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118. 순진한 호의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9. 7. 19.

본문

  할머니는 매일 아침 그렇듯 오늘도 새벽 다섯시에 일어났다. 헤이즐에게 아침밥을 챙겨주기 위해서다. 하늘이 두 쪽, 세 쪽이 나더라도 아침은 먹여야 한다는 게 할머니의 지론이었고, 하늘이 네 쪽, 다섯 쪽 나도 아침은 얻어먹고 나가야 한다는 게 헤이즐의 신념이었다. 늦어도 아침 여덟시엔 집을 나서야 하는 헤이즐은, 늦어도 일곱시엔 침대에서 기어 나올 것이다. 보통 여섯시에 이미 깨어있는 할머니는, 늦어도 보통 일곱시까지 토스트를 굽고 스크램블 에그를 만들고 커피를 내렸다. 어제 남은 음식이 냉장고에 들어가 있음에도 매일 아침 굳이 새로 차리기를 고집했다. 냉동실 가득 냉동식품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아침식사를 만들기를 고집했다. 그게 밖에 나가 일하는 헤이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토스트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져 올라오는 사이에 할머니는 오렌지를 직접 짜서 신선한 주스를 만들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그녀를 위해 (비록 그 고기가 그 고기는 아니지만) 스팸도 준비했다. 냉장고에서 새 피클을 꺼내 써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보통 일곱시가 되면 헤이즐이 일어났다. 욕실에서 그녀가 씻는 소리가 들려오면 할머니는 본격적으로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둘은 마주 보고 아침을 먹었다. 헤이즐은 그런대로 투정 없이 할머니의 음식을 잘 먹었다. 특별히 입맛에 맞지 않아하는 적도 없었다. 식사 후, 치장을 위해 한바탕 법석을 피운 헤이즐이 집을 나설 때가 되면 할머니는 현관 밖까지 따라 나가 배웅했다. 헤이즐이 할머니를 꼬옥 껴안은 다음 활달하게 손을 흔들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것은 마치 프로그램처럼 정해진 순서였다. 매번 같은 패턴이었지만 할머니는 그게 싫지 않았다.

- 할머니, 나 다녀올께. 

- 그래, 차 조심하고 잘 다녀와.

- 알았어요. 할머니도 조심. 무슨 일 있음 전화줘요.

- 그래.

 

*

 

  할머니와 헤이즐은 다섯 달 전에 처음 만났다.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겨우 두 달 전의 일이다. 사실 친할머니-친손녀가 아니다. 헤이즐 넛(Hazel Nutt)이라는 이름의 아가씨는 사실 할머니가 다니는 치과에서 일하는 간호사였다. 환자와 간호사로 만나서 어떻게 3개월만에 같이 살게된 것이다. 분명 이상한 일 아닌가. 첫눈에 양안에서 스파크를 튀긴 열정적 남녀조차 아마 그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연은 이랬다. 할머니는 동네에서 '말 많은 할머니'로 통했다. 가족은 물론 이웃 주민들에게 (심지어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도) 한두 시간은 거뜬히 말씀을 늘어 놓을 만큼의 수다 욕구와 왕성한 기력을 자랑했다. 결정적으로 한 얘기를 하고 또 하기가 일쑤였다. 늙을수록 말이 많아진다는 누군가의 말은 어쩌면 참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대개 할머니의 그런 부분을 싫어했다. 가족들도 싫어했고 이웃 사촌들은 더더욱 싫어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바빴고 할머니는 외로웠다. 젊은 사람들에게 시간은 부족한 것이었고 할머니에게 시간은 너무 남아 슬픈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재미있는 것이 차고 넘치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이미 팔순을 앞둔 할머니의 이야기 거리는 별로 흥미로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할머니는 거꾸로 남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은 또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이 차고 넘치는 요즘 같은 세상의 이야기는 할머니에게는 조금의 관심도 없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할머니는 남들의 관심사에는 관심도 없었고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도 없었지만 남들이 자기 얘기를 들어주기는 바랐던 것이다. 정확히 그게 문제였다.

  할머니에게는 진짜 손녀가 있었다. 그것도 셋씩이나 있었다. 큰 애는 큰 아들의 딸이었고 나머지 두 자매는 둘째인 딸의 딸이었다. 올해로 각각 스물 둘, 스물 넷, 스물 일곱이 되는 이 세 아가씨 사이에는 이렇다할 공통점이 없었지만 딱 한 가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그네들의 친할머니와 이야기 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많은 경우에 길었고 지루했고 배려가 부족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소한 일로 시작하여 항상 도를 넘는 수위에서 끝났다. 동네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가족사가 주된 주제였다. 남의 집 혼사, 어떤 집 고부 갈등, 다른 집 부부 싸움, 누구네 집 아들의 성공, 혹은 그보다 더 흥미로운 실패 등이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였다. 손녀들이 보기에 그런 수준의 남 이야기는 '뒷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것도 '연예인 뒷담'처럼 재미있지도 않은, 친구들 만나 써 먹을 수도 없는 유익하지도 않은 뒷담. 결정적으로 여기에 노인 특유의 훈화 말씀이 곁들여졌다. 모든 이야기는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이 나라를 이룩한 기성 세대를 존경할 줄 모른다는 할머니의 고집스러운 세계관 위에서 재구성되었다. 할머니에게 젊은 세대란 물론 '자식 세대'와 '자식의 자식 세대'의 합집합이었다. 남의 집 혼사, 어떤 집 고부 갈등, 다른 집 부부 싸움, 누구네 집 아들의 성공, 혹은 그보다 더 흥미로운 실패 등에서 시작한 가십성 이야기가 그렇게까지 비약된다는 것은 실로 불가해한 일이었다. 흡사 아침 드라마의 라디오 버젼 같았다. 손녀들은 실제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할머니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공부다 일이다 바빠 원래 추수감사절이 아니고서는 보기도 힘든 손녀들이기는 했지만 조손간의 거리는 그렇게 더 멀어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노화로 제 기능을 잃어버린 할머니의 치아는 시한 폭탄과도 같았다. 이는 동네 치과의 의사도 인정한 바였다. 닥터 마이크 로치(Mike Rotch)는 순간적으로 이 할머니만으로도 자기 여름 휴가 비용을 뽑아낼 수 있음을 직감했다. 휴가지는 보라보라와 카우아이 둘 중의 한 곳으로 결정될 예정이었다. 그만큼 할머니의 치아 상태는 심각했다. 대신 지갑은 꽤 두툼해보였다. 다행히 자기 몸이 걸린 일에 돈을 아낄만큼 구질구질한 노인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의사는 할머니가 다른 병원으로 가버릴까봐 겁이 났다. 이를테면 노인네들이 좋아하는 대학병원 혹은 그에 준하는 대형종합병원 말이다. 그나마 성한 치아의 충치 치료 같은 싸구려 작업만 하고 소견서나 써줄 수는 없었다. 여름 휴가의 퀄리티가 걸려있는 문제를 두고 3차 진료기관 좋은 일만 하기는 싫었다. 어떻게든 할머니를 자기 병원에 붙잡아 두어야만 했다. 의사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예사 상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큰 병원을 알아봐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님을 이해시키고자 애썼다. 품은 많이 가겠지만 동네 치과 의사인 자기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수준의 작업임을 강조하고자 애썼다. 그리고 전담 간호사를 붙여주었다. 전담 간호사는 은퇴 노인들로 바글바글거리는 이 조용한 교외 도시에서 그가 단골 손님을 관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할머니처럼 혼자 사는 노인에게는 특히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전담 간호사들은 외로운 노인네 이야기를 들어주도록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또한 전문 직업인답게 전문 지식을 충분히 활용하여 수시로 애로 사항을 해결해줄 수 있도록 지시받았다. 대개의 경우 젊고 똘똘한 간호사들은 그 임무를 무리없이 해냈다. 

  할머니처럼 특수한 상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할머니에게 처음 배당된 사람은 신참 매킨지 추 (Makenzie Zhou) 간호사였다. 그녀는 신참다운 패기와 신참다운 사명감으로 할머니가 원하는 모든 일을 해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끝내 채 24시간도 버티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전담 간호사임을 알게된 할머니가 하루만에 장장 여섯시간에 걸쳐 '이야기 상대'로 훈련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전담 간호사'라는 말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장해서 해석했다. 할 이야기가 많았고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는 그녀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피차 이야기하기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진료가 없는 날이었음에도 아침 9시, 오후 1시, 오후 4시에 찾아와 각각 두 시간씩 그녀를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따금 다른 환자가 찾아와 그녀가 일을 봐야하는 경우조차 할머니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 잠시 기다리지'라는 의연한 표정으로 정수기에서 생수나 받아 목을 축이고 있다가, 다시 짬이 나기가 무섭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장하자면 마치 20년 분량의 동네 대소사가 한꺼번에 그녀 머리로 다운로드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의사가 이 할머니를 특별 관리하라고 신신당부하지만 않았더라도 훨씬 상황이 나았을런지 몰랐다. 그리하여 신참다운 패기는 신참다운 공포가 되어버렸고, 신참다운 사명감은 신참다운 부담감이 되어버렸다. 후일 그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 할머님, 할아버님 이야기 들어드리는 일에는 익숙해요. 어려서부터 대가족 사이에서 자라나 특별히 힘들 것도 없고요. 그런데 이 할머니의 경우에는 조금 달랐어요. 굉장히 외로운 분이라는 건 알겠는데 배려해드리기가 너무 어렵더군요. 특히 숨도 안쉬고 계속 말씀을 하시는데 저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어요. 참다 참다 안되서 '이것도 일이다'라는 심정으로 이 악물고 버텼는데 귀에서 피가 나는 기분이었고 나중에는 다리가 다 후들거렸어요. 그날요? 집에 돌아가기가 무섭게 하루 동안 먹은 음식을 모두 게워냈다니까요. 특별히 그 분에게 악의가 있진 않지만 말씀을 좀 자제하셔야 할 것 같다고는 생각해요.

  닥터 로치는 할머니에게 다른 간호사를 붙여주기로 결심했다.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했다. 일단 큰 돈을 들여 대공사를 벌이겠다고 결심할 때까지 찰싹 붙어서 설득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신참 매킨지 간호사는 너무 어렸다. 처음부터 경험이 없는 초짜를 붙여주는게 아니었다. 그래서 7년 경력의 케이샤 디야(Casey Deeya) 간호사가 새롭게 간택되었다. 이미 일곱 명의 혼자 사는 노인을 전담하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그녀는 수완이 좋았다. 자기 휴대전화번호를 노인들 전화기에 입력해드리고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들을 대신해 보호자를 저처할 정도로 의욕도 대단했다. 퇴근 후에도 종종 노인들에게 밑반찬을 챙겨드리는 걸로 평판이 자자했다. 하지만 그녀 또한 1주일 이상 버티지는 못한 채 할머니의 집요함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하루 종일 졸졸 쫓아다니며 말을 걸어오는 걸로도 모자라 밤새 전화를 걸어 이야기를 나누자고 채근해대니 노련한 그녀조차도 배겨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까지도 그녀는 당시 경험을 묻는 질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 할 말 없어요. 할머니는 정말 무서운 분이에요. 뭐랄까…… 그냥 여기까지 하죠.

  닥터 로치의 마지막 선택이 바로 헤이즐 간호사였다. 솔직히 그녀는 병원에서 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태를 벗지도 못한 생활 습관과 무책임한 행동으로 여러 번 의사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그녀 외에는 가용인원이 없어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할머니에게 붙여준 아이였는데 얄궂게도 1주일을 버텨냈다. 2주일은 거의 기적적인 기록이었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격동 20년'을 모두 마스터한 그녀는, 피 섞인 가족도 견뎌내기 힘들다는 '시집살이 크로니클스'까지 진도를 빼기 시작했다. 신명이 오른 할머니는 거의 병원에 체류하다시피하며 과거 당신의 시어머니와 매일같이 벌였던 날카로운 신경전의 기록을 헤이즐에게 들려주었다. 다른 간호사들은 언뜻 들려오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참을성 없기로 유명한 헤이즐이 어떻게 견뎌내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닥터 로치 또한 예상치 못한 결과에 깜짝 놀랐지만, 이로써 할머니가 자기 병원을 신뢰하게 된다면 어쨌든 싫을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헤이즐은 한 달을 버텼고 두 달을 버텼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나자 할머니는 누구도 헤이즐 간호사를 대신해 자기 말동무가 되어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녀는 할머니의 엄청난 수다욕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지도 몰랐다. 

  다시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헤이즐은 병원 식구들 앞에서 할머니네 들어가 살게 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다른 간호사들을 포함해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닥터 로치 또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럭저럭 잘 견뎌내었다. 할머니가 드디어 임플란트를 해넣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소식이 함께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수입 임플란트 재료에 예비 보철 포함 최고급 보철을 사용하여 상악 하악 14개 세트.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의사는 팬티 바람으로 서재 테이블에 올라가 람바다를 추었다. 팬티보다 더한 차림으로, 람바다보다 더한 춤도 출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물론 이 동거를 싫어하는 사람도 물론 있었다. 할머니의 아들이 그랬고 딸이 그랬다.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 그 간호사와 친하게 지내 적적하지 않으시다면 좋은 일이죠. 혼자 방에만 계시면 우울해지기 마련이잖아요. 하지만 집에까지 들인 건 좀 지나쳤어요. 막말로 그 아가씨를 어떻게 믿습니까? 요즘 젊은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딸은 역시 펄펄 뛰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 엄마, 뭔가 이상해요. 자기 친할머니하고도 같이 살기 꺼려하는 게 요즘 애들인데 남의 할머니 뒤치닥거리를 하며 살겠다고요? 뭔가 이상한 애가 틀림없어요. 내 말 들어요. 백퍼센트 엄마 돈 노리고 들어온 애가 틀림없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할머니는 강력하게 헤이즐을 변호해주었다. 니들 말도 맞지만 겪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 사람이 참 괜찮더라, 요즘 그렇게 참한 아가씨도 없다는 것이 주된 논조였다. 오히려 손주 놈이라도 있었으면 둘이 엮어줬으면 좋았을 걸 입맛만 쩝쩝 다셨다. 좀 철이 없다는 것이 동네 사람들의 중평임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만 보면 도망가는 진짜 손녀들보단 백배 낫다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아들과 딸은 어떻게든 설득해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할머니 고집이 워낙에 완강했다. ① 내가 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니들은 내가 행복한 꼴을 못 보겠단는 거냐, ② 그럼 니들이 직장 그만두고 이리로 내려와서 대신 나랑 같이 살아라, ③ 나랑 말 섞기도 귀찮아하는 니들 딸년들보단 얘가 백배 낫다 등의 반격이 이어지자 별 수 없이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그들은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닐 거라고도 생각했다. 반백년 이상의 삶의 궤적을 두고 이뤄진 이런 동거가 절대 오래갈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외로 헤이즐과 할머니는 큰 문제 없이 잘 지내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다시 이십년 전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가족을 위해 아침상을 차렸다. 헤이즐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돌아오면 하루 종일 그녀의 퇴근만을 기다렸다. 무슨 반찬을 해주면 이 아이가 좋아할까? 무슨 수다를 떨어주면 이 아이가 좋아할까? 하루 종일 그런 생각만을 했다. 젊은 애가 노인네 퀘퀘한 냄새를 꺼려할까봐 하루에 너댓번식 샤워를 하고 향수를 뿌렸다. 젊은 애가 지루해할까봐 케이블 TV라는 걸 달았고 난생 처음으로 타코나 퀘사디아라는 걸 먹어보려고 애도 써봤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헤이즐은 변함없이 할머니에게 잘했다. 여전히 할머니 수다를 잘 들어주었고 적절히 받아쳐주었다. 한번도 싫거나 귀찮은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예전에 몰랐던 애교와 아양까지도 발견하게 되었다. 진짜 손녀들은 가식이라도 그런 예쁜 짓을 한 적이 없었다. '얘가 내 진짜 손녀라면 얼마나 좋을까?' 할머니는 하루에 백번 천번 그런 생각을 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할머니는 치과에 가야했다. 임플란트 제작을 위해 시술을 받고, 또 그 진행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마다 헤이즐은 일하던 중에 만사 제치고 집으로 달려와 다시 할머니를 병원까지 모시고 갔다. 충분히 거동할 수 있으면서도 할머니는 그게 싫지가 않았다. 늙고 쭈글쭈글한 몸을 싫어하지 않고 안아주는 그 따뜻한 손길이 고마웠을 뿐이다. 정말로 힘이 떨어져 부축받는 척 하면서 할머니는 그녀에게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약간의 각색을 거쳐 들려주었다. 옆집 사돈네 아저씨가 사기를 당해 집을 홀랑 날려먹은 사연, 앞집 아저씨 둘째 딸이 열 살이나 많은 남자와 눈이 맞아 가출한 사연, 뒷집 부부 싸움의 와중에 가보로 내려오던 미술품이 박살난 사연 등 작은 동네에도 사연은 참 많았고 이야기 거리는 상상 이상으로 무궁무진했다.

 

*

 

  할머니네 식탁은 원래 삼시 세끼 스튜만 올라가는 곳이었다. 오죽했으면 식탁 중앙 냄비받침이 아예 늘어붙어 한 몸을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헤이즐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할머니는 헤이즐이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려고 애를 썼다. 두 말 없이 그건 고기였다. 50킬로그램도 안되는 삐쩍 마른 몸에도 불구하고 헤이즐은 고기를 잘 먹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는 물론이고 오리고기, 개고기, 양고기까지도 마다하는 법이 없었다. 끓이고, 데치고, 굽고, 찌고 등등 조리법을 가리는 법도 없었다. 막말로 무슨 고기를 먹지 못해 환장한 애 같았다. 고기 타는 냄새로 진동 하는 저녁 식탁의 대화는 늘상 이런 식이었다.

- 고기는 삼시 세끼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다니까요.

- 그려도 채소도 골고루 먹어야지.

  이때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할머니에게 아양을 떨었다. 말하자면 그녀의 필살기였다.

- 내일은 오리고기 해주면 안되요? 요즘 몸에 기름이 너무 부족해서. 게다가 오리고기가 미용에 그렇게 좋대요. 

  당연히 할머니는 다음 날 오리고기를 사러 마켓에 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저녁상에 마주앉아 그녀와 수다를 떠는 것은 할머니의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꾸역꾸역 잘도 먹는 모습이 사실 복스럽고 귀엽기도 했다. 정작 할머니는 임플란트 시술을 받는 과정에 있어 뭘 먹기도 쉽지 않았으나 헤이즐의 먹는 모습을 보자하니 어쩐지 절로 행복해졌다. 고기를 자르고 구워 먹여주며 할머니는 쉬지도 않고 옛날 시집살이 이야기를 꺼내 들려주었다. 그 유명한 '시잡살이 크로니클스'. 불타는 증오 속에 한 얘기가 또 나오고 또 나오는 '네버엔딩 스토리'인 탓에 피 섞인 가족들도 지겨워한다는 바로 그 얘기다. 상추 깻잎에 잘 익은 고기를 올려 입에 밀어넣으며 헤이즐은 절묘하게도 맞장구를 쳐드렸다. 할머니는 당신의 악랄했던 시어머니 흉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직 이승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유쾌하고 행복한 저녁상이 끝날 때쯤이되면 볼록해진 배를 두드리며 헤이즐은 보통 이런 식의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 할머니, 내일은 양고기 사주시면 안되요? 지방도 적고 체력에 좋대요.

 

*

 

  할머니의 임플란트는 석 달 반만에 완성되었다. 다행히 뼈가 튼튼해 잘 붙은 편이었고 이렇다할 문제 없이 시술은 마무리가 되었다. 오래 고생했던 치아 문제를 드디어 해결하게 된 할머니는 물론 헤이즐도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주었다. 이를 기념하는 차원에서 소갈비나 한 번 배부르게 먹어보자는데 둘은 의견을 같이 했다. 이제야 임플란트 시술을 마친 양반이 덜렁 소갈비를 뜯을 수야 없을테니 실상 돈 내는 사람과 고기 뜯는 사람은 별개겠지만, 그래도 기쁜 날이니!

  헤이즐이 단숨에 갈비 다섯 대를 깨끗하게 뜯어먹는 동안 할머니는 그저 만족스럽게 그녀의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살코기만 발라 조심 조심 씹으면 못 먹을 것도 아니었지만 그보단 이 편이 훨씬 할머니를 배부르게 했다. 그녀는 정말 잘 먹기도 잘 먹었다. 그 먹성 좋음을 굳이 문자로 표현하자면 '와구와구 얌냠쩝쩝' 정도랄까. 어이구, 귀여워라!

- 근데 할머니, 나 여행 좀 가도 돼?

- 여행? 무슨 여행?

- 그냥 날도 덥고 병원도 다음 주에는 휴가라잖아. 어디 시원한데 가서 일주일만 놀다 올께.

- 혼자서?

- 친구들이랑. 할머니한텐 정말 미안하긴 한데 다음에 꼭 모시고 갈께요.

  약간의 서운함을 느꼈지만 할머니는 이해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실 젊은 애가 노인네랑 살며 오죽 답답했겠는가. 저도 가끔은 마음 맞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을 것이다. 일년에 한 번 뿐인 휴가까지 노인네 뒤치닥거리를 강요해서야 되겠는가. 당연히 허락해야 될 일이고 어쩌면 굳이 자기한테까지 물어볼 필요가 없는 일이리라 생각했다.

- 그래라. 너도 네 생활이 있어야지. 용돈 조금 줄테니 친구들이랑 신나게 놀고 와. 할미는 괜찮으니까.

- 할머니 정말? 

  입이 귀에 걸린 헤이즐은 벌떡 일어나더니만 식탁을 뛰어 넘어와 할머니에게 마구 뽀뽀를 해댔다. 침도 약간 묻었고 고기 냄새도 심하게 났지만 할머니는 그 또한 싫지 않았다. (진짜 손녀들은 자기 반경 5미터 내로도 들어오지 않는 것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그제야 머쓱해진 헤이즐은 할머니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 다음,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 할머니 이 집 고기 짱 좋다. 우리 갈때 2인분만 포장해가면 안되요? 네? 내일도 먹게요.

 

*

 

  3일 뒤. 헤이즐은 가방을 꾸렸다. 병원도 일주일 동안은 휴가였고 할머니한테도 일주일간은 휴가를 받았다. 그녀는 들떠있었다. 거의 할머니 집에 들어올 때만큼의 짐을 꾸려서 핑크색 샘소나이트 가방에 꼭꼭 밀어넣었다. 처음부터 워낙 짐이 없었기 때문일런지도 몰랐다. 여행 날 아침부터 할머니는 아침을 차렸다. 아침에 배달받은 신선한 계란과 우유를 꺼냈고 꼭꼭 숨겨두었던 새 버터도 잘랐다. 일주일 간 못볼 그녀에게 든든히 집밥을 먹이기 위해서다. 비장의 카드는 와플이었다. 원래는 브랙퍼스트 소세지을 해주려고 했는데 몇 시간 후 비키니를 입어야 할 헤이즐이 난생 처음 극구 고기를 마다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비키니를 입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나 그것까지 뭐라 간섭하면 도를 넘는 잔소리가 될 것 같아서 꾹꾹 눌러 담았다. 평생 목구멍까지 올라온 잔소리를 내뱉지 않은 적이 없는 할머니로서는 그나마도 대단한 발전이었다. 헤이즐이 욕실에서 평소보다 더 오래 수선을 떠는 사이에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그녀를 픽업해 가기로 한 친구들이겠거니 생각하고 문을 열어주었는데, 엉뚱하게도 그 자리에는 닥터 로치가 서 있었다. 얼마 전까지 할머니의 입 안에서 대공사를 벌였던 바로 그 치과의사 말이다. 헤어 왁스로 한껏 머리를 올려 세우고 선글라스를 올려 낀 모습이 여간 예사롭지가 않았다. 분홍색 꽃남방에 남자 옷이라기 민망한 짧은 반바지, 그리고 터덜터덜 끌고 온 게다, 아니 플립플랍 슬리퍼를 보건데 일하다가 온 꼴은 아니지 싶었다.

- 할머님 치료하신 이는 어떠신가요? 별 문제 없으시지요?

- 그렇기는 한데, 의사 선생은 여기 어쩐 일이신가?

- 저요? 우리 넛 간호사 데리러 왔습니다.

- 휴가 아니오? 친구들이랑 놀러간다고 잔뜩 바람이 들어가 있던데.

- 휴가 맞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바로 접니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 그럼 휴가를 같이 간다는 게, 우리 헤이즐이 하고, 의사 선생하고?

- 정확하십니다. 할머님. 잘 데리고 놀다 오겠습니다.

 

  내막은 이랬다. 원래 의사는 헤이즐을 짤라버려야 겠다고 이를 갈고 있었다. 다른 간호사들에 비해 책임감도 부족하고 철도 덜 들어 칠렐레 팔렐레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병원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는 메킨지 간호사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같이 여름 휴가나 가보자고 살짝 꼬셔볼 속셈으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때 할머니 사건이 터졌다. 헤이즐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할머니의 차트와 자기 지갑이 두툼해지자 의사는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렇게 큰 건수에 공을 세운 걸 보면 아주 쓸모없는 애는 아니구나 싶었던 것이다. 한 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이제까지 느껴왔던 모든 단점들은 이내 장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철없는 게 아니라 순수하거였군. 책임감이 부족한 게 아니라 해맑은 거였어. 그러고보니 몸매도 얼굴도 정말 괜찮아. (응? 다시 보니까 상당히 괜찮은데?) 이윽고 할머니 시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의사는 헤이즐을 불러 같이 괌이나 사이판으로 휴가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헤이즐은 고기 많이 사줄 수 있느냐고 대꾸했고 의사는 그러마라고 약속했다. 그렇게 거래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할머니는 이 모든 게 남의 집 이야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음 신나게 흉이나 보고 다닐텐데.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욕실에서 나온 헤이즐은 득달같이 달려와 자신의 고용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라고. 할머니는 이 모든 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진작에 반대할 걸 하는 생각도 했다. 아무리 봐도 일주일동안 둘이 해외에 나가 있는 건 너무 위험한 생각 같았다. 안 돼! 안 돼! 마구 소리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할머니는 의사에게 냉수를 건넨 뒤, 헤이즐의 옆구리를 꼬집어 부엌으로 데리고 갔다.

- 너 같이 여행 간다는 친구가 의사 선생이었어?

- 할머니, 아파. 왜 꼬집고 그래.

- 남자랑 단 둘이 여행 가면 나한테도 그렇게 말했어야지.

  그러자 헤이즐이 정색을 했다.

- 할머니 웃긴다. 할머니가 우리 엄마도 아니고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데.

- 이 놈의 지지배가.

- 어디다 대고 이 놈의 지지배래. 잔소리 하고 싶음 할머니네 진짜 손녀들한테나 해. 난 여행 갈꺼야. 선생님이 나 고기도 사준댔어. 보라보라에는 고기맛도 경치만큼이나 황홀하대. 그러니까 나 막지 마.

  정말로 헤이즐은 왼손으로는 바퀴 달린 샘소나이트 가방을 끌고 오른손으로는 의사 선생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항상 그랬듯 다녀오겠다는 살가운 인사조차 하지 않고. 쾅, 하고 닫혀버린 현관문 앞에서 할머니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저 애가 다시 돌아올까?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는 누구를 붙잡고 수다를 떨어야 할까? 아들에게 SOS를 칠까? 딸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손녀들에게 오라고 해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현관에 앉아 문이 다시 열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2009년 07월)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