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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레포트: 음악회를 다녀와서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2.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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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 클래식 음악회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이면 공교롭게도 레포트 마감 기한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시점인 탓에 자칫 순수하지 못하게 보일까봐 걱정입니다만, 클래식은 언제나 제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음악회는 언제나 제 삶의 일부였습니다. 과거에도 그러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늘 그러할 것입니다. 물론 과제물이 나오기 전에도 그러했고 과제물이 나온 다음에도 그러했습니다. 이번 연주회를 임하는 저의 마음가짐과 클래식 음악회를 다녀와서 감상문을 써야하는 레포트는 절대로 인과관계에 놓여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단지 저는 숱하게 연주회를 다녔던 그 일상속에서도 풀어지지 않는 그 갈증을 해소하고자, 덤으로 시기적으로도 너무 낡지 않은 (적절한 현장감이 넘치는) 레포트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면, 꿩 먹고 알 먹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을 치고 가재를 잡는 유용한 효과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공사가 다망한 와중에도 이번에 연주회, 그 중에서도 바로 실내악 연주회에 다녀왔습니다. 

  실내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저보다 교수님께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기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 바로 지금 교수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그것이 실내악입니다. 관현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저보다 교수님께서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기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 바로 지금 교수님께서 생각하고 계신 그것이 관현악입니다.장소는 세종문화회관이었고, 광화문역 7분 출구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그 곳이 되겠습니다. 5호선을 타기 어려운 경우에는 1호선이 종각역이나 3호선 경복궁역에 하차하여 걷는 방법도 있습니다. 버스가 편하시다고 하여도 서울의 교통 중심지 답게 아주 다양한 옵션이 있습니다. 일일이 설명하다가는 레포트가 너무 길어질 듯 하여 이 부분은 버스 노선도를 참조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세종문화회관은 1978년 준공되었고 얼마 전 재단법인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공연 예술을 대표하는 공간이자 서울 문화 예술 중심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듯 연주회의 장소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허나, 연주회의 음악에 관한한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진실로 감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녹음상태로 보관되어 있는 과거의 소리를 재생하는 것과 바로 눈 앞에서 손과 악기가 맞닿아 만들어지는 현재의 소리는 그 생생함에 있어 비교가 불가능하였습니다. (물론 전술한 것처럼 음악회는 늘 제 삶의 일부였기에 제게는 이 놀라운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점은 밝혀두고자 합니다.) 

  어쩌면 역설적으로 들릴런지도 모르겠지만 상기와 같은 이유로 음악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소리의 아름다운 향연, 마음을 가득히 채우는 음표들이 밤 하늘의 별들처럼 수놓아지는 그 영롱한 순간을 문자로 옮길만한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또한 가슴이 얼어버리는 듯한, 피가 거꾸로 흐르는듯한, 심방과 심실이 하나로 뭉쳐서 미어지는 듯한 그 현란한 감동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재간도 저에게는 없습니다. 연주회 내내 저는 마음속으로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오, 신이시여, 당신은 어째서 당신의 도구로 제가 아닌 저 ‘제인 굿딜과 서머셋 모듬 청소년 오케스트라'을 택하셨나이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똑같이 피아노의 건반은 88개, 나이올린의 현은 4개, 비올라의 현도 4개, 첼로의 현도 4개, 똑같이 사람의 손가락은 10개인데,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서 저렇게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저 환희와 흥분 속에서 머물수만은 없었습니다. 냉정하고 차분한 자세로 연주회를 바라보아야 레포트를 올바로 적어낼 수가 있을테니까요. 저는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 가방에서 톰 포드 선글래스를 꺼내 썼습니다. (선글래스가 원래 눈빛을 숨기기 위해 개발된 거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눈을 똑바로 부릅뜨고 그들의 연주를 살폈습니다. 전혀 눈에 피로감을 주지 않을만큼 부드러운 조명 아래서 진지하게 악기를 다루는 그들의 손길을 빠짐없이 분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확실히 그들의 바이올린 연주는 니콜로 파가니니나 이치하크 펄먼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피아노 연주는 로베르트 슈만이나 펠릭스 멘델스존의 그것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지휘자인 제인 굿딜 여사의 지휘 역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나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에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그 전설적인 인물들의 연주나 지휘를 실제로 본 적은 없습니다. (슈만, 멘델스존, 파가니니의 연주나 카라얀, 스토코프스키의 지휘를 제가 실제로 본 적이 있다면 조금 무서운 일이겠지요.) 어쨌든 상당히 치명적인 사실입니다. ‘제인 굿딜과 서머셋 모듬 청소년 오케스트라’의 멤버들은 고작 슈만이나 멘델스존, 혹은 파가니니보다 조금 더 잘 생겼고, 키가 조금 더 컸으며, 조금 더 젊을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음악에 대해서는 할 말을 아끼고 있지만 티켓에 대해서는 할 말을 아끼지 않으려고 합니다. 원래는 ‘제인 굿딜과 서머셋 모듬 청소년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티켓을 증빙을 위해 바로 이 레포트의 가장자리에 다소곳이 붙여 놓을 예정이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조교님은 그렇게 안내를 하였습니다. (만약 교수님께서 모르는 일이시라면 그것도 조금 무서운 일일 것입니다.) 저 역시 굳이 티켓 첨부를 누락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자그마치 35,000원이라는 거금이 들어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생은 계산대로만 되지 않습니다. 연주회가 끝나고 지휘자인 제인 굿딜 여사의 사인까지 받은 다음에 (분당 맥박수가 180에 육박하는 벅찬 가슴을 추스려) 2층 발코니로 나가려는 찰나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일진광풍. 말인 즉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자세히는 알 수가 없으나, 순간 초속이 15미터 퍼 세크는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휘리릭. 맙소사, 미친 바람은 제 손에 들려져 있던 영광된 음악회의 흔적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제인 굿딜 여사의 사인도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미친 바람은 15미터 퍼 세크의 빠르기로 불어왔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때는 어림잡아 거의 50미터도 더 날아간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그곳이 2층 발코니였기 때문에 저는 티켓을 쫓아서 뛰어 내릴 수도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제 목숨은 35.000원보다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중학교 교과서에 있는 오래된 노래 하나가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이 몸이 새라면, 이 몸이 새라면, 날아가리. 아아, 그러나 제 몸은 새의 몸이 아니고, 저는 연주회 티켓을 따라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또 다른 노래 하나가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더즈 왓에버 어 스파이더 캔. 아아, 하지만 저는 스파이더맨이 아니고 연주회 티켓을 따라 거미줄을 발사할 수 없었습니다. 하릴없이 그 자리에 주저 앉았습니다. 멍하니 연주회 티켓의 궤적을 눈으로 따라갔습니다. 한국전력공사, 미국 대사관, 문화관광부, 정보통신부, 어린가정부, 한국통신, 뉴질랜드 대사관, 교보빌딩. 아아, 상상이 가십니까? 조그만 노란색 종이 쪽지가 서울 도심의 상공을 마치 살충제 맞은 나비처럼 비틀비틀 거리면서 날아다니는 모습을. 

  바로 그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피아노의 소리도 아니었고, 바이올린의 소리도 아니었으며, 첼로나 비올라의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의 음성이었습니다. 아아, 신의 권능. 저 티켓은, 저에게 허락된 유일한 클래식 연주회의 흔적은 이미 저렇게 날아가 버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아, 모든 것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무척이나 따뜻해졌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제가 이 레포트에 증거물로 티켓을 붙이지 못한 것은 오로지 신의 뜻이었습니다. 신은 뜬금없는 일진광풍으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켰습니다. 그리고 분노하는 법 대신에 용서하는 법을 일러주었습니다. 저는 저를 곤경에 빠뜨린 미친 바람을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용서의 사이클이 만들어졌습니다. 미친 바람도 자신을 잉태시킨 순간적인 고기압과 순간적인 저기압을 용서하였습니다. 역시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고기압과 저기압, 그들은 자신들의 짧은 생애를 존재케한 세종문화회관의 이상 야릇한 건축적 구조를 용서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용서와 용서가 맞물리고 있습니다. 이 또한 신의 큰 뜻이 아니었겠는지요. 이제 교수님의 차례입니다. 교수님께서는 본 레포트에 티켓이 첨부되어 있지 않음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모든 일련의 사태를 직조해 낸 최상위 책임자에게 (그는 바로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절대적 존재이십니다) 책임을 물으시겠습니까? 모든 것은 전적으로 교수님의 의사에 달려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교수님께서 신에게 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있거든, 그가 누구이든 그것을 잊어버리고 용서하라. 그때에 그대는 용서한다는 행복을 알 것이다. 우리에게는 남을 책망할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해 질 수가 있습니다. 또한 18세기 영국의 문필가이자 비평가였던 사무엘 존슨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진실로 시간이 귀한 줄을 아는 현명한 자는 용서함에 있어 지체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용서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헛되이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디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십시오. 이 레포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시는 순간, 교수님께서도 행복해지실 수가 있습니다. 

(200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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