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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민족기록화: 눈싸움대첩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3.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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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사이 함박눈이 내렸다. 서울 12.8 센티미터. 군포에는 22.5 센티미터, 의왕에는 19.0 센티미터, 안양에는 18.0 센티미터나 왔다고 하니 이번 폭설의 규모를 짐작할 법도 하다. 북쪽에서 남하한 찬 공기가 강한 눈구름을 만들었고 이것들이 고스란히 내륙으로 유입되면서 많을 눈을 뿌려……

알게 뭐냐.

  현재 전세(戰勢)를 가만히 들여다보자면 세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 비록 날카로운 이빨로 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고는 있지만 내 꼬리가 또 다른 적에게 붙들려 있으니 그 누구도 안심할 수가 없는 상황이렸다. 눈송이를 뭉쳐 던질땐 뒤를 조심하라. 누군가 눈을 번뜩이며 너의 뒷통수를 노리고 있을런지도 모르니까.


  우리들의 전쟁은 갑자기 시작되었다. 간밤 서울에 12.8 센티미터나 되는 눈이 내린 까닭이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우리들은 두꺼운 스키복으로 몸을 감싸고, 고무 장화를 신고, 가죽 장갑을 낀 채 밖으로 몰려 나왔다. 엄마들은 마치 아들을 이라크에 파병이라도 하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배웅해 주었고, 몇몇 센스있는 엄마들은 스키복과 가죽장갑으로 중무장한 우리들의 결정적 취약점, 즉 손목 부위에 스카프를 매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스카프는 방한 효과도 효과였지만, 차가운 눈밭의 전쟁터에서도 엄마의 따뜻함과 늘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좋았다. 눈이 약속없이 내린 것처럼 오늘 일을 벌이기로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서히 304동과 404동과 504동이 직각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공터로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공터를 위에서 내려다 볼작시면, 

마치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성립할 것만 같았다. 

  우주아파트는 도봉구가 선정한 '자연과 함께하는 웰빙 아파트' 중의 하나로 이름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다양한 평수가 조화를 이루고 있기로도 유명했다. 채 600세대가 되지 않는 스무 동짜리 아파트에 32평, 45평, 52평, 심지어 68평짜리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 험준한 산기슭에 아파트를 짓다보니 공간이 나는대로 평수를 맞춰서 지을 수 밖에 없어 그렇게 되었단다. 믿거나 말거나. (방향이 제각각인 것은 덤이다) 그래서 이 놈의 아파트는 하나의 단지 안에서 동을 평수별로 나눠 놓을 수 밖에 없었는데, 300동대 아파트가 32평이고 400동대 아파트가 45평 500동대 아파트가 52평인 식이다. 말하자면 동수가 곧 평수를 코딩하는 셈인데, 그러다보니 '저 303동 삽니다' 라는 말이 곧 '저 32평에 삽니다' 라는 뜻을 지니는 의외의 결과를 낳게 되었다.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그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고 몇몇 극성스러운 엄마들은 그걸 두고도 미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이런 식으로.


“너는 52평에 사니까 절대 저 301동, 302동, 303동, 304동 애들하고는 놀아선 안돼.”
“비록 니가 32평에 살지만 난 똑똑하고 잘 생겼으니까 절대 기가 죽어서는 안된다. 알았어? 우리 아들?”
“엄마, 우리집은 45평이잖아. 그럼 나는 누구 누구랑 같이 놀아도 되는거야?”



*


  작년의 복수를 해주겠어. 303동 501호에 사는 광선유(廣宣流)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발 아래 부드득 부서지는 눈덩이의 느낌이 상쾌한 것이 예감이 좋았다. 오늘은 꼭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304동과 404동과 504동이 솥발처럼 마주보고 있는 공터는 일종의 국경지대라고도 볼 수 있다. 역대 모든 눈싸움은 여기서 벌어졌고,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같은 동수 아이들끼리 뭉쳐서 한 팀이 되었다. 300동대 아이들끼리 한 팀, 400동대 아이들끼리 한 팀, 그리고 500동대 아이들끼리 한 팀. 어떤 의미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게 가장 손쉬운 구별짓기의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유는 그 중 300동대 아이들의 대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었다. 올해 2월 초 하루날의 대 참패 이후 10개월여만에 벌어지는 싸움이다. 그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잠시 몸을 부르르 떤다. 그때 301동, 302동, 303동, 304동 - 즉 300동대 (이하 삼동대) 아이들은 맹공을 퍼부어 500동대 (이하 오동대) 아이들을 매섭게 몰아붙였다. 완벽한 승리가 목전에 있었다. 보도블럭이 무너지고, 화단이 밀려가고, 504동 쪽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길목이 삼층 돌계단까지 삼동대가 점령한 상황이었다. 여기저기서 오동대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유는 압승을 예감했다. 옆에 있던 삼동대 기술자문위원 302동 302호 공문도가 말했다. "싸움을 장기전으로 끌고가고자 했던 우리의 계획이 맞아 떨어진 것 같습니다. 52평에 사는 오동대 애들은 운동 부족이라 뱃가죽에 기름이 껴서 체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지요." 


  바로 그때였다. 400동대 (이하 사동대) 아이들이 나타난 것은. 그들은 504동 쪽으로 올라가는 삼층돌계단의 좌측 화단을 가로질러 맹렬히 돌진해 왔다. 양손에 사과만한, 아니 자몽만한, 아니 수박만한 눈덩이를 들고. 와아아, 천지가 떠내려가라 소리를 지르면서. 삼층 돌계단은 이 공터에서 가장 상징적 의미가 진하게 배어 있는 곳이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곳 없이 뚫려 있어 굳게 지키기에는 쉽지 않은 곳이기도 했다. 광선유와 그의 삼동대가 승리에 도취되어 너무 방심했던 탓이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궁지에 몰렸던 오동대도 남은 세를 몰아 반격해 나오기 시작했다. 쥐새끼같은 녀석들. 선유는 이를 벅벅 갈았다. 사실 사동대는 그 날 싸움에 끼지 않기로 미리 약조가 되어 있었다. 사동대의 실질적 리더인 404동 106호 지대공(地對空)과 이야기가 모두 끝난 터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갑자기 뒷통수를 치다니. 치사하고 더러운 녀석들. 니들은 남자도 아니야. 내가 다신 상종을 하나 봐라. "형님, 여기는 저희한테 맡기고 빨리 몸을 피하십시오." 삼동대의 기술자문위원 공문도가 팔을 바람개비처럼 돌려 눈덩이를 막으며 악다구니를 썼다. 그 말을 듣자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눈사태가 일어나는 소리가 났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의 친구, 그의 아우, 그리고 그의 삼동대 대원들이 쏟아지는 눈 속에 서서히 파묻히고 있었다. 선유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마구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엄마 냄새가 날 때까지 한참을. 


  "형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눈발을 헤치며 삼동대 기술자문위원 공문도가 멍하니 상념에 잠겨있던 선유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오늘은 꼭 이길 수 있겠죠. 응, 아마도. 삼동대의 아이들은 어깨 동무를 하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 그리운 마음에 전화를 하면. 아름다운 너의 목소리. 언제나 내게. 언제나 내게. 속삭이던 너의 목소리." 


*


  오늘은 어떻게 해야하지? 사동대의 실질적 리더인 404동 106호 지대공은 애꿎은 눈밭을 뽀드득 뽀드득 일부러 소리내어 밟고 있었다. 지난 2월 그는 광선유와의 약조를 깨고 결정적인 순간에 삼동대를 요격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숨어 있다가 일제히 들고 일어서서 삼동대의 허를 찔렀다. 눈덩이가 하늘을 수 놓던 그 아름다운 포물선과 세상 그 어느 용맹한 전사라도 겁을 먹고 오줌을 지릴 듯 우렁찬 함성을 대공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오로지 그 방법이 온당치 못했다는 것인데, 삼동대와 오동대의 사이에 어중간하게 끼여있는 사동대로써는 별 도리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실 400동대는 가장 인적 자원이 부족하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모두 모아봐야 일곱. 삼동대와 사동대와 오동대를 통틀어 가장 적은 숫자다. 이상한 일이지만 우주아파트 45평형에는 어린 아이들이 별로 살지 않았다. 어린 아이가 딸린 집들은 45평형보다는 더 작은 평수에 있다가 자리가 잡히고 아이들이 조금 더 큰 다음에 무리를 해서라도 더 큰 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형편이 되는 집들은 이미 바로 더 큰 평형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때문에 일종의 '끼인 평수'인 400동대 아이들은 눈싸움을 해도, 말뚝박기를 해도, 총싸움을 해도, 축구를 해도, 그 밖의 무얼해도 불리했다. 수적인 열세였다. 


  지대공의 고민이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어떻게하면 사동대만의 색깔을 분명하게 할 수 있을까. 좌측는 삼동대로, 우측은 오동대로 둘러싸여 있는 이 형국에서 어찌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이쪽에 붙기도 하고 저쪽에 붙기도 했다. 이른바 박쥐 전법. 물론 대공 스스로는 박쥐라는 말보다 '실용 노선'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는 사동대가 다른 동 아이들이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먹이'가 아니라 전세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결정적 '캐스팅 보트'가 되기를 바랬다. 삼동대와 오동대가 '사동대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판세를 이끌어 갈 수가 있다'라고 생각해주기를. 

  솔직히 고백하자면 문제는 밖보다 안에 있었다. 다 합쳐봐야 일곱 명 밖에 되지 않음에도 사동대 내부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삼동대에 붙어야 한다는 소위 '친삼파'와 오동대에 붙어야 한다는 소위 '친오파'간의 세력 다툼 때문이었다. 친오파를 (친오빠가 아니라) 대표하는 401동 101호 어도단(語道斷)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형님, 45평과 52평은 일곱평 차이이지만, 32평과 45평은 열 세평 차이이잖수. 그러니까 우리는 오동대 녀석들이랑 더 가깝게 지내야 한다니까요.' 그럴때면 친삼파의 수장 403동 802호 풍노도(風怒濤)는 이렇게 반박한다. '아따, 형님. 세상에는 균형이라는게 있잖아요. 이 공터의 모양을 한번 봐요. 직각 삼각형 아닙니까, 직각 삼각형. 오 곱하기 오는 벌써 이십오인데 우리까지 오동대 편을 든다면 솥발처럼 나눠져 있던 균형이 깨져버리지 않겠습니까.' 대공은 밖에서 싸우는 일보다 안에서 싸우는 친구들을 말려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런걸 내우외환(內憂外患)이라고 불러야하나,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불러야하나. 그것도 아니면……. 


*


  상황이 이렇게나 어려워질 줄이야. 수세라고 밖에는 달리 이를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수세라는 표현도 최소한 어느 정도 지키거나 방어할 수 있을 때, 쓸 법한 말이지 지금으로서는 도대체……. 


  오동대를 이끌고 있는 501동 901호 우유부(優柔不)는 항상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분명 오동대는 삼동대나 사동대보다 좋은 여건을 가졌다. 또래 꼬마들의 숫자에서도 가장 우위에 있었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도구적 여건에 있어서도, 그러니까 스키복의 메이커나 가죽장갑의 질도 삼동대나 사동대 애들보다는 확실히 좋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2월 초하루날은 (그 날 함박눈이 펑펑 내렸더랬지) 여지없이 깨졌다. 여섯 명이나 적은 삼동대 녀석들에게. 막판 반전으로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것만은 면했지만 그것도 사동대의 깜짝 협공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던터라 여간 찝찝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사동대. 유부도 그 응큼한 속을 능히 짐작하고 있었다. 삼동대와 오동대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가 하는. 


  우유부는 삼동대나 사동대를 부러워했다. 303동 501호 광선유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중앙집권적 삼동대나 두 파벌로 나누어져 있기는 하지만 404동 106호 지대공이 그래도 중간에 버티고 서서 막강한 입김을 발휘하는 사동대와는 달리, 오동대의 힘은 한 사람에게 수렴하는 법이 없었다. 대장, 그 까짓거 별거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번갈아해야 공평하다는 것은 500동대 엄마들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3개월마다 오동대의 리더가 바뀌었는데, 그 방식은 조기 교육을 통해 민주시민 역량을 길러준다는 목적아래 민주주의의 심볼인 '투표'로 정해졌다. 그리하여 완벽한 '힘의 균형이 만들어졌다. 오동대는 1인의 대장과 1인의 부대장과 4인의 각종 분과장과 8인의 분대원으로 이루어진 실로 민주적인 집단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말로는 '그까짓 대장'이라고들 하면서 '그까짓 대장'자리에 집착했다. 


  지난 2월 초하루날 고전했던 이유도 다 그 집착들 때문이었다. 당시 차기 대장자리를 노리던 501동 405호 해일속(海一粟)은 유부의 명을 어기고 404동을 우회하여 삼동대의 진지로 치고 들어갔다. 501동 306호 치하문(恥下問), 502동 203호 가담항(街談巷)등이 그의 뒤를 따랐다. 404동의 뒷편은 403동과 가깝게 붙어 있어 볕이 들지 않는 곳이었고, 줄기에서 가지를 쳐 빠져나온 외진 길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굉장히 뜸한 길이었다. 그럼에도 밤사이 펑펑 내린 눈은 깨끗하게 쓸려 있었다. 경비 아저씨가 쓸어버렸을까? 해일속은 그의 부장인 치하문과 가담항을 가만히 돌아본다. 이거 수상한 냄새가 난다. 여기서 우리는 계속 가야할까? 아니면 돌아가야할까? 잘 모르겠습니다. 303동 501호 광선유는 교활한 녀석이다. 분명히 함정을 파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피해가지 않겠다. 이거 함정인 척 우리를 기만하려는 전술이다. 


  그러나 자신만만하던 일속의 일행은 길의 중반 지점을 통과할 무렵, 삼동대의 본군과 마주쳤다. 놀란 너머지 손에 들고 있던 눈덩이를 집어 던졌지만 적의 수는 두 배가 넘었다. 그들은 리어카 한 가득 눈덩이를 싣고 왔다. 급해진 일속은 바닥에서 눈을 모아 뭉치려고 했으나, 바닥은 깨끗히 쓸려져 있어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눈덩이에 눈과 코가 얼얼했다. 일속은 그 자리에서 집중 포화를 맞고 눈사람이 되었고, 그의 부장인 하문과 담항은 재빨리 울타리를 넘어 화단으로 도주했다. 화단 구석의 응달에 조금 남아있는 눈을 모아 대응하고자 했으나 한 번 승기를 잡은 삼동대의 녀석들은 피칭 머신처럼 눈덩이를 쏘아 대었다. 하문과 담항은 팔과 다리를 웅크려 몸을 방어했다. 우리도 이러다 눈사람이 되는게 아닐까? 같은 시각, 상가를 한 바퀴 돌아 삼동대의 진지로 향하던 504동 108호 일기백(日己百), 그의 부장인 502동 506호 견강부(牽强附), 503동 706호 강투석(江投石)등도 광선유가 직접 이끄는 별동대의 매복에 걸려 비슷한 꼴이 되어 있었다. 이렇듯 각기 제멋대로 앞장서서 애들을 몰고 나갔으니 오동대의 본진에 남아있는 것은 오동대의 대장인 유부를 포함하여 다섯명 남짓. 물론 유부는 군법의 지엄함을 보이고자 했으나 워낙 반발이 거세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3개월 후 새로운 대장이 권력을 잡았을 때 돌아올 정치적 보복 또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밤 사이 함박눈이 내렸다. 서울에만 12.8 센티미터다. 그건 높이. 우주아파트의 면적을 곱하면 그것은 부피. 꼭 그만큼의 눈이 쌓였다. 면적. 비록 우리는 서로 다른 면적에 살지만 공터의 눈만큼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총알. 올해는 유난히 풍족하니 다들 마음껏 싸울 수 있을 것이다. 뭉쳐서 던져라. 크기는 주먹만하게. 던지다 부스러지지 않게 꼭꼭 뭉쳐라. 눈덩이의 생명은 밀도다. 10초에 하나씩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숙련되어야 한다. 보관시에는 직사광선을 피해 서늘한 곳에. 그렇다고 녹았다 얼어 정말 '얼음'이 되어 버리면 그것도 낭패니 주의하시라. 


  우리들의 전쟁은 갑자기 시작되었다.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많은 눈이 왔기 때문에 전략고 전술이고가 없었다. 일단은 온 힘을 다해 돌격해야 했다. 삼동대와 사동대와 오동대는 304동과 404동과 504동이 직각삼각형의 형상을 닮은 피타고라스의 공터로 돌진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포근한 스키복과 단단한 장갑과 엄마의 스카프가 함께 했다. 뭉쳐라. 던져라. 피해라. 오십여명의 동네 꼬마들이 눈싸움을 벌이는 광경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눈덩이가 하늘을 날았고 부서진 눈가루는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흡사 거대한 눈 폭풍이 아파트를 덮친 것 같았다. 곳곳에서 협공을 받고 눈사람이 되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분명히 옷을 껴 입어도 추운 날씬데 땀이 비오듯 쏟아졌고 입 안에는 단내가 났다. 머리가 홀랑 젖었다. 귀가 빨갛게 시렸고 눈이 침침해서 더이상 우리 편과 니네 편을 구분할 수가 없다. 눈이 너무 안 오면 눈싸움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반대로 눈이 너무 많아도 눈싸움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지난 패배를 설욕해야 했던 삼동대의 대장 303동 501호 광선유는 이를 악물고 달려 들었다. 오동대의 대장 501동 901호 유우부는 바람만 불면 산산이 흩어지는 오동대원들을 통합하고 독려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사동대의 대장 404동 106호 지대공은 그 사이에서 간과 쓸개를 놓고 저울질하며 눈치껏 양쪽을 편들었다. 서서히 옷이 젖었고 내복으로 물기가 빨려들어와 축축했다. 바람이 지나갈때마다 물기가 말라서 목덜미가 서늘했다. 이미 상당수의 아이들이 바닥에 누워있었고, 마침내 그들의 대장인 303동 501호 광선유, 404동 106호 지대공, 501동 901호 유우부도 힘없이 주저 앉았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더러는 너무 춥고 서러워 눈물마저 흘렸는데, 그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증발하여 32평 아파트와 45평 아파트와 52평 아파트와 심지어 68평 아파트를 돌아 돌아 하늘로 올라갔다. 북쪽에서 남하한 찬 공기가 그것들을 다시 총총히 응축시켜 강한 눈구름을 만들었다. 이것들이 다시 고스란히 내륙으로 유입되는 날에는 많을 눈이……, 


에라, 알게 뭐냐.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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