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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 앨리스 인 원더랜드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5. 7.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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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TV를 켰다. 요즘은 온통 ES세포 이야기뿐이다. 다른 이야기는 없다. 이제는 너무 지겨워 리모컨을 들어 TV를 꺼버렸다. TV에 다른 이야기가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 기관에서 정보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기관의 이름은 ALICE다. 무슨 뜻이냐고? 예전에는 알았는데 나도 지금은 모르겠다. 정부 기관 산하의 정보기관 산하의 겉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특수 기관이다. 초현실적인 일을 담당한다. TV 시리즈 X-파일처럼 말이다. (거기서는 FBI였지만 물론 우리 기관을 한국판 FBI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CIA에 가깝냐면 또 그것도 아니다.)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옷에 붙어있는 TBJ라는 뜻 모를 상표가 바람에 팔랑팔랑거렸다. 집 앞의 편지함을 열어보니 조카의 성적표가 들어있다. 저번 학기보다 분발했는지 CGPA가 올랐다. 기특한 자식.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었다. 도로 한가운데서는 웬 꼬마가 RC카를 가지고 놀고 있다. 돌연 옆집 마당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옆집 학생은 툭하면 마당에 붐박스를 갖다 놓고 FM 라디오를 큰 소리로 틀어놓는다. 정말 짜증 나는 일이다. 라디오 속의 DJ가 말했다. '다음 곡은 HOP의 뭐시기입니다.' OMG. 아침 댓바람부터 HOP라니, 옆집 학생이야 좋아서 환호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편협한 것은 좋지가 않지만 속 빈 강정 같은 십 대 댄스그룹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라디오 속의 DJ는 물론이고, 아마 동교동의 DJ도 저런 음악은 싫어할 것이다. 담장을 넘어 들어오는 국적불명의 짬뽕 비트 때문에, 폐의 기능이 멈추고 호흡이 정지될 지경이었다. 누가 제발 와서 CPR이라도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ASP 피스톨을 꺼내 붐박스를 겨냥했다. 순간 인내심을 잃고 발사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아내었다. PHEW. 하마터면 ALICE에서 잘릴 뻔했다.


  기관에서 지급받은 VAN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벌써부터 길이 진절머리 나도록 막혔다. 정말이지 우리 SSC시는 너무 SOC가 부족하여 큰일이다. 혹시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SSC는 옛날에 서울특별시라고 불려지던 이 나라의 수도이다. 점점 커지다가 지금은 과거에 수도권이라고 불리던 지역을 다 집어 삼켰다. 아무튼 이렇게 SOC가 부족하니 교통체증과 항만정체가 유발되고, 그러니까 생산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기업처럼 도시도 CRC 같은 곳에 맡겨서 구조조정을 해야한다. AM 라디오에서 CSI와 BSI에 대한 기사가 나왔다. 전자는 소비자가 생각하는 경기의 지수이고 후자는 기업가가 생각하는 경기의 지수다. 예상대로 역시 그 차이가 상당히 컸다. 차라리 완전히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기야 보통사람들이 보는 전망과 CEO가 보는 전망이 같을 수야 없는 것이겠지. (그런데 TV 쇼에 나오는 범죄현장의 그 CSI 요원들도 CSI에 신경을 쓸까?) 차가 너무 막히다보니 별 엉뚱한 생각을 다 한다. 뒤이어 NLL이 어떻고 EEZ가 어떻고 하는 지루한 뉴스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앞의 차가 더 이상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였기에, 운전대에서 손을 놓고 바깥을 쳐다 보았다. 옆의 VAN 운전자도 완전히 포기를 했는지, 운전대가 아닌 DMB를 잡고 있었다. 저렇게 작은 것으로 TV를 본다니! 정말 불편하지 않을까. (게다가 운전 중에는 너무 위험하잖아?)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반대편 인도에서는 VANK에 소속된 사람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UN에서 발간된 지도책자에 뭔가가 또 잘못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요즘은 매일같이 시위다. 어제도 ASEM인가 APEC인가 때문에 난리였다. 다음 주부터는 FTA 협상이 진행된다니 전경들만 죽어나겠다. 


  SSC시의 시각은 GMT 기준 아홉 시간을 더해야 한다. 지금 SSC시는 아침 10시 30분이다. 런던은 지금 새벽 1시 30분일 것이다. 그러니 해외 지사와의 미팅은 늘 올빼미 스타일로 진행할 수 밖에 없어 피곤하다. 맞다. 이제 GMT가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UTC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봐야 몇 초 차이 나지 않을테니 혼용해도 전혀 문제는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하품이 난다. PHEW.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VAN을 돌려 교통체증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휴대전화는 SMS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얼마 전 일자리를 잃고 ADD 증후군에 시달리는 친구였다. 그는 IBM이나 HP와 같은 대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던 회사의 CRM 부서에 근무했다. 하지만 IMF 시절을 기점으로 회사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최근 3년 연속 ROE와 ROA가 급감하더니만 결국에는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말았다. 주거래 은행인 SC은행은 ASAP 회사를 정상화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CEO는 CRO에게 메일을 보내 인력감축을 하라고 지시했다. CRO는 다시 인력 감축을 각 부서의 치프들에게 지시했다. 당연히 그 메일은 CFO와 CTO에게도 BCC로 날아갔다. 만약 CIO와 COO와 CBO까지 따로 나눠져 있는 회사였다면 그들에게도 당연히 메일이 CC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FW 되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팀장이 친구를 불렀단다. 그리고 묻기를, 자네 MBS와 ABS는 어떻게 다른지 아나? 친구가 대답하기를, MBS는 방송국이고 ABS는 브레이크입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친구는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ILO는 동방박사와는 별 상관없는 동방의 먼 나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알아도 실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삶은 그렇게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CSS를 구축한 그의 거래 은행들은 하나같이 그의 점수를 깎고 신용등급을 하락시켰다. 대출마저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그는 좌절했다. 매일같이 WWW을 맴돌았으며, P2P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반 디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XXX등급의 AVI 동영상을 다운로드하여 보며 하루하루를 허비하였다. 국가별 국민 삶의 질을 평가한다는 HDI가 무려 20위권이라는 우리나라지만 이런 불운아들은 항상 있는 법이다. 


  친구의 SMS 메세지는 간단했다. '나 UFO를 봤어' 시답지 않은 소리다.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휴대폰 뚜껑을 닫는다. MBS와 ABS의 차이. 따지고 보면 불쌍한 녀석. 그 차이를 알았다면 해고당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세상에는 쉽게 구분해내기 어려운 엇비슷한 단어들이 너무 많다. UHF와 VHF가 있고 LNG와 LPG가 있고 BC와 AD가 있다. WWE와 WWF가 있고 GNP와 GDP가 있다. 선택에의 강요다. UHF가 좋습니까? VHF가 좋습니까? LPG로 하시겠습니까? LNG로 하시겠습니까? 역사책 속 그 해는 BC입니까 AD입니까? WWE와 WWF 중 어떤 것이 프로 레슬링과 관련이 있습니까? GNP로 따지는 것이 맞습니까? GDP로 따지는 것이 맞습니까? GNP로 따지는 것이 맞습니까? 어렵다. 역시나 걱정이 된다. 나는 휴대전화의 단축 다이얼을 돌려 그에게 전화를 건다. ET를 봤는지 아니면 FBI에게 쫓기는지,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나눠줄 참이다. RRRR. RRRR.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것은 녀석이 아니라 ARS의 기계음이다. 어쩐지 허탈하다. 노래라도 틀어야겠다. MDP를 꺼내어 카 오디오에 연결한다. RHCP의 노래가 나온다. RHCP가 뭐냐고? '레드 핫 칠리 페퍼스'다. 맨 처음 소개팅했던 여자가 생각난다. 무슨 노래 좋아해요? 라는 질문에 RHCP를 좋아한다고 답했더니 그녀가 말하기를, 그거 ROTC랑 비슷한 거예요? ROTC 나오셨어요?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농담 삼아 RHCP란 '우향 원형 편파'를 말하는거에요, 라고 대꾸해 주려다가 말았다. 아마 그녀는 '우형 원형 편파'가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물론 RHCP의 라이벌은 LHCP, 그러니까 좌향 원형 편파에요, 라고 한들 웃지 않았을 것이다.


  글로브 박스를 뒤지다 손에 뭔가 걸려 떨어졌다. MDP다. 마음이 착잡해진다. 성능이야 나무랄데 없지만 이제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골동품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우리나라에서 MDP를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얼리 어답터의 한 사람이다. LP와 CD를 이을 대세가 MP3가 아닌 MDP에 있으리라고 여겼다. CD에서의 광케이블 레코딩을 기본으로 하는 MD가 CD의 적자라면 불법복제를 양분 삼아 자라났던 MP3는 주워온 아들쯤 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게 웬걸.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MP3가 대권을 잡았다. 나는 제후를 잘못 섬긴 춘추전국시대 귀족의 꼴이 되었다. 곧이어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꼈다. 리스닝 세계의 스탠다드는 MDP가 아닌 MP3P에 있었고 모두가 음악을 MB와 GB로 치환하여 말하길 시작했다. 너도 나도 'WMA는 용량이 적은 대신 음질이 후지고 OGG는 용량이 큰 대신에 음질이 좋지' 따위의 말을 하고 다녔다. 내 귀는 WMA와 OGG의 음질차이를 구분하기엔 너무 무뎠다. 시계의 움직임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GMT에 준하여 일초에 한 칸씩만을 움직인다. 하지만 체감속도는 달라졌다. PCS가 처음 등장한 게 엊그제 같은데 거의 모든 국민이 휴대전화 단말기를 하나씩 갖고 다니는 시대가 왔다. 요즘은 지하철에서 PDA나 VDT를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자연스럽다. 어느새 그런 풍경마저 어색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집에 VTR만 하나 있었어도 참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새 DVD의 소멸 시점을 논하는 시대가 되었다. 또 어디 그뿐인가. CPU도 마찬가지다. 집에 AT286 컴퓨터를 처음 사던 날 나는 아직도 XT를 사용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슈퍼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컴퓨터는 공짜로 준다고 해도 아무도 거들더 보지 않을 것이다. 펜티엄급 컴퓨터를 처음 사던 날의 흥분 역시 이제는 누렇게 바래졌다. 어디까지 왔고 어디까지 갈 건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히 불편하지 않음에도 더 빠를 필요가 없음에도 나는 컴퓨터를 자주 바꾸었다. 그건 남들에 나를 맞추었거나 나에 남들이 맞추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SDRAM, DDR, RD……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 설명을 늘어놓는 상인에게는 '그냥 최신 사양으로 주세요.'라고 말한다. 최신, 그 말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기도 한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마음의 발전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항상 그렇다. 그러나 나 역시 직업상 기술에 집착할 수 밖에는 없음은 마찬가지다. 요즘에는 정부 요원도 첨단 장비가 없이는 곤란하다. ALICE에도 기술개발부가 있다. 007 제임스 본드 영화를 보면 MI6에도 Q 브랜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런 식이다. 우리는 그냥 R&D 팀이라고 부른다. 작년 테러리스트들이 우리 ALICE 본부를 EMP로 공격했을 때 이 팀에서만 세 사람이 순직했다. RIP. 이후 인원 충원을 위해 새로 몇 사람이 채용되며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지금 우리 버전의 Q는 닥터 강다. 그의 코드명은 GGS인데 본명은 강건신(Gang, Gun Sin)이다. 마치 범죄자처럼 느껴지는 이름 때문에 채용 시에 해프닝이 조금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외국 물 좋아하는 윗 분들이 그의 CV를 검토하다가 무슨 이유에선가 갑자기 VIP 대접을 하기 시작했다. 닥터 강은 BS와 MS와 Ph.D를 모두 UCLA에서 받았다. 그는 박사과정 때 여섯 편의 SCI 등재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는데 사실 그 내용은 지금 맡은 일과는 별 상관이 없다. 오늘 그를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가 USB를 가장한 비밀 무기를 건네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AWOL을 쫓고 있는데 (그러니까 무단이탈자 말이다) 이 비밀 무기가 꼭 필요하다. 그건 USB처럼 보이지만 실은 드래곤을 불러낼 수 있는 호출기다. 왜 하필 드래곤이냐면 드래곤은 EMP가 터져도 타격을 받지 않는 완벽한 비대칭 전력이기 때문이다. 정말이냐고? 당연히 뻥이다. 그럴리가 있겠는가. 유감스럽지만 그 비밀 무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힐 수가 없다. 사실 나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닥터 강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는 NDA 때문에 밝힐 수가 없다고 했다. 실제 그 무기를 사용할 현장 요원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시계를 보니 13시 27분이다. 닥터 강은 아직 오지 않았다. SMS를 보내 물어보니 금방 도착한다고 한다. ETA는 14시 15분이라고 한다. 참 빨리도 온다. 닥터 강을 기다리는 사이에 사무실로 돌아와 PC를 켜고 메일을 썼다. UFO를 보았다는 친구에게 말이다. RSVP라고 표시하는 것도 있지 않았다. 일단 도망간 놈을 잡아 놓고 가능한 빨리 그를 찾아가 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남아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여러 대의 RV카가 바람처럼 내 앞을 스쳐갔다. 오늘 밤에는 축구팀 FC 서울의 경기가 있다지. 서울은 SSC가 되었지만 여전히 FC 서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FCSSC라고 하면 발음하기가 너무 어려워서라고 한다.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자켓을 여미고 ATM을 찾아 나선다. 그러고 보니 지갑에 잔돈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돈을 뽑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휴대폰을 꺼내 SMS를 보낸다. 요즘에 만나는 여자에게 보내는 메세지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TGIF니 시간이 되면 오늘 밤 FC 서울의 경기라도 보러가자는, 그렇지만 시간이 없거나 내키지 않으면 반드시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밍숭맹숭하고 우유부단한 내용의 것이었다. 역시나 그녀는 시간이 없노라 했다. 다음을 기약하자 했으나 그 다음이 언제 일런지는 TBA라고 했다. 짐작조차 할 수 없다. TGIF에 시간이 안된다면 언제 또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 나에 관한 그녀의 반응은 언제나 AFKN 같다. 알아들을 수도 없거니와 나를 위한 것도 아닌 듯 하다. 사랑에 있어 나는 항상 PKO였다. 언제나 그랬다. 그렇다고 그녀가 썩 마음에 든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오늘 저녁에는 할 일이 없었다. OMG. 닥터 강의 전화가 왔다. 오늘 사정이 있어 본부에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갑자기 자기 마음대로 ETA는 내일이란다. USB는 다음에 가져가라고 했다. 괜히 기다리다가 하루를 공쳤잖아. 말 그대로 WTF다.


  내게는 VAN도 있고 MDP도 있고 PDP 텔레비젼도 있고 DVD도 있지만 오늘 저녁에 할 일은 없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무의미한 쇼핑에 나선다. O.Z.O.C와 ab.f.z와 ONG를 지나 TBJ의 매장까지 간다. 거울에 비춰지는 내 모습 또한 TBJ를 입고 있다. 또 여기서 살까? 아니다. OMG. 하필 내가 싫어하는 댄스 그룹 HOP의 노래를 매장에 틀어 놓았다. 저런 노래는 언제 들어도 머리가 아프다. 라디오 속의 DJ는 물론이고, 아마 동교동의 DJ도 저런 음악은 싫어할 것이다. 몇 걸음 더 가니 NII의 매장이 보인다. 그래 여기서 사자. 직원들은 분주하다. 새로 교체된 브랜드 SI를 위한 매장 통일화 작업이 한창이다. VAT가 포함된 가격으로 남색 터틀넥 스웨터를 하나 샀다. SKT 회원카드를 내밀어 캐쉬백 적립도 했다.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숨통이 트이니 UFO를 봤다는 친구가 다시 떠오른다. 다시금 휴대전화의 단축 다이얼을 돌려 그에게 전화를 건다. ET를 봤는지 아니면 FBI에게 쫓기는지, 뭐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라도 나눠줄 참이다. RRRRR. RRRRR.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전화를 받는 것은 녀석이 아니라 ARS의 기계음이다. 어쩐지 허탈하다. ARS와 대화한다는 것은 언제나 허탈하다. 메일함을 확인하였는데 RSVP라고 표시해서 보낸 나의 메일은 아직 ‘읽지않음’으로 표시되어 있다. MDP를 꺼낸다. RHCP의 노래라도 들어야겠다. 아직 오늘 저녁에 무얼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내게는 VAN도 있고 MDP도 있고 PDP 텔레비젼도 있고 DVD도 있지만 오늘 저녁에 할 일은 없다. 

 

(2005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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