘의 대화는 곧 세대간의 생각 차이를 미묘하면서도 노골적으로 암시한다. 하지만 앨런과 데니가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같은 이상을 단지 다른 방법으로 꿈꾸고 있을 뿐이다. 상식과 원칙은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지 않는다. 꿈과 이상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광대놀음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오늘 현실의 이슈와 사건들은 앨런의 기준으로도 데니의 기준으로도 봐도 문제다. 이 시리즈는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앨런과 데니의 우정 혹은 유대는 그래서 중요하다. 어쩌면 앨런 쇼어의 30년 후는 데니 크레인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데니를 변하게 만들었던 시간의 무게는 앨런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될 것이다. 앨런 또한 보수적이고 완고한 노인이 되지 않으리란 법 없다. 아마도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서서히 자리바꿈하며 돌아가게 될 것이다. 지금은 데니와 앨런이지만 나중에는 앨런과 그 다음 세대의 누군가로, 또 그 다음 세대의 누군가로……. 고요히 반짝이는 별과 밤 이 내린 발코니에서 역사는 이어질 것이고 그들의 꿈도 함께 보전될 것이다.

 

(200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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