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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조교 공손급의 조교병법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4.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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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교가 있어 대학은 굴러간다. 그렇다면 조교가 없으면 대학이 굴러가지 않는가?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많은 일이란 어차피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의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에 설령 조교가 없다고 해도 어떻게든 돌아가기야 돌아갈 것이다. 타격이 있다면 복사할 사람이나 복사하고 난 걸 나눠줄 사람이나 나눠준 걸 다시 걷을 사람이 없단 정도랄까. 다만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땅에 대학이 생겨난 이래 항상 조교가 존재해왔다는 기록 때문이다. 조교의 역사는 환웅과 웅녀의 시절까지 올라간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싶노라 다짜고짜 떼를 썼을때 환웅은 그들이 백일동안 동굴에 쳐박혀 쑥과 마늘을 먹도록 했다. 헌데 (당연히) 이에 따르는 여러가지 번거롭고 잡다한 일이 있었다. 우선 지정된 동굴까지 곰과 호랑이를 안내할 담당자가 필요했다. 들어간 호랑이와 곰이 중간에 나오나 확인할 담당자도 필요했다. 동굴 안에 백일 분의 쑥과 마늘이 있을리가 만무하므로 곰과 호랑이가 입에 풀칠을 (아니 쑥칠 마늘칠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신선한 쑥과 마늘을 배달해 줄 필요도 있었다. 그 모든 걸 귀하디 귀하신 환웅께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누군간 이 손이 많이 가고 위험하며 더럽기까지 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환웅은 조교를 뽑았다. 조교는 곰과 호랑이를 신단수 공식 지정 동굴로 안내하였으며, 백일동안 매일 아침 저녁 두 번 곰과 호랑이에게 산지에서 직접 조달한 유기농 쑥과 마늘을 배달해다 주었다. 호랑이가 백일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오던 광경을 최초 목격한 이 또한 조교다. 나중에 그는 단군의 건국 과정에 있어 연구 지원 및 행정 사무를 전담, 고조선의 융성에 크나큰 업적을 세웠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사실 ‘조교’라는 단어는 어쩐지 너무 조교스러워 거부감이 든다. 한편으로는 군사 교육이 연상되기도 하고. 특히 솜털이 채 벗어지지 않은 신입생들에게 ‘조교님’이라고 불리는 순간 눅눅한 세월의 무게는 양 어깨 가득히 전해온다. 아주 크고 넓고 단단한 벽이 하나 생긴 느낌이다. 같은 또래라도 졸업을 하지 않은 녀석들은 '오빠'라는 좋은 말로 불리울 가능성이 있다. 속으로는 아저씨, 복학생, 혹은 기타 등등으로 여겨질지언정 막무가내로 '오빠'소리는 들을 여지는 남아있다. 그 일말의 희망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지만 한 번 조교가 되면 게임은 끝이다. 조교가 되면 더도 덜도 아닌 '조교님'이다. '오빠'가 '아빠'되면 죽었다 깨어나도 도로 '오빠'가 되지 않는 것처럼 한번 '조교님'이 되어 버리면 ‘오빠'로의 롤백은 완전 물 건너간다. 그냥 조교님이다. 흡사 동물원의 코끼리나 공놀이하는 물개가 된 기분이다 (백수의 왕 사자나 위엄있는 호랑이가 아니다).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면은 코로 먹지요. 당장은 출석 때문에, 시험 때문에, 실험 때문에 아는 척을 하지만 용무가 끝나면 10초 안에 잊혀질 관계다. 오른손 엄지에 골무를 끼우고 복사기를 돌리면서 화창하게 웃는 아이들을 부러운 듯 훔쳐본다. 그래도 동물원엔 입장료라도 있지. 


  시절로 말하자면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학부의 여자아이들이 줄줄히 몰려온다. 파도치듯 인사가 이어진다. “안녕하세요? 조교님.” 고개를 끄덕한다. 과연 뭐라고 답해줘야할지 모르겠다. 같이 '안녕하세요?'라고 해야하나. (너무 딱딱하고 사무적으로 보이지는 않을까?) 그럼 '안녕?'은 어떨까. (역시 이상하지. 제 멋대로 말을 놓다니 말이야.) '그래'가 이상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그렇긴 뭐가 그렇단 말인가.) 어차피 의례적 인사다. 정말로 안녕하다던가, 조교님이 안녕한가 궁금해서 견디질 못하겠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하는 것으로 넘긴다. 무심한듯 보였을까. 그럼 성공이다.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게. 그게 이 시대가 요구하는 매력이라고 하더라.


  학부생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조교 급 공손'이다. 교수님 앞에만 서면 바싹 긴장하여 항시 공손 모드로 일관한다는데서 나온 별명이다. 실은 선천적 울렁증과 후천적 트라우마의 결합물이다. 영감님이 (아니, 교수님이) 그냥 좋게 넘어가도 될 일에 버럭 화부터 내니까 나처럼 소심한 영혼을 가진 이는 늘상 위축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의 ‘공손’까지는 알겠는데 ‘급’은 어디서 튀어 나온 말이냐고? 급(急)은 요즘 애들이 여기 저기에 갖다붙어 새로운 유행어를 만드는데 쓰는 말이란다. 한자 그대로 '무척'이나 '매우'랄까 뭐 이런 뜻으로. 하지만 나는 '급 공손'보다 '공손 급'이라고 거꾸로 불러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공손 급! 멋지지 않은가. 마치 옛 춘추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이름이 아닌가. 그때 '공손 급'은 분명 모두가 우러러보는 영웅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나는 옛 중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국민학생 때 이미 ‘삼국지’와 ‘초한지’, ‘수호지’, 그리고 ‘동주 열국지’를 독파하고, 중학생 때는 그걸로 모자라 판본에 따라, 저자에 따라, 그리고 역자에 따라, 비교 분석을 수행했다. 내가 좋아하는 거의 유일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학생들이 나를 '급 공손'이라고 불러주기보단 '공손 급'이라고 불러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조교 공손 급 - 얼마나 멋진 말인가. 마치 무협영화의 제목같지 않은가? 

*

 
  조교의 임무 중 가장 핵심적이고 중차대한 것이 바로 시험지 채점이다. 그리고 가장 채점하기 어려운 시험지란 역시, 천재들의 것이다. 진짜 천재가 아니라 악필로 미루어보건대 천재로 추정되는 천재. 그들의 글씨는 비오는 날 기어나온 지렁이의 동선마냥 구불구불하여 모든 표기를 단 하나의 획에 의해 해내고야 만다. 채점을 하기 위해선 따로 해석을 해야할 노릇이다. 이런 답안지가 제일 골치 아프다. 모르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정말 모르겠다. 눈에서 멀리 떼어놓고도 본다. 애국조회 시간, 운동장의 중학생들마냥 고만고만하게 보여 무슨 생각으로 쓴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바짝 눈 가까이 대고도 본다. 마치 중동 어느 나라의 문자처럼 보인다. 답안을 이렇게 쓰느니 차라리 백지를 내는 것이 훨씬 낫다. 조교가 되면 백지 제출자를 좋아할 수 밖에 없다. 채점하기 편하지, 성적 내기 편하지, 학점에 초탈하여 일체의 항의도 없지, 말하자면 최고의 학생이다. 그게 아니라면 또박또박한 글씨로 완벽한 모범 답안을 내놓던가. 백지 제출자의 것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그래도 채점하는 보람은 있다. 상위권도 아니고 하위권도 아닌, 괜히 어설프게 중간에 끼어있는 애들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괴발개발 엉뚱하게 적어내는 것이 가장 채점하기에 골치 아프다. 모르면 아예 쓰지 말고 쓰려면 정말 제대로 공부해서 제대로 써라, 바로 그것이 격무에 시달리는 조교를 안녕하게 하는 길이다. 


  나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일곱 장의 답안지를 추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언어로 작성되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을 골라 지하 3층 조교 위원회에 보낼 요량이었다. 위원회는 조교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문제를 관장한다. 장을 맡고있는 지대공 선배는 박사과정 6년차. 학교를 십삼년째 다니는 동안 팔년을 조교로 보낸 조교 중의 조교로 조교 일로 생긴 잔뼈가 가지고 태어난 뼈보다 더 많다는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최고의 조교만 가질 수 있다는 전용 복사기와 전용 스테이플러 제침기도 가지고 있다. 이 건물 안의 어떤 조교도 대공 선배의 공력에는 대항하기 어려웠다. 몇 차롄가 철없는 몇몇이 무리를 이루어 조교실 구석의 라꾸라꾸에서 찌그러 자던 대공 선배를 급습, 단박에 목을 따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다. 허나 그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선배는 번개같이 눈을 뜨고 녀석들의 인중과 명치를 가격하여 제압했다. 언젠가 내가, "선배는 놈들이 급습할 줄 어떻게 아셨어요?" 라고 물었더니 대공 선배는 "조교만 8년을 해봐. 언제 교수가 들이닥칠지 몰라서 아예 눈을 뜨고 자게 된다니까……." 라며 히죽 웃어보인다. 역시 그의 공력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다. 말하자면, 대공 선배는 우리들의 전설이다. 그의 오른손 엄지는 굳은 살이 단단히 박힌 것이 골무를 끼지 않아도 골무를 낀 듯 했으며, 각설이처럼 죽지도 않고 매년 자료 요청이 들어오는 중앙일보 대학평가 자료를 눈을 감고도 만들 수 있었고, 만취 상태에서도 학부생들을 데리고 실험 실습하는 것이 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생각만 해도 머리를 빠개지게 만드는 비케이 21 (바보 코리아 21) 이나 대학인증제 관련 서류마저 발로 만드는 신공으로 항상 초짜 조교들인 우리를 감탄케 했다. 대공 선배는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만 집에 들어갔다. 다른 날에는 매일을 하루같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지하 3층 조교 위원회 구석에 라꾸라꾸 (그를 위해 일년 365일 스물네시간 배치되어 있다) 에서 퍼질러 잤다. 


  대공 선배의 술 실력 또한 전설적이다. 팔년의 조교 생활 동안 규칙적으로 매일 밤 술을 마신 그는 한 자리에서 소주 세 병을 단숨에 털어넣고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는 프로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술을 잘 마시는 방법을 내가 가르쳐줄께. 매주 한 잔씩 늘려가는거야. 첫 주는 매일 밤 한 잔씩 마시고 자. 둘째 주에는 매일 밤 두 잔씩 마시고 자는거지. 셋째 주에는 매일 밤 세 잔씩 마시고 자. 그렇게 일년이 지나잖아? 그럼 매일 밤 오십두 잔식 마시고 자겠지? 그쯤되면 어지간한 술자리에선 짱 먹는단 말이지." 정말인지는 알 수가 없다. 천성적으로 술을 못하는 나는 소주를 쉰잔이나 마시고 사람이 살아있을 수가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숱한 피래미들이 처참하게 패배하여 길바닥에 널부러진 것을 보고 그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대공 선배는 프린터-팩스 복합기를 공유하자는 광선유 선배, 일기백 선배, 우유부 선배 - 박사과정 2년차 피라미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걸 가져가려면 나를 밟고 지나가라." 이에 격분한 피라미 선배들은 그에게 냉면그릇으로 대작할 것을 요구했다. "우리가 지면 깨끗하게 물러나겠습니다. 하지만 선배님이 지시면 복합기를 넘겨주십시오. 우리도 이젠 복사에 이력이 난 놈들입니다." 대공 선배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삼 대 일이라면 어떨까?" 그 말이 피라미 선배들을 자극시켰다. "좋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실겁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학교 앞 주점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맞붙게 되었다. 


  결투의 규칙은 이러했다. 안주는 없다. 잔은 냉면 그릇. 종목은 막걸리와 소주를 2대 1로 섞은 혼합물 (이것을 만들기 위해 위해 화학과 조교 치하문 선배가 긴급 호출되어 쿼츠 비이커와 메스실린더를 들고 자리에 나타났다). 위대하신 지대공 선배는 독고다이로, 그에 맞서는 광선유 선배, 일기백 선배, 우유부 선배는 삼인 일조로 번갈아 잔을 받는 것이 룰이었다. 먼저 쓰러지는 놈, 혹은 놈들이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이었다. (공정한 심판을 위해 법학과의 조교 강투석 선배도 호출되었다.) 강투석 선배가 엄숙히 일어나서 게임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지금부터 복합기 쟁탈 대작을 시작합니다. 청코너 박사과정 6년차. 어쩌면 이 학교에 뼈를 묻을지도 모르는 조교의 왕!" 열렬한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왔다. "홍코너 박사과정 2년차들. 우린 앞으로 최소 5년이 남았다. 니들이 누구랑 더 오래 볼 것 같으냐! 떠오르는 차기 대권주자 삼인방!" 일부 석사 소장파들을 중심으로 역시 환호와 박수가 따랐다. 피라미 파에서는 광선유 선배가 먼저 나섰다. 화학과의 치하문 선배가 엄숙하게 혼합물의 농도를 맞추었고 양쪽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모른다. 나는 거기가지만 보고 조교실로 돌아와 무려 196명분의 공학수학 기말고사 채점을 해야했으니까.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으며 평생 다시는 보지 못할 명승부였다고 하여, 뒷날에서야 아쉬웁게 입맛을 다셨을 뿐이다. 하지만 결말은 알고 있다. 그 날 채점을 마치고 내가 퇴근할 무렵 - 새벽 한시하고도 십칠분경이었다 - 운동장에 피라미파 넘버 원 광선유 선배가 큰 대(大)자로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몸은 우리 연구동쪽을 향하고 있었다. 무의식 중에서도 조교실로 돌아가야한다는 의지의 발현이 아닌가 싶어 사뭇 숙연하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대로 두고 갈 수야 없었으니, "선배, 선배, 선유 형!" 나는 그를 붙잡고 따귀를 때렸다. 새까만 후배가 뺨을 치는지도 모른 채 선유 선배는 의식 불명의 상태였다. 마치 상한 물오징어처럼 추욱 늘어져서……. 


  하는 수 없이 선유 선배를 포기한 나는 정문을 향해 계속 걸어나갔다. 식당 앞 계단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나. 뭔가 물컹하는 것이 밟혔다. 그 징그러운 촉감에 화들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피라미파 넘버 투, 일기백 선배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인사불성인 채로 계단에 구겨져 있었다. 이렇게 두었다가는 단단히 큰 일이 나겠다 싶어 그를 계단 아래로 질질 끌어 내었다. 바닥에 끌리면서도 그는 전혀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듯 조용했다. 한적한 곳에 그를 잘 눕혀두고 나는 다시 퇴근을 서둘렀다. 혹시 우유부 선배도 만나는게 아니야? 아니나다를까. 정확하게 정문에 이르렀을때 나는 피라미파 넘버 쓰리 유부 선배를 보고야 말았다. 학교 정문 바리게이트에 추하게 걸쳐진 채로. 그 위에 늠름하게 걸려있는 '등록금 인상안 결사반대'라는 플랜카드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가능하면 편하게 눕혀주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이었으나, 그의 좌우로 토사물이 어지럽게 깔려있어 접근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미안하지만 그냥 갈 수 밖에. 그렇게 정문을 나서는데 저 멀리 승리자의 모습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바로 조교의 왕 지대공 선배. 그는 늠름한 모습으로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걸어오고 있었고 경기를 지켜보던 각 학과의 조교들은 만세를 부르며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대공 선배는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래서 '조교 중의 조교'라고 불리우는구나, 그런 사람씩이나 되니까 박사과정을 육년씩이나 하는구나, 별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하여간에 내 평생 그렇게 멋있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조교 지대공을 진심으로 존경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


  문제의 답안지들을 종이 봉투에 잘 넣었다. 조교에게 답안지가 분실되는 것만큼 큰 사고는 없다. 답안지가 없어지면 성적을 매길 근거가 없고, 그럼 해당 학생의 불같은 항의에 대처할 길이 없다. 아울러 모든 사태의 책임을 지고 교수님 방에 들어가 석고대죄까지 해야한다. 조교들이 시험 감독을 하며 불에 눈을 켜고, 아니 눈에 불을 켜고 몰래 도망가는 놈들이 없나 살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실 컨닝하는 놈보다 답안지 안 내고 도망가는 놈이 더 나쁘다. 그래놓고서 나중에 찾아와서 자기는 답안지를 냈다고 우기는 일이 종종있기 때문이다. 아주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그럼 분실의 책임은 영락없이 조교가 다 뒤집어 쓰게되는 것이다. 너무 억울한 일이다. 그런 놈들은 모두 나라에서 잡아들여야 마땅하다. 봉투에 침을 발라 잘 붙이고도 모자라 촛농을 떨어뜨렸다. 걸쭉한 액체가 봉투의 접힌 부분에 고였다. 서랍 속에서 주먹만한 도장을 꺼내어 쾅, 하고 찍었다. '조교 공손 급' 이라는 인장이 분명하고 또렷하게 새겨졌다. 날래고 명민한 학부연구생 후배 둘을 불러 놓고 은밀하게 지시하길, "이걸 조교 위원회 지대공 선배님에게 갖다 드려라. 글씨가 '개판 오분 전'이라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다고. 아마 형님이라면 단박에 무슨 얘긴지 알아채실게야." 후배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십분쯤 지났을까. 예의 그 후배 놈 둘이 질질 짜면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얼굴을 보아하니 여기저기 터지고 깨지고 성한 곳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답안지는? 조교위에 제대로 전달한거야?" 녀석들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중 키가 큰 녀석이 입을 열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에 복면을 한 자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키 작은 녀석도 거들었다. "누군지 처음 보는 자들이었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희 둘이 힘을 합쳐도 막지 못할만큼 강했다는 말이냐?" 녀석들은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럴리가. 분한 마음도 분한 마음이었지만 무엇보다 답안지를 잃어버리면 안된다. 자기 답안지를 잃어버렸다고 개난리를 피우는 학부생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건 대형사고다. 초대형사고다. 초초대형사고다. 습격을 받았다는 지하 2층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답안지만큼은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지하 2층은 육십년전부터 창고로 쓰고 있어 눅눅하고 컴컴했다. 진동하는 화학약품의 독한 냄새를 뚫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분명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는 했다.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어둡고 불길한 기운, 역시나 나무상자가 하나 날아왔다. 예사롭지 않은 힘이 실려 있는 그것은 벽에 부딪히기가 무섭게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격산타우(隔山打牛). 나는 뒤로 두어걸음 물러나 보법을 밟았다. 쉽지 않은 상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매화수전(梅花手箭)이 날아 들었는데 몸을 뒤로 젖히며 빨간 색연필로 쳐냈다. 색연필 끄트머리가 또각,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나는 재빨리 색연필을 뺑글뺑글 돌려 깠다. 원을 그리며 벗겨진 종이에 공력을 불어넣어 연편(軟鞭)처럼 휘둘렀다. 딱, 소리와 함께 뭔가가 걸렸다. 슬슬 끌어당겼다. 어둑한 사위 사이로 상대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런! 박사가 되려다 학위를 받지 못해 지하실에 숨어 산다는 무명도사. 시험 답안지를 뺐어간 연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전음(傳音)을 통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내 구역에 침범하지 말라' 나 역시 대거리를 했다. '댁이 먼저 답안지를 먼저 빼았아갔잖소.' 그는 대답 대신에 장창을 들어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재빨리 채점용 빨간색 색연필을 들어 그걸 막으며 예닐곱 합을 버텼다. 이어 그는 여덟방향에서 바람을 몰아치듯 팔방풍우(八方風雨)로 공격해 들어왔는데 나 역시 채점용 색연필을 하나 더 꺼내 양 손으로 휘두르며 막아내었다. 되려 그 사이를 틈타 스테이플러 심을 번개처럼 쏟아내는 뇌락철심(雷落鐵諶)으로 반격을 꾀했다. 무명도사는 허를 찔린듯 뒤로 두어걸음을 물러났다. 이때다 싶어 나는 달려들었는데 아뿔싸! 이 교활한 늙은이가 벌떡 일어나 혈도를 찍었다. 순간 어질하더니 온 몸의 피가 부글부글 끓는듯 얼굴이 사과만큼 빨개지고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주화입마(走火入魔), 공력의 운행이 어디에선가 막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고 그 사이 무명도사는 허연 잇몸을 드러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아, 조교 공손 급의 모험도 여기에서 끝이로구나 싶어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과 땅이 붙었다 쪼개지는 벽력 같은 소리가 났다. 눈을 떠보니 무명도사는 저 멀리 날려가 벽에 부딪힌 상태였다. 누군가 바람처럼 내게 다가와 익숙한 솜씨로 탁탁탁탁 혈을 짚어주었다. 대공 선배였다. 우욱. 묵은 피를 울컥 토해내었다. 그제서야 기운이 차고 정신이 제대로 돌았다. "고마워요, 선배." 대공 선배는 틈을 보이지 않고 바로 돌아서 방아 자세를 취했다. "고맙다는 말은 여기서 살아나간 다음에나 해라." 무명도사 역시 뒤집어쓴 흙먼지를 털어내고 경계 자세를 취했다. 양 쪽 다 물샐 틈 없이 완벽한 자세였다. 둘의 대결은 말 그대로 용과 호랑이의 싸움 - 막상막하였다. 색연필과 창이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겼다. 그렇게 육십여합을 싸웠을까. 뭔가 시커먼 것이 날아와 대공 선배의 등에 달라붙었다. 아차. 놈이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선배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공손 급, 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어서 올라가. 네가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하지만 웬일인지 내 두 발은 바닥에 고정되기라도 한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너무 무서워 오금이 저렸다. 달라붙은 녀석은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선배의 몸 속을 공격하고 있는듯 했으나, 선배는 앞에 있는 녀석을 상대하기도 바빴다. 상황이 이렇게나 급박한데도 겁을 먹어 움직이지 못하다니! 이런 쪼다! 병신! 스스로를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편 선배는 정신을 집중하고 다시 부러진 색연필에 다시 검기를 불어넣었는데, 끝에 맺혀진 기운이 얼마나 눈부신지 역시 박사과정만 육년 한 양반은 다르기도 다르구나, 싶었다. 이어지는 일갈 "이놈들아, 내가 김영삼때부터 대학에 다닌 몸이다." 태산압정(泰山壓頂) - 우아하게 뛰어 올라 위에서 아래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내려 찍었다. 이어 손을 등 뒤로 돌려 달라붙어있는 녀석의 견정혈(肩井穴)을 찍어 유도를 하듯 어깨 위로 돌려 넘겼다. 녀석은 바닥에 널부러졌고 선배는 빨간 색연필을 우아하게 한 줄 더 까서 심을 길게 만든 다음에 녀석의 가슴에 날카롭게 찔러 넣었다. 순간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습격했던 무명도사 무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다리가 풀린 나는 대공 선배에게 달려갔다. 그는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식은땀을 비처럼 흘리고 있었고 숨이 고르지 못했다. 나는 선배가 어찌 되기라도 할까봐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멍하니 서있다가, 다시 안절부절 돌아다니다가, 얼마나 지났을까. 선배는 고요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 씨. 술 끊던가 해야지……." 

(2004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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