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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의 번역가 (Les Traducteurs, 2019) B평

불규칙 바운드/영화와 B평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2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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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터리 베스트셀러 ‘디덜러스(Dedalus)’ 트릴로지 (註1). 그 마지막 세 번째 작품의 전세계 동시 출간을 앞두고 출판사는 번역서 준비를 위해 9개국 번역가를 한 곳에 모아 초호화 시설을 갖춘 지하 벙커에 격리한다. 원작은 프랑스어로 씌여졌고 출판사는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스어, 러시아어, 그리고 중국어(만다린) 번역을 추진한다. 전 세계 동시 출간의 핵심은 당연히 철통 보안인 법. 따라서 출판사는 번역가들의 전자 기기 반입을 제한하고 전화와 인터넷을 막아 완전히 세계와 단절시킨다. 무장 경비를 세우고 폐쇄회로 카메라를 이용하여 감시한다. 또한 일정에 맞추어 하루 30 페이지씩만 원고를 나누어주고 매일 저녁 번역 작업 내용을 함께 회수하는 꽤 철저한 조치를 취한다. 그럼에도 온라인상 원고 공개를 빌미로 돈을 요구하는 협박이 시작되고 출판사에서는 원고를 접한 9명의 번역가들 중 범인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 자체 조사에 나선다.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 (2013)’와 ‘오리진 (2017)’을 둘러싼 전 세계 동시 출판 작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이 작품은 놀랍도록 지루하고 답답하다. 나름대로는 아가사 크리스티적 상황 구현을 의도하였던 것처럼 보이지만 단순히 밀실에 사람만 모아놓았다고 '쉬스팽스'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서는 산재되어 있고 구성은 산만하다. 잦은 트위스트는 짜릿하기보다는 짜증스럽다. 범인을 찾는 것보다 차라리 바벨탑을 쌓는 것이 빠르겠다 싶을 정도이다. (바벨탑이 완성되면 전 세계 동시 출간은 걱정할 일도 아니다. 그저 제 2의 댄 브라운만 찾으면 되니 얼마나 일이 간단해지는가.) 설정 또한 곳곳에서 결함을 노출한다. 어느 정도의 제한적 격리까지는 모르겠으나 초호화 지하 벙커가 등장하는 것부터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도대체 어느 정도 베스트셀러여야 지하 벙커 격리와 무장 경비 배치가 정당화될까? 백번 양보하여 그럴 수 있는 규모의 사업 프로젝트라고 치자면 나머지 디테일들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아홉 번역가들의 면면 역시 물음표를 지우기 어렵다. 무엇보다 거의 무작위로 모인 기차 승객들에 가까워 보인다. 전직 저널리스트에서 히피를 거쳐 가정주부와 소설 속 여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미스터리한 여성까지. 전 세계적으로 크게 성공하였다는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문학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충족한) 대단한 작품에 이미 두 번이나 참여했던 번역가들의 모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들 캐릭터를 활용하는 방식도 그리 영리하지는 않다. 영국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그리스인, 러시아/슬라브인, 중국인이 모여있으니 서로 다른 기질과 특징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인데, 그나마도 <먼 나라 이웃나라>식의 낡은 스트레오 타입의 반복이라 별로 흥미롭지 않다. (그런 맥락에서 각자의 작업 책상 위에 탁상용 국기를 올려놓은 점도 실은 상당히 우스꽝스럽기는 하였다.) 또한 하필 이들이 다름 아닌 번역가이다 보니 이미 모국어 외에 프랑스어를 공통으로 사용하여 서로 간의 언어적 장벽도 그리 재미있는 장치가 되지 못한다.    


  처음에는 ‘더 매트릭스 (워쇼스키 형제자매, 1999; 2003; 2003)’의 메로비지언(랭버트 윌슨)과 유명한 여배우(올가 쿠릴렌코) 한 명 나오는 작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등장하는 배우들 대부분이 각자의 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배우들이라고 한다. 주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국적만 10개국에 달하며 극 중 인물과 배우의 국적 또한 거의 일치하도록 캐스팅하였다 (쿠릴렌코가 우크라이나인이고 그녀가 연기한 카트리나 아니시노바가 '러시아어 번역가'일 뿐 러시아인이라고 언급된 적은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뭐 어쩌면 블라드미르 푸틴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그러니까 가상의 베스트셀러 '디덜리스' 이전에 이 작품 자체가 생각보다 훨씬 큰 규모의 글로벌 프로젝트였던 셈인데 그 풍부한 문화적, 언어적 재료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2022년 11월)


(註1) 디덜러스는 그리스 신화 속 건축가로 이카루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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