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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돼지 저금통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9.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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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시멘트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벽은 한 번도 덥혀져 본 적이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 얇은 셔츠를 넘어 냉기가 스믈거리며 넘어왔다. 오한이 일었다. 휴. 그는 짧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아직은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보스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를 잡아 쓰러 뜨리고 커다란 칼로 배를 가를 때까지.


  멀리에서 손전등 불빛이 아른 거렸다. 점점 가까워졌다. 그를 향하여 다가왔다. 다시 숨이 막혔다. 추위에 몸이 떨리고 있음에도 총의 그립에는 축축하게 땀이 차올랐다. 오른손으로 힘이 들어갔다. 트리거를 걸고 있는  오른손 검지 손가락에는 경련이 일었다. 여차하면 주저없이 당겨야 할 것이다. 생각을 하면 늦었다. 그러니 생각없이 쏴야했다. 상대가 누구라도 말이다. 침이 바싹 말랐다. 묵직한 긴장이 심장 박동을 가속하였다. 빛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발자국 소리도 점점 더 또렷하고 선명해졌다. 빛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일렁였다. 펌프질하듯 아드레날린이 쏟아져나왔다. 공포와 전율 속에 아득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이러다 정신을 잃어버릴지도 몰라.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빛은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고 단단하게, 모든 것이 균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숨소리도, 심장 박동도, 아드레날린도. 베레타의 탄알집을 열어서 총알을 확인했다. 한 발도 사용하지 않은 채로 가지런히 열다섯 발이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에도 남은 총알의 수를 확인했었단 사실을,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찰칵. 힘을 주어 다시 탄알집을 닫았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 앉은 채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살아남자. 반드시 살아남자.


 *


  보스는 좋은 사람이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보였다. 따지고 보면 함정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법 아닌가? 정말 나쁜 놈 치고 첫 인상 나빠 보이는 사람 별로 없다.


  처음 그를 고용하고, 또 자기 집으로 데려오면서 보스는  이렇게 말했다.
-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생각해.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나는데.
  하지만 이제 그는 안다. 그런 말은 절대 믿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보스는 그에게 전 재산을 맡겼다. 네브레스카에 사시는 할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받는 용돈도 그에게 맡겼다. 엉클 샘의 세차장에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를 뛰고 떨어진 돈도 그에게 맡겼다. 3번가 맥도날드에서 프렌치 프라이며 해쉬 브라운을 튀겨서 번 돈도 그에게 맡겼다. 기분이 좋았다. 배가 빵빵했다. 포만감이 밀려왔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누군가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감정이었다. 보스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런 말을 했다.
- 나는 너를 전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내 모든 걸 너에게 맡기는 거야.
- 압니다.
- 만약 누군가 내 돈을 훔쳐가라고 하면 네가 지켜줘야 해. 그렇지?
- 물론입니다.
- 심지어 내가 참을성 없이 중간에 저금한 걸 헐어버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겠어?
- 그건……
- 그래도 막아야지. 그렇지? 설령 상대가 나라도 말이야.
  그땐 그 말이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


  보스의 이름은 티모시 데이비스 주니어. 데이비스 가문의 3대 독자로 커크랜드 고등학교 1학년생.

  그 나이대 아이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티미가 관심 있어 하는 것은 오직 세 가지 뿐이었다. 여자, 자동차, 그리고 풋볼. 평범한 고등학생들에게 있어 이 세 가지란 흔히 중간 지대가 없는 문제이다. 모 아니면 도. 올 오어 낫띵 (All or Nothing). 대개 있다면 셋 다 있기 마련이오, 없다면 셋 다 없는 것이 보통이라고나 할까?

  고등학생 사회의 치열한 먹이 사실을 감안하자면 그것은 곧 계급의 문제이기도 했다. 티미는 세 가지 모두를 가지지 못한 계급에서 세 가지 모두를 가진 계급으로 올라서려는, 나름 중차대한 길목에 위치한 아이였다. 커크랜드 고등학교의 풋볼팀 ‘재규어스’에 들어갔고 (설령 아직 벤치 신세일지라도!), 고물이지만 빨간색 포드 피에스타를 (오하이오 투데이에서 선정한 '십대를 위한 자동차 10선' 중 수위를 차지한 바로 그 피에스타를!) 손에 넣었으며, 차와 명예를 손에 넣은만큼 자연히 여학생들이 (예쁘고 날씬한 치어리더팀의 여학생들이!) 따라 붙으려는 결정적 시점에 있었다.


  티미가 변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풋볼 선수로 살려니 품위 유지비가 필요할 것이고, 자동차를 굴리려니 유류비가 필요할 것이며, 여학생을 만나려니 데이트 비용이 필요할테다. 내색은 안했지만 상당히 돈이 쪼들리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차곡차곡 내게 맡겨두었던 돈에 슬쩍 입맛 다시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선을 확실히 그었다. 찰리가 정확히 내게 바랐던 대로며 그것이 바로 내가 고용된 이유이기도 했다.


  티미는 처음엔 머쓱해했다. 다음엔 부끄러워했다. 내 말이 맞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해줘서 천만 다행이라고 했다. 정말 고맙다고, 나야말로 진정한 친구라고도 했다. 나는 티미가 잠시 잃었던 이성을 되찾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역할에 만족했다. 나 역시 싫은 소리를 하긴 싫었지만, 그 싫은 소리가 내 일의 일부임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


  바람은 어둡고 차가웠다. 흘러오는 곳도, 앞으로 흘러갈 곳도 알 수 없는 바람이 웃자란 잡풀을 흔들었다. 사시나무처럼 몸이 떨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둥근 달은 평화롭게 빛났다. 어쩐지 속이 역겨웠다. 저녁으로 맥치킨 샌드위치를 먹으며 다이어트 콜라 한 캔을 곁들였단 사실이 떠올랐다. 이 사단이 벌어지기 직전의 짧고 불길한 평화. 어떤 예감이라는 게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었다. 운명은 그의 귓가에 어둡고 나른한 숨을 불어넣으며 작지만 끈질기게 속삭여오지 않았나.

(파국이 멀지 않았어. 그렇지? 너도 알지?)

  지금 그에게는 온 세상이 적진이었다. 한 가운데 홀로 두 다리로 디디고 서있을 뿐이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그리고 베레타 M92F한 자루. 열다섯 발의 탄알만이 그의 편이었다. '영화에서는 이걸로도 잘만 버티던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바삭 말라붙은 입에서는 비릿하게 녹슨 쇠맛이 났다. 영화는 빌어먹을 영화일 뿐이다. 아마도 '잘만 버틸 일'은 없을 것이었다.

 

*


  티미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굳이 원흉을 따지자면 린지 커닝햄이라는 동급생 여자애였다. 그 아이는 치어리더팀에 속해 있었다. 린지는 여러 면에서 티미와 비슷했다. 첫째, 지금은 B조였지만 앞으로 A조에 올라가기를 희망했다. 둘째, 먹이사슬의 상층부로 올라가고자 하는 야망이 있었다. 셋째, 그래서 서로의 미래 가치에 투자했다. 내년에는 쿼터백과 치어리더 캡틴이, 후년에는 기어코 프롬 퀸과 프롬 킹에 등극하리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관계를 풋내나는 십대들의 사랑이라고 코웃음쳤지만 어떤 이들은 무서운 야심가들의 전략적 제휴라고 여겼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을 위험 요인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관건은 확률처럼 보였다 (항상 배신은 숫자에서부터 시작된다). 티미가 쿼터백이 될 확률은 0.03 % 정도였다. 체격은 좋으나 두뇌 회전이 좋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가 봐도 티미는 쿼터백 보다는 디펜시브 라인에 위치할 몸빵 캐릭터가 어울렸다. 반면 린지가 치어리더 캡틴이 될 확률은 30%쯤 되었다. 두뇌 회전이 좋지 않으나 체격 조건이 좋기에 더없이 몸빵 캐릭터가 어울렸다. 바로 그 확률적 차이가 티미를 절박하게 만들었다. 급한 건 티미쪽이었다. 그 사실은 0.03 %와 30 %의 차이만큼이나 명명백백했다. 늦기 전에 그 차이를 메워야 한단 부담이 티미의 이성을 마비시켰던 것 같다.

  티미의 재산이라봐야 썩 많지는 않았다. 감히 건드릴 수 없는 할머니의 신탁을 제외하고 (만약  대학생이 되면 스무살에 25만불을 물려 받게끔 되어 있는데 그가 보기에 그 확률은 0.00003% 정도이다) 주립은행에 예금이 5천불 정도가 있다. 하지만 부모의 감시가 엄중하니 그 또한 쉽게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저런 이유 다 제끼고 남은 것은 오로지 그의 뱃속을 굴러다니는 7백불이다. 정확이 728불이다. 은행에 맡기지 않고 보관하기에는 꽤 큰 돈이다. 그는 티미의 성격을 알았다. 부모의 간섭 없이 입출금 가능한 계좌를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촌동네에서 드물게 대학 진학의 꿈을 이룬 케이스가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밝은 미래는 멀리 있었고 치어리더 여자애는 당장 가까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위험한 충동을 느낄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 갈등이 이렇게 심각하고 강렬할 줄은 몰랐다.

 

*


  귀청을 찢는 소리와 함께 벽면이 패여들어갔다. 놈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진작에 시간 문제일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독 안에 든 쥐였고 퇴로는 없었다. 몇 발의 총알이 더 날아와 거칠게 벽을 긁어내고 연기를 흘렸다. 코를 매캐하게 만드는 화약 냄새가 멀리에서부터 흘러왔다. 위험하고 매혹적인 향기였다. 그는 경고 차원에서라도 대응 사격을 해야하나 잠시 고민했다. 언젠간 당하겠지만 당장 순순히 잡혀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탕! 한 발을 쏘았다. 하지만 그 작은 몸부림은 격정적인 촉매 반응을 일으켜 몇곱절의 총알 세례를 일으키고야 말았다. 그는 벽에 바싹 붙었다. 거북이처럼 고개를 말아 넣고 몸을 움추렸다. 차가운 벽을 따라 진동이 느껴졌다. 반대쪽 벽이 벌집처럼 변해버렸음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죽기로 결심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살기로 결심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무엇을 위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뱃속의 728불을 지켜야 한단 말인가? 자신을 위해? 아니면 그의 등에 칼을 꽂아 넣은 티미 그 놈을 위해?

- 그래도 막아야 겠지. 설령 상대가 나라도 말이야.
  그때 그 말이 자꾸만 귓전을 맴돌았다.

 

*


  덫은 아주 고전적이었다. 티미는 그에게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위협을 경고했고 그걸 이유로 삼아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처음에 그가 느낀 것은 혼란스러움이었다. 우선 거짓말임이 너무 티가 났다. 더구나 주어진 임무는 명백히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주어진 선택지는 둘 중의 하나. 따를 것이냐? 거부할 것이냐? 어느 쪽도 아름다운 결말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임을 그는 알았다. 항명 대신 결연히도 막다른 골목을 향해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티미가 그럴리가 없어.'

  인정하지 못했다. 인정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또한 상당한 가슴 쓰림이 동반되어야 했다.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생각해. 나이 차이도 얼마 안나는데." 그 말이 남긴 상처와 아픔은 '개비스콘'으로도 가라 앉히지 못할 것이었다.

탕!

  두번째 총알을 발사했다.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탄알집을 열고 남은 총알을 확인했다. 그는 자신이 정확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여름날의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알소리에 귀가 멍했기 때문이었다. 올라가자. 여기서는 승산이 없었다. 빌딩의 5층으로 몸을 피하기로 했다. 물론 올라간다고 뾰족한 수는 없었다.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중력의 무게만 더해질 뿐이었다. 올라가면 올라갈 수록 더 큰 고립이 그를 짓누를 것이었다. 그래도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비상문을 밀어제꼈다. 미끄러지듯 계단을 올라갔다. 동전들이 짤랑거렸고 지폐와 지폐가 몸을 비비며 서걱거렸다. 탕!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계단 아래까지 놈들이 따라왔다. 난간마다 불꽃이 튀겼다. 길 잃은 총알들이 허공을 갈랐다. 재수없으면 한 방에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화가 치밀면서도 서러웠다. 몸을 비틀어 계단 아래로 총을 밀어 넣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이제 열 발 뿐이었다. 더도 없고 덜도 없는 열 발.

 

*


  티미는 치어리더 여자애의 스웨터 안으로 손을 넣지 못했다. 물론 스커트 아래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티미의 처참한 실패를 지켜보았다. 진작부터 0.03 %와 30 %의 확률 차이를 이해하고 있었지만 '내 그럴 줄 알았지'식의 마음은 들지 않았다. 고용인의 불행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티미는 실패의 원인을 진작에 '티파니'나 '탈리아'에 다녀오지 못한 자신에게서 찾았다. 물론 스스로를 탓하는 자세까지는 높이 살만했다. 허나 에둘러 그에게 책임을 묻는 교활함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티미는 그의 눈치를 보았다. 앞에서 달라고 하지 않았다. 속을 털어놓고 의논하지도 않았다. 뒤에서 일을 꾸몄다. 슬슬 그를 떠보았다. 그는 그것이 불편했다. 마치 그가 티미의 돈을 억지로 움켜쥐고 배짱을 튕기며 내놓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티미의 돈이었다. 티미가 넣은 돈이고 티미가 원하면 언제든지 빼내어 쓸 수 있는 돈이었다. 그가 관여할 이유는 없다. 그의 역할은 단지 잠시 잘 맡아주는 것 뿐이었다. 티미가 그를 고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치어리더 여자애들에게 목걸이나 티아라를 사주느라 용돈을 탕진하는 일이 없도록 만류하라고 고용한 것이다. 그의 일이다. 그는 맡은 일을 할 뿐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이제와서, 이런 식으로…….

  어깨가 시큰거렸다. 왼쪽이었다. 끈적거리고 미지근한 액체가 셔츠를 적셨다. 어디에서 날아와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 없기는 총알이나 바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순간 비틀거렸지만 뒤로 돌아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 중 한 발에 놈들 중 하나가 가슴을 맞고 나동그라졌다. 피는 피를 불렀다. 항상 그랬다. 더 많은 놈들이 소리를 듣고 달려와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총알을 퍼부었다. 문 안 쪽으로 몸을 날려 피하면서 생각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군.' 몇 놈들이 문 앞으로 다가왔다. 오른팔로 총을 옮겨 잡은 다음에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로 두 발을 쏘았다. 왼손잡이의 오른손 사격이 마음 먹은대로 될 리는 없었건만 다행히 한 놈이 문을 열고 들어오려다가 더 고꾸라졌다. 얼음 송곳이 뚫고 지나간 듯한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그는 쓰러진 놈을 끌어 당겼고 문을 닫고 몸을 숨겼다. 뒤이어 날아온 몇 발이 문에 흉한 구멍을 내었다.

  쓰러진 놈의 품을 뒤져 그는 지갑을 찾아내었다. 예상대로였다. 그를 쫒는 이들은 용병이었다. 이해가 가는가? 자신이 고용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고용하는 이의 의도가? 도대체 이 무슨 고약한 장난이란 말인가?

  티미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모든 연극을 연출하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장막 뒤에 숨어 시치미만 떼고 있는 것이다.

 

*


  이것이 소모품들의 운명이다.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 잭 바우어, 샘 피셔, 이단 헌트, 제이슨 본……. 모두가 이런 식으로 버림받았다. 한 세월 몸 바쳐 일한 결과란 예외 없이 이런 식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티미의 어린 동생들로부터 뱃속의 돈을 지켜내려고 그는 분전했다. 불량 학생들의 폭력 및 금품 갈취로부터 티미를 지켜내려고 분투했다. 그 사이 그의 결혼 생활에는 서서히 금이 갔다. 아내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언제부턴가 밥을 같이 먹지도 잠을 같이 자지도 않게 되었다. 틈나는 대로 그는 방수용 페인트며 실리콘이며 종이 점토를 사다가 잔금을 메워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와 같은 모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색이 달랐고 메워진 티가 났다.
- 꼭 우리 결혼 생활 같은 꼴이네.
  아내는 또 포도주를 홀짝였다. 술 마시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설득했다.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일단 티미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그 또한 미련없이 은퇴할 거라고. 그 날이 오면 어디 좋은 곳으로 이사해서 새롭게 시작하자고. 그리고 그 2막에는 더 이상의 야근도, 위험 수당도, 말다툼도, 혼자 먹는 밥도 없을 거라고. 그의 말은 먹히지 않았다. 그는 3 개월째 쇼파에서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중이다. 며칠째 같은 옷을 입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침은 맥머핀으로 해결했고 저녁은 맥치킨 샌드위치로 해결했다. 식후에는 로날드를 끌고 펍으로 가서 새벽 한 시까지 위스키를 들이켰다.
- 이젠 딸 애도 나한테 말 한마디 하지 않아.
  그럼 어김없이 로날드는 곱슬거리는 빨간 머리칼을 쥐어 뜯으며,
- 자네 딸은 이제 6개월이잖나.
  그런 쓰잘떼기 없는 주정을 섞어 배부를 때까지 알코올에 인생을 적선하는 것이 일주일에 여섯 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쇼파에 누웠다가 다음 날 아침 일곱시면 다시 맥도날드로 향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협의이혼의사확인신청서'를 위시한 몇 장의 종이 쪼가리가 나뒹굴고 있다. 부러 보라고 놓고 아내가 시위하는 것이었다. 보라고!

 

*


  탕! 다음 총알은 문 뒤에서 튀어나와 그를 덮치려던 적의 이마를 날렵하게 관통했다. 열에 아홉은 즉사했을 것이 분명한 상대를 두고도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방아쇠를 한 번 더 당겼다. 관성의 농간으로 상대의 피를 뒤집어 쓰고 난 다음에야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적을 제압했으나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이제 딱 세 발 만이 남았으니까. 얼마나 더 남았을까? 열 놈? 스무 놈? 그 하나를 잡기 위해서 그의 보스는 몇 명의 용병을 샀더란 말인가? 문득 해 질 무렵의 밀물처럼 회의가 밀려 들어와 그의 외로운 영혼을 적셨다.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싶었다. 삼십분 전까지만 해도 반드시 살아남자고 다짐했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운이 좋으면 살아 남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죽을 힘을 다해 이 빌딩을 빠져 나가기만 하면 0.03 %의 확률이 30 %쯤으로 높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뭘하지? 캘리포니아나 플로리다 같은 따뜻한 동네로 도망갈까? 수중의 728불로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혹은 뭘 어떻게 할 수 없을까?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캘리포니아 남부로 가서 운이 좋으면 사설 경비업체에 직원 자리 하나쯤 얻을 수도 있겠지.

  그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충성의 서약은 한 낱 휴지조각이 되었다. 사랑의 서약은 해피밀보다 장난스러운 것이 되었다.  평소 보고 듣고 배운 기술이란 뛰고 쏘고 죽이는 것 밖에 없지. 남의 것을 지켜주는 일을 했지만 정작 자신의 것은 하나도 지켜내지 못한 그였다. 스스로가 가치 없게 느껴졌다. 무력감만 남았다. 그래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마음 단단히 먹고 저지선을 돌파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그냥 포기하는 것이 나을지. 빛이 보였고 그림자가 보였다. 발소리가 들렸고 말소리가 울렸다. 그는 비상구로 향했다. 빌딩의 6층이자 반옥상으로 올라갔다. 쫓겼다. 분명 쫓기고 있었다. 전성기의 그였다면 이렇게 도망만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작에 내려갈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어찌한단 말인가. 그가 처음 사격을 배울 때 교관이 가장 엄히 가르친 것은 남은 총알 세는 법이었다 (특히 베레타를 쓸 때는 더더욱!). 이제 남은 총알은 겨우 세 발이다. 적과 나눠 쓰기도 넉넉치 않을 것이다. 잰 걸음으로 반옥상을 향해 다가갔다. 중력의 무게는 소름끼치도록 그의 발을 잡아 당겼다. 높이 올라갈 수록 더 처참하게 떨어질거야. 알면서도 그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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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티미의 느린 걸음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막 옥상을 쓰다듬고 떠오른 밤의 바람이 풋볼티 위에 받쳐입은 코트를 펄럭여 한층 더 영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해주었다. 미래 동선을 따라 장난감 병정들이 좌우로 사열했고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 들어온 티미는 마침내 목표물이 길고 지루한 도주를 마침내 멈추었던 그 자리에 섰다. 만족감과 찝찝함, 시원함과 안타까움, 불쾌함과 서운함이 어지럽고 복잡하게 뒤섞인 표정으로 한참을 바닥에 널부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 쪽 무릎을 끓고 앉았고, 주머니에서 핸들 유틸리티 커터 나이프를 꺼내 능숙하고 정확하게 쓰러진 남자의 배를 갈랐다. 남자의 몸 안에는 구겨진 낡은 지폐 몇 장과 짤랑 거리는 더러운 동전 몇 개 뿐이었다. 닦거나 추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양쪽 주머니에 닥치는대로 쑤셔넣었다. 티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돌아섰다. 침묵의 배웅 속에, 입장한 그 길을 따라 조용히 퇴장하며 말했다. 728불, 이라고. 그러나 그 한 마디는 너무 짧고 작고 낮았으며 애초에 소리 자체가 워낙에 입 안에서만 맴돌다 말았기 때문에 그 자리의 누구도 알아 듣지는 못했던 것 같다.   

(200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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