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요즘 애들 무서워요
낙농콩단

028. 요즘 애들 무서워요

by 김영준 (James Kim)

1. 점심시간이 없이 75분짜리 수업 네 개를 연강으로 듣던 대학 3학년 시절이 있었더라.

 

2. 9시 반에 시작한 수업이 4시 반이 되어야 모두 끝나니 점심도 챙겨 먹지 못한 몸이 녹초가 되더라.

 

3. 그런 극한을 경험한다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으매, 악이 있기에 선이 빛나는 것처럼,

 

4. 이렇게 사람의 피를 말리는 날이 있기에 세상에는 여유롭고 한가한 날도 있는 법일 것이라.

 

5. 그러나 선과 악, 혹은 옮음과 그름을 떠나서 배고픈 것은 배고픈 것이니.

 

6. 쉬는 시간이 있으매 너무 짧고, 매점에는 나처럼 굶주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7. 우유 하나를 사먹기에도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고통스럽기를 이루 말할 수가 없더라.

 

8. 주린 배를 움켜안고 음식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모든 수업을 마치니.

 

9. 저녁 약속이 잡혀있던 신촌까지 기어나가는 발걸음 걸음마다 하늘이 흔들리더라.

 

10.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신촌역 인근에서 은혜롭게도 편의점을 발견하니,

 

11. 약속도 잊은 채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이끌림에 따라 그 안에 들어갔노라.

 

12. 큼지막한 바나나 우유를 하나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가서 내가 가로되,

 

13. 내가 급히 우유를 마셔야겠으니 서둘러 계산을 해주기를 바라.

 

14. 빨대를 꽂은 바나나 우유를 깊이 빨아들이며 편의점을 나서니.

 

15. 비로소 속이 든든하여지고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아무튼 이래저래 좋았더라.

 

16. 바로 그 때, 학교에서 갓 튀어나온 것만 같은 중학교 교복의 예쁘장한 여학생 둘이 사뿐사뿐 나에게 다가오는데.

 

17. 그 아이들로 말할 것 같으면 눈이 두 개 코가 하나 입이 하나,

 

18. 걸을 때 양팔은 앞뒤로 부채꼴을 그리며 운동하고 양다리는 그에 맞춰 그와 반대로 움직이더라.

 

19. 거짓말처럼 그 아이들이, 저기요, 하며 말을 거는데,

 

20. 잠시 하늘이 내게 주신 선물이 아닐까 생각되더라.

 

21. 물론 저기가 아닌 나는 저으기 놀라 예? 라고 되물었어라.

 

22. 얼굴을 살구처럼 물들인 그 아이들이 몸을 배배 꼬면서 수줍게 속삭이니.

 

23. 저희가 부탁이 있는데요 들어주실수 있어요.

 

24. 세상에는 화창한 봄날의 신촌 거리에서 귀여운 여중생들이 내게 부탁하고자 이를만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으매,

 

25. 이를테면 이차함수를 가르쳐 달라는 것일런지도 모르더라.

 

26. 이차함수를 우습게 보는 이들이여 위대한 이차함수를 절대 가벼이 여기지 말 것이니,

 

27. 이차함수라는 간악한 복병은 마땅히 행복해야할 중학 시절을 망치고도 남을 것이니라.

 

28. 그 아이들의 부모님은 '이차함수도 못하는 것'이라면서 집에서 쫓아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29. 그 아이들의 남자친구는 '이차함수도 모르는 애랑은 사귀고 싶지 않아'하면서 작별을 고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30. 혹은 굉장히 망령된 상상이지만 무슨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처지에 놓인 아이들일 수도 있어라.

 

31. 그러니까 무슨 불치의 병을 앓고 있으매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부모님과 간호사 몰래 도망쳐 나온 것일지 누가 알겠는가.

 

32.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존재가 필요하여 편의점 앞에서 아무나 붙잡아 멋진 곳으로 데려가 주길 바라는 지도 모르는 일이더라.

 

33. 짧은 상상을 마친 내가 가로되,

 

34. 내 비록 비소하고 약한 존재이건만 힘 닿는 데까지 도우리다. 무엇을 하리이까?

 

35. 그 아이들이 말하기를 고맙고 또 고마우니 조금 나쁜 일이라 마음에 걸리지만 정말 부탁할게요.

 

36. 나는 나쁜 일이라는 말에 잠시 움찔하기는 하였으되,

 

37. 꼼꼼히 살펴보매 그 아이들이 그렇게 나빠 보인다거나 나쁜 짓을 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더라.

 

38. 세상이 아무리 무섭고 요새 애들이 아무리 무섭다고 하더라도

 

39. 번화가 한 복판에서 키가 내 어깨만큼도 안 되는 중학생들이 내게 부탁할 일이란 결코 무서운 것이 못될지니.

 

40. 설마 골목 안에서 내 몸집의 두 배는 족히 되는 무서운 애들이 기다리고 있는 고도의 양동작전이 아니라면.

 

41. 시퍼렇게 날이 선 면도칼을 들이대고 세종대왕을 요구하는 따위의 일이 일어나기야 할리가 있으랴.

 

42. 이윽고 아이들이 말하기를, 저기 그러니까, 한 박자 쉬고.

 

43. 담배 한 갑만 사다 주세요.

 

44. 아주 세게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라 내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매,

 

45. 그 아이들이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46. 디스요, 디스 플러스면 돼요.

 

47. 내가 묻되, 너희들은 중학생이 아니냐.

 

48. 그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를,

 

49. 교복을 입고 와서 그래요, 사복이면 저희가 직접 샀을 텐데.

 

50. 벙벙한 어안을 부여잡고, 어쩌면 좋을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망설이니.

 

51. 그 아이들이 앙탈하되, 제발요, 제발요, 제에발요, 다 떨어졌는데 너무 급해서 그래요.

 

52. 이 어찌 통탄한 일이 아닐 수 있으랴.

 

53. 그러니까 이차함수도 아니고, 불치의 병도 아니고, 고작 담배를 대신 사다 달라고 부탁하는 거였단 말인가.

 

54. 소심한 내가 소심하게 가로되,

 

55. 미안해요, 그건 안 되겠네요.

 

56. 계속 가로되, 담배는 한국담배인삼공사가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폐암은 담배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온 것이라.

 

57. 담배갑에는 건강을 해치는 담배 그래도 피우시겠습니까, 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을 너희들이 아느뇨.

 

58. 또 그 뒷면에는 19세 미만 청소년에게는 판매할 수 있습니다, 라고 적혀있음을 너희들이 아느뇨.

 

59. 이어서 청소년에게 담배를 판매하는 것은 불법입니다, 라고도 명확히 적혀있음을 너희들이 아느뇨.

 

60. 그 아이들의 표정은 이내 뾰로통해졌어라.

 

61. 이에 괘념치 않고 내가 계속 가로되,

 

62. 담배를 피우는 것은 일산화탄소, 아세톤, 포름알데히드, 나프티라민, 메탄올, 피렌, 니코틴, 디메틸니트로사민, 좀약살충제, 제초제, 배터리, 배기가스, 벤조피렌, 청산가리, 톨루이딘, 암모니아, PVC, 산업용 우레탄, 비소, 페놀, DDT, 타르 등을 칵테일로 섞어 마시는 것과도 같나니.

 

63. 검정 봉지에 본드를 짜넣고 불던, 송곳으로 부탄가스통을 뚫어보던,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나는 큰 관심이 없으며 그래서 뇌에 구멍이 송송 나고, 폐가 시커멓게 썩어감으로써 발암의 경지에 한 발자국 다가선다고 하더라도 나는 별 관심이 없으나,

 

64. 너희처럼 어린 학생들이 그래서야 쓰겠느냐.

 

65. 그 아이들이 사정하길, 아아이~한번만요.

 

66. 소심키는 하나, 자존심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나의 고집은 완고하였으니,

 

67. 지나가는 사람을 가리키며 외쳐 가로되,

 

68.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69. 그러니 제발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거라.

 

70. 그럼에도 그 아이들은 사정하기를 멈추지 않았으니, 아아아이~ 제에바알요오.

 

71. 까딱하면 마음이 약해져 그 유혹에 넘어갈 뻔했어라.

 

72. 아이들은 바나나 우유를 들고 있는 내가 꼭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것만 같아서 그랬는지 계속 칭얼대기 시작했으매,

 

73. 만약 부탁을 들어줄 경우 각각 우유와 담배를 들고 있을 우리의 모양새는 완연히 레옹과 마틸다를 연상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나니.

 

74. 뭐라 설교한다 하여 듣지 않을 것을 내 이미 알고 있으나,

 

75. 그렇다고 양심상 '내 알 바가 아니야'라며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더라.

 

76. 미안해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세요.

 

77. 아이들의 표정은 재수 대가리가 없어도 이런 왕재수는 처음 보겠다는 표정이니,

 

78. 저런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눈길을 받는 것은 어쩐지 서럽고 서글퍼지는 것이라.

 

79. 그 일로 충격이 컸던 나는 간밤에 악몽까지 꾸었으니,

 

80. 교복 입은 여중생들이 담배를 물고 나타나 말하기를, 거 형씨, 불 좀 빌려주쇼.

 

81. 만약 남학생들이었다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호통을 치며,

 

82. 요즘 중학교에서는 윤리과목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냐 엄히 꾸짖고 라이터로 머리카락을 지저 버렸을 텐데.

 

83. 여학생들이라 꿈속에서도 차마 대꾸를 못하고 줄행랑을 놓고야 말았던 것이라.  

 

84. 나는 지금까지도 그날의 일이 실제상황이었다 조금도 믿지 않으려니.

 

85. 필경 그 어딘가에서 이경규 아저씨가 촬영팀과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리라.

 

86.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는 다시 청소년 보호를 테마로 한 코너를 신설한 것이니,

 

87. 그들은 청소년에게 술 담배 및 향 정신성 의약품을 판매하지 않는 소신 있는 업주들을 찾아내는 공익적인 목표를 세웠을 것이리라.

 

88. 또한 청소년이 술담배를 사다 달라 부탁하는 황당한 상황에 닥치되 시민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담아보려고 했던 것이리라.

 

89. 내가 잰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오지만 않았더라도 '양심 냉장고'를 싣고 달려온 이경규 아저씨를 만나게 되었을 것이라 확신하니.

 

90. 영광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양심 냉장고'와 함께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웁더라.


(200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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