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블랙리스트 (The Blacklist, NBC, 2013~ ) B평
by 김영준 (James Kim)과거 프리미엄 케이블의 등장으로 한 번 위기를 맞았던 브로드캐스트 채널들은 COVID-19 팬더믹과 스트리머의 등장으로 급기야 코너에 몰린 모양새다. 무엇보다 완전히 게임의 법칙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방영 프로그램의 총량은 무한에 가깝고 타임 슬롯과 시청률의 개념은 무의미해졌다. 신작은 지난 수십 년간 누적된 검증된 성공작들과 시청자들의 선택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스타 크리에이터들이나 스타 작가들이 더 좋은 대우와 재량권을 보장하는 쪽으로 이동하면서 브로드캐스트 채널 편성에서 공동화 현상도 가속되었다. 가을 시즌에 일제히 신작이 공개되어 9월부터 5월까지 엎치락뒤치락 레이스를 벌이던 그 시절이 여전히 그립기는 하지만 이 상황을 반전시키기는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기존 히트 쇼들의 스핀-오프에 대부분의 시간 편성을 몰아주고 있는 현상이 이를 방증한다. 틋히 원-아워 쇼에서는 이제 스탠드얼론으로 성공한 사례가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쓰나미가 본격적으로 닥치기 직전에 데뷔하기는 하였지만 NBC의 ‘더 블랙리스트’는 이 격동의 시기 내내 살아남으며 거의 강산이 한 번 바뀔 동안의 롱런을 거쳐 이제 시리즈 피날레를 목전에 두고 있다. 몇몇 영화에 스크린라이터로 참여한 정도의 경력 밖에 없는 존 보켄캄프가 크리에이터로 이름을 올린 첫 번째 시리즈임을 감안하면 예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하지만 ‘더 블랙리스트’에는 기회와 한계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이 작품이 꽤 괜찮은 소재에 바탕한 아주 강력한 드라이브를 가지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일찍이 셜록 홈즈에서부터 내려온 수사 컨설턴트 캐릭터는 사립 탐정으로 시작하여 소설가 겸 교사 겸 아마추어 탐정 (Dame 안젤라 란스베리!), 해고된 형사, 과학수사대, 법의학자, 의사, 수학자, 심리학자, 바디 랭귀지 전문가, 미스터리 소설가, 심지어 악마와 영매까지 등장하였는데 하이-프로파일 범죄자라고 안될 이유는 없다. 그리고 범죄자를 잡으려면 범죄자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치에 맞는다. 범죄자가 FBI 자문을 맡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화이트 칼라 (USA, 2009~2014)’와 비교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오히려 이 작품의 분위기는 ‘양들의 침묵 (조너선 드미, 1991)’과 ‘크리미널 마인드(CBS, 2005~2020)’의 만남에 더 가깝다. 주인공 레이먼드 레딩턴(제임스 스페이더)의 극 중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더 컨시어지 오브 크라임 (The Concierge of Crime).’ 다시 말해서 어둠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악명 높은 크리미널 마스터마인드가 FBI를 기관의 레이더망 밖으로 인도하여 잡기 불가능하거나 심지어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범죄자들을 상대하도록 유도한다. 이 소재가 전통적인 방식의 에피소드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물론이다. 레딩턴은 매주 하나의 이름을 FBI에 넘기고 (혹은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FBI의 자문 격으로 하나의 이름을 지목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담팀은 수사를 벌인다. 전형적인 ‘케이스 오브 더 위크(Case of the Week)’ 혹은 ‘몬스터 오브 더 위크(Monster of the Week)’ 구성이고 그 과정에서 서서히 레딩턴을 둘러싼 비밀들이 시즌 혹은 시리즈를 관통하며 연결성을 확보한다. 반 세기 이상 텔레비젼을 지배하였던 포맷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FBI의 ‘모스트 원티드’로 일컬어지는 레이먼드 레딩턴이 FBI에 자수를 하고 그 대가로 거래를 제안하는 파일럿 에피소드의 도입부는 2010년대 브로드캐스트 채널에서 데뷔한 모든 원-아워 쇼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파워풀하다.
무엇보다 에미 3회 수상자인 제임스 스페이더가 이 작품의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카드이다. 그는 레이먼드 레딩턴 역으로 골든 글로브 'Best Actor - Television Series Drama' 부문에 두 번 노미네이션을 받았다. 원래 레딩턴 역에는 키퍼 서덜랜드, 리처드 기어, 브라이언 크랜스턴, 그리고 피어스 브로스넌 등이 거론되었다고들 하는데 다소 점잖은 이미지가 있는 배우들이라 성사되었다면 스페이더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FBI 어시스턴트 디렉터 헤럴드 쿠퍼를 연기한 헨리 레닉스와 나란히 있으면 마치 패컬티 클럽처럼 보였을 수도 있겠다). 반면에 스페이더는 이단아에 말썽꾼 이미지에 가까운 역할을 평생에 걸쳐 누구도 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왔다. 능청스럽게 농담과 허풍을 늘어놓다가 순간적으로 냉철하고 진지하게 돌변하는 연기는 여전히 독보적이다.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다가 잠시 말을 멈추는 순간마저도 다 계산된 것처럼 보인다. 별로 대단치 않은 대사도 스크립트에서 볼 때보다 더 빛나게 만들어버리는 능력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데이비드 E. 켈리와 같은 빅 가이가 쓰지 않은 평범한 텔레플레이에서도 이 남자는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드물게 좀 괜찮은 대사가 나오면 바로 펜스 직격이고 조금 더 좋은 장면이 나오면 여지없이 홈런이다. 나아가 이러한 스페이더의 연기 스타일은 레딩턴이라는 캐릭터의 성향에도 아주 잘 맞는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차치하기로 하자). 극 중 레딩턴은 FBI 태스크포스에 범죄자들의 정보를 넘기지만 항상 순수한 의도만은 아니다. 항상 자기만의 큰 그림과 비밀스러운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로빈후드도 아니고 론 레인저(The Lone Ranger)도 아니다. 공익제보나 양심고백 따위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며 어디까지나 오로지 자신만의 목적 달성을 위해 거래를 하는 것이다. 연방 요원들을 농락하고 이용하지만 그는 항상 상응하는 (혹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댓가를 지불한다. 결과적으로는 사회에 더 큰 이익을 가져오더라도 레딩턴과 FBI의 거래는 옳고 그름의 경계에 있어서는 의문을 남길만한 것이다. 이런 미묘한 회색 지대를 휘저어 놓는 면에서 스페이더의 능력은 언제나 탁월했다. 이 작품이 종종 논리적 허점이나 비약으로 순간적인 한계를 드러낼 때마다 빠르게 수습할 수 있었던 동력도 역시 그의 원맨쇼였으니 속된 말로 이 작품의 멱살을 잡아끌고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근본적으로 에미나 골든 글로브의 작품상 컨덴더가 될 수는 없는 이런 형식의 쇼에 스페이더와 같은 배우가 거의 십 년을 묶여있었다는 점은 사실 아까운 일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 한 단계 더 올라서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브로드캐스트 채널에서 픽업되고 방영되는 원-아위 쇼, 그것도 특히 수사물들의 일반적인 제약들이 있을 것이다. 수사가 진행되는 과정에 있어서 지나치게 전형적인 패턴을 드러내거나 야심차게 시작한 이야기가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심지어 그 중에는 태스크포스의 존재 가치에 의문을 가질만한 것도 있다. 에피소드 간 편차가 발생하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좋은 순간과 나쁜 순간의 차이가 크다. 몇몇 액션 장면은 텔레비젼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을 준다. 스릴러물의 숙명이지만 트위스트를 반복하는 것도 피할 수가 없으며 당연히 반복을 거듭할수록 효과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세부적으로 분위기를 더 어둡게 가져가지 못한 것도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적으로 전술한 파일럿 에피소드 도입부에도 그런 문제들이 드러난다. 자수한 레딩턴이 구금 상태로 FBI를 휘저어 놓는 아주 강력한 스타트 이후,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어 엘리자베스 킨(메건 분)의 첫 출근 날 아침 소동으로 연결하는 방식 같은 것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예감하지 못하는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려는 따위의 의도였겠지만 갑자기 너무 가벼운 분위기로 바뀌면서 장면 전환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이후에도 이런 문제는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완전히 다른 톤의 장면이 갑작스럽게 끼어들어 몰입도를 해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근본적으로 이는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는 킨의 캐릭터 설정부터 출발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레딩턴이 그녀를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지목하였으므로) 그녀는 이 변종 ‘키다리 아저씨’ 이야기에서 실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녀는 너무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동시에 이해하기가 어려우며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 또한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만큼 여러 가지 상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혼란스럽다. 그녀를 마냥 비극의 주인공처럼 묘사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대뜸 금세기 최고의 악당에게 눈을 부라리며 맞설 만큼 강단 있고 대담하다는 점은 이해하기가 힘들다. 무엇보다 킨은 레딩턴과 맞서야 하는 인물인데 거의 연기 경력이 짧은 배우의 캐스팅으로 맞수 비슷한 수준까지 가지도 못한다. 의도적으로 덜 알려진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주장도 이해는 가지만 이 정도로 압도당하는 것도 계획에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이만한 내공 차이를 극복하여 맞대결을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맞지만 마냥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가령 이 작품의 뿌리에 있는 레퍼런스 중 하나인 ‘양들의 침묵’에 대해 다시 논하자면 조디 포스터가 연기한 FBI 수습요원 클라리스 스털링은 연약함과 강인함이 공존하는 아주 강력한 캐릭터로 완성되었다. 특히 포스터는 대배우 Sir 앤소니 홉킨스와 훌륭한 맞대결을 해내 찬사를 받았는데 당시 겨우 스물여덟 살에 불과했다.
(202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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