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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장학사님 납신다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9.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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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쁘다. 장학사님 오신다. 만 백성 일어나 맞으라. 

  교육과학기술정보통신어린가정부와 서울특별시교육청에서 공문이 내려온 것은 24일 오전의 일. 내달 12일로 예정된 슈퍼장학사들의 회담 장소로 노모초등학교가 결정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보를 받았을 때 노모초등학교의 강건신 (Gang, Gun Sin) 교장은 접대용 테이블에 올라가 가부좌를 틀고 명상하던 중이었는데, 그 영광된 내용이 주는 가벼운 흥분과 아드레날린 덕분에 그만 바닥으로 휘청거리다가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괜찮으시냐는 비서 미스 금의 (미수금 아님) 기겁을 뒤로 한 채 결연히 일어선 강교장은 흡사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실로 오래간만에 온 몸 구석구석 원활하게 혈액순환이 이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용솟음치는 호르몬에 늘어졌던 피부와 주름은 다리미로 다린 듯 팽팽하게 펴졌고 굽었던 등은 대나무처럼 올곧이 다시 섰다. 왕년의 근육이 돌아오기라도 한 듯 프리미엄 클래식 정장 어깨가 팽팽하게 차오르다 뻥이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고 야성적으로 팽창하던 스포츠 허벅지는 그의 맞춤형 고급 원단으로 짜여진 하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크레바스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순백색 백양 팬티가, 젊음에 있어선 언제나 현역과 다름없는 강교장의 위용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몸의 팽창을 지속하고자 더욱 격렬한 발열이 동반되었던 탓에 열이 오른 강교장은 구두를 벗고 양말을 벗었다. 한편 미스 금은 마치 변신 중인 헐크를 대하는 제니퍼 코넬리의 표정으로 그런 강교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실 미스 금은 제니퍼 코넬리의 왕 팬인 강교장이 167명을 심사한 끝에 선발한만큼 제니퍼 코넬리의 동양 버전이라고 해도 좋을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이기는 했다) 그녀는 비서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강교장의 스트립쇼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그러기 위해서 걸리적거리는 어깨 숄을 풀렀고, 거추장스러운 더플 코트를 벗어 두어야 했으며, 불편한 하이힐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러나 황급히 벽장에서 모포를 꺼내와 거진 반나체 상태인 교장의 '하의 실종 반전 패션'을 가려 드리려는 찰나 우연히 책상 다리에 발이 걸려 교장과 함께 이태리제 고급 쇼파로 뒤엉켜 넘어지고 말았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박유범 (Park, You Bum) 교감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강교장은 그런 식으로 설명을 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만.

 

*

 

  박유범 교감은 노모초등학교의 실질적인 살림을 맡아하는 남자였다. 그는 학교 안에서 자신의 유일한 상관인 강교장을 두고 "능력도 없고 감각도 없는 주제에 라인타고 출세했다"는 차가운 평가를 내리곤 했다. 실제 강교장은 학교 돌아가는 전반 사항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개는 굳이 알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은 책임자이고 관리자이고 절대자이니 큰 그림만 알아서 결정해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역용 요추보호의자에 앉는 사람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고 충분히 그래도 된다는 것이 강교장의 지론이었다. 박교감은 교장의 그런 면이 못마땅했다. 이런 경우만 해도 그렇다. S20 슈퍼장학사회담이 겨우 20일 남짓 남았는데 자기가 팔 걷어붙이고 나설 생각은 안하고 대뜸,

- 무척 중대한 일이니 교감 선생이 좀 수고 좀 해줘요.

라며 팔짱 끼고 있으면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장이 S20 슈퍼장학사회담으로 얻을 것이 없느냐면, 천만의 말씀. 최대의 수혜자다. 지금 재학중인 어린이들이 졸업한 다음 "님들, 나는 제 7회 S20 슈퍼장학사회담 개최학교 출신이에요"라고 자랑하고 다닐 것도 아니고, 장삼이사 평교사들이 그 덕에 "저는 S20 제 7회 슈퍼장학사회담 개최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 편달한 경험이 있습니다" 라고 이력서에 한 줄 적어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대부분의  영광이란 교장에서 시작해서 교장에서 끝나거나 교감까지 콩고물 조금 떨어지는 것인데 어쩜 저렇게 얄밉게도 쉽게만 얘기하는지. 박교감은 그의 머릿 속 '큰 그림'을 대충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노모초등학교가 S20 슈퍼장학사회담 개최지로 선정되었습니다. 가문의 영광입니다. 만전을 기해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말은 참 쉽지. 이렇듯 이 양반이 생각하는 '큰 그림'이란 절대 140자를 넘기는 법이 없으니 그야말로 트윗질 수준이라 할만 하다. 하지만 사실상의 실무를 모두 다 맡아져야 할 박유범 교감의 부담은 실로 엄청난 수준이었다. 너무 부담이 막중했기 때문에 지난 5회와 6회의 S20 슈퍼장학사회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자료를 먼저 구해볼 상식적인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S20 슈퍼장학사회담이다. 슈퍼다. 과학자에도 슈퍼과학자가 있고, 내니에도 슈퍼내니가 있고, 박테리아에도 슈퍼박테리아가 있듯, 장학사에도 슈퍼장학사가 있는 것이다. 16개 시도교육청을 통틀어 딱 20명 밖에 없는 영광의 이름들 (수도 서울에 셋, 자칭 구도 부산에 둘인 이유를 두고 KBO와 야구팬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있었다는 후문), 장학사들의 왕, 슈퍼장학사들을 맞아야 하는 일이라면 다른 업무는 모두 제껴 놓는다한들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박교감은 12일 오전의 일정을 모두 취소시켰다. 아침 조회도 교무부장에게 맞겨버렸다. 구두를 벗어두고 슬리퍼로 갈아신었다. 점심은 김밥으로 때웠다. 교무실 선생님들 중에 약삭빠른 몇몇은 이상 분위기를 감지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오후 2시. 무려 다섯 시간이나 지난 다음에야 박교감은 다음과 같은 긴급 메모를 완성할 수 있었다.

 

1. 환경미화의 측면 

  1) 교실청소 2) 복도청소 3) 운동장청소 4) 학교주변청소

2. 행사홍보의 측면 

  1) 홍보용 플랜카드 2) 홍보용 포스터 3) 홍보용 안내판

3. 학생지도의 측면 

  1) 생활지도 2) 교육지도 3) 교사지도

4. 행사진행의 측면

  1) 토의장준비 2) 연회장준비 3) 다과준비 4) 연회준비 

5. 귀빈환영의 측면

  1) 역까지 마중 2) 식사제공 3) 숙소제공 4) 역까지 배웅

 

  동네 반상회 계획이라기에도 상당히 어설퍼 보이는 메모지만 박교감은 나름 만족했다. 이 정도 준비하면 "신경 좀 썼다"는 소리가 나올 것이라 자신했다. 특히 무심한 강교장과는 달리 친절히 '와꾸'를 잡아 아랫사람에게 던져주는 자신의 모습에 감명마저 받았다. 이래야지. 이래야 관리자지. 관리자는 뼈대만 잡으면 되는 거다. 살을 붙이는 건 그 아래 사람들의 일이다. 물론 박교감은 친절하고 자상한 보스이기 때문에 누구처럼 방관하지는 않을 참이었다. 현장 지휘는 평교사들의 좌장인 교무부장 선생에게 맡기고 자신은 조용히 한 발 물러서는 척 하면서 남몰래 여기 저기 챙기고 다닐 참이었다. 오후 2시 15분. 그는 교무부장 김유석 (Kim, You Suck) 선생을 자리로 불렀다. 그리고 S20 슈퍼장학사회담이 다다다음주에 우리 학교에서 개최될 것이며, 자네가 교사들을 움직여서 실질적인 준비를 해야 할 것이며, 내가 항상 자네의 뒤를 봐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 것이며, 경험없는 자네가 혹시라도 당황할지 모르니 친절히 '와꾸'를 잡아봤으니 참고하라는 내용의 말을 늘어놓았다. 

  메모를 받아든 교무부장 김유석 선생은 교감보다 조금 더 긴장했다. S20 슈퍼장학사회담이라니. 말 그대로 역대급 행사가 아닌가. 정신이 아찔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교감선생님이 적어주신 개요는 최소한이구나, 최소한.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자리로 돌아간 그는 최소한의 개요에 살을 붙여서 본격적으로 계획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한 살 붙이기 작업의 기조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전에 없던 중요한 행사이니 전에 없던 초현실적 규모의 작업이 필요하겠구나. 둘째, 다시 없을 중요한 행사이니 다시 없을 초현실적 규모로 판을 벌여야겠구나.

  다음은 그 날 저녁 김유석 선생이 전체 교사 회의를 소집하여 열었던 긴급특별비상대책회의 회의록의 일부 내용이다.

 

1. 환경미화 (책임자: 유소민 (You, So Mean) 미술선생, 최돈호 체육선생 외 각 반 담임)

  1) 교실청소: 교실은 학업의 전당임을 유념

     ① 마루바닥은 반짝반짝 빛나야 함

     ② 책상은 가지런히 정렬되어야 함

     ③ 칠판은 깨끗하게 지워진 상태여야 함

     ④ 사물함은 가지러히 정돈된 상태여야 함

     ⑤ 백일장, 사생대회 결과물 등 기타 산만하게 보일만한 것은 모두 제거되어야 함

  2) 복도청소: 복도는 정신 수양의 공간임을 유념

     ① 세멘바닥은 매끈매끈 빛나야 함

     ② 쓰레기가 굴러다니지 않아야 함

     ③ 화분, 화초, 어항, 괘도, 밀대 등 기타 산만하게 보일만한 것은 모두 제거되어야 함

  3) 운동장청소: 운동장은 체력 단련의 장임을 유념

     ① 모래바닥은 사근사근 밟혀야 함

     ② 쓰레기가 날아다니지 않아야 함

     ③ 운동 기구, 철봉, 미끄럼틀 등 기타 산만하게 보일만한 것은 모두 제거되어야 함

  4) 학교주변청소: 학교주변은 학교를 위해 존재함을 유념

     ① 보도블록은 사뿐사뿐 밟혀야 함

     ② 쓰레기가 퇴적되지 않아야 함

     ③ 노숙자, 잡상인, 불량학생, 중고생 등 기타 산만하게 보일만한 것은 모두 제거되어야 함

 

2. 행사홍보 (책임자: 동덕희 (Dong, Duck-Hee) 사회선생)

  1) 홍보용 플랜카드: 플랜카드는 완전 멋진 것임을 유념

     ① 문구는 "(경) S20 슈퍼장학사회담 (축)"으로 확정함 (헤드라인체)

     ② 아래 "노모초등학교 교직원 일동"임을 삽입함 (궁서체)

     ③ 정문 상단에 하나, 후문 상단에 하나 게시함 

  2) 홍보용 포스터: 홍보는 하나의 예술임을 유념 

     ① 문구는 "빅 가이들이 몰려온다"로 확정함 (엽서체)

     ② 아래 "올 겨울 당신을 흥분하게 할 단 하나의 서밋"임을 삽입함 (산돌광수체, 폰트저작권 해결 필요)

     ③ 버스 정류소를 중심으로 인근 곳곳에 2~3겹 덕지덕지 게시함

  3) 홍보용 안내판: 높으신 양반들이란 대개 어린 아이와 다르지 않음을 유념

     ① 삼보마다 안내판을 마련하여 높으신 분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함

     ② 바닥에 화살표를 붙여 화장실까지 가는 길을 친절히 표시하도록 함 (기저귀 비치) 

     ③ 정수기가 비치된 곳에 나이트 조명을 설치하여 멀리서도 육안으로 확인이 가능하도록 함 

     ④ 토의장에서 연회장에 이르는 길에 학생 도우미 양팔 간격으로 배치하도록 하여 귀빈들께서 길을 잃으시는 일이 없도록 함 (성적 우수자 선발)

     ⑤ 국민가수 현숙씨 섭외하여 본 행사의 얼굴로 삼도록 추진함 (예산 문제로 유보)

 

3. 학생지도 (책임자: 방유만 (Bang, You Man) 학생주임)

  1) 생활지도: 생활은 곧 끊임없는 자기 수양임을 유념 

     ① 행사 기간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중용의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도록 학생들을 지도함

     ② 행사 기간 중 특히 복장 단속에 만족을 기울여 학교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학생들이 없도록 지도함 (ex. 츄리닝, 슬리퍼, 삼선슬리퍼, 게다, 조리, 가보시, 하이힐 등, 일부 수정)  

     ③ 남학생의 경우 행사 일주일 전부터 체육할동을 금지시키고 두발, 치아, 손톱, 발톱, 사타구니 등 위생 검사 실시 (시정되지 않을 경우 가정에 가정통신문 발송, 일부 수정)

     ④ 여학생의 경우 브래지어 미착용자 색출하여 특별 지도 (단, 2차 성징이 나타났다고 판단되는 5, 6학년 학생에게만 해당, 일단 유보)

  2) 교육지도: 행사 기간에도 교육은 계속되어야 함을 유념 

     ① 행사 기간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국영수 위주의 수업으로 학생들의 진학 준비에 만전을 기함

     ② 귀빈들께 본교의 알차면서도 미래지향적인 강의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도록 교안 및 교재 준비에 최선을 다함

  3) 교사지도: 교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직분을 잊지 않아야 함을 유념

     ① 행사 기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대한민국의 교사임에 자부심을 갖도록 함

     ② 특별한 사유 없이 귀빈들께 접근하거나 말을 걸지 않도록 함

 

4. 행사진행

  1) 토의장준비: 본교 강당의 우수하고 선진적인 시설을 적극 활용할 것을 유념 

     ① 교육용 기자재는 모두 창고로 옮겨야 함

     ② 농구골대, 정구골대 등 불필요한 장애물들은 모두 떼어다 지하실에 넣어야 함  

  2) 연회장준비: 본교 테니스장의 정갈하고 선진적인 시설을 적극 활용할 것을 유념

     ① 테니스 코트 라인을 지우고 네트를 걷어놔야 함

     ② 테이블, 의자 및 가라오케를 설치하여야 함

  3) 다과준비: 다과는 식사 전후로 가볍게 입맛을 돋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유념

  4) 연회준비: 연회는 본 행사의 규모와 중요성을 감안하여 최고 수준으로 준비해야 함을 유념

 

5. 귀빈환영의 측면

  1) 역까지 마중: 높으신 분들은 자기 발로 행사장을 찾아오지 못함을 유념 

  2) 식사제공: 저녁 연회를 제외한 아침과 점심 준비에 해당됨을 유념

     ① 귀빈들의 귀한 식성에 맞추어 아침은 대륙식 브렉퍼스트, 점심은 짱개집으로 준비 

  3) 숙소제공: 숙소는 행사장에서 가까우면서도 나름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받을만큼은 멀어야 함을 유념

     ① 인근에서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는 '노모 모텔'에서 20개실 단체 예약하여야 함 (대실 5만원, 숙박 10만원)

  4) 역까지 배웅: 높으신 분들은 자기 발로 집에 갈 줄 알아도 대접받고 싶어함을 유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교무부장 김유석 선생은 엄청난 부담과 싸우는 중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얼마나 일을 웃기고 복잡하고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왜 다른 교사들이 자신을 '유념선생'이라고 부르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진실로 '유념'하고 있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S20 슈퍼장학사회담과 같은 큰 행사를 망쳐서는 안된다는 것. 어떤 경우에도 교감선생님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는 것.

 

*

 

  최돈호 (Choi, Don-Hoe) 체육선생은 이번 행사 준비에서 유소민 미술선생과 함께 환경 미화의 전반을 총괄하게 되었다. 평소 그는 교사들 사이에서 하드코어 스타일의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는데, 말인 즉 압박이 강해질 수록 희열을 느끼고, 채찍질이 심해질 수록 추진력을 얻는 변태적 스타일의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적잖이 부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해보이겠다는 열의에 불타올랐다. 특히 차기 학생주임 타이틀에 욕심이 있는 그로서는 이번 기회가 윗 사람들의 눈도장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다만 천상 체육선생이고 천상 '밀덕후'인 그는 '반짝반짝'이나 '매끈매끈'과 같은 지시를 어떻게 수행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다짜고짜 '마루바닥은 반짝반짝 빛나야 함'이라니. 언제? 어떻게? 얼마나? 그래서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집하기로 마음먹었다. 바짝 굴려서 군기 잡은 다음에 작업을 진행하는 것. 학생회장단을 소집하여 운동장 오리걸음 10바퀴를 시킨 후 그는 마루바닥 청소를 위해 아이들에게 양초와 마른 걸레와 박카스 병을 나눠주었다. 그리고는 단상 위에 올라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 쉽게 말해 내일 당장 우리 부대에 사단장이 방문한다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작업해라. 이상 해산.

  열두 살 꼬마들은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동물적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수컷들에게 이 무한한 부담을 무작정 전가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회장단은 각 급 반장단을 모아 놓고 겁을 주었다. 초를 칠하는 각도, 걸레질하는 횟수, 구체적인 마루바닥의 광택도 등에 관한 없던 구체적인 기준이 생겨났다. 지레 겁을 먹은 각급 반장단은 동급생들을 모아놓고 다시 겁을 주었다. 화단에 꽃을 심는 일이 추가되었고 연병장, 아니 운동장 돌을 줍는 일이 더해졌으며, 수세미로 보도블럭을 문지르는 작업이 계획되었고 (여의치 않자 하이타이까지 동원되었다), 칫솔로 화장실 변기, 타일, 세면대, 개수구 닦는 일은 니가 하라며 서로 실랑이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자기 밥그릇이 위험하게 된 노모초등학교의 소사 문사철 (Moon, Sa-Cheol) 씨는 당시 ‘이것이 조직사회의 묘미로구나’라며 깊은 탄식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실 그랬다. 맨 처음 강건신 교장의 머릿속에 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는 아주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박유범 교감의 짧다면 짧은 메모를 거치고, 김유석 교무부장이 주도한 긴급특별비상대책회의를 거치면서 무섭게 불어났다. 여기에 다시 그 중 일부 책임을 맞게된 선생들이 충성 경쟁을 벌이느라 다소 억지스럽게 일을 진행시켰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전달받은 명령을 다른 아이들에게 하달하면서 아이다운 (혹은 아이답지 않은) 과장과 비약을 거듭했다. 마치 산 정상에서 작은 눈송이 하날 던진 것이 산 아래에서는 치명적 눈사태가 변모하는 것처럼 말이다.

 

*

 

  한편 이번 S20 슈퍼장학사회담의 대내적, 대외적 홍보를 담당하게 된 인물은 동덕희 사회선생이었다. 노모초등학교 교무실에서 최돈호 체육선생과 함께 30대 기수로 평가받는 그 역시 이번 행사를 윗사람들의 눈도장을 받을 절호의 기회라고 여겼다. 최돈호 체육선생이 차기 학생주임을 노리는 인물 중 하나라면 그는 차기 교무주임을 노리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현직 교무부장 이후 마땅한 인텔리 거물이 없고 현직 학생주임 이후 이렇다할 카리스마 강골이 없는 노모초등학교 교무실의 분위기는 그들에게 상당히 유리한 분위기임이 분명했다. 불과 5년 안에 그들의 전성시대가 다가올 것이었다. (불과 5년 안에!) 때문에 최돈호 선생과 동덕희 선생의 사이는 좋고도 나빴다. 넥스트 제너레이션의 선봉에 선 상징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둘은 공통의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늘 그랬던 것처럼 문관의 우두머리와 무관의 우두머리 사이의 묘한 알력과 경쟁 심리 같은 것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동덕희 선생이 Y대 출신인데 반해 최돈호 선생이 K대 출신이므로 '연고전' 내지 '고연전'의 확장팩 버전으로의 신경전 또한 상당했다. 그러니 둘 중의 한 쪽이 먼저 부장이나 주임 타이틀을 달게 된다면 다른 한 쪽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모욕적인 일이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동덕희 선생은 학생들을 대거 동원한 최돈호 선생의 환경미화 작업이 못마땅했다. 일은 어린 아이들에게 전가시키면서 나중에 생색은 자기가 다 내려는 뻔히 보이는 의도가 꼴사나웠던 것이다. 더구나 환경미화는 그 성과가 다분히 가시적이라는 점에서 그 성과가 다분히 가식적인 홍보 나부랭이보다 천배만배 좋아보였다. 젠장. 빌어먹을. 그래서 동덕희 선생은 도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시키지 않은 짓을 벌임으로써 누군가에게 의외의 감명을 선물하기 - 학창시절 그를 '선생님들의 애제자'이자 '또래들의 왕따'로 만들었던 바로 그 결정적 비법의 재림이었다.

- 여기 노모초등학교인데요. 108번 버스 노선 관련해서 접수할 민원이 있습니다.

  운수회사 주사무소 직원이 그 전화를 받았다.

- 예, 말씀하십시오.

- 지금 전화받으신 분이? 따로 담당자 없어요?

- 예, 제가 담당잡니다.

- 풋, 지금 장난해요? 당장 책임자 바꿔요.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예, 제가 책임잡니다.

- 좋아요. 한 번만 얘기할 겁니다. 내달, 그러니까 11월 12일부터 노모초등학교에서 아주, 아주, 아주 중요한 행사가 열립니다. S20 슈퍼장학사회담이라고 아실런지 몰라. 아무튼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행사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이때 행사장 주변은 아주, 아주, 아주 고요하고 정숙한 분위기가 유지되어야 합니다. 우리 학교의 품격이 달린 문제입니다. 고로 절대, 절대, 절대 이 근방으로 버스가 지나가면 안된단 말입니다. 민간인들이 승하차한답시고 소란을 떨면 곤란합니다. 그러니 잘 들어요. 당장 해당 날짜에 노선을 바꿔요. 노모초등학교 앞 뒤로 세 정거장에 108번 버스가 지나가지 않도록 하세요. 만약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한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신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담당잔지 책임잔지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동덕희 사회선생은 또한 슈퍼장학사들이 참관하게 될 몇몇 학급의 분위기에 대해서도 걱정하기 시작했다. 사실 담당자도 아니요, 해당 학급의 담임도 아닌, 자기가 걱정할 일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샘플로 선정된 5학년 6반을 창문 너머로 힐끔 훔쳐보며 그는 '과연 이 학급이 우리 학교를 충분히 대표할 수 있는 우수하고 선진적인 학급인가?'하는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들 옷도 제각각이요 키도 제각각이요 생김새도 제각각이니 여간 산만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 저게 뭐야.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데. 차라리 교복이라도 입혔으면.' 입맛을 쩝쩝 다셔보았지만, 제 아무리 집요하기로 악명높은 동선생이라도 이미 십수년 전에 사라진 교복제도를 부활하게 할 재간은 없었다. 대신 그는 질 좋은 아이들을 추려 행사 당일 5학년 6반에 투입할 계획을 세웠다. '나쁜 종자'를 '좋은 종자'로 바꿔치기 함으로써 슈퍼장학사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학교의 위엄을 전국 만방에 드높이겠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자 당연히 5학년 6반 담임인 유석미 (You Suck Mee) 선생이 반발했다. 교무실의 다른 선생님들도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회유와 협박을 적절히 활용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고 전교를 돌며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는 아이들을 무단으로 징발 차출하기 시작했다. 그 기준이라는 게 글쎄.

 

● 남자의 경우 키 175 ~ 180 센티미터, 몸무게 65 ~ 70 킬로그램

● 여자의 경우 키 165 ~ 170 센티미터, 몸무게 40 ~ 45 킬로그램

● 98년 이전 출생자 제외

● 공통사항: 품행이 방정하고 육안으로 기분 나쁘지는 않을 정도 외모의 소유자

 

  가히 초초교급 기준이라 할만했다. 그는 전교를 뒤져 자신의 높은 기준을 충족하는 놀라운 발육 상태의 아이들 스물 한 명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비슷한 신체 조건의 서른 명을 골라 똑같은 옷을 입혀 나란히 교실에 앉혀놓으려는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여전히 아홉 명이 모자란 상황이었다. 아홉이라, 아홉이라, 아홉이 모자란다? 그러고보니 아홉이란 그에게 있어 상당히 상징적으로 다가오는 숫자이니, 아아, 그의 꿈, 그의 희망 ‘소녀시대’를 환기케하는 마법의 숫자다. 분명 소녀들이라면 그의 높은 기준을 만족시키고도 남을 것이었다. 더구나 ‘소녀시대’는 분명 우수하고 선진적인 육성의 사례라는 점에서 (응? 이건 아닌가?) S20 슈퍼장학사회담이 호명하는 교육자의 이상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 이거다. 바로 이거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누구도 시키지 않은 짓을 했다. ‘소녀시대’의 소속사에 전자메일을 보냈다. 우리의 우수하고 선진적 행사의 참관수업에 귀사의 소녀들을 초청하여 참가시키고 싶다는 내용의. 물론, 

답장은 받지 못했다. 

 

*

 

  박유범 교감은 지난 며칠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표면상으로는 교무주임 휘하 교무실 선생님들에게 일을 믿고 맡긴 것처럼 되어 있었으나, 자칭 '좋은 관리자'인 그는 절대 아랫 사람들에게 일을 던져놓고 뺀뺀히 놀아제낄만큼 신경줄이 굵지는 못했다. 동전 한 닢의 출처까지도 일일이 나서 챙겨야 한다는 것은 박교감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잡아준 '와꾸'를 바탕으로 젊은 선생들과 어린 학생들이 체계적으로 기대 이상의 준비를 진행해가고 있음에 대단히 감격하기는 했다. 유념 선생의 특별긴급비상대책회의를 비롯, 관료 조직 사회의 묘미, 전교 어린이회의 단체 기합, 동덕희 선생과 최돈호 선생의 총성 없는 충성 전쟁 등 이면에서의 해프닝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현재 돌아가고 있는 모든 난리 법석이 그저 자신이 정확히 '와꾸'를 잡아주었던 덕분에 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아! 피곤해! 도대체 이 몸이 나서지 않으면 일이 돌아가질 않아요.' 허나 어쩌겠는가. 미완의 젊은 세대들에게 지혜를 나누어주는 것이 바로 오래 살아본 자의 특권이자 책무인 것을! 크게 만족한 박교감은 자신의 관리자 역할에 가일층 박차를 가하기로 결심했다. 기민하게 잠복해 다니며 행사준비 진척사항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견된 문제점을 손수 바로 잡았다. 그는 남들 앞에서 생색 내기보다 혼자 뿌듯해하길 더 좋아하는 유형의 사람이었기에 이 모든 과정은 철저히 정체를 숨긴 채 이루어졌다. 이 당시 며칠간 노모초등학교 학생들은 각시탈을 뒤집어 쓴 초로의 남자가 학교 안팎을 배회하며 쓸고, 닦고, 비비고, 문대고, 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작업을 마다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 모습이 멀리서 봐도 재밌고 가까이서 보면 더욱 재밌어 줄줄이 동네방네 따라 다니며 놀려대는 아이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정작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으니, 예상하지도 못했던 순간에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등장한 민폐 보스다.

  강건신 교장의 관리자 본능이 깨어난 것은 대략적으로 1일 아침.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알아서 잘들 하겠지"라며 여유를 보이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돌연 꽁지에 불 붙은 망아지마냥 호들갑스레 뛰어다니기 시작했던 것이다. 달력이 한 장 넘어가면서 문득 위기감을 느꼈던 걸까? 혹시 초 칠한 마루바닥에 미끄러지다 어디 부딪혀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은 아닐까? 계기는 알 수 없었으나 문제는 문제였다. 누가 뭐래도 노모초등학교의 최고 어른이자 최상위 관리자는 이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한국판 제니퍼 코넬리라는 비서 미스 금(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미수금' 아님)의 치마 폭에 갇혀 실실거리고 다녔던 탓에 만만하게만 보였던 이미지와는 달리, 일단 기질이 발동하니 그 치밀하고 꼼꼼하고 날카로움이 모두의 분노와 짜증을 불러 일으키고도 남을 정도였다. 강교장은 각급 교실 바닥이 너무 반짝반짝함을 지적했고, 각층 복도 바닥이 너무 만들만들함을 지적했다. 또한 운동장 바닥이 너무 사근사근해 모래 밟는 느낌이 나지 않음을 지적했고, 잡초 하나 없는 화단이 전혀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음을 지적했다.

- 이건 뭐랄까? 너무 인위적이지 않습니까? 꼭 백만년 전에 박제된 학교 같구만 그래. 당장 시정해요.

  그리하여 학교에 '사람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바꿔 말하면 이제까지 진행해온 작업을 홀랑 뒤집어야 할 상황에 마주했다는 뜻이다. 가장 먼저 마루바닥 광택 죽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최돈호 체육선생이 다시 전교 어린이 회장단을 불러 오리걸음을 시켰고, 회장단은 반장단을, 반장단은 동급생을, 상급생은 하급생을, 일진들은 빵셔틀을 각각 갈구고 갈췄다. 1일 오후, 최신형 한경희 스팀 청소기 5대가 전격 투입되었다. 유소민 미술선생은 삼일 전에 내다버린 백일장이며 사생대회 입선, 가작, 장려, 우수, 최우수 작품들을 찾으러 쓰레기 소각장에 뛰어들어야 했다. 한편 운동장에서는 교문과 강당을 잇는 '환영의 꽃길'이 파헤쳐지는 중이었는데, 괜히 벌레만 끼고 냄새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교장의 한 마디로 뒤집힌 일이었다. 같은 시각 동덕희 사회선생은 동네를 돌며 홍보용 포스터를 철거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반경 20 킬로미터까지 붙이고 다니지 않는건데, 라며 그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비단 그들 뿐만이 아니라 1일을 기점으로 노모초등학교 전교가 이런 식으로 들썩이는 중이었다.  "대빵이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라며 자조하는 선생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 대빵이 이제까지 무념방관하고 있었음을 지적했다. 확실히 그랬다. 이런 경우 아랫 사람들 입장에선 참 피곤해질 수 밖에 없다. 이제까지 벌여놓은 일이 없다면 모를까. 이미 일주일 이상 비상 모드로 학교를 한바탕 뒤집어 놓은 판국에서 또 다시 뒤집기 한 판이 벌어질 참이니, 당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뛰고 다시 미칠 일일 수 밖에 없다. 그 와중에 박교감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갑자기 불거진 '박교감 책임론'. 즉 교감이 중간에서 교통정리를 명확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노가다 개삽질 사태가 도래했다는 일부 선생들의 주장이었다. 

- 애초에 교감 선생님은 도대체 뭘 알기나하고 일을 시킨건지 모르겠다. 지금 보면 권한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허수아비 같다. (익명을 요구한 36세 자연선생)

- 일찍부터 괜히 난리 피우지 않았으면 오늘부터 빡세게 딱 열흘 고생하고 말면 되는 일이다. 위에서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누적된 우리의 피로는 도대체 누가 풀어줄 수 있단 말인가! (익명을 요구한 43세 도덕선생)

- 일 좀 제발 합리적으로 하자. 그게 안된다면 술이라도 달라! (익명을 요구한 45세 국어선생) 

  그러나 정말 대박 큰 일은 따로 있었으니, 정문과 후문에 이미 나부끼고 있는 S20 슈퍼장학사회담의 플랜카드를 강교장이 못마땅해 했다는 사실이다. 너무 유치하다고 했다. 개교 이래 최대 행사인데 스케일이 이게 뭐냐고 했다. 우리 학교의 우수성과 선진성을 전혀 어필할 수 없는 '초딩스러운' 결과물이라고도 했다. 저거 만드는 데 들어간 예산 집행해 준 놈 당장 데려와 목을 치라고도 말했다. 강교장의 복안을 제시했다. 파리의 에투앙 개선문을 본따 교문을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야 두고 두고 노모초등학교가 제 7회 S20 슈퍼장학사회담의 성지였음이 회자될 것이라도 주장했다. 박교감은 상식적인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반론으로 자신의 유일한 보스를 제지하고 나섰다.

- 교장선생님. 아니, 열흘 사이에 개선문을 어떻게 세우나요. 

- 왜 안됩니까? 하면 되지.

- 그게 되면 왜 나폴레옹이 멀쩡히 죽 쒀서 개 줬겠습니다.

- 이 사람, 참. 요즘 세상에 돈 걸어놓고 경쟁 붙이면 안되는 게 뭐 있답니까? 

  신기하게도 5일 정오 교문 자리에 개선문이 들어섰다. 너비 4.5m 에 높이 5m. 높이도 너비도 에비앙, 아니 에투앙 개선문의 10분의 1이었지만 외형만큼은 그럴 듯했다. 위압감이 상당했다. 그것 참 신기한 일일세. 일이 이렇게 풀리니 박교감은 기가 죽었고 강교장은 기가 살았다. 음메 기죽어. 음메 기살어. 무슨 쓰리랑 부부도 아니고 정말. 

 

*

 

  11월 8일. 이제 S20 슈퍼장학사회담이 4일 앞으로 다가왔다. 준비는 완벽했다. 강교장은 자신이 넘쳤다. 박교감도 그럭저럭 동의를 표했다. 교무부장도 학생주임도 찬사를 늘어놓았다. 사회선생도 체육선생도 서로 수고 많았다며 손을 맞잡았다. 힘든 시간은 다 지나갔다. 행사 무사히 잘 치르고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와 두 달간의 겨울 방학을 누리……

바로 그때 개선문 앞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있었으니 복지병 (Bok Ji-Byung) 슈퍼장학사다. 

 

  대한민국에 단 20명 밖에 없다는 슈퍼장학사 중의 한 명. 서울시교육청에 세 명 뿐이라는 슈퍼장학사 가운데 강북 동부를 관할하는 이. 복 슈퍼장학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역 안에 위치한 노모초등학교에서 이번 S20 슈퍼장학사회담이 열리는 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서울에서 가장 수준 떨어지는 6개구를 맡고 있다는 사실도 짜증나고 존심상하는데, 만약 이번 회담이 지난 회담들보다 엉성하고 빈약하고 삐걱거리게 치뤄지면 그야말로 개망신일 것이었다. 그랬다가는 지방교육청 소속 촌놈들한테까지 무시당할 것이 확실했다. 때문에 복 슈퍼장학사는 손수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행사 준비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챙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물론 마음이야 일찍 먹었는데 워낙 업무가 과중한 탓에 지금에서야 도착하게 된 것이기는 했다. 대신 늦게 도착한만큼 지금부터 4일 동안은 만사 제끼고 밤낮없이 이 일에만 매진하겠노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세상의 많은 보스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내가 팔 걷어붙이기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일은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노모초등학교 선생들을 소집해 놓고 "며칠만 빡세게 고생해봅시다"로 요약가능한 연설을 했다. "대빵이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나"라며 자조하는 선생들이 일주일 전보다 곱절은 많아졌다. 익명을 요구한 43세 도덕교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 끝판왕인데 별 수 있나.

 

  복 슈퍼장학사는 복스런 호빵맨 같은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털털하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세간에 인기가 높았고 절대 겉으로 화내는 법이 없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노모초등학교의 일원들은 이후 4일 동안 그 소문이 정녕 사실이었음을 알게되었다. 가장 먼저 행사장 주변을 둘러본 복 슈퍼장학사는 인자한 동네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 여러분, 경호가 너무 개판이네요. 귀빈들 뒤져도 아무도 모르겠어요.

  이에 K대 출신이자 해병대 출신이기도 한 최돈호 체육선생이 동기들에게 전화를 넣었다. 행사 기간 동안 행사장 주변에 전우들을 동원해 세 겹 이상의 인간 배리어를 만들어 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최돈호 선생의 라이벌로, Y대 출신이자 공익근무요원 출신이기도 한 동덕희 사회선생은 자신의 초라한 병적증명서를 원망하며 인근 경찰서에 전화를 넣었다. 행사 기간 동안 노모동 노모지구대의 순찰 인원을 두 배로 늘려달라는 민원을 넣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동안 복 슈퍼장학사는 건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교장과 박교감을 비롯한 십 수명의 교사며 직원들이 레밍처럼 그 뒤를 따라 밟았다. 교실을 둘러보며 복 슈퍼장학사는 마루바닥이 너무 지저분하지 않느냐고 (환하게 미소지으며) 투덜거렸다. 있는 그대로의 생활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귀빈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하지 않겠느냐고, 방긋 웃으며 지적해 강교장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존심 상한 강교장은 박교감에게 짜증을 부렸고 (누구 때문에 입힌 광택 다시 벗겨냈는데?) 드디어 폭발한 박교감은 교무부장을 불러 조인트를 깠다. 열받은 교무부장은 슈퍼특별긴급비상대책회의를 소집하여 담당자를 일일이 문책했다. 그 '끝장 미팅'은 이틀 밤낮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는데 그 결과, 최돈호 체육선생이 다시 전교 어린이 회장단을 불러 오리걸음을 시켰고, 회장단은 반장단을, 반장단은 동급생을, 상급생은 하급생을, 일진들은 빵셔틀을 각각 갈구고 갈추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루바닥은 다시 반짝반짝 빛났고 백일장 및 사생대회 결과물은 다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꽃길이 철거된 자리에는 깐느에서 공수되어 왔다는 레드카펫이 깔렸고 복 슈퍼장학사의 질녀가 운영하는 곳으로 케이터링 업체가 변경되었다. 교무실에선 '박교감 무능론', 즉 사태가 이 지경 이 꼴이 되도록 교감 선생님은 어디서 무얼 하고 계셨느냐는 투정이 나왔다. 이후 며칠간 각시탈을 뒤집어 쓴 초로의 남자가 옥상에서 구두를 벗어둔 채 좌선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 대박 큰 일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교문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크고 웅장한 개선문을 복 슈퍼장학사가 영 못마땅해했다는 사실이다. 복 슈퍼장학사는 그 특유의 사람좋은 웃음으로 은근히 강교장을 타박했다.

- 아따, 우리 명색이 슈퍼장학사인데 나폴레옹하고 스케일이 같아서 되겠어요? 

- 슈퍼장학사님, 나폴레옹이 어때서요.

- 나폴레옹, 그 친구 대학도 안 나왔잖아요.

- 하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럼 혹시 복안이라도…… 있으신지요.

  강교장은 땀을 뻘뻘 흘렸다.

- 있지요. 내 여기 구체적으로 그려왔답니다.

  복슈퍼장학사는 품 속에서 꼬깃꼬깃 종이를 한장 꺼내어 펼쳤는데, 이건 뭐 스케일이 달라.

 

 

  도대체 이게 뭐지? 강건신 교장은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꼈다. 그 와중에도 쉬지 않고 아부를 늘어놓았으니.  

- 역시 슈퍼장학사님은 괜히 슈퍼가 아니십니다. 그런데 제가 좀 과문한 탓에 이게 뭔지 잘…….

- 아니, 교장선생님은 스타게이트도 몰라요? 스타게이트? 허허, 이거 참.

- 스타……게이트. 어떻게 교문 앞에 세워야 할지 알려면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겠습니까?

-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고대인들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어요.

  노모초등학교 교무실 유일의 K대 출신 최돈호 체육선생이 이때다 싶었는지 손을 번쩍 들었다.

- 실은 제가 고대인이지 말입니다.

  순간이지만 복지병 슈퍼장학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생글생글 웃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저 또라이 새끼 당장 내 앞에서 치워주세요.

  최돈호 선생의 숙명적 라이벌 동덕희 선생은 남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

 

♬ Thinking of you's working up my appetite

Looking forward to a little afternoon delight

Rubbing sticks and stones together, make the sparks ignite

And the thought of rubbing you is getting so exciting

 

Skyrockets in flight (빰빰!)

Afternoon delight (우우)

Afternoon delight (우우)

Afternoon delight ♬

 

  ‘스타랜드 보컬밴드’의 1976년 히트곡 '애프터눈 딜라이트(완곡한 번역 - 오후의 즐거움; 보다 노골적인 번역 - 한낮의 정사)'에 맞춰 노모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이 학교의 품격을 드높이고자 환영의 매스게임을 펼쳤다. 가사 속에 숨어 있는 낯 뜨거운 암시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표정은 한 없이 밝고 맑고 순수하고 우수하고 선진적이기 그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일곱 개의 쉐브론이 맞춰지자 거대한 소리를 내며 스타게이트가 돌기 시작했다. 마치 파도가 치듯 웜홀이 열렸고 넘실거리는 빛 무리를 뚫으며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슈퍼장학사들이다. 서울특별시 슈퍼장학사 역세권, 서울특별시 슈퍼장학사 초대졸, 서울특별시 슈퍼장학사 복지병, 부산광역시 슈퍼장학사 유동닉, 부산광역시 슈퍼장학사 초성체, 대전광역시 슈퍼장학사 현시창, 대구광역시 슈퍼장학사 이태백, 인천광역시 슈퍼장학사 글설리, 광주광역시 슈퍼장학사 사오정, 울산광역시 슈퍼장학사 오륙도, 경기도 슈퍼장학사 미연시, 강원도 슈퍼장학사 권두언, 충청북도 슈퍼장학사 방명록, 충청남도 슈퍼장학사 구석기, 제주특별자치도 슈퍼장학사 촉탁직 등 슈퍼장학사 20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껏 멋을 부린 자세로, 합창하듯 우렁차게, 그들은 자신들이 장학사들의 왕임을 선포했다. 

- 우리느은, 슈퍼어 장학, 사에요! 

 

(2009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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