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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 스승들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2.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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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에서는 이제까지 내가 만났던 네 사람의 스승에 대한 기억을 다루고자 한다. 학창시절 내가 만났던 스승들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었고 나쁜 사람도 있었고 좋으면서도 나쁜 사람도 있었으며 물론 이상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분들은 모두 마지막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 같다. 이들이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 첫번째 스승 -


  선생은 대학때 운동권이셨다고 한다. 누가 그렇노라고 말해주었던 것은 아니다. 누가 그렇냐고 여쭈어 본 적도 없다. 이상한 일이지만 언제나 스스로 운동권이었다고 어필하셨다. 내가 대학을 다닐때 운동권은 별로 의미가 없는 공허한 이름이었고, 유사품인 비운동권과 총학생회의 자리를 놓고 힘겨운 경합을 벌여야 하는 존재로 전락했지만, 선생이 대학생이실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선생은 그 사실에 대하여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고,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일익을 담당하셨다는 뿌듯함에 사셨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런 개념이 이제 갓 열살을 넘긴 초등학생들에게는 요원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선생은 언제나 민중과 투쟁을 부르짖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소 귀에 경읽기'였다. 완전 번지 수를 잘못 찾지 않았는가? 게다가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어린이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는 그랬다. 선생도 전혀 괘념치 않으셨다. 혹은 괘념치 않으시는 것처럼 보였다.


  선생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970년대의 전반을 입학-운동-입대, 1970년대의 후반을 제대-운동-졸업, 그야말로 70년대의 전반과 후반을 운동 중심의 데칼코마니로 보내신 분으로, 전두환 할아버지가 대통령에 취임하던 그 다음 해에 처음으로 교단에 데뷔하셨단다. 선생의 1970년대를 찬찬히 살펴보자면 역시 늘상 말씀하시던 운동으로 보낸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그래서 우리는 선생께서 한국체대를 졸업하신줄 알았다. 몇몇 아이들이 '체대만 졸업하고도 국민학교 교사를 할 수 있는건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으나 별로 흥미로운 문제가 아닌 관계로 이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열심히 국가 권력에 저항하셨다는 분이 국가 공무원이 되셨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하다. 하지만 미리 밝혀두건대 이 글은 선생의 높은 이름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절대 운동권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서 품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를 파헤치고자함이 아니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한다. 

  선생께서는 운동도 잘 하셨다. 여기서의 운동은 축구, 농구, 배구, 야구, 짬뽕, 하키, 골프, 육상, 근대 5종과 같은 그런 운동이다. (이제 나도 혼란스럽다 - 그 운동과 이 운동을 구분하기 위해 정녕 이 글에서 각각의 운동을 적색과 청색으로 나누어 표기해야 하는 수고로움을 거쳐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체육시간이 있는 날이면 누구보다 먼저 운동장에 달려나가신 것이 바로 선생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이 운동을 그 운동인줄 알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축구에 조예가 있으셨다. 초등학생들 특유의 뻥 차놓고 냅다 달리는 전원 공격, 전원 수비형 축구에서도 선생의 예사롭지 않으심은 빛을 발했다. 선생을 빠르셨다. 우리는 감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선생은 힘이 세셨다. 우리는 감히 밀쳐낼 수 없었다. 선생의 팔과 다리는 길고도 가느셨다. 우리는 감히 그의 허리춤에 닿을 수도 없었다. 급기야 선생께서는 전성기의 로베르토 바조마냥 예닐곱명을 뚫고 벼락슛을 성공시키는 경이를 보여주시기에 이른다. 선생께서 속하신 팀은 언제나 승리했다. 우리는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 놀라움에 때때로 좌절했고 때때로 흥분했다. 역시 선생께서는 운동권이셨어라. 괜히 스스로를 운동권이라 하셨겠는가. 


  야구에 대한 전설적 일화도 있다. 물론 당시 공립 국민학교에서 체육시간에 야구를 한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탓에 여기서의 야구란 다름 아닌 발야구가 되겠다. 비록 '꿩 대신 닭'이었지만 발야구의 오롯한 재미란 이루 설명하기 힘들다. 발야구는 축구의 시원스러움과 야구의 아기자기함을 고루지녔다. 또한 축구나 야구처럼 남자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양성평등 사회에 기여한 점도 있다. (물론 우리 남자아이들에게는 모처럼 여자아이들과 체육시간에 어울릴 수 있는 '염불보다는 젯밥’ 개념의 장점도 있었다.) 선생께서는 발야구에 대한 조예도 상당하셨다. 고사리같은 꼬맹이들의 손이 있는 힘을 다해 굴린 배구공을 선생께서는 타석에서 잠자코 바라보셨다. 전운이 감돌았으나, 그것은 싱글 A에 갓 데뷔한 풋내기의 공을 배리 본즈가 타석에 버티고 서서 노려보고 있는, 그런 종류의 전운이었다. 이윽고 공이 가야할 길의 절반을 굴러왔을때 선생의 눈은 샛별처럼 빛나셨어라. 선생의 기다란 왼다리와 기다란 오른 다리가 번갈아 땅을 디뎠으며, 기다란 왼팔과 기다란 오른팔이 적절히 중심을 잡았다. 이윽고 때가 되어 공이 바로 앞까지 데구르르르 굴러오자 선생께서는 왼다리를 축으로 삼으셨고, 뒤로 빠져있던 오른다리를 힘차고 빠르게 내지르셨다. 또다시 벼락슛. 순간 봄날 오후의 먼지인지, 아니면 중국에서 건너온 황사인지 뭔지가 뿌옇게 피어올랐고, 그걸 헤치고 튀어나간 배구공은 날카롭게 하늘을 갈랐다. 우리의 손은 그 커다란 공을 잡기에 너무도 작았고, 우리의 다리는 그 빠른 공을 따라가기에 너무 짧았다. 선생께서 걷어올리신 공은 운동장을 완전히 가로질러 담장 아주 가까이에 떨어지거나 때때로, 학교 담을 넘겼다. 호움런. 그것도 장외홈런. 과연 운동권이신 선생께서는 왼팔을 호쾌하게 저으며 베이스를 돌으셨고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과도한 세레모니를 하셨다. 그때마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그때는 눈물을 닦아낼 손마저 너무 작았다. 


  선생께서 보여주신 피구경기는 너무 잔인한 탓에 (킬패스는 축구에만 있는게 아니었다) 묘사하지 않기로 한다. 선생께서 보여주신 농구경기는 너무 매서운 탓에 (바디체크는 아이스하키에만 있는게 아니었다) 역시 묘사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선생의 노래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자. 선생께서는 노래도 잘 하셨다. 역시 운동권이셨지만 체육말고 음악에도 재능이 있으셨던 것이다. 점심 도시락을 뱃속에 털어넣은 여파로 모두가 괴로워하는 오후 수업시간, 긴급조치에 맞서 투쟁의 젊은 날을 보내셨다는 선생께서는 담임 직권으로 긴급조치를 발동하시고 '전국노래자랑'을 긴급 편성하셨다. 전국노래자랑은 전국노래자랑이로되, 여건상 전 국민의 참여는 여의치가 않으니 선생께서 맡으신 학급의 제자들을 전 국민의 대표로 삼았다. 또한 선생께서는 사이먼 코웰 저리가라 할 정도로 지독한 양반이셨던 관계로 여건상 노래에는 여러가지 제약이 따랐다. 조건은 오직 하나, 선생께서 사랑하시는 의미심장한 노래만 참이고 무조건적 진리라는 것. 따라서 금지곡에 맞서 젊은 날을 보내셨다는 선생께서 손수 가무의 자유를 억압하시기에 이른다. '깊은 밤을 날아서', '사랑할수록', '희야', '날 울리지마', '내 사랑 내 곁에', ‘로라' 등이 무대에 오르기가 무섭게 차례로 제지당했고, 참다못한 선생께서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저 평등의 땅에', '아침 이슬', '작은 연못', '타는 목마름으로'등을 모범답안으로 제시하셨다. 그러나 답을 가르쳐 주었음에도 선뜻 나서는 출연자가 없으니, 언제나 그랬듯 노래자랑은 흐지부지 얼렁뚱땅 막을 내리고야 만다. 그럴때면 선생께서는 돌연 백묵을 들고 칠판에 '밤배'라고 적으셨다. 그리고는 돌연 음악 선생님으로 변신, 풍금을 치며 노래를 부르셨다. 풍금솜씨는 정말 서툴고 형편없었지만 누가 듣건 말건 꿋꿋이 부르셨다. 수업 종이 칠때까지 끝도 없이 부르셨다. 

검은 빛 바다위에 밤배 저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 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때면 
작은 노를 저어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
아 볼사람 찾는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텐가 
아 볼사람 찾는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 두번째 스승-


  다음은 중학교때의 일이다. 어느날 갑자기 나는 장기부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당장 특별 활동이라는 것을 특별히 하나 결정하여 들어가야 하는 시점이었는데 그중에서 장기부가 제일 만만했다. 첫째, 장기부에는 선발 요건도 없고 인원 제한도 없었다. 둘째, 장기는 바둑처럼 골치 아프지 않으면서도 바둑에 필적하는 지적 충만감을 선사할 수 있는 실로 효과적인 놀이다. 어디 장기만큼 돈 안드는 취미가 있겠는가. 노는데 돈이 필요하기나 할까. 특별히 도구가 필요하기나 할까. 그냥 나무 판 하나와 빨간 말, 초록 말만 있으면 그만인 것이 장기다. 판이 없으면 바닥에 그려도 되고, 말이 없으면 종이에 그려도 된다. 흙바닥에 그린 장기판과 종이로 만든 장기말이라고 하여 장기를 둘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 불편할 뿐이지. 일찍이 이름 높은 고수와 신선들은 판이 없고 말이 없어도 잘만 장기를 두고 놀았다 했다. 동구 밖 오동나무를 다듬어 만든 것이나, 동네 어귀 은행나무를 잘라 다듬은 것이나, 도심 한 가운데의 플라타너스를 잘라 다듬은 것이나 (물론 가로수를 함부로 베어다쓰면 크게 경을 칠 수 있겠다) 관건은 연장이 아닌 목수의 실력에 달려있는 법이라 했다.   


  특별 활동 장기부의 담임은 비(非) 특별 활동의 세계에서 작문 과목을 가르치는 분이셨다. 선생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방금 술독에서 기어나온 듯한 인상의 소유자로, 피부는 쥐처럼 새까맸고 코는 루돌프만큼 빨갰다. 비단 인상만 그러셨던게 아니라 실제 매일같이 술독으로 기어들어가시길 마다하시지 않으셨다. 그게 그나마 정신을 수습하고 들어오신다는 수업시간의 모습이시니 정신이 수습되지 않는 상황의 모습이란 상상이 불가할 정도라 짐작이 된다. 세상사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신선 중의 신선, 술과 낭만을 사랑하는 금세기 마지막 풍류가, 책임감이라고는 없는 몹쓸 교사, 셋 중의 하나가 확실할 것으로 보이는 선생은 특별 활동 시간이 되면 언제나 학생들에게 대련을 (장기 또한 두 사람이 서로를 상대하여 겨루는 놀이므로) 주문하고는 스르르 사라지셨다. 대개 그런 때에는 역시 주당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기술 선생과 거너하게 한 잔 걸치러 가셨기 일쑤였다. 기술 선생 또한 비 특별 활동 세계에서의 담당 과목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발명반을 맡았는데, 역시 발명이라는게 딱히 가르칠 부분이 없는 분야인지라, 언제나 학생들에게 모든걸 위임하고 우리 장기반 작문 선생의 술벗이 되어 무릉도원을 찾아 헤메곤 하였더랬다. 일설에 따르면 두 분은 당시 우리학교에 암묵적으로 은밀하게 조직되었던 비밀결사 단체 '주호선(酒好仙 - 술을 사랑하는 신선들)'의 회장과 부회장을 각기 맡고 계셨다고 전해진다. 


  선생의 훈육방침은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생께서는 일체 장기에 대하여 강의를 하는 법이 없었다. 우리의 장기반에서 선생이 제자 전체를 앉혀놓고 입을 여는 경우는 오로지 출석을 부르는 순간 뿐이었다.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은 그저 어슬렁 저슬렁 뒷짐을 지고 책상과 책상 사이를 오가셨다. 그러다가 대부분은 술 약속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개중에 그러지 않은 지루한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졸음을 달래기 위해 계속 책상과 책상 사이를 거니신다. 소가 꼬리로 파리를 쫓듯 늙고 주름진 손을 들어 파리와 모기와 날벌레를 내치시다가 어쩌다 기분이 내키는 순간이 온다. 그제야 제자들의 기량을 힐끔힐끔 거리셨고, 그러다 운명적인 순간이 찾아와 루돌프처럼 빨간 코가 더 빨개지고, 더 이상 몸이 근지러워 한 말씀 하지 아니하시고는 견딜 수가 없는 상황이 오면, 입을 열어 결정적 훈수를 두셨다. 아시다시피 훈수란 대단히 공격적인 성격의 행위로 그 시와 때가 제대로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훈수를 두는 사람, 훈수를 받는 사람, 그리고 훈수를 받는 사람의 상대, 이렇게 세 사람 사이에 영구적 원한 관계가 야기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우리 장기부의 절대 권력이자 유일무이한 1950년대 출생자로 그 모든 가능성을 일거에 무시하셨고, 우리 중 누구도 감히 이를 문제 삼지는 못했다. 


  나는 선생께서 손수 말을 잡고 장기를 두시는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는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며, 제자된 도리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선생만큼 호걸적 풍모를 고루 지니신 분이라면 필경 장기를 두는 기술 또한 가히 호걸적이셨을텐데, 선생께서는 한번도 제자들과의 대국을 허락하신 일이 없었고, 우리는 감히 선생께 가르침을 청하는 불경을 저지른 일이 없었다. 대신 선생께는 장기를 두지 않고 있어도 마치 장기를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고유의 힘이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뭔가 가르치고 있는 듯한 그 기묘하고도 당당한 기운을 두려워했고, 선생의 루돌프처럼 빠알간 코와 십리 밖에서도 풍겨오는 술냄새를 두려워했다. 어쩌면 그 두려움은 선생의 남다른 훈육방법, 그러니까 훈수 두는 방법에 기인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결코 아무한테나 축복된 훈수를 선사하지 않으셨다. 그 또한 풍부한 경력을 지닌 숙련된 교육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나는 믿는다. 느릿느릿 팔자걸음으로 전장과 전장 사이를 어슬렁거리던 선생은 그 날 유난히 눈에 띄이는 게임을 골라 가까이 다가가신다. 대개 그것은 이제 갓 중학교에 들어와 아직 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게다가 제법 예쁘장하기까지한 학생들의 대국이다. 가만히 지켜보면 깜짝 놀랄만한 일들이 벌어진다. 스르르 풀린 눈으로 말의 움직임과 그 말을 잡는 아직은 하얗고 뽀얀 소년의 손을 그윽하게 쳐다보시던 선생은 그쯤해서 마음을 굳히신다. 그리고는 둘 중 더 마음에 드시는 녀석의 뒤로 돌아가서 (그 녀석은 둘 중 상대적으로 더 아이의 티를 벗지 못했고 상대적으로 더 예쁘장한 녀석이다) 잠시 더 전세를 지켜보신다. 그러다보면 때가 온다. 선생의 새카맣고 주름진 손은 두 개다. 그 중 하나는 대국자의 살포시 허리를 감고 다른 하나는 사뿐히 어깨를 넘어 들어간다. 그리고는 젖비린내 풀풀나는 소년의 가슴팍 주위를 만지작 거리기 시작한다. 대국의 상대가 아닌 다른 이에게 갑자기 급습을 마주한 소년은 뭣도 모르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당황한다. 당혹감에 얼굴이 붉어지는데 어쩐지 붉어져서는 안될 것 같은 대한 남아로의 자존심때문에 이를 악물고 얼굴의 핏기를 빼어낸다. 아울러 등으로 식은땀이 버쩍버쩍 나는데 뒤에 바짝 붙어 있는 선생의 몸뚱이 때문에 채 흐르지도 못하고 옷에 스며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선생의 행동에 당황하여 그런겐지, 아니면 능력이 부족하고 운이 다해 그런겐지 소년은 이내 수세에 몰려 버리고 만다. 자기가 보듬고 있는 어린 양이 고난의 길을 가는데 어찌 선생이 가만히 계시겠는가. 이 시대 마지막 풍류가이신 선생은 뽀얗고 하얀 소년의 목덜미에 꺼칠꺼칠한 얼굴을 가져다 댄다. 한참을 비비적거리시다가는 아주 나직하고 무척 뜨겁게 입을 여신다. 


- 마(馬)를 돌려서 차(車)를 막그레이. 


  정확하다. 선생이 그러시다면 마땅히 그런 것이다. 마를 돌려서 차를 막으니 상황은 반전되었다. 단숨의 적의 예봉을 막아내고 퇴로까지 끊어버린 것이다. 이로써 매서운 상대의 공세를 막아낸 소년은 겨우 한숨을 돌린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선생의 공세가 이어진다. 선생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반의 반 토막도 되지 않는 어린 소년을 뒤에서 끌어 안으셨다. 선생의 손은 빈번하게 움직이셨고, 선생의 얼굴은 그만큼 더 소년의 목덜미를 비벼대셨다. 언제 어떻게 다듬었는지 모를 그 텁텁한 수염에 소년의 목덜미가 벗겨질 지경이된다. 선생은 맺고 끊음, 주고 받음이 확실한 합리적인 분이셨고, 그때 느껴야 했던 다양한 감정들은 순수한 훈수의 댓가였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식은땀만 벌벌 흘리던 소년은 후일,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선생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교훈을 그때 배웠노라 술회하였다. 당시 그 광경을 바로 맞은 편에서 지켜봐야했던 또 다른 소년 역시 혀를 내두르며 '장기반에 여학생이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을 정도니, 선생의 기행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장기부의 일원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 나와 동창들은 만날 적마다 선생의 이야기를 한다. 대단히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그 이야기를 술안주로 삼는다. 시간이 지날 수록 선생의 기행이 소름끼치게 느껴지는 정도 역시 점점 더 심해진다. 우리의 결론은 선생께서 지니신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영혼이 선생께서 지니신 교사로서의 자격을 언제고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셨다면 말이다. 오징어채와 땅콩과 미역과 문어와 뻥튀기에 바꿔먹고, 맥주잔에 콜라잔을 부딪혀가며 이야기의 꽃을 흐드러지기 피우다보니 더럭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그는 작문 선생이고, 장기 선생이셨지만, 나는 단 한번도 선생의 작문과 선생의 장기를 구경하지 못했다. 그럼 그는 나에게 있어 무슨 선생이었던 것인가. 


- 세번째 스승 -


  역시 중학교때의 일이다. 모든 문제는 학교 운동장을 청소하는 봉사 활동 시간에 우연히 발견한 종이 쪽지 하나로 시작된다. 대체 그게 그때 왜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인가. 그때 왜 나는 바람에 날려온 그걸 주웠단말인가. 바람에 날려온 걸 주웠으면 왜 다시 바람에 날려보내지 않았다는 말인가. 햇살도 높고 맑은 가을 날, 쪽지처럼 보이는 그 것은 단풍물든 나뭇잎처럼 팔랑팔랑 날아왔다. 당시 막 십대로 접어들었던 나는 십대의 감수성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까닭은 선생께서 그리 하라 지시하셨기 때문이다.


  처음 그 쪽지를 발견한 것은 내가 아니라 B이라는 벗이다. 그는 바람에 실려오다 내 앞에서 한번 출렁이고 다시 바람에 실리는 그것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 어? 저거 좀 이상한데. 단풍잎이 아니야. 
  나도 그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 그렇네, 크기가 손바닥만하잖아. 


  분명 빨갛게 노랗게 오색으로 물들어 있었건만 그건 단풍잎이 아니었다. 단풍이 아닌데 단풍으로 오해할만한 것이 세상에 대관절 뭐가 있단 말인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B는 그걸 뒤쫓아갔다. 나는 그를 제지하려다가 말았다. 늦가을의 아침바람은 그것을 조금 더 위로 밀어올렸다. 그는 팔을 조금 더 하늘로 뻗었다. 그러나 다시 바람은 그것을 땅으로 내려놓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손을 대었다. 이번에도 또다시 바람은 그것을 밀어버렸다. 그러기를 몇 번을 반복하였다. 당시 '삼국지'를 이미 열 번도 넘게 읽었던 나는 그가 너무 깊숙히 쫓아가는 것을 우려했다. 자고로 저렇게 쫓아간 경우에 변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적어도 '삼국지'의 세계에서는 그랬다. '삼국지'대신 '금병매(金甁梅)'를 열 번 읽은 B도 말귀를 알아듣고 말을 돌려 (아니 말이 아니라 몸을 돌려)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그 쪽지가 다시 우리 앞으로 날아드는게 아닌가. 우리는 알다가도 모를 미묘한 자연의 조화앞에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아주 얌전하게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B가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몸을 숙였고, 나는 해를 등지고 그 뒤에 서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 이거 삐란데? 
- 응? 무슨 라? 
- 삐라 말이야. 삐라. 


  그렇게하여 출처를 알 길이 없는 북한의 대남 선전용 전단물이 우리의 손에 들어왔다. 이제와서 다시 생각해보지만 역시 그것을 줍지 말아야 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발행된 그것은 미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되어야 한다는 말, 그래서 남조선 인민들이 자진하여 월북하기를 바란다는 말, 그리고 그 경우에 제공될 각종 다양한 오퍼들로 채워져 있었다. 사뭇 매력적으로 보이는 조건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수업시간에 그게 모두 거짓부렁이라는 사실을 배웠던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유혹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 대신 우리는 이 수상쩍고도 불온한 인쇄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간단히는 모른 척 다시 버리는 방법이 있었다. 또한 담임 선생님한테 가져다 주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B가 갑자기 그걸 경찰에 신고하면 얼마간의 돈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돈을 받으면 그래도 돈을 받을 수 있는 쪽으로 가져다 주는게 좋지 않겠느냐, 어차피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 아니냐, 만약에 이걸 그냥 담임한테 가져다주게 되면 혹시 담임이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고 돈도 받고 표창도 받는 것이 아니냐, 등등의 말이 오갔다. 생각이 복잡해졌다. 다른건 몰라도 담탱이가 우리의 공적을 가로채도록 놓아둘 수는 없었다. 따라서 우리는 민주시민답게 경찰에 직접 신고하기로 했다. 


- 이게 뭐냐? 
  바로 그때 누군가가 그 수상하고도 불온한 인쇄물을 낚아채었다. 매의 날카로운 발톱이 햇병아리를 낚아채듯이. 그 날카로운 발톱의 주인공은 학교마다 하나 둘씩은 꼭 있는 '날이 갈수록 머리는 굳는데 주먹만 쓸데 없이 우는 질풍노도의 방랑자'로 어지간해서는 상종하지 않을도 좋은 부류의 녀석 Q였다. 그러나 Q는 남성 호르몬을 링거병으로 맞았는지 또래 아이들보다 좌우로 어깨뼈가 두개는 더 있었고, 나와 내 벗 B는 그저 평화를 사랑하고 사랑을 갈망하는 유쾌하고 건전한 십대 청소년이었다. 우리는 절대 그의 골격에 겁먹어서가 아니라 평화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가 궁금해 하는 수상하고도 불온한 인쇄물의 정체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아주 친절하고도 자세하게. 
- 이거 삐란데. 
- 무슨 라? 
- 삐라 말이야. 삐라. 


  이렇게 하여 비밀을 아는 사람이 셋이 되었다. 그러나 셋은 둘보다 위험한 숫자, 반드시 어느 한 쪽으로는 기울어버릴 수 밖에 없는 시소(See-saw)적 숫자,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아슬한 숫자, 아주 잠시 동안이나마 은밀한 비밀의 공유로 평형 상태을 이루었던 우리의 집단은 담임 선생님이 슬그머니 뒤로 나타나면서 이내 파국을 맞았다. 선생께서는 문제의 쪽지를 단번에 낚아채셨다. 여기 더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매가 있었도다. 학생이 선생의 물건을 낚아채면 문제가 되지만 선생이 학생의 물건을 낚아채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되는 법. 더구나 이 무시무시한 매로 말할 것 같으면 날카로운 발톱 외에도 인근 당구장에서 공수해 온 단단한 몽둥이와 학생생활기록부를 마음대로 작성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선생께 순종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눈이 좋지 않으신 선생께서는 돋보기 안경을 들어 그 것을 자세히도 쳐다보셨다. 처음엔 우리처럼 단풍 물든 나뭇잎인줄 아셨고, 그 다음에는 동네 슈퍼의 전단지인줄 아셨고, 마지막에서야 수상쩍은 분위기가 풍겨나옴을 아셨다. (우리 동네 슈퍼마켓이 '인민'들에게 물건을 팔지는 않을테니까?)


- 이게 뭐냐? 
  우리는 선생께 순종해야 했다. 선생의 채 초크칠이 벗겨지지 않은 선생의 고목적 다기능 몽둥이에 순종해야 했다. 선생께서 생활기록부의 수시 작성과 시험 점수 합산을 위해 와이셔츠 윗 주머니에 꽃아두시는 검정색 만년필에 순종해야만 했다. 그건 검정색 잉크를 사용함에도 빨간색으로 우리 이름을 쓰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알아야 했다. 우리 셋은 합창하듯 대답했다. 
- 이거 삐라입니다. 
- 무슨 라? 
- 삐라 말입니다. 삐라.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게 뭐냐." (“이건 뭡니다.”) "아니 이럴수가." (“그러게요, 이럴수가.”) "너희가 많이 놀랬겠구나." (“네, 그럼요 선생님. 많이 놀랐습니다.”) "수고했다. 나머지는 이 선생님이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마.” 하지만 이런 식의 같은 낭만적 루트를 따라 사건이 진행되지 않는다. 선생께서는 벼락처럼 호통을 치신다. 아마 우리가 교무실에 불을 지르고 거기에 조개탄을 던진다음에 다 타고 난 다음에 오줌을 갈겨도 그만큼 화를 내지는 않으실 것이다.

- 누구야? 이거 누가 가져왔어?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너희 셋 다 영창감이다!


  당시 피아노는 영창피아노가 최고였고, 학교가 군사문화에 찌들어 있기는 했어도 군대는 아니었던 관계로 영창은 없었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이 수상하고도 불온한 인쇄물의 최초 입수자를 찾는데만 관심이 있으셔서 필요하다면 영창이라도 만들 기세였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래서 상을 주려는 것 같지는 않고, 같이 경찰서에 가서 이승복 이래 제일가는 반공 어린이라고 칭찬해주려는 것 같지도 않고. 선생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불온하고도 수상쩍은 인쇄물을 (빨리 신고하지도 않은 채) 가지고 세월좋게 노닐고 있었다는게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일이라 여기셨던게다. 선생께서 슬슬 몽둥이에 초크칠을 하셨다. 최초 입수자를 간첩, 첩자, 간자, 세작, 스파이, 프락치 내지 그에 준하는 반동분자로 점찍어 본때를 보여주시겠다는 심산이었다. 우리는 놀란 나머지 어안이 벙벙하여 멍하니 서 있었다.


  우정이 아름다운건 균열이 있어서다. 우정마저 없으며 애초에 균열을 일으킬 것도 없다. 애초부터 우리와 우정으로 엮이지 않았던 '날이 갈수록 머리는 굳는데 주먹만 쓸데 없이 우는 질풍노도의 방랑자’ Q는 곧바로 등을 돌린다. 수상하고도 불온한 인쇄물을 퍼뜨린 주범이 지목되는 순간이었다. 
- 이 녀석들이 주워서 놀고 있었습니다. 
  귀가 얇으신 선생께서는 또 그 말을 고스란히 믿으신다. 우리도 선생의 얇은 귀를 한번 더 믿어 본다. 
- 저희도 우연히 주웠습니다. 막 신고하려는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귀는 얇았다가 두꺼워졌다 하는지 이번에는 그 말을 믿지 않으신다. 그리고는 몽둥이를 들어 우리를 복날에 개를 잡듯 두들겨 패셨다. 후두려 팬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패다는 동사로 무엇무엇을 사정없이 때리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아무래도 '때린다'보다 '사정없이'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목적어에 해당하는 '무엇무엇'이 바로 우리였기 때문이리라. 몽둥이가 아팠던 것은 어쩌면 당구용 큐대였기 때문이다. 큐대는 잡기에도 편하고 속도 알찬데다가 길이까지 적당해서 확실히 이래저래 몽둥이로 적합한 면이 있다. 우리는 당구공도 아닌데 큐대로 얻어 맞았다. 잠시 후, 경련과 호흡곤란으로 숨이 넘어갈듯 하던 (자기가 맞은게 아니라 때리는 중이었으면서도) 선생께서 지치셨는지 숨을 헐떡이며 말씀하시길, 
- 누가 주범인지 불으면 그 놈아는 보내준다. 순순히 자백하는 놈도 선처해준다. 하지만 끝까지 입 다물고 있다가 걸리면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알겠냐?


  나와 B는 비슷한 수준의 머리를 동시에 비슷하게 굴렸다. 나중에 대학에 가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어떤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가지고 '게임 이론'이라는 아주 유명한 이론을 만들었단다. 그러나 당시 우리는 그렇게 유명한 이론을 우리가 몸소 체험해보고 있는지조차 잘 몰랐다. 이때부터 '삼국지'나 '금병매'를 합친 것 보다 더욱 씁쓸한 배신과 음모와 선동과 술수와 욕망과 질투와 응징과 복수와 속죄로 넘실대는 한 편의 진한 드라마가 펼쳐지는데, 이 참에 다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양이 많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우리에게 수상하고도 불온한 인쇄물을 보냈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바로 이 게임이론을 ‘경기론(競技論)’이라고 부른다고 한단다. 


- 네번째 스승 -


  다음은 고등학교때의 일이다. 고등학교 마지막 일년간 나의 담임을 맡으셨던 선생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선생께서는 중학교 때의 작문선생과 비슷한 체형과 비슷한 외모를 가지신 분으로 아니나 다를까 대단한 술꾼이셨다. 붉게 물든 코와 게슴츠레한 눈으로 많은 경우에 술 냄새를 풍기고 다니셨다. 술을 사랑하시는 분들이 교단에 서는 것인지, 교단에 서다보면 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인지, 그 관계는 실로 미스테리한 부분이다. 선생에 관해서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져 내려오건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수학 문제집의 별첨 해설집 문제풀이를 보며 강의를 진행하신 패기 넘치는 일화다. (그래, 나 답안지 보면서 풀고 있다. 그래서 니들이 어쩔건대?)


  선생을 마지막 뵙던 날이었다. 일년간의 정신병원, 아니 고등학교 3학년 생활을 마친 나는 시험 통지표를 들고 진학 지도를 받고자 선생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반가이 나를 맞아주신 선생께서는 일년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굳게 손을 잡아주셨다. 그 감촉을 아직까지 잊기가 힘들다. 선생의 손이 약간 끈적하고 약간 미끈거렸기 때문이다.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생선의 몸이 아닌 사람의 손을 잡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선생께서 다한증이 있으셨나. 아니면 외계의 별나라에서 내려오셨던가, 아니면 정말 생선이셨는지도 모르겠다. 내 궁금증에도 아랑곳 없이 선생께서는 내 성적통지표를 받아 드셨다. 받아 드셨다고는 하지만 내가 드렸는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무실에 들어갈때는 분명 내가 들고 들어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선생께서 들여다보고 계셨을 뿐이다. 두꺼운 돋보기를 위로 올리고 두 눈을 찡그린 채 성적표를 살피는 선생께서는 마치 '스타워즈'의 요다처럼 보이셨다. 그 넘실대는 포스 때문에 질식할 지경이었다. 잠시 후 선생께서는 고개를 들어 히죽 웃어보이셨다. 
- 이만하면 되었다. 그래, 잘혔다.


  짐작컨대 선생께서는 당신의 다른 모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말하셨으리라. 내가 진학지도를 부탁드리자 선생께서는 양팔을 좌우로 펴도 온전히 잡을 수 없을만큼 넓은 대학 배치표를 테이블 위에 펼치셨다. 인구에 비해 대학이 지나치게 많은 나라 아니랄까봐 배치표는 크고 복잡했다. 선생과 나는 마치 국가의 명운이 걸린 전투를 위해 필승의 전략을 논하는 사령관과 참모장처럼 엄숙하게 테이블 위의 그것을 내려다 보았다. 어색한 침묵, 잠시 후 우리의 사령관께서는 품 안에서 노란색 형광펜을 꺼내어 입으로 뚜껑을 따셨다. 섬세하고도 미려한 유자색의 펜촉이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겨울 햇볓을 받아 반짝거리는 성스러운 순간이었다. 펜을 잡은 선생의 손은 서서히, 그러나 아주 우아하게 테이블 위의 배치표로 하강해 들어갔다.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선생이 왼손잡이셨더라면 오른쪽에서 왼쪽이었으리라) 아주 서서히 움직였다. 노랗고 빛나는 단 하나의 선이 선생의 손을 따라서 그려졌다. 선생이 손을 들어올리셨을때는 배치표가 반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노란선 위와 노란선 아래. 
- 에, 그러니까 말이여. 이 선이 지금 네 점수로 갈 수 있는 대학이다. 그러니꺼 여기서 골라보면 되겠다, 이 말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살펴보니 노랗게 빛나는 구불구불한 선이 마치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처럼 보였다. '토토, 이 길을 따라가면 우리는 다시 캔자스에 갈 수가 있을꺼야. 캔자스인지, 캠퍼스인지, 그 곳에 가면은 밤 열한시까지 방정식을 풀지 않아도 되고, 고대국가의 연대를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되며, 숱한 미팅과 미팅과 오예, 미팅이 기다리고 있단다.' 그래서 엘튼 존 아저씨는 그 육중한 몸을 피아노에 앉히고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안녕, 노란 벽돌길. 안녕, 사회의 개들이 짖어대는 노란 벽돌길. 이 아이는 너무 어려서 블루스 같은 걸 노래할 수 없어요. 아아, 노래할 수 없어요. 


- 그래도 선생님, (너무 간단하지 않습니까) 다시 한 번만 봐주십시오. 
  나는 거듭 선생의 고견을 청했다. 기왕에 다시 찾아왔으니 선생의 풍부한 경험을 빌어 결정에 참고해야 하지 않겠나. 선생께서는 그래 어디보자며 노란 벽돌길을 힐끔 들여다 보시더니만, 
- 가군의 낙성대 천문학과는 어떠하냐? 
- 괜찮을 듯 합니다. 


  오냐, 고개를 끄덕이시며 선생은 노란 형광펜이 칠해진 다음 칸을 보셨다. 
- 그럼 나군의 을밀대 냉면학과는 어떠하나? 
- 그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또 오냐, 고개를 끄덕이시며 선생은 그 다음 칸을 보셨다. 역시 노란 형광펜이 칠해진.
- 다군의 하조대 해수욕학과는 어떠하냐? 
- 하조대도 있었군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또 또 오냐, 고개를 끄덕이시며 선생은 마지막 칸을 보셨다. 물론 노란 형광펜이 칠해진.
- 라군의 장독대 장맛영양학과는 어떠하냐? 
- 예, 안전지원으로 장독대에도 하나 넣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선생은 크게 기뻐하시며 내 손을 잡고 흔드셨다. 
그래, 되었다. 이 네 군데 중에 가고 싶은 곳을 골라가면 되겠구나. 

  나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축하한다, 나는 말이다. 그래, 진작에 네가 해 낼 줄 알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덩달아 나도 크게 기뻐했다. 마치 대학에라도 합격한 듯이. 뿌듯해하시는 선생을 뒤로하고, 나는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어 감사를 표한 뒤에 조용히 물러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게 무슨 진학지도야?’라는 불경한 생각도 들었다. 선생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내 성적에 해당하는 부분을 찾아 형광펜으로 백몇십 센티미터 주욱 그은 다음에 그 위에 보이는 대학과 학과를 네 개 골라 말씀하신 것 밖에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뭔가 대단한 가르침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괜시리 든든하기는 하였고 어찌되었건 결국은 그 해 대학에 합격하였으니 그 또한 선생의 공덕이실 것이다. 물론 결국 선생께서 골라주신 대학과 학과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지원하여 합격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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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이 내 학창시절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 네 분에 대한 일화이다. 영예로운 졸업 이후 아직까지 그리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한 부족한 제자의 미천한 글이 선생들의 크나큰 위용에 혹여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분들의 함자를 밝히지는 않겠다. 이 글은 그저 선생들이 어떤 스승이셨는지에 대해 떠올려보고 싶을 소박한 마음으로 쓰여졌을 뿐, ‘교사’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가지게 하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고자 함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한다. 물론 이상하게 한결같이 뚜렷한 개성을 지닌 분들을 많이도 만난 점은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남들도 다 그런 걸까? 가끔은 언젠가 이 스승들의 독특한 캐릭터를 가져와 코미디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든다. 옛 우리 선조들은 감히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하였는데 감히 스승들을 코미디 캐릭터로 만들겠다니, 정말 누가 들으면 펄쩍 뛰고도 남겠군. 

 

(200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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