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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 친구에게: 푸에르토리코에서 보내는 편지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8. 1. 6.

본문

사랑하는 나의 친구 소유석 (So, You Suck) 군에게,

정말 오랜만이다. 지금 이 형님은 여기 푸에르토리코에 있다. 들어는 봤나? 푸에르토리코라고. 태양이 보석처럼 빛나는 중남미의 아름다운 나라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믿기 어렵겠지만 계절학기 수업 때문이다. 계절학기로 해외에 나간다는 게 아주 일반적인 일이 아니란 것은 잘 안다. 더더욱 푸에르토리코와 계절학기를 연관지어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안다. 아마 너는 조금 놀라워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분명히 이 형님은 푸에르코리토에 있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계절학기 수업을 듣는지 궁금하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그 이야기는 일단 미루자. 먼저 푸에르토리코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자. 너도 알다시피 여기는 미국의 자치령 섬이다. 푸에르토리코란 "부유한 항구"라는 뜻이다. 인구는 4백만명. 9천제곱 평방미터 크기의 섬에 시드니만큼의 인구가 살고 있다는 얘기다. 인구 밀도가 상당한 셈이지만 피부에 크게 와닿지는 않는다. 대도시처럼 복닥거리지 않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관광지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는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는데 다들 체격이 좋다. 푸에르토리코가 야구를 잘한다더니 남자 애들은 하나 같이 당장 야구선수를 해도 좋을만한 피지컬을 엄마 뱃속에서부터 타고 난 것처럼 보인다. 장난 삼아 수업 같이 듣는 애들이랑 야구 한 게임을 붙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장난이 아니었다. 덩치는 산만하고 근육이 넘치는 애들이 유연하기는 또 얼마나 유연한지! 게다가 배트 스피드는 총알보다 빠르더라. 송구는 또 얼마나 정확하고 신속한지! 외야수가 펜스 앞에서 던진 공이 포수 미트에 노 바운드에 꽂히는 것을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괜히 프로팀 스카우터들이 이 동네를 기웃거리는 게 아닌가 보다. 한편 여자 애들은 하나 같이 모델감이다. 앞에서 봐도 그림이고 뒤에서 봐도 그림이다. 우리가 동네 이발소 달력에서 보았던 금발 미녀들 따위 수준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숨이 막힌다. 아찔하다. 뒤에서 봐도 아찔하고 앞에서 봐도 아찔하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이후로 비로소 내 사전의 많은 단어들이 새롭게 정의된 듯 하다. 이를테면 ‘뇌쇄’와 같은 것들. 여기 여자애들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수영복이나 수영복에 가까운 일상복을 입고 지낸다. 키는 또 징그럽게도 커서 콜라병처럼 가느다란 허리가 바로 내 눈높이에서 찰랑거린다. 여기 해변의 까무잡잡한 여자애들이 그런 허리 한번 생긋 흔들어주면 (으아악!) 머릿속이 깜빡 정전된다. 매일 소리내어 외친다. 카리브해의 찬란함이여! 영원하라! 정말이다. 평생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치명적인 강렬함이다. 표현력이 부족하여 너에게 이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완전히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27년만에 드디어 안목이 제대로 캘리브레이션이 된 것 같다. 여기서 새로 잡은 영점으로 조국에 돌아가면 말도 못할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아무리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아무리 한반도에 이상 열대기후가 나타난대도, 솔직히 아직까지 동양 여자애들의 그릇은 그저 동양 여자애들이 아니겠냐.


유석에게,

지난 편지에선 깜빡하고 계절학기에 대한 얘기를 마무리 짓지 못했다. 무슨 놈의 계절학기 수업을 푸에르토리코까지 가서 듣는지, 그 이야기를 정작 하지 않았구나. 아마 너의 궁금증이 극에 달았을 것이 틀림 없는데 내가 너무 내 얘기만 했지 싶다. 너도 알다시피 이 형님이 '에스파니아어과'다. 어떤 놈은 '스페인어과'라고도 하고, 어떤 놈은 '서반어과'라고도 한다만, 내 생각에는 ‘에스파니아어과'라고 부르는 것이 최고 멋들어진 듯 하다. 이제 너도 감이 좀 잡힐런지 모르겠다. 만약을 대비해서 힌트를 하나 주겠다. 여기 푸에르토리코에서는 에스파니아어와 영어가 공용어다. 쉽게 말해서 에스파니아어, 스페인어, 서반어, 영어, 아무거나 주워섬겨도 대충 통한다는 얘기다. 자! 전공과 제 1의 외국어를 공용으로 쓰는 나라이니 우리 학과 애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어학연수에 이상적인 나라다. (너도 참고하길 바란다.) 무슨 전공 과목을 푸에르토리코까지 가서 듣는지 (그것도) 너는 알고 싶겠지. 그럴 바에야 왜 바로 에스파니아에 직항으로 않았는지도 너는 묻고 싶겠지.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우리 학교에 던져야 할 질문 같다. 잘난 듯이 돈도 없는 우리 학교. 돈 없는 게 죄다. 남들 학교는 미국 본토 내 유명 대학들과 연줄을 잘도 만들더만, 돈 없고 줄 없는 우리 학교는 밀리고 밀려 기껏 미국의 자치령 섬나라에 있는 대학과 상호 교류하게 된거다. 누굴 탓할 일은 아니다만 이렇게 되어 오히려 나는 더 좋다. 내가 여기서 계절 수업을 듣는 것에 만족하고 있음을 지난 편지로 너도 짐작했겠지. 아마도 이럴 때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쓰는가보다. 너도 알다시피 어디 계절 학기가 공부만 하려고 듣는 것이겠느냐.  주로 놀면서 나머지 시간에 학점이나마 조금 챙겨보자는 것이지. 하루 한두시간 지루한 쏼라쏼라가 끝나고 쭉쭉빵빵한 혼혈 여자애들과 피냐콜라타나 홀짝이는 이 곳의 생활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계절학기라고 이 형님은 생각한다. 오늘은 이만 써야겠다. 연거푸 몇잔을 마셨더니 칵테일도 술이라고 꽤 알딸딸하다. (이미 나도 내 글씨를 읽을 수 없는 지경인데 너는 읽을 수 있겠느냐?) 얼음을 일부러 큼직하게 갈아 달래서 (아그작 아그작) 소리를 내며 씹어 먹었더니 턱이 저릿저릿하다. 하지만 내 걱정은 말아라. 카리브해의 태양은 내일도 빛날 것이고, 이 놈의 계절 수업은 돈 낸만큼은 계속해서 이어질테니, 다시 편지를 쓸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너도 잘 지내라. 

유석에게,

이번이 벌써 세번째 편지다. 푸에르토리코에서 보내는 계절 학기도 벌써 반이나 지났다는 얘기다. 이 형님은 많이 아쉽다. 너도 같이 아쉬워해줬으면 좋겠다. 하루가 너무 빨리 간다. 일 분이 아쉽고 일 초가 아쉽다. 문득 하루 하루를 값지게 보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매일을 즐기고자 했다. 놀라지마라. 그러다보니 엉뚱하게도 여친이 생겼다. 스물한살짜리 푸에르토리코산 혼혈 아가씨다. 키는 무려 백하고도 칠십 센티미터. 몸무게는 사십하고도 팔 킬로그램. 쓰리 사이즈는 미안하지만 비밀이다. 그래 맞다. 물론 나도 어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밤마다 피냐콜라타를 홀짝이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세상 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이 형님은 기쁘다. 부디 너도 같이 기뻐해줬으면 좋겠다. 여친은 내가 계절 수업을 듣는 바로 그 대학의 철학과 2년생이다. 철학이라니! 이 실용적인 세상에서 왜 그런 비실용적인 공부를 왜 하나 싶을 거다. 그러나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런 애가 밤마다 산 후안 최고의 칵테일 바 ‘언 포꼬 로꼬’에서 칵테일을 만든다는 거다. 칵테일과 철학이라. 철학과 칵테일이라. 거 참 어울린 듯 하면서도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게다가 철학하는 애 답게 집도 잘 산다. 그것도 오지게 잘 산다. 돈도 있으면서 왜 그런 알바를 뛰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란젤이랑 같이 있으면……. 아, 내가 얘길 안 했나? 여친 이름이 소피아 란젤(Rangell)이다. 그래서 그냥 란젤이, 란젤이 부르는데,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어째 야시시하단 둥 자꾸 헛소리를 지껄인다. (맞다. 속옷 선물은 했느냐고도 묻는다.) 아무튼 밥 먹고 늘상 그런 생각만 하는 사내 놈들이란 인터넷 검색창에 치면 당장 성인 인증부터 요구할 법한 쪽으로만 머리들을 쓴다. 그러니 피가 머리로는 돌지 않아 돌댕이에서 더는 진화하지 못하는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확실히 남성보다는 여성이 진화한 동물이 아닌가 싶다. 대개 남자보단 여자가 철이 빨리 드는 것도 그렇고, 맥심지 모델도 울고 갈 정도로 섬세한 우리 란젤이 몸매를 봐도 그렇다. (하다 못해 칠공공 전화 데이트 따위도 남자가 걸면 유료인데 여자는 무료가 아니더냐.) 이 형님이 푸에르토리코에 와서 종종 꾸는 꿈이 하나 있다. 이 반짝이는 카리브해의 바닷가에서 란젤이 같은 애로 태어나 한번만이라도 그런 인생을 즐겨보는 것이다. 해변, 비키니, 선탠, 비치 발리볼, 언 포꼬 로꼬, 칵테일, 철학, 아니 철학은 아니고, 어쨌든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유석에게,

유석에게. 진짜 유 석 (You Suck)이다. 어쩜 이 형님에게 답장을 한 번도 보내지 않느냐. 내가 석 장의 편지를 보내는 동안 말이다. 이 형님은 조금 삐졌다. 휴… 그래도 내 소식은 알려주마. 나는 잘 있다. 머지 않아 너의 형수님이 되실 란젤이도 잘 있다. 우리는 요즘도 강의를 땡땡이치고 산으로 바다로 칠렐레 팔렐레 놀러 다니고 있다. 변명같지만 여긴 너무 더워서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더운게 아니다. 우라지게 덥다. 이래서 환경이라는 게 참 중요한가보다. 문득 드는 생각이다. 오늘은 란젤이랑 맥주캔 골프를 쳤다. 맥주캔 골프가 뭔지 너는 아마 궁금할 것이다. 별 거 아니다. 한적한 산등성이에 올라가서 맥주 한 잔 빨고 캔을 밟아 찌그러뜨린 다음에 드라이버로 시원하게 샷을 날리는 거다. 당연히 홀은 없다. 우리가 날려 보내는 바로 그 곳이 홀이다. 말하자면 '골프장 회원권은 없으면서 훔칠 아빠 골프채는 있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인 셈이다. 일캔에 일타이니, 몇번 치기도 전에 얼큰하게 취했다. 란젤이도 헤롱거렸다. 내 어깨에 기댄 그녀가 이런 말을 했다. “오빠, 실은 나 고민이 하나 있는데." 그녀가 한국말로 고민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영어로 말했다. "고민이 뭔데?" 내가 되묻자 그녀는 예쁜 눈을 깜빡여 조금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말해 봐." 거듭 재촉하자 그녀는 못 이기는 척 말을 꺼냈다. "미구엘가 또 찾아왔어." 그 얘기를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구엘는 란젤이가 고딩 때 잠깐 만났다던 이 동네 건달이다. 워낙 성격이 아웃 오브 컨트롤이어서 란젤이도 졸업 무도회 직전에 털어버렸는데, 무려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징글 맞게 쫓아다닌다는 거다. "언제?" "어제 저녁에." "언 포꼬 로꼬에서?" "그리로 찾아왔었어." 나는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여기에 불과 보름 남짓 있었을 뿐이지만 미구엘이 얼마나 평판이 좋지 않은 놈인지를 파악하기에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란젤이와 데이트 하던 중에 몇 번 부딪히기도 했는데 괜히 굶주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폼이 여간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래?" "몰라. 무슨 꿍꿍인지. 자기가 떠나길 원한다면 돈을 달래." "돈? 무슨 돈?" "있잖아.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새롭게 시작하려면 정착 자금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얼마나?" "5만불." 5만불이라니. 미구엘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이 틀림없다. "미쳤냐? 그냥 씹어버려." 그런데 뜻밖에 란젤이는 심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기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 비디오를 인터넷에 올리겠다는 거야." "썬 오브 비……." 나는 (영화에서나 보던) 오리지널 양놈처럼 욕설을 뱉었다. 비디오라면 고딩때 란젤이와 그 놈팽이가 1주년 기념일에 같이 찍었던 '그것'을 말하는 것일테다. "그래서?" "일단은 시간을 좀 달라고 했어." 나는 화가 났다. 너도 알다시피 아무리 좋지 않게 헤어졌어도 이런 추잡스러운 짓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런 건 정말 남자답지 못한 짓인 것이다. "네 생각은 어때? 이번에는 정말로 실행에 옮길 것 같아?" 그녀는 벌벌 떨었다. "충분히. 내 생각에는 실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 물론 란젤이네 집은 잘 산다. 그것도 오지게 잘 산다. 하지만 돈이 많은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일 뿐이다. 칵테일 바에서 알바 뛰는 대학 2년생이 5만불이나 되는 큰 돈을 끌어다 쓸 방법이 있을리 만무하다. 이 사실을 그녀 아버지에게 알릴 수 없음도 더없이 분명하다. 참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것 같다. 이 편지의 서두에서 나도 잘 있고 머지 않아 너의 형수님이 되실 란젤이도 잘 있다고 했지만, 아무튼 지금 상황이 쪼까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그 애 곁에 조금 더 있어줘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바로 이런 게 사내로 태어나서 응당 해야할 일이 아닌가 싶다. 미구엘 개 놈의 새끼는 그래서 사내의 자격이 없단 것이다. 

유석에게,

지난 편지에서 내가 전했던 '우리'의 근황을 너도 기억할 것이다. 분명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의 연인 란젤이는 전 남자친구 미구엘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고, 그녀의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하게 5만불을 구해내야만 했다. 카리브해의 해적들이 실수로 보물을 몇 상자 흘려주거나 갑자기 그 망할 놈의 미구엘이 벼락이나 맞아 뒤지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해결할 도리가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잘 되었다. 결국은 잘 되었다는 얘기를 너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다. 일단 돈은 내가 나서서 융통해주었다. 푸에르토리코 토박이인 란젤이도 못 구할 돈을, 짐시 머물다 가는 뜨내기인 내가 무슨 수로 구해줄 수 있겠냐고 너는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란젤이는 토박이라서 더 돈을 구하기가 어려운 면도 있는 것이다. 이 작은 섬나라에서 란젤이는 공금융과 사금융, 지상금융과 지하금융을 막론하고 아버지 몰래 돈을 구할 방법이 전무하다. 반면 나는 여기에서야 잠시 놀러온 뜨내기에 불과할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엄연한 국민이자 한 가정의 귀한 아들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면, 한국 집에 전화를 넣어 부탁하면 돈을 구하지 못할 까닭도 없다는 얘기다. 물론 5만불은 큰 돈이다. 집에서 덜컥 부쳐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집에는 내가 곤경에 처한 당사자인 것처럼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합의를 위해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했다. 아니면 집에 돌아가기가 어렵다고도 했다. 또한 일단 합의가 원만하게 풀리면 돈은 1달러, 아니 1원도 빠짐없이 채워놓겠다고도 했다. 이리로 당장 날아오겠다는 부모님을 말리는 데 3일이 걸렸고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까지 다시 3일이 걸렸다. 못할 짓이 분명하지만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을 확신하기에, 언젠가 부모님께서도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란젤이는 내가 정말로 5만불을 구해오자 눈물까지 흘리며 기뻐 날뛰었다. 석 달 안에 어떻게든 (1원, 아니 1달러까지) 이자를 쳐서 갚아주겠다고 했다. 집이 오지게 잘 사는 그녀이니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났다. 바로 그녀가 나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던 것이다. 결혼. 결혼? 결혼! 나는 감격했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뽀뽀를 해주었다. (놀라지 말아라. 처음으로 볼 말고 입술에 말이다.) 그렇다. 모든 것이 잘 풀렸다. '우리'는 쓰레기 건달 미구엘 놈을 쫓아버렸고 란젤이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하기로 했다. 이게 바로 해피엔딩이다. 네가 기뻐해줬으면 좋겠다. 축하해줬으면 좋겠다. 결혼을 준비하려면 이래 저래 바쁜 일이 많겠지만, 계절 수업이 끝나는 시점에는 잠시 한국에 들어갈 생각이다. 그때 보자. 

유석에게, 

잘 지내고 있느냐. 이번이 몇 번째 편지인지 모르겠다. 그간 편지가 뜸했던 것엔 이유가 있었다. 내가 몇번째 편지에서 말했던가? 사람 일이란 알 수가 없다고. 음… 그러고보면 나 역시도 한 걸음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것 같다. 한숨만 나온다. 참 하기 어려운 얘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줬으면 한다. 너이기에 나도 믿고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데서는 쪽팔려서도 못할 이야기다. 일단 계절 학기는 끝났다. 잘 끝났다. 시험 전날에 피냐콜라타만 줄창 마셔대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C 플러스 이상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란젤이는 사라졌다. 어떻게 이 아름다운 해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제 ‘언 포꼬 로꼬’에 갔더니 그제 그녀가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집으로 찾아갔더니 이사를 갔다고 했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이메일 수신확인에는 '읽지 않음'으로 계속 표시된 상태다. 쓰레기 건달 미구엘이 그 애를 납치한 줄 알았다. 미구엘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소문해서 놈의 흔적을 쫓다가 비슷한 질 나쁜 놈들에게 걸려 남은 돈과 여권을 다 빼앗겼다. 자친 몸을 이끌고 학교 사무실로 찾아갔더니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그 대학의 학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얼이 빠진 나는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대단한 부자라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갔는데 (경호원에게 늘어지게 두들겨 맞고서야 가능했다) 자기는 딸이 없다고 하더라. 아아! 나의 친구여! 그렇다. 그녀가 어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이 부유한 항구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 그제까지만 해도 이 섬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알았는데 오늘은 이 섬에 그녀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억장이 무너졌다. 지금 나는 홀로 해변에 앉아 쓸쓸히 너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다. 저 바다를 건너 바하마 군도와 쿠바를 지나면 미국의 플로리다가 있을 것이다. 과연 그녀는 지금 어디 있을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두 손을 모아 크게 소리를 지르면 란젤이가 있는 곳까지 들릴까? 왜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과연 약속한대로 5만불에 이자를 얹어서 내게 돌려줄 수 있는 것일까? 묻고 싶은 것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이 밤이 지나면 나는 한국에 돌아가야 한다. 더는 수업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번 계절 수업,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가면 한 번 보자고 말하고 싶지만 장담은 못하겠다. 우리 부모님이 이 자초지종을 듣고도 나를 살려주시면 그때가서 다시 약속을 잡기로 하자.


(200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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