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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메밀꽃 필 무렵엔 좀비가 많다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9.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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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 장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눈이 따갑도록 강렬한 햇살. 불판이 올라간 고기마냥 타들어가는 목덜미. 등줄기를 타고 줄기를 이루어 흐르는 땀. 유령처럼 일렁이는 아지렁이. 장터를 오가는 다른 이들은 모두 제 각각의 태양이 되어 숨막히는 열기를 발산한다.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는 의미렸다. 비로소 땀이 말라간다는 것은 꽤나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였다는 뜻이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들 돌아가고 남은 빈 터에서 상인들은 저마다 탄식을 내뱉는다. 전대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다들 충격을 받았다는 눈치다. 다시 말해서 오늘도 시원하게 공쳤다는 얘기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장도 기분이 유쾌해야 볼 맛이 나는 것이다. 열기에 지치고 짜증난 사람들이 쉽게 지갑을 열리가 없다. 이렇게 푹푹 찌는 날에라면 누가 밑천을 대준대도 돌아다니기 싫을 것이다. 사실 지난 낮의 장터에 장 보러 나온 이들이 있기나 했는지도 의문이다. 낮동안의 모든 일이 아득하여 분간이 가지 않는 희미한 꿈처럼 느껴진다.

  저 멀리 나뭇꾼 패들이 보인다. 일명 ‘한닢만파’라고 불리는 놈들이다. 주업은 벌목인데 부업은 갈취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무더운 날에 지게를 한 짐씩 지고 (몇 놈은 두 짐이나 지고) 저리 얼쩡거리고 있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놈들이거나 정말 제대로 미친 놈들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둘 중 어느 쪽에 해당하거나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다. 저러다 강짜를 부리거나 행패를 놓는 수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가 지기 전에 판을 접고 저들과 얽혀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어차피 장은 파했다. 시간을 끌어봐야 더 올 손님도 없을 것이다. 이미 여관으로 떠난 상인들도 있다. 얽둑빼기 해리는 기어코 파트너 꺽다리 조쉬의 마음을 슬쩍 떠보았다.
- 그만 철수할까?
  꺽다리 조쉬도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더 이상 반가울 수가 없는 소리군. 
  그들 바로 앞의 드팀전 상인이 전대를 풀고 그날치 매상을 따졌다. 절렁절렁 소리는 요란했지만 보아하니 그쪽도 재미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조쉬가 중얼거렸다.
- BP장이 언제 흐뭇했던 적 있었나. 다들 내일 DH장을 기대하고 있겠지.
- 그렇다면 오늘 밤은 밤을 새워 걸어야 할 걸?
- 달이 뜨렸다?

  해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남자는 휘장을 걷고 말뚝을 정리하는 상인들을 도왔다. 또한 저 멀리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나뭇꾼 패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상단의 가드는 겨우 넷 뿐이었고 놈들의 수는 열배이 넘었다. 겁이 나지는 않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상대가 누구라도 겁을 먹은 적은 없었다) 객관적으로 좋아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굳이 무리할 이유는 없었다. 상인들이 하나 하나 떠나기 시작했다. 내일 JB와 DH에 장이 선다. 축들은 그 어느쪽으로든지 밤을 새워서라도 육칠십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었다. 그건 금성의 상인들 사이에서 공유된 운명 같은 것이다. 문제는 상인들의 무리가 나누어지면 가드들 또한 나누어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넷으로도 약세인 전력이 그나마도 나누어지게 되었으니 그 점이 문제였다. 파트너인 해리와 조쉬는 함께 움직일 것이었다. 아마 DH로 움직일 것이다. 짝다리 재스퍼와 뚱땡이 케빈, 그렇게 둘이 JB로 갈 것이다. 달리 무엇을 바라겠는가. 가드들의 운명도 상인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 모두가 떠돌이다. 모두가 무사하기를 바랄 수 밖에.

  주점에 도착하니 이미 싸움이 터져 있었다. 싸움은 그냥 장날 저녁 주점 풍경의 일부나 다름이 없었다. 그날 벌이가 있으면 있는대로 벌이가 없으면 없는대로 상인들은 주점으로 몰려가 맥주를 마시며 그날의 피로와 고단함을 풀었고 그 결말은 언제나 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런 싸움은 가드들이 나설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시원한 술이었다. (땅콩이나 감자튀김을 안주삼아.) 주정꾼들의 욕지거리와 그에 진절머리를 내는 계집들의 앙칼진 고함소리가 맞추는 묘한 박자의 장단 속에서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술 생각이 간절했다. 진 앤 토닉. 근무 중이면서 근무 중이 아닌 묘한 시간이었지만 한낮의 유별났던 무더위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눈 감아 주어도 무방할 것이었다.  
- 해리, 그런데 그 퀸 비 말이야……. 

  계집 목소리를 들으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조쉬가 퀸 비 이야기를 꺼냈다. (어쩌면) 조금은 비웃는 것도 같았다. 퀸 비 이야기만 나오면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으니 파트너에게 들키지 않을해야 들키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퀸 비. 그녀는 BP 지구 주모들 가운데서도 단연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능력과 수완으로는 말할 것도 없었고 미모 또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때문에 BP를 오가는 많은 상인들과 가드들이 퀸 비를 연모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은 외모나 재력에서 해리보다 훨씬 나았다. 해리는 확실히 계집과는 연분이 먼 편이었다. 반대로 계집 편에서 정을 보낸 적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평생 그러했다.) 얽둑빼기 상판이 한 가지 이유요, 숫기없는 왼손잡이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숫기없음이야 뭐 그렇다 치더라도 왼손잡이가 어이하여 결격 사유가 되는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해리는 막연한 기대를 놓지 않았다. 퀸 비는 해리가 가드로 상단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던 20년 전부터 계속 주점을 운영했고 해리는 매번 BP를 지나칠 때마다 퀸 비의 주점을 들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거기서 쓴 술값만 하더라도 상단 하나를 만들 정도는 될지도 몰랐다.) 퀸 비는 항상 그에게 친절한 호의를 보였고 (물론 그 친절이 동정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쓸쓸하고 뒤틀린 그의 반생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연분홍 희망을 품게하는 존재였다. 꺽다리 조쉬는 하필, 마침, 덜컥, 그 퀸 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 왜? 퀸 비가 뭘?
- 실은 그 스파키라는 놈이 실은 감쪽같이 퀸 비를 후린 눈치거든. 
  해리는 과장되게 입을 딱 벌렸다. 스파키. 그 놈을 잊고 있었다. 얼마전부터 상단을 따라다니기 시작한 어린 장돌뱅이 (직접 무두질한 피혁을 판다나 뭐라나?) 해리의 입장에서는 외모와 재력만이 아니라 나이에서 녀석보다 나은 점이 없었다. 스파키는 그의 나이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리 용을 쓴들 연소패들을 적수로는 명함이라도 내밀 수 없다는 걸 진작에 알고는 있었지만 (하필) 퀸 비를 (하필) 스파키 놈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세상에 널린 게 주점이고 널린 게 주모인데 왜 하필 퀸 비인가. 또 반대로 세상에 널린 게 장돌뱅이인데 왜 하필 스파키인가. 또 퀸 비, 그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연소패와 정분을 쌓는 것이 요즘 유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녀 연배에 그렇게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송이를 데리고 놀면 일종의 '미성년자 약취 및 유인'이 아닌가. 하여 마음에도 없는 볼멘 소리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무어, 그 애숭이가? 물건가지구 나꾸었나부지. 착실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 그것만은 알 수 있나. 일단은 가봄세. 내 한 턱 쓰도록 하지. 

  꺽다리 조쉬가 ‘퀸 비의 터번’에 가자는 것은 해리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바텀리스 프라이. ‘퀸 비의 터번’은 감자튀김을 바닥이 보이지 않을만큼 채워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요즘 말로는 무한 리필이라고 하던가?) 게다가 맛도 기가 막혔다. 퀸 비가 여러 가지 재주가 있지만 (본업인 알코올 제조를 비롯하여) 크게 썰어낸 감자를 바삭하게 튀겨내는 능력 또한 일품이었다. 그리고 꺽다리 조쉬는 보통 맥주 한 잔에 열 그릇씩은 먹어치웠다. 도대체 그게 다 어디로 가는 건지 의문스러울 지경이엇다.  

  가뜩이나 상했던 해리의 기분은 ‘퀸 비의 터번’을 들어서면서 더욱 망쳐버렸다. 하필 그 자리에서 스파키를 마주쳤기 때문이다. 녀석은 그곳의 웨이트리스 중 하나인 빨간머리 앰버에게 지분거리는 중이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벌건 대낮부터 계집과 농탕을 치는 광경이 불쾌했고, 퀸 비를 감짝같이 후렸네 마네 소문이 도는 마당에 또다른 여자와 저러고 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참말로 지구인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돌아다니누나. 스파키 앞을 막아서기가 무섭게 따귀부터 올려붙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이유다. 녀석의 상기된 눈망울이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이글거렸지만 해리는 조금도 동색하지 않았다. 대신 마음 내키는대로 모두 뱉어버렸다. ① 어디서 굴러 먹던 개뼈다귀, ② 너 같은 놈을 낳고도 느이 어머니는 미역국, ③ 느이 아버진 뭐하시노?, ④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돼지, ⑤ 대체 계집이 다 무어야 등이 유려하게 조합된 일장연설이었으나 정작 흥분한 해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도리어 꺼지란 말에 진짜 고분고분 꺼지는 스파키의 뒷모습에 문득 측은함마저 느꼈다. 아직두 서름서름한 사인데 너무 과하지 않았을까 하고 마음이 섬짓해졌다. 소란을 지켜보는 퀸 비의 표정도 싸늘했다. 어쩌면 같은 술 손님 주제에 어린 놈이라도 붙들고 치고 닦아 센 것이 너무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난장을 피워가며 제 맘 속의 소리를 모두 털어내고도 마음이 썩 편하지가 않아선지 어째선지, 해리는 주는 술잔이면 거의 다 들이켰다. 한 잔에 두 잔, 두 잔에 석 잔, 석 잔에 넉 잔을 걸치다보니 어느새 어둠도 짙게 깔렸다. 차차 거나해짐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일단 스파키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헐 작정이었을까?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망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서 얼마 후 스파키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죄책감 때문에서라도 마시던 잔을 냅다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없이 허덕이며 ‘퀸 비의 터번’을 뛰어나간 것이다. 
- 젊은 친구, 뭔 일이야? 
- 해리, 당신 낙타가 줄을 끊고 야단이에요. 
- 우리 허니번치를? 이런! 염병할 각다귀들 장난이지, 필연코. 
- 각다귀들이 아니에요. 좀비란 말이에요. 
- 좀비! 


  하긴 좀비가 극성맞을 무렵이지! 해리은 짐을 풀어 전자동 산탄총을 꺼내 들었다. 분당 240발의 발사가 가능한 12게이지짜리다. 어둠을 뚫고 스파키의 뒤를 따라 득달같이 달음질하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스파키였다. 방금 전 자기에게 따귀를 맞았음에도 괘념치 않고 바로 달려와 준 것이 짠하고 고마웠다. 게다가 함께 달리고 있지 않은가. 컴뱃 나이프를 들고. 좀비들이 있는 방향으로 (어쩌면 자기도 위험에 빠질지 모르는데!) 어쩌면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닌데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혼자서 상대하긴 부락스런 녀석들일 거예요.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덧붙이는 스파키의 말에 해리은 짐짓 헛기침을 해보았다.
- 우리 낙타를 못살게 구는 녀석들은 내가 가만 두지 않을 걸! 

  따지고 보면 해리과 낙타 ‘허니번치’의 이십년 인연은 결코 얕지 않았다.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잠이 들었던 세월이 반평생이었다. 둘이 함께 누빈 금성의 땅이 몇만 마일이던가. 낙타를 볼 때면 해리은 늘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여간 안쓰러운 것이 아니었다. 탄력을 잃어 바스라진 목털. 짓물러 게슴츠레 해진 눈동자. 닳아빠져 피까지 엉겨붙은 발굽. 제 꼬리조차 제대로 휘젓지 못하게 된 것이 이미 오래 전 일이었다. 하나 예쁠 것 없는 모습임에도 해리은 늙은 짐승이 애뜻했다. 짐승도 그에게 뭔가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먼발치에서 나타나기가 무섭게 야단이었다. 피로 칠갑을 한 낙타는 모를 벌름거리고 입을 투르르거렸는데 채 닫히지 못한 입가로 침과 거품이 섞여 주르르 흘러내렸다. 해리은 신발이 벗어져라 달려가 짐승을 글어안고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정성스레 어루만져주었다. 자세히 보니 굴레가 벗어지고 안장도 떨어졌다. 날카로운 데 물리고 베인듯한 상처가 곳곳에 보였다. 
- 용케 목숨을 건졌구나. 내 다시는 너를 이리 혼자두지 않으마. 

  스파키는 애뜻한 상봉의 순간을 방해하기가 멋쩍었던지 야간 투시경을 꺼내어 쓰고 이리저리 흔적을 살피었다. 
- 어째서 이 놈을 그냥 버려두고들 간 거지? 
- 모르겠어요. 듣기론 짐승도 물어 죽인다던데. 
- 손 쉬운 먹잇감이었을텐데. 
- 흔적은, 아마도 이 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피로 물든 흙 위로 어지러운 적어도 십수개 이상의 발자국이 긴박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 우리가 온 방향이로군. 마을 쪽이야. 
- 그렇다면 왜 도중에 마주치지 않았던 걸까요. 
  뭔가 번쩍 하는 것이 해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그렇다면 혹시… 우릴 피해간 것이 아닐까?

  그 말이 맞다면 좀비들은 지금쯤 마을 언저리에 당도했을 것이다. 해리과 스파키는 서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거의 같은 순간에 각기 다른 방법으로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물론 BP는 큰 마을이다. 그리 쉽게 좀비들의 습격에 무너질 BP는 아니었다. 십여년 전 이유 모를 역병이 일대를 휩쓸고 간 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좀비다. 역병으로 죽어 묻힌 자들이 무덤을 파헤치고 나오면서 주민들을 공격했다. 좀비들에게 공격당한 주민들은 똑같이 좀비가 되어 다른 주민들을 공격했다.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꼭 이맘때마다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철저하게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감시 초소도 세우고 무기도 매입했다. 총을 겨냥하여 쏘는 법도 배웠고 불을 붙여 놈들을 쫓는 방법도 익했다. 놈들이 얼마나 영리한지는 놈들이 되어보기 전엔 알 길 없는 노릇이지만, 함부로 마을로는 찾아들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런 대비 테세를 알아챘기 때문이라는 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분명 한 무리의 놈들이 직접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 걸까? 흔적으로 봐선 그 수효가 기십을 넘을지도 몰랐다. 낙타를 버려두고 간 것도 수상한 부분이었다. 더 큰 먹이를 노리고 있을 수도 있단 뜻이었다.

*

   BP는 해리에게 고향이나 진배없는 곳이었다. 떠돌이 주제에 진정 BP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그런 소리를 했다간 욕 얻어 먹기에 딱 좋겠지만 해리에겐 해리 나름의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드팀전 상단을 따라, 그리고 뜨고 지는 달을 따라 면에서 면으로 건너가며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꿈결에 문득 그리워지는 곳은 BP밖에 없었다. 퀸 비 때문일까? (아니면 바텀리스 프라이 때문일까?) 조쉬은 그리 타박을 주겠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퀸 비야 이제와 다 늙어 농담 반에 진담 반으로 그냥 하는 얘기고, 세월과 무관하게 해리의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은 BP에서 겪었던, 다시 없을 단 한번의 괴이한 인연이었다. 미스터 노머스. 디키 노머스(Dicky Normous). 하긴 그 날도 달이 밝았다. 우연이 인도하여 달빛과 눈물에 젖다보니 이럭저럭 이야기가 된 무섭고도 기박힌 밤! 그 이후로 해리은 단 한번도 그 남자를 보지 못했다. 남자에게 감정을 느낀 것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그 길로 줄행랑을 쳤다가 다음 장날에 슬그머니 돌아와 보니 이미 노머스 집안은 BP을 뜬 뒤였던 것이다. 아마도 망신살에 야반도주를 했을 거란 뒷공론을 뒤로 한 채 그는 미스터 노머스를 찾아 제천 장판을 뒤집고 다녔지만 이미 엇갈려버린 인연을 되이을 길은 없었다. 그때부터 어김없이 드나들기 시작한 BP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매번 역시나 실망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어떤 면에선 평생 외로웠던 그에게 그나마 산 보람을 느끼게 해주는 거의 유일한 기억이기도 했다. 그런 BP이 좀비들에게 쑥대밭이 된다? 줄행랑을 친다고 마음이 편할리가 만무했다. 물론 조쉬과 짐수레도 걱정이 되어서기도 했으나. 

- 엄호해하세요. 
  스파키가 바짝 따라붙었다. 이미 해괴한 기운은 안개처럼 낮고 짙게 가득히 깔린 다음이었다. 어둠 속의 장터 공기는 얼움보다 차가웠고 저 멀리 의미없이 흔들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 모습은 오금이 저릴만큼 으시시했다. 그들은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 아저씨, 걸음이 이상해요. 
- 나도 안다. 

  좀비들의 걸음이다. 느리고 부정확하다. 얼핏 눈 짐작으로도 삼십 놈은 넘어 보였다. 그 중 얼마가 최초 마을에 침입했던 좀비이고 그 중 얼마가 놈들에게 당해 새로 좀비가 된 좀비인지 그들은 알 수가 없었다. 하긴 그렇다. 엄밀히 말해 처음부터 좀비였던 자는 없을 것이다. 좀비한테 물리면 좀비가 된다.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는 사실이다. 귀족도 물리면 좀비가 되고, 상놈도 물리면 좀비가 된다. 일단 물리면 허구한 날 장에 나와 공치는 나무꾼들도 좀비가 되고, 어른보다도 무섭다는 각다귀들도 좀비가 된다. 그러고 보면 퍽 공평하다. 빈과 부가 없고 귀와 천이 없다. 소와 노가 없고 미와 추도 없다. 모두가 좀비다. 좀비를 없애는 방법은 모두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머리를 자르거나 뇌를 파괴하는 것이다. 심장과는 큰 상관이 없다. 말인 즉 가슴이 아닌 머리에 달린 문제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사람이 좀비를 당해내지 못하는 이유를 물리적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닌가.
- 이보게, 조쉬! 조쉬? 자넨가? 
해리의 외침은 비명에 가까웠다.
- 안돼요, 아저씨! 조심하세요! 안돼요!
  거의 동시에 스파키가 기겁하며 만류했다. 

  조쉬. 꺽다리 조쉬. 생각해보면 조쉬은 좋은 동행이었다. 비록 연배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좋은 벗이었다. 가끔은 조쉬의 맞먹으려는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만 그 또한 이제껏 쌓아온 정의 일부인도 몰랐다. 무엇보다 조쉬은 해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듣는 재주, 그것이 얼마나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는 것인가. 미스터 노마스와의 인연만 해도 조쉬에게 백번은 더 말했을 것이다. BP 근처를 지날때마다 말했고 둥근 보름달 아래마다 말했다. 귀에 못이 박힐만도 하건만 조쉬은 단 한번도 싫은 기색을 내지 않았다. 그런 조쉬, 그런 조쉬이 입에 한가득 피와 거품을 물고 꿈틀거리며 (꿈틀거리며!) 해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여전히 조쉬일거라 믿고 싶었으나 다른 좀비들과 차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유달리 눈이 어두운 해리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침내 조금 전까지도 꺽다리 조쉬라고 불렸던 좀비가 손을 뻗었다. 그 사이 길게 자라난 (그 사이 길게 자라난?) 낯선 손톱이 거짓말처럼 달빛을 갈랐다. 
- 쏘세요! 

  하지만 해리은 차마 쏠 수가 없었다. 조쉬의 바둑알보다 까만 눈에서 아무런 반응을 느낄 수 없었음에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 거리가 좁혀져 급박해지고서야 한쪽 팔을 쏘았다. 그것도 엉겹결에였다. 조쉬 좀비의 왼쪽 팔이 날아갔다. 반쯤 찢어진 어깨죽지를 덜렁이면서도 꺽다리 조쉬 혹은 꺽다리 좀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해리은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 허리께를 뭉개놓았다. 등 뒤로 수박만한 구멍이 났음에도 조쉬 좀비는 멈추지 않았다. 짖이겨진 피와 살이 아래로 쏟아졌다. 채 소화가 되지 않은 감자튀김이 보였다. 바텀리스 프라이. 조쉬가 그렇게 좋아하던 것. (진짜 바구니에 우라지게 가득 담아주었는데! 그리고 또 리필도 해주고!) 꺽다리 조쉬 혹은 꺽다리 좀비는 끝내 그 날카로운 손을 뻗어 해리의 팔에 생채기를 입혔다. 심장! 마음! 가슴! 정! 사람에겐 있으나 좀비가 되면 사라지는 것. 그래서 사람은 좀비를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다. 해리의 뒤에 등을 붙이고 다른 좀비들을 상대하느라 애를 먹던 스파키가 보다 못해 급히 끼어들었다. 
- 머리를 쏘시라니까요! 

  스파키의 한 방에 조쉬 좀비는 머리가 날아갔다. 거짓말 같았다. 고무풍선이 터지는 것도 같았다. 시큼한 냄새에 사방이 진동했지만 상황을 받아들일 겨를도 없었다. 이미 사방에서 좀비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놈들의 으르렁거리는 오싹한 소리에 입이 바짝 말랐다. 과연 짐승인가 사람인가. 방금 전까지 사람이었다가 갑자기 짐승이 되는 일이 어찌 가능하다는 말인가. 스파키는 생각 외로 날래게 이리 저리 뛰며 놈들을 상대했다. (장돌뱅이가 제법인데?) 퍼뜩 정신을 차린 해리도 마음 독하게 먹고 놈들에게 맞섰다. 저들은 사람이 아니다, 저들은 사람이 아니다,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고야 마는 그였다. 도망치자! 이미 조쉬은 짓이겨져 형체도 없는 고깃덩이가 되었고 짐수레나 본전을 생각할 경황도 아니었다. 일단은 살고 볼 일이었다. 해리과 스파키는 낙타를 끌고 밀고 달렸다. 달리다 틈이 나면 돌아서 방아쇠를 당겨, 제일 앞서 쫓아오는 놈에게 한 방을 먹여주었다. 하지만 한 놈이 당하면 다른 놈들도 겁을 먹는다는 건 최소한 저들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좀비다.) 선두의 놈이 거꾸러지고 산산히 찢겨 너덜너덜해져도 다른 놈들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해리과 스파키를 향해서만 무섭도록 돌진해왔다. 

*

  좀비는 인간의 살 냄새를 맡는다. 인간도 좀비의 살 냄새를 맡을 수는 있다. 알고 보면 메밀꽃 냄새랑 비슷하다. 이미 언덕 너머는 놈들로 새하얗다. 짐승같은 숨소리가 아니라 그냥 짐승이다. 보름을 갓 넘긴 달이 흐뭇이 흘리는 달빛마다 피냄새가 번져왔다. 금성에서 메밀꽃은 9월 경에 무리지어 핀다. 좀비도 9월 경에 무리지어 나타난다. 8월이나 10월 아닌 9월에 좀비가 많은 연유를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굳이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어 보였다. 해리는 퀸 비 역시 좀비가 된 상태로 그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조쉬 때와 매한가지로) 발이 땅에 붙어 옴싹달짝을 못했다. 아니 오히려 조쉬때보다 더 속수무책이었다. 퀸 비를 연모하는 마음이 두려움보다 더 컸기 때문일까? 좀비가 된 퀸 비는 (그는 속으로 ‘그래도 라임이 맞네!’하는 엉둥한 생각을 했다) 턱이 반쯤 사라진 채였다. 어디에서 누구에게 당한 건지, 아니면 좀비가 되기 전에 좀비에게 당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부서진 턱으로는 침인지 피인지 술인지 모를 것이 뚝뚝뚝 흘러내렸다. (오! 신이시여!) 턱이 없어 새는 것인지, 턱과는 상관없이 원래 좀비라는 놈들이 그런 것인지, 구수하고 몽롱한 자줏빛 연기 속에서 해리는 퀸 비가 가엾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 '이렇게 덜컥 좀비가 되어버리기엔 불쌍한 여인인데……. 능력도 좋고 재주도 많고' 스파키가 재빨리 퀸 비의 머리를 날려버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큰 사단이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해리는 가슴이 바들바들 떨리는 한편으로 스파키의 냉정함과 과단성에 혀를 내둘렀다. (그냥 장돌뱅이가 맞아?) 조쉬야 스파키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드문드문 면식만 있었을 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것도 고작 며칠 전의 일이다. 허나 퀸 비는 다르다.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정분이 난 상태였고 (또 잠시 전까지 농탕을 부렸을) 계집과의 연을 그처럼 단박에 칼로 무 베듯 싹둑 잘라버릴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말 '요즘 젊은 축들'은, 그런 생각도 했다. 심장! 마음! 가슴! 정! 사람에겐 있으나 좀비가 되면 사라지는 것. 그렇다면 요즘 젊은 축들이란 좀비보다 더 무서운 존재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퀸 비를 그렇게 처치할 수 있다면 해리는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게다가 아까 치졸한 난장을 피우고 따귀까지 날렸던 해리가 아닌가. 만약 해리가 좀비가 된다면 아마도 스파키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헤드샷을 날릴 것이다. 아마도 한 방에 끝내버리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땀이 등을 한바탕 쭈욱 씻어내렸다. 그것이 오싹하게 느껴져서인지, 아니면 저녁에 벌였던 일에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해리쪽에서 먼저 침묵을 깼다. 
- 총각두 젊겠다, 지금이 한창 시절이렸다. ‘퀸 비의 터번’에서는 그만 실수를 해서 그 꼴이 되었으나 설게 생각 말게. 
- 천만에요. 되려 부끄러워요. 계집이란 지금 웬 제격인가요. 
  휘몰아치는 아드레날린에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있었으나 어조만큼은 한풀 수그러진 것이었다. 신중히 주위를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 자나깨나 아버지 생각뿐인데요. 제겐 어머니가 없거든요. 피붙이라곤 아버지 하나뿐이에요. 
- 돌아가셨나? 
- 당초부터 없어요. 
- 그런 법이 세상에……. 그럼 자네는?
- 몰라요. 저절로 생겼나보죠. 하늘에서 내려왔거나. 아무튼 저 때문에 아버지가 집에서 쫓겨났다는 사실만 알아요.

  해리는 상황도 잊고 껄껄 웃었다. 낙타 허니번치도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었다. 꺽다리 조쉬도 우습다며 배를 잡고 껄껄 으르렁 소리를 내었다. 스파키도 민망했던지 김 빠지는 소리를 내며 실소했다. 그리곤 정색을 하여 우겼다. 
-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정말이에… 응? 조쉬 아저씨? 
- 조쉬? 꺽다리 조쉬! 
  분명 아까 여러 발 총탄을 맞고 짖이겨진 조쉬가 어느샌가 슬그머니 다가와 그들 틈에 들어와 있었다. (언제부터 같이 웃고 있었던 거야?) 팔 한쪽과 허리 절반이 없어졌음에도 용케 직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구멍난 아랫배 안으로 아직도 한 웅큼의 감자튀김이 보였다. (역시 바텀리스 프라이로군!) 사실 뒷통수도 삼분의 이쯤 남은 걸 생각하면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게 용했다. 도대체 언제 우리에게 접근했단 말인가. 좀비와 같이 웃고 떠들면서도 몰랐다니! 해리는 숙련된 가드답지 않게 반쯤 혼이 빠져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둥대었다. 길길이 날뛰는 낙타 허니번치의 방울소리는 메밀밭을 따라 요란스럽게 흘러갔다. 스파키만이 침착하게 조쉬을 노려 겨냥하였다. 한 발, 두 발, 세 발, 꺽다리 조쉬 혹은 꺽다리 좀비가 바닥에 완전히 널부러진 뒤에도 두 발을 더 쏘고서야 스파키는 총질을 멈췄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낙타 허니번치의 목에서 방울을 끊어내었다. 
- 우리가 방울 소리를 생각하지 못했네요. 
- 미안하이. 나도 그 생각을 못했네. 

  해리는 부끄러웠다. 누가 숙련된 가드이고 누가 보호를 받는 장돌뱅이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생각도 했다. 그들은 서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사방을 경계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서로 의논하지는 않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는 명확했다. DH. 예정대로라면 내일 상단이 이동하려던 목적지.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군부대도 주둔하고 있어 그나마 안전한 곳. JB로 떠났던 짝다리 재스퍼와 뚱땡이 케빈에게 아무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그들에게도 문제가 생겼다면 지금쯤 DH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꺽다리 조쉬를 잃었지만 그들과 합류하여 재정비를 하면 이 악몽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일단 당장 쫓아오는 좀비들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습격이 시작될지 모르는 일이라 덜컥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일단은 간신히 숨을 돌렸다. 산길을 벗어나 큰길로 틔어지기가 무섭게 해리와 스파키와 낙타 허니번치는 나란히 가로 늘어섰다. DH까지는 80 마일의 밤길, 고개를 일곱 개나 넘고 다섯 군데의 개울을 건너며 밤새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할 터였다. 좀 숨이 트이니 다시 한동안 끊겼던 이야기가 이어졌다. 
-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 집에서 쫓겨난 아버지는 JC 지구의 적당한 목에 자리를 잡아 술장사를 시작했죠. 그런데 술장사가 술을 너무 좋아하니 이익이 나겠어요? 그러니까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고 결국은 제가 나이 열여섯에 동네 무두장이에게 일을 배우기 시작했죠. 그러다 아예 만든 피혁을 들고 돌아다니며 직접 팔아보자 하는 생각에 상단에 합류하게 되었고요.    
-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개울가는 어디없이 하얀 메밀꽃이었다. 여름이 지난지 얼마되지 않았는데도 차가웠다.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물살도 어지간히 센데다가 발에 채이는 돌멩이도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 아버지 집안이 원래 JC 지구에 정착하였었나? 
- 웬걸요. 시원스럽게 말은 안 해주지만 원래는 BP 지구에 살았다는 말은 들었죠. 지금도 가족들은 그곳에...
- BP!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 알 수 있나요. 그 또한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 그래, 그렇겠지.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해리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디었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버렸다. 허우적거릴수록 몸을 걷잡을 수 없어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스파키는 물 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워낙에 해리가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 이렇게까지 해서 안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 염려하실 것 없어요. 
- 그래, 아버지는 BP에 다시 올 생각이 없으시다던가? 고향에 들러 부모님도 뵙고.
- 늘 한번 그러고 싶다고는 하는데요. 장사가 빠듯하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집안이랑 서먹하여 좀 내키지가 않으시는가봐요. 게다가… 휴, BP에 오늘 이런 일이 생겼으니 당분간은 어렵겠네요. 가을에는 BP에 모셔오려고 생각 중인데요. 장사를 접고 이리로 옮겨와도 제가 배운 기술이 있으니 이를 물고 벌면 이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죠. 
- 아무렴, 기특한 생각이야. 가을이랬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스파키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 더 업혔으면도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늘 낮에 주점에서 얼굴을 붉혔던 일은 다 거짓말 같았다. 해리는 빨리 아무데라도 묵어 젖은 옷도 말리고 몸도 녹여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좀비 사태가 해결이 되면 다음엔 오래간만에 JC 지구에 한 번 가봐야겠단 생각이 간절했다. 스파키와 동행할 수 있을까? 권하면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해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파키는 딴 소리를 했다. 
- 아무리 소재가 갈급했기로소니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이래 장난을 쳐도 좋을까요? 
- 응? 뭐라고?
- 뭐가요?
- 방금 자네가 한 말 말이야.
- 아무 말도 안했는데요?
-그래? 내가 잘못들었나보다.
- 제 사연이 지루하셨던 건 아니세요?
- 전혀.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낙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스파키의 라이플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해리도 요번만은 스파키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다시 낙타 허니번치의 목에 달아놓은 방울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좀비의 울음소리는 이제 아주 멀리에서만 들려왔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2009년 11월)

# Inspired by Seth Grahame-Smith
(by mash-up combining Hyo-seok Lee’s classic novel with the element of modern zombie fi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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