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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8. 슈퍼 출장비 대전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5.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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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박 대리는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버스 안이다. 사실 그는 약간 심통이 난 상태였는데, 당초에 케이티엑스를 타려던 계획과는 달리 하릴없이 고속버스에서 시간을 보내야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것은 본사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 양 대리님, 일렉트릭 물산 비서실인데요. 오늘 서울로 돌아오신다죠?
- 예, 그렇습니다.
- 뭘 타고 오실건가요?
  그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시험에 들었음을 알아챘다. 그가 일하는 일렉트릭 물산의 사장 가성비씨는 직원들이 출장을 다니며 허투루 쓰는 돈을 제일 싫어했다.

'모름지기 가정이 만세토록 화목하려면 푼돈을 아껴야 하고 모름지기 회사가 만세토록 번성하려면 역시 푼돈을 아껴야 하나니.'

   운율이 묘하게 엇나간, 이 다소 재미없게 느껴지는 문장이 사장님의 푼돈복음서 1장 1절의 핵심문구임을 모르는 사람은 사내에 없었다. 그런 짠돌이 사장이 어느 날 우연히 직원 출장시 말단 대리들까지도 케이티엑스를 타고 돌아다닌다는 (모든 사람들이 공공연히 알고있던)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라는 대부분의 생각과는 달리, 격분한 사장은 화를 주체하지 못해 수컷 아프리카 코끼리의 상아로 만들었다는 명패를 충분히 어깨를 사용하여 비서실장에게 집어 던졌고, 그러고도 기운이 남아 고급형 대리석 재떨이의 상단부에 돌보다 단단하다는 제 머리를 두 번 쾅쾅 들이박더니만, 시뻘건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이마를 조르지오 아르마니 머플러 (색상 : 그레이, 울 : 100%)로 닦아가며 기어코 다음과 같은 엄명을 내렸던 것이다.

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직원 출장시 이동수단은 무조건 고속버스로 통일함.
② 국내여비정액표에서 '케이티엑스 기준' 항목을 완전히 삭제하겠음 (추억의 낙서가 너무 많아도 하얗게 지울 것).
③ 이에 기준하여 모든 기준 교통비를 삭감하겠음 (직급별 차등지급은 폐지).
④ 만약 고속버스 요금을 기준으로 더 싼 이동수단을 이용한 경우 월요조회 시간을 빌어 치하하겠음 (표창과 부상).

  그러나 일렉트릭 물산의 직원들은 담대하기로는 당해업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위인들로,
- 그까짓 표창과 그까짓 부상, 안 받으면 되지 뭐.
라는 한없이 자유로운 심정으로 계속 케이티엑스를 타고 다녔다. 아무리 사장의 엄명이라고는 하지만, 사장이 아니라 사장 할아버지라도 자기가 졸졸졸 따라와서 일일이 확인하지야 못할 것이 아닌가. 케이티엑스를 탄 다음에 고속버스였다고 우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단 한 사람도 얼굴에 심각한 기운을 드리우지 않았다. 그들이 그토록 케이티엑스를 고집하는데는 무엇보다 시간을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둘째로는 사장의 긴급 담화문 중에서 '대리까지 케이티엑스를 이용한다는' 이라는 부분이 이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과장급 이상의 97 퍼센트가 자가용을 가지고 있으며, 출장시에도 당연히 자가용을 이용하며, 다녀와서는 주유비에 감가상각까지 계상하여 출장비로 받아내는 마당에 전체의 고작 5 퍼센트만이 자가용을 가진 뚜벅이 대리 및 평사원들이 낭비의 원흉인 양 문제로 삼는 것은 엄연한 멸시요 차별라는 것이었다. 엄명을 남몰래 거부하고 여전히 케이티엑스를 애용하는 생산관리부 역세권 대리(3호봉)는 이에 울분을 느낀 나머지, 대나무 숲 깊숙한 곳에 들어가 이렇게 외치기도 했다.
- 만 몇 천원을 더 들여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비즈니스가 아니겠습니까! 니들 시간은 시간이고 우리 시간은 시간장난(소꿉장난의 방언)입니까! 그리고……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그 속시원한 외침은 궂은 날 대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리면 어김없이 리벌스, 플레이, 앤 스톱을 반복함으로써 생생하고 현장감있는 서라운드로 재생되어 흘러 나왔는데, 말 장난을 좋아하는 품질관리부 초성체 대리(2호봉) 또한 장난기가 동해 그 대나무 숲을 찾아들어갔다. 자기도 그런 유행어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단다.
- 고위직 허리는 허리고 우리 허리는 허리 아니랍니까? 맨날 빨리 일하라고 '허리 업, 허리 업' 말만 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 허리도 좀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대나무 숲은 그 말까지 녹음해주진 않았다.


*


  고속버스를 타고 다닌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출돌이들의 (자주 출장 다니는 사람들을 부르는 정겨운 사내 신조어가 되겠다) 노력은 99 퍼센트의 노력과 1 퍼센트의 잔머리로 완성될 수 있었다. 이들은 출장비가 <사후실비정산>이라는 위대한 '마그나 카르타' 아래 일비, 숙박비, 식비, 교통비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유기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경비를 절약하고 가짜 영수증으로 상한선까지 사용했음을 증명한다면 교통비의 부족분(목적지까지의 케이티엑스 왕복요금 - 목적지까지의 고속버스 왕복요금)을 꾸역꾸역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즉 고정으로 지급되는 일비와 숙박비, 그리고 식비의 사용내역을 만땅으로 채운다면 사비를 털지 않고도 얼마든지 케이티엑스의 안락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그들은 이런 기술을 조석으로 연마하여 왔으니 달리 새로울 일도 아니었다. 출장비에서 만 몇 천원 남겨 먹는 것과 고속버스 대신 케이티엑스를 타는 것, 둘 중에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이들은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었다. 마지막 단 하나의 문제가 출장보고서에 포함될 '고속버스 영수증'이었는데, 그들은 불굴의 투지로 터미널 쓰레기통을 뒤져 출발지와 도착지가 일치하는 것을 기가 막히게 구해내는 신공을 보였다. 정 쓰레기통을 뒤지기 어렵거나 거지꼴이 되도록 뒤지고 또 뒤졌음에도 영수증을 구하지 못한 경우엔 차장이나 승무원 혹은 오가는 승객들에게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 역시 이전부터 종종 시도해오던 일이기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에게 미움을 돌리지 않고도 즐겁고 명랑한 마음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가성비 사장은 자신의 엄명이 '잃어버린 멍멍이 찾습니다'라는 동네 전단보다도 덜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6 개월 후에나 알게되었는데, 여기엔 그가 회사를 아버지 가건물 왕회장으로부터 스물 다섯에 넘겨 받았다는 사실이 결정적일 것이라 모두들 추측했다. 한번도 평사원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장이 삥땅과 두루치기의 고혹적이고도 오묘한 진리를 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한 증거가 있는 말은 아니지만 확실히 사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직원들은 믿었다. 입신에 눈이 먼 어떤 놈팽이의 밀고가 아니었더라면 사장은 그나마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수증 뻥튀기'라는 (당연하지만 사장에게만큼은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상황은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실제 출돌이들이 무엇을 타고 내려가고 올라오던) 꼬박꼬박 보고서상에는 고속버스를 이용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서 출장경비 전반의 전무후무한 절약이 이루어졌으며, 그간 알게 모르게 늘어나던 실삥땅액수(지급된 출장경비-실제 사용한 출장경비-해당 출장업무와 유관하여 미구에 소멸될 기타경비) 역시 급감하였다. 서류상으로만 보면 사장의 의도는 더없이 성공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 시점에 밀고가 터졌다.

  그는 모름지기 세상에 두 가지 유형의 보스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나는 실리적인 보스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엄있는 보스다.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는 제 삼의 유형이 있을까? 그는 두 발 달린 짐승의 세계에선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실리적이면서도 위엄있는 보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때문에 순순히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리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지만 위엄은 건질 수 없기 때문이다.
- 내가 타지 말라면 다같이 타지 않는거야! 케이티엑스고 나발이고…….

  밀고를 접한 그는 분노와 수치심이 짬뽕 짜장 섞인 짬짜면처럼 되어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하여 그의 위대한 엄명에는 비로소 다섯 번째 줄이 추가되게 되었던 것이다.
⑤ 비서실 산하 감사팀을 신설함으로써 고속버스 탑승 여부를 철저히 조사하고 만약 허위로 드러날 경우 출장과 관련된 비용처리를 일체 불허할 것.

*


  허나 일렉트릭 물산의 출돌이들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신설된 감사팀이 허위 여부를 조사할 수 있는 부분은 보고서 영수증의 진위 조사 아니면 동행자 간의 진술 조사일텐데, 어느 쪽이어도 충분히 맞대응할 자신과 여력이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전자의 경우라면 기껏해야 날짜와 시간을 확인하거나 경유한 노정이 최적의 순로인지 아니면 잔머리 굴려 뱅글뱅글 돌아갔는지를 파헤치는 것인데, 가짜 영수증만 잘 얻어오면 감사팀 할아버지라도 손을 쓸 수 없는 부분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서로 입과 입이 맞지 않아 빈틈을 보이는 경우에나 문제가 될텐데, 역시 서로서로 입만 찐하게 잘 맞추면 트집잡히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그들은 회사 앞 사거리 '산유화 숯불갈비'에 모여 사내 비밀조직인 '출장단'을 만들고, 의리의 예를 보이기 위해 서로 팔뚝에서 피를 내어 섞어 마셨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업무와 무관하나 유관한 척 가장한 전화를 걸어 출발 및 도착 시각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었으며, 더욱 더 철저하게 더욱 더 전문적으로 터미널의 쓰레기통을 밑바닥까지 뒤짐으로써 일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고속버스 영수증을 줍거나 구걸하여 의기도 양양하게 돌아왔다. 이에 일렉트릭 물산 비서실은 특별출감팀 (출장감사의 준말. '출장뷔폐'처럼 '출장'이 '뷔폐'를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출장'이 '감사'의 목적어가 되는 형태다) 초대졸 실장은,
- 사장님의 승부욕이 우리 회사 직원들을 거지, 부랑자, 홈리스처럼 쓰레기통이나 뒤지도록 만들고 있누나.
하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그 한숨이 태평양을 건너 허리케인이 되고, 남태펴양에서 윌리윌리가 되고, 인도양을 건너 사이클론이 되는 동안에도 출돌이들은 점빵용 계산기를 가져다 놓고 상부의 눈을 피해가며 가장 환상적이며 가장 독창적인 조합의 일비 계산을 만들고 있었다. 그 조합은 감사팀이 무슨 용을 쓰더라도 실체를 밝혀낼 수 없도록 난해하고 복잡하며 철학적이고 또한 고도로 심오했으며, 일원 단위까지 잘 빠진 연극 대본처럼 섬세하고 우아하게 짜맞추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보고서 제출 직전에는 서로가 서로의 두루치기 결과를 두루 두루 살펴주며 무의식중에 관습적이고 정형화된 - 매너리즘에 젖은 일비 패턴을 집어넣지는 않았는지 두 번 세 번 확인해주기까지 했다.

  상황이 그러다보니 비서실 특별출감팀이 동원 가능한 인력을 총 동원한들 허위 사항을 밝혀낼 재간이 없었다. 예컨데 현금으로 7,580 원을 지불했다는 택시 영수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확인하란 말인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택시를 탔고, 길은 얼마나 막혔으며, 택시기사가 어떤 길을 경유하여 갔는지를 알 길이 없는데 말이다. 또한 장급 여관에서 묵고 모텔이었다고 우기는 것도 그렇다. 호텔이 아닐 바에야 몇 명이 어떤 방에서 얼마를 내고 묵었는지,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풍찬노숙을 하고 영수증을 가라로 그린 것인지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마찬가지로 시외버스를 세 번 탔는지 네 번 탔는지, 그게 얼마짜리 구간인지, 요금에서 백원을 올려 보고했는지 내려 보고했는지, 식당 이름으로 달랑 내역이 적힌 '김해식당', '미회식당', '자연상회', '경상분식', '할머니집', '대포집', '부산대앞', '당고모가 차려주신 밥상'에서 뭘 어떻게 처먹고 왔는지, 거래처의 요구로 불가피하게 '스타벅스'나 '할리스'에서 업무와 유관한 일을 수행했다던지 하는 일은 정도령이나 애기선녀가 아니고서야 앉은 자리에서 진위 여부를 꿰뚫어볼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감사실로부터 그러한 애로사항을 전해들은 가성비 사장은,
- 그럼 직원 출장시 직원 한 명에 감사팀 한 명을 딸려보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도록 하면 되겠구만……. 지깟 것들이 뭐 별 수 있겠어?
하고 궁시렁거렸다고 한다. 

  이에 왕회장이 자신을 일렉트릭 물산 부사장 자리에 앉혀놓은 이유를 문득 깨달은 지대공 부사장은 급히,
- 하지만 사장님. 감시자를 딸려보내는 비용이 모든 직원을 케이티엑스 특실에 태우는 비용보다 더 들어갑니다만…….
- 부사장님, 정말입니까?
- 예. 그렇습니다.
  천하에 두려울 것 없다는 가성비 사장도 이때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단다. 물론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위인은 아니었다. 이쯤해서 적당히 물러나도 '고무줄 출장비'의 폐단 대부분이 사라졌으니 체면도 차리면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일텐데, 그의 머리 속에는 오직, 타지 말라는 케이티엑스를 기어코 탄 놈들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했다. 크게 회사 경비를 떼어먹는 소도둑들보다는 허용된 경비 내에서 케이티엑스를 타고 다니는 거짓말장이들이 더 미웠다.

  '이것들이 도대체 나를 뭘로 보고…….'

  일렉타워 달 밝은 밤에 스카이라운지에 홀라 앉아 얼음 채운 양주통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속에 밤을 보낸 그는 아침이 밝기가 무섭게 다시 부사장을 만났다.
- 부사장님. 내일 정오를 기해 모든 출장비용은 카드로만 결제하도록 엄명을 추가하겠습니다.
- 신용카드요?
- 그래요. 카드로 사용하면 모두 기록이 남으니까. 출장비 내역이 투명해질 겁니다. 회사에서 출장용 체크 카드를 발급해 주는 겁니다. 미리 예상 출장비를 넣어주는 거고요. 남은 돈 중에서 증명 가능한 비용은 처리해 주는 겁니다. 내역이 모두 남을 거고요. 고지서는 관리부로 날아오게 되겠지요. 사후 환급보다 훨씬 더 직원들에게도 부담이 적을테고 말입니다.
- 법인 카드로 만들자는 뜻이십니까?
- 아니요. 법인 카드가 아닙니다. 그렇게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저랑 부사장님이랑 강실장이랑 몇몇 임원진 명의로 카드를 새로 만들 겁니다.
- 쉽지는 않을텐데요. 카드를 사용할 수 없는 지출은 어차피 자비 처리를 증명해야 하잖습니까.
- 부사장님, 그런게 어딨습니까? 포차에서도 카드를 받는 시대에요. 초실장 불러서 물어봤더니만 고속버스도 카드 결제가 된답디다.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도 할 수 있고요.
- 택시도 해당됩니까?
- 감히 나도 안 타고 다니는 택시를 타는 양반들이 있답니까?
- 아닙니다. 그렇지는…… 단지 예를 들어보인 것 뿐입니다.
- 거 왜 있잖습니까? 택시도 카드 받는 택시있어요. 지난번에 초실장이 뭐라고 얘기 하더만.
- 시외버스는요?
- 시외버스에서 카드를 안 받습니까?
- 예,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 난생 처음 듣는 소린데…… 초실장한테 한 번 물어봐야겠습니다.

*


  다음 날 정오, 가성비 사장은 사내 방송 (언제나 당신 곁에 ECNBS) 통해서 기존의 엄명에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줄이 추가되게 되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시각부터 유효한 것임을 발표하였다.
⑥ 향후 출장자는 비서실 산하 특별출감팀으로부터 '일렉트릭 물산 비지니스트립 카드'를 받아 일련의 출장 비용 결제에 사용하도록 함.
⑦ 카드 처리가 불가능한 항목에 대해서는 기존과 같이 일단 자비처리 및 사후 환급을 원칙으로 하지만, 만약 부적절한 행위가 의심되는 경우 엄중히 그 댓가를 물을 것임.

  '일렉트릭 물산 비즈니스트립 카드'는 (출돌이 중의 일부는 그 명칭이 너무 길다고 제멋대로 자르고 줄여 '스트립 카드'라고 부르기도 하여 사내 여직원들을 기겁케 했다)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임원용은 <가성비 프리미엄>으로 일당 3만원의 일비, 일당 15만원의 숙박비, 일당 4만 5천원의 식비, 그리고 출장지까지의 왕복 고속버스 비용만큼이 입금된 것이었다. 그 아래 차과장용 <지대공 익스트림>, 마지막 대리 이하용 <초대졸 마스타>, 모두 각각의 국내여비정액표에 맞추어 수준에 걸맞는 금액을 품고 발급되었다.

  이 회심의 아이디어에는 한 가지 실수가 있었는데 고지서만으로는 출돌이들의 잔머리를 얼마나 훌륭하게 막았는지를 증명할 길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카드 고지서엔 출발지와 도착지가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역 또한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만 달랑 찍혀서 날아왔기 때문이다. 그 상세를 알기 위해서는 또다시 카드 명의자 (사장, 부사장, 그리고 특별감사팀 실장) 이름으로 영수증이나 티켓을 다시 발행하여 확인하는 번거로움을 거쳐야 했다.
- 설마 놈들이 그것마저 조작했으려고……. 

  가성비 사장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으나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좀처럼 불안한 감을 떨치지 못했다. 만약에 자기들 사비를 털어서라도 케이티엑스를 타고 다니겠다고 주장하면 어떻게하지? 어쩌면 출돌이들이 주요 출장지 지역 사회에 인맥을 동원하여 침투하지 않았을까? 자영업을 하는 친지나 친구, 선배와 후배, 선임과 후임을 총동원하여 카드 결제기로 은밀한 장난을 치고 유유히 케이티엑스를 타고 올라오는 것은 아닐까?

  그게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장은 그 생각에 매여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이사 회의도 내팽겨친 채 비서실과 산하 감사팀을 들쑤시며 쥐꼬리만한 흠집이라도 잡아내라 강요했으며 보다 철저한 감시와 감시자가 제대로 업무를 수행하는 지를 감시하기 위한 또다른 감시자의 인원을 충원함으로써 감사팀은 나날이 비대해졌다. 급기야는 미래전략팀보다 더 많은 인원이 근무하는 부서가 되었다. 한편 과거 관리부 아래 경리나 서무들이 맡아보던 일을 사장 직속의 비서실 감사팀으로 흡수 통합됨에 따라 관리부에서는 대폭 감원이 이루어졌다.

  그러는 동안에도 가성비 사장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은밀하게 케이티엑스를 타고 다닐 것만 같아서였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최후의 수단으로 '눈으로 확인하자'는 주장을 꺼내 들었다. 이름하여 작전명 '칸의 분노'다. 왜 그런 괴상한 부제가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⑧ 출장자들은 출장지로 떠나는 동안, 그리고 출장지에서 돌아오는 동안, 삼십분 간격으로 비서실 산하 출감팀의 요원들과 화상통화를 하며 위치를 보고할 것.

 

*



  바로 그것이 지금 양산박 대리가 화상전화를 들고 있는 이유다. 삼십분 간격으로 그는 비서실에 전화를 하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젠장, 이게 뭐하는 짓이람.' 그는 투덜거리며 최근통화목록에서 일렉트릭 물산 비서실 특별감사팀을 찾아 재발신을 눌렀다. 또르르르, 또르르르, 신호가 가더니만
- 일렉트릭 물산 비서실, 출장추적 감사팀 유소민 (You, So Mean) 요원입니다.
  요원 좋아하고 자빠졌다. 사장은 감사팀 직원들에게 요원이란 직급을 만들어 붙여 주었다. 평사원보다는 높고 대리보다는 아래라는데, 이런 시스템을 꾸릴 돈이 있으면 그냥 케이티엑스 타도록 내버려 두는 게 더 경제적이겠다.
- 상품관리부 대리 양산박입니다.
- 양 대리님. 지금부터 작전명 '칸의 분노'에 따라 대리님과 저희 비서실 사이의 모든 대화는 녹화될 예정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녹화 자료는 법적 강제력을 띠지는 않지만 이후 저희 감사팀 업무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나 일렉트릭 물산의 위상과 안위에 직결되는 중차대한 일이라 판단되는 경우에 한하여 대리님의 동의를 구하지 아니하고도 자의적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에 이의 있으십니까?

  이의야 있지만 그걸 지금 어떻게 말해? 그는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 없습니다.
- 좋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출비감사 파일 넘버 50506. 2006년 3월 25일 화요일. 대상자 상품관리부 양산박. 직급 대리. 맞습니까?
- 예. 맞습니다.
- 양산박 대리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아…… 아마도 경부고속도로겠지요. 표지판을 보니 양산 인터체인지 근방이라는 것 같네요.
- 양산박 대리님, 어떤 교통수단으로 상경하시는 중입니까?
- 보시다시피…… 고속버스입니다.
  화면 속 요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 양산박 대리님, 버스 내부를 좀 보여주십시오.
- 꼭 그렇게까지 해야합니까?
- 양산박 대리님, 두 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럼 버스 내부를 좀 보여주십시오.

  미치고 팔짝 뛰겠군.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전화기를 들고 찬찬히 좌우를 비추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하게 보였던지 기사가 운전하다말고 룸 미러로 힐끔 그를 돌아보았다. 정말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 됐습니까?
- 양산박 대리님, 좌석 번호가 어떻게 되십니까?
- 13번 입니다.
- 양산박 대리님, 14번 좌석 손님에게 이 전화를 건네어 주십시오.
- 뭐라고요?
- 양산박 대리님, 두 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당장 14번 좌석 손님에게 이 전화를 건네어 주십시오. 정말로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 동서울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인지, 지금 시각이 동경 135도 표준시 기준 현재 몇 시 몇 분인지, 이해관계가 없는 제 삼자의 증언을 수록해야만 합니다. 거부하실 경우 인사상 불이익을 받으실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생전 초면인 옆 좌석 승객을 쳐다보았다. 별 꼴 다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이 괴상망측한 일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빌어먹을,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람!

(2005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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