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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7. 하객전쟁: 얼터너티브 엔딩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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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식은, 14시 정각에 시작되었다. 토요일도 출근해야 하는 하객들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식이 시작하자 사회자는 하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소개시켰다. 얼마나 품격있는 자리인지를 모두에게 분명히 각인시키기 위한 일종의 쇼라고 볼 수 있었다. 유명한 실업가이자 장차 나의 장인이 되실 양반이 소개되었고 이어 유명 사립고의 교감이자 장차 나의 장모가 되실 양반이 소개되었다. 이어 장차 나의 처제가 될 세 아가씨가 소개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개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이어 장인 되실 양반과 사회적 역학 관계가 있는 양반들이 줄줄이 소개되었다. 이어 장모 되실 양반과 사회적 역학 관계가 있는 양반들도 줄줄이 소개되었다. 이어 장인 되실 양반에게 실제적 혹은 심리적 채무를 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양반들이 줄줄이 소개되었고, 마찬가지로 장모 되실 양반에게 실제적 혹은 심리적 채무를 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양반들도 줄줄이 소세지마냥 줄줄이 소개되었다. 그제야 드디어 장차 나의 신부가 될 아가씨 본인의 관계자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일곱명의 은사와 스물 일곱명의 초등학교 친구와 서른 여덟명의 중학교 친구와 마흔 세명의 고등학교 친구와 예순 다섯명의 직장 동료와 여든 일곱명의 교회 친구와 아흔 일곱명의 대학 친구가 차례대로 자리에서 일어 로봇처럼 인사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거짓말 하나 보태지않고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아, 자기야,

자길 사랑하지만 이건 좀 아니잖니?

*



  더욱 비극적인 것은 신랑측 (이렇게 3인칭으로 말하면 다소 위안이 된다)에는 달랑 일곱명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없이 친구만 달랑 일곱인데 하객만으로 '심즈 (Sims)' 세계 하나를 만들고도 남을 기세인 신부측에 비하자면 초라하기가 그지 없다. 그나마 나은 놈이 양산박이라고 모 방송국에서 FD를 하는 놈이다. 눈치챌 사람 없을테니 그냥 PD로 소개하기로 퉁쳤다. 사회자가 그를 소개한다.
- 신랑 친구 양산박 군입니다. 현재 서울방송에서 PD로 일하고 있습니다.
  신부측의 저명한 인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FD 주제에 녀석은 절도있게 일어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실은 이제부터가 문제다. 초대졸 차례인데,
- 다음은 신랑 친구 초대졸 군입니다. 레벨 17, 스나이퍼. 신랑과 함께 <충격과 공포> 길드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다음은 신랑 친구 가성비 군입니다. 역시 <충격과 공포> 길드의 멤버로, 소서러스. 레벨 16을 찍고 있습니다.
- 다음은 신랑 친구 지대공 군입니다. 역시 <충격과 공포> 길드의 멤버로, 바바리안. 레벨 15를 찍고 있습니다.
  어리둥절하던 하객들은 하나둘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웃음은 전염되는지 웃는 사람들을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웃던 사람들은 더 크게 웃었다. 처음에 박자를 놓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과장된 리액션으로늦은 이해를 만회하려했다. 누군가 외쳤다.
- 신랑분이 정말 좋은 길드에 계시는군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신랑측 하객 일곱 중에 여섯이 온라인 게임 길드원이라니. 게다가 변변한 직장도 없는 만년 취업 준비생들이라니. 짜식들이 없으면 없는대로 꾸며 쓰기라도 할 것이지 눈물 날 정도로 솔직 담백하여 기어코 내 얼굴에 타르를 펴바른다.

  아아! 이거야말로 팀 킬이 따로 없구나.

*



  안돼! 역세권은 괴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알고 보니, 꿈이다. 다행이다. 휴, 한숨을 몰아 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결코 꿈이어서 다행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그의 신부가 될 소민은 성격 좋기로 유명했다. 나쁜 의미에서 좋은 성격이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좋은 성격이다. 좋은 성격만큼 당연히 친구도 많았다. 그냥 친구가 많은 게 아니라 '유효 친구'가 많았다. 친구라고 다 친구가 아니다. 태권도에서 상대를 때린다고 다 유효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그녀는 청첩장이 넉넉히 잡아 1,000매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체 많기로 유명한 친구들(초등/중등/고등/대학/교회/동네), 동료들(현 직장/전 직장), 은사들에다가 어머니쪽 관계자들과 아버지쪽 관계자들을 모두 합치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00매는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런지도 몰랐다. 아주 가까운 시일 내에 그의 처가가 될 댁은 집안 좋기로 유명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사립학교 교감이자 교회 집사고 그녀의 아버지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업의 대표 이사다. 그녀는 그에게 자기쪽엔 '몇 매'나 필요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뢰매'가 필요하겠다고 대꾸했다. 그녀는 하나도 안 웃기다고 말했다. 실은 그도 재밌다고 생각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단지 답이 안나오기에 둘러대었던 것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랑측’에는 50매까지도 필요없었다. 어디에 나눠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자기 결혼식에 나타날만한 얼굴 오십 개를 머릿속으로 떠올릴 수가 없다. 운이 좋아 50명을 꾸역꾸역 채워도 ‘신부측’보다 하객이 훨씬 적은 티가 날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300매쯤은 필요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말했다. 그날로 1,300매의 청첩장이 며칠 전 밤을 새워 고른 단정한 도안과 정갈한 문구에 맞춰 인쇄에 들어갔다. 그 스스로 봐도 참, 하단의 계좌번호로 당장 입금하고 싶어지는, 그런 고급스러운 청첩장이었다.

*



  전구체씨 차녀 소민양. 역발산씨 장남 세권 군. 어버이 가리신 바이오 서로 백년을 함께할 뜻이 있어서 이제 어른과 벗을 모신 앞에 화촉을 밝히겠사오니 부디 오시어 양가에 빛을 베푸소서.

5월 30일 을밀대 동문회관 (냉면 개시)
주례 (영화배우) 복지병 재배

계좌번호: 단풍은행 123-45678-7979 / 예금주: 전구체

*


  하긴 처음부터 '균형'을 기대할 수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피붙이 하나 없는 고아 출신인 그와 좋은 집안에서 넉넉하게 잘 자란 그녀의 환경이 같을 수는 없었다. 지방대학을 나와 평범한 증권사 평범한 말단자리에 간신히 비벼 들어간 그와 일류대학을 나와 끈 없으면 찔러도 못본다는 일류직장에 안착한 그녀의 환경이 같을 수는 없었다. 사실 식을 올리게 된 것조차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 집안의 반대를 생각하면 확실히 그렇다. 언젠가 그녀 아버지가 그에게 보여주었던 대단한 예비 사위 후보군 목록을 기억하자면 확실히 그렇다. 자수성가를 거듭해 오늘의 지위까지 오른 그녀의 아버지가 왜 자길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목숨걸고 가족을 설득해내는 그녀 옆에서 그저 수줍게 머리를 긁적였을 뿐이다.

  하긴 이 결혼, 어쩌면 처음부터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았을런지도 모른다. 청첩장을 네자리수로 찍어야 하는 신부가 세상에 몇이나 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주례 고사하기로 정평이 난 노배우 복지병을 만사 제치고 달려오게끔 만드는 신부 아버지가 세상에 몇이나 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텔레비젼에서나 보던 사회 저명인사들을 딸 결혼식에 줄줄이 전시해 놓을 수 있는 신부 아버지가 세상에 몇이나 되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어차피 하객의 질과 양에서 그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녀 집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 입 거리도 안되었다. 그래도 최소한 정족수는 채울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눈, 다 눈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 미래 장인 장모의 체면은 접어두더라도 이 결혼을 흥미롭게 바라볼 수백 수천개의 눈이 하객이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 모인다. 소셜 클래스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보이는 이 결혼은 가뜩이나 그 돼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 분명했다. 그런 마당에 꿈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신혼집도 못 해가는 주제에 레벨 17의 스나이퍼를 친구라고 소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친구 중 그나마 '부끄럽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양산박 FD에게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시사/교양으로 분류되지만 실은 가십성 오락프로그램의 FD를 맡고 있는 친구는 그에게 결혼 하객 대행 서비스라도 받아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워낙 핵가족 시대에, 사람들도 워낙 바쁜데다가, 얕고 지엽적인 관계 형성도 많아져 그런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고도 했다. 프로그램 취재 때 받아두었던 것이라며 명함까지 건네주었다. 업체마다 다르지만 두당 4만원 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세권은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로 신부측 예상 하객에 맞추려다간 통장이 먼저 거덜나겠단 생각에서다.
- 정말 이렇게 무의미한 쪽수 대결까지 해야하는 걸까? 그깟 남의 눈 때문에?

*



  친구가 건네준 명함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아본 세권은 그 중 <렌트-어-메모리>라는 업체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세 가지 점이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첫째,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값이 다른 업체의 10분의 1 수준이다. 두 당 4천원.
둘째, '남의 결혼식에 한 번이라도 참석한 적이 있는 하객이 당신 결혼식에 제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주장한다.
셋째, '예식 3일 전에 신청해도 알바 동원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밖에도 10회 이용시 1회 서비스라는 점도 구미가 당겼지만, 음 그건 글쎄…….

  사장은 눈이 부실 정도의 대머리에 송충이보다 짙은 눈썹을 가져 기묘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세권은 최대한 침착하게 자신이 최근 느끼는 공포와 불안, 회의와 환멸, 그리고 말도 못할 압박감에 대해 설명했다. 며칠 전의 그 악몽 이야기도 소상히 곁들였음은 물론이다. 이야기를 듣더니만 사장은 하하하하, 호탕하게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 식장에서 하객 전원을 일일이 소개시켰다고요? 한 명도 빠짐없이?
- 그러니까 개꿈이죠. 그런데 결혼만 생각하면 입맛이 달아나는 게 사실입니다.
- 실제로는 몇 분 정도 올 것으로 예상하십니까?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 스무명 정도입니다. 직장 동료들이랑 친구 몇 명이 전부입니다.
- 신부 되실 분 쪽은요?
- 솔직히 육칠백명 온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네요.

  이제 정말 궁금했던 걸 물을 차례다.
- 그런데 어떻게 하객 알바가 다른 팀이랑 중복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들 아닌가요?
- 간단합니다. 한번 쓰고 폐기하거든요.
- 폐기요? 사람을요?
- 아니죠. 우린 사람을 안 써요.
  어쩐지 오싹한 느낌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 사람을 안 쓰면…… 뭘 쓰나요?
- 궁금한가요? 그럼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여기 각서에 서명을 먼저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보고 들은 모든 걸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는 내용입니다. 위반시에는 법적으로는 물론, 편법적, 위법적, 탈법적, 초법적 차원에서 저희가 책임을 묻더라도 일체 수용하셔야 함을 명심해주십시오. 

  세권이 대충 흩어보고 쓱싹 사인을 하자 주인은 그를 안쪽의 큰 홀로 안내했다. 호텔급 결혼식장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광경에 그는 입을 딱 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장 여기서 예식을 올린대도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필요한 모든 설비가 갖춰진 상태였다. 

*



  사장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를 지하실로 데려갔다. 이런! 그 아래에는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수트 차림의 허수아비가 양팔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동남아쪽으로 추정되는 아주머니들이 허수아비를 만들다말고 재빨리 샛방으로 숨어 들어갔다. 사장은 정확히 말레이시아 출신 미등록 이주 노동자라고 영업 비밀을 귀띔해주었다.
- 이게 다 뭔가요?
- 당신의 하객들입니다.  
- 어떻게요? 이건 그냥 논에 있는 허수아비 아닙니까?
- 직접 보여드리죠.

  사장이 손짓을 하자 검은 수트에 검은 선글라스를 낀 검은 피부의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 이 친구가 인솔 매니져입니다. '미스터 블랙'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미스터 블랙이 가볍게 목을 숙여 인사를 해보였다. 미스터 블랙이 짝짝 박수를 두 번 치자, 허수아비들이 느릿느릿 1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세권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는데, 사장이 그를 일으켜 세워 1층 홀로 올라가보도록 권했다. 그와 사장과 미스터 블랙이 다시 1층 홀에 도착했을때 이미 허수아비들은 열 맞춰 자리를 잡고 있는 상태였다. 

  미스터 블랙이 짝짝짝 박수를 세 번 치자, 허수아비들은 신랑측 접수대에 몰려가서 축의금을 내고 방명록에 이름을 적었다. 몇몇은 같이 오기로 한 두꺼비, 꾸러기, 삼식이가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해 축의금만 계좌번호로 송금하겠노라 전해달라고 했다나 뭐라나 그런 말을 접수원에게 건넸다. (두꺼비, 꾸러기, 삼식이가 도대체 누군데?) 

  미스터 블랙이 짝짝짝짝 박수를 네 번 치자, 허수아비들은 꾸역꾸역 식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더러는 딴짓을 하고 더러는 졸아서 더더욱 실감나는 광경이었다) 미스터 블랙이 짝짝짝짝짝 박수를 다섯 번 치자, 허수아비들이 일제히 팔을 높이 들고 "대한민국!" 목이 터져라 샤우팅을 했다. 

  미스터 블랙이 짝짝짝짝짝짝 박수를 여섯 번 치자 허수아비들이 꾸역꾸역 식장을 빠져나와 2층으로 올라가 줄서서 갈비탕을 받아 먹기 시작했다. 더러는 쟤는 고기가 두 점인데 왜 나는 한 점이냐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고, 더러는 우리가 빨리 먹고 빠져줘야 다음 팀이 올라온다고 남의 식사에 간섭하기도 했다.
- 와! 이건 정말 상악골과 하악골이 절로 벌어질만큼 놀라운 광경이군요.
  사장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 이게 바로 우리 업체의 비결입니다.
- 그렇지만 누가 허수아비인줄 알아보면 어떡하죠?
- 못 알아봅니다. 그 복잡한데서 누가 알아봅니까. 모두 수트를 입혀놔서 벗기기 전엔 아무도 몰라요.
- 누가 이름이라도 물어보면 어떡하죠?
  사장은 왼손으로 딱 소리를 냈다.
- 그게 바로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여기 이름표하고 압핀이 있어요. 앞면엔 이름하고 나이를 쓰고 뒷면엔 당신과의 관계와 직업을 쓰는 겁니다. 잘 적어서 하나씩 달아주면 얘들이 거기에 맞춰서 연기를 합니다.
- 그게 되나요? 말이?
- 됩니다. 되니까 장사를 하는 거죠.
  세권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이름표를 하나 받아들어 이렇게 적어 넣고 허수아비에게 달아주었다.

이름: 김철수
나이: 32
직업: 변호사
관계: 고교 동창
특이사항: 엉덩이에 몽고반점


  원하면 시험해보라는 듯 사장이 윙크를 했다. 그는 허수아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 당신 이름이 뭡니까?
  허수아비가 살짝 망설이더니만 주둥이를 벌려 이렇게 대꾸했다.
- 김철수다, 김철수. 니 고딩때 친구다. 짜식아.
  와! 이거 정말 놀랍다. 

*



  세권은 <렌트-어-메모리>와 하객 대행 계약을 맺기로 결심했다. 두당 4천원이면 햄버거 세트 하나 값이다. 보통 알바를 사는 것보다 훨씬 쌌다. 게다가 사람 알바처럼 사고 치고 다닐 일도 없다. 이백마리, 아니 이백명만 사자. 부담이 적은 건 아니지만 일생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이 아닌가. 

  사장과 '미스터 블랙'은 그에게 이름표 200개와 압핀 200개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허수아비 하나 하나에 이름표를 달아주었다. 이름표 안에는 5만원짜리 지폐를 하나씩 넣어주었다. 자기 결혼식에 신랑측 축의금으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든든한 하객들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설레이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의사, 치과의사, 한의사, 변호사, 교수, 변리사, 사업가 등 부모에게 잘 세뇌당한 초등생 아이들이 장래희망으로 삼을만한 직업을 싸그리 적어보았다. 꼭 비디오 게임 캐릭터를 만드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의 결혼식에는 아는 의사, 아는 치과의사, 아는 한의사, 아는 변호사, 아는 교수, 아는 변리사, 아는 사업가 등등 부끄럽지 않은 하객들이 찾아오게 될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자신감도 붙었다. 미래의 장인 장모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기세를 몰아 끝까지 가보자! 

  하지만 이름표 오십개쯤 만들고 나니 생각이 막혔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직업이 이렇게나 적었던가? 또 뭐가 있을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미스터 블랙이 허수아비 하나를 안고와서 그에게 서툰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방금 그가 적은 이름표를 가리키면서 말이다.
- 헤이, 이고 니가 저군고얌?
  자세히 보니, 아뿔싸!

이름: 성기사
나이: Lv.19
직업: 팔라딘
관계: 어둠의 던젼 3층에서 만나 봉인 두루마리를 찾기까지 동고동락
특수기술: 셀루미네이션 라이트닝 에센스 (a.k.a. 양가에 빛을 베푸소서)


  에이 씨! 온라인 게임 끊던가 해야지, 정말.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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