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장미처럼 발랄한 저 로보트는 사실
by 김영준 (James Kim)첫 면접 날을 기억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면접이란 걸 본 날이다. 숱하게 지원하고 숱하게 떨어진 그 기록적 비극 시대의 서막(序幕)과도 같은 날이다. 그것은 나쁜 세계에서 더 나쁜 세계로 빌어먹을 세계에서 더 빌어먹는 세계로 잔인한 세계에서 더욱 잔인한 세계로 들어가는 서글프고 비문명적인 - 말하자면 '우가차카 우가차카'와 같은 의식이었노라 할 만도 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어제보다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야 하는데 어이하여 나는 오늘만큼 나쁜 내일을 향해 전력 투구를 하는가, 스스로에게 꽤 심각하게 자문해 보았는데 그건 결국 스타벅스의 컵 보증금이 왜 컵 크기와 상관없이 오십 원이냐는 물음처럼 답하기가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기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와 한 시간을 달려 칠십 년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후줄근하고 낡아 지저분한 역사에 내렸을 때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꼭 내 마음처럼 흐렸다. 만약, 그것이 정말 칠십 년대 영화 속 장면이라면 어두운 하늘은 어두운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었을 테니 영화 속이 아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S그룹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이다. 문제는 몇 번째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하느냐는 것인데 혹자는 네 번째라고도 말하고 다섯 번째라고도 말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세 번째라고도 말하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S그룹의 1차 서류전형과 2차 적성검사를 전광석화처럼 통과하고 반 사회적이라는 평소 주위의 평을 뚫고 3차 인성검사마저 기적적으로 통과했을 때 친구들은 운무처럼 몰려들어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었다. "축하한다, 인마. 면접까지 왔으면 얼추 합격이나 다름없는거지." 지원자의 3 배수까지 줄어든 상태였으니 어쩜 그 말은 사실이었을런지도 모른다. "S그룹에 들어가면 말이야 사람 신수가 훤해지더라고.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다니까."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개조되어 하프 맨-하프 머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알렉스 머피 경관을 떠올렸고, 이내 온몸이 티타늄으로 둘러싸인 듯 갑갑해졌다. "내가 아는 선배도 S그룹에 들어갔는데 말이야. 뭐랄까, 갑자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된 느낌이랄까. 빛이 났어." 나도 모르게 CF에서 보았던 S그룹의 이미지 송을 머릿속으로 랄랄라 흥얼거렸다. 흡사 티타늄으로 가득한 사탕바구니를 안은 듯 찬란하고 희망찬 느낌이었다.
S그룹의 공장은, 그래 공장이다,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굴뚝에선 열탕처럼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었고 지게차들이 바퀴벌레처럼 부지런히 굴러다녔다.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창고, 창고, 또 창고였다. 굴뚝에서 빠져나온 입김같은 하얀 알갱이는 무겁고 두렵게 내려앉아 마치 세상을 안개 낀 무진(霧津)처럼 만들었다.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국내 대기업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S그룹의 밝고 천진한 이미지 씨엠 송은 랄랄라, 안녕! 잘가요! 지저분한 안전모를 쓰고 기름때가 두터운 점퍼를 입은 아저씨들이 지게차보다 더 빠르게 바퀴벌레보다 더 바지런하게 좌로 우로 뛰어다녔다. 깔끔하게 다려 입은 양복을 입고 헤어왁스로 단정하게 다듬은 머리를 하고 그 길을 걷는다는 것은 마치 티타늄을 주머니에 가득 넣고 걷는 것만큼 무겁고 죄스러운 기분을 들게 하는 일이었다. 그곳은 생계의 최전선이었다.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폼 나는 일과 적절한 연애가 3대 7로 배합된 낭만적 회사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로 삭막할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나는 지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동의할 수 없는 서늘함에 가슴이 울렁 아렸다. 두꺼운 공학원서를 베고 잠들고 새벽마다 영어학원을 다니는 것으로 대학의 낭만을 포기한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월화수목금금금'의 대학원 생활을 견딘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회의감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종류의 먹먹함이 복부에서부터 광대뼈 부근까지 빽빽하게 들어찼다. 아니 물론 저 분들의 치열한 일상을 두고 그렇게 말하면 안되겠지만, 아마도 저 모습은 내가 바라왔던 미래는 아니었던 것 같아. 저 틈바구니로 들어가 기어이 저 풍광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
S그룹의 수원 공장에서는 로보트를 만든다. 홈페이지에서 언뜻 그렇게 보았던 듯 싶다. 로보트의 이름은 '캔디'다. 그러니까 캔디 1호, 캔디 2호, 캔디 3호, 하는 식이다. 캔디라니. 어쩐지 로보트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들장미 소녀처럼 밝고 명랑한 로보트인가 보다. 티타늄으로 만든다. 티타늄에 대해 설명해 보세요, 다음 까페 '취업 뽀개기'에 게재된 S그룹 면접 단골 질문이다. 밤을 새우다시피 티타늄의 물성을 달달 외웠다. 티타늄이요? 주기율표에서 4A족에 속하죠. 원자번호는 이십이. 원자량은 사십칠점구, 천육백칠십오도에서 녹고 삼천이백육십도에서 끓죠. 비중은 사점오. M. H. 클라프로트라는 독일 사람이 발견해냈죠.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거예요. 가벼워요. 내식성이 우수해요. 독성이 없어요. 합금으로도 많이 만들죠. 안경테부터 화학폐기물 처리용기까지 참 다양하게 이용되어요. 알렉스 머피 경관이 어떻게 '로보캅'으로 다시 태어났는지 알아요? 비결은 티타늄이죠. 하하하. 비밀을 하나 말씀드릴까요? 전 어려서부터 S그룹에 들어가는 것이 꿈이 있었습니다. 제가 오랜 꿈과 찬란한 미래를 S그룹에서 펼치고 싶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대개는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지나치게 자신감에 차있거나 지신감에 차있는 척을 한다. 스스로를 과장하고 포장한다. 흡사 속이 없는 거대한 껍데기를 마주한 느낌이다. 그들은, 그리고 쓸데없이 친한 척을 한다. 잘 보셨어요? 뭘 물어보던가요? 잘 될 것 같아요? 난 틀렸어요. 그쪽은 잘 되길 바랄게요. 티타늄처럼 반짝이는 그들의 말간 눈동자를 보며 나는 로보트 캔디를 상상해 보았다. 오, 캔디! 로보트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그 이름! 낙방이나 낙선의 통보는 꼭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두고 전달되는 것처럼 불가해한 그 이름! 그거 아세요? 들장미처럼 발랄한 저 로보트는 사실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태어났답니다.
(2008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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