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047. 첫사랑 연작 2: 다크 유니버스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4. 2. 8.

본문

- 역자 주 -

  소년의 아명(兒名)은 개똥이. 소년의 본 이름은 성윤, 성은 구로 이(李)가로, 호조판서를 지낸 이민권 대감 댁 둘째 아들이었다. 본디는 정승 배출만으로 해트 트릭을 이룬 뼈대있고 잘나가는 집안이었으나, 그의 고조부가 어수선한 시국에 대역죄인으로 낙인찍힌 인사와 우연히 입을 맞춘 탓에 온 집안이 사화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소년의 고조부는 하늘의 도우심으로 목숨은 겨우 건졌으나 권력의 중심을 떠나 낙향하는 것 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고, 이에 좌절한 소년의 증조부는 몰락한 가문 자제(子弟)의 프로토타입을 충실히 따라 평생에 걸쳐 문턱이 닳아 없어지도록 기방(妓房)을 드나 들며 세월로 술을 짓고 술로 세월을 낚았다. 억울함은 소년의 조부때 이르러서야 밝혀졌다. 가문의 바이오리듬이 다시 회복세로 접어드는 이 때, 소년의 아버지인 이민권 대감은 청운의 꿈을 안고 조정에 출사하였고, 있는 재주와 없는 재주를 모두 부린 끝에 정이품의 호조판서까지 올랐다. 이로써 소년의 가문은 반 세기에 걸친 암울하고도 긴 터널을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터널의 끄트머리에 태어난 소년은 비교적 행운아였다. 가문을 몰락시킬 필요도 없었고, 기방을 들락거릴 필요도 없었고, 가문을 일으키려고 동치서주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소년은 나들이를 나갔다. 건장한 종놈도 그림자처럼 하나 떡하니 데리고 다니는 그 모양새가 영락없는 양반인지라, 사람들은 역시 양반 피라는 것은 큰 놈에게나 작은 놈에게나 매한가지로 똑같이 흐른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 조그만 것이 밴댕이 소갈딱지만큼 좁은 논틀밭틀(논두렁이나 밭두둑을 따라 난 좁고 꼬불꼬불한 길 - 역자 주)을 지나면서 그 품위를 잃지 않으려 비틀배틀 팔자로 걷는 그 귀염직한 모습을 보고서는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중에 깔깔대고 웃는 조참판 댁 여식이 있었으니, 이 또한 어찌 우연이라 여길 수 있으랴. 소년보다 두 살이 아래로 올해로 여덟 살난 조참판댁 여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조씨 문중의 무남독녀 중 무남독녀로 - 무남독녀는 동방불패와 소오강호를 합친 것보다 더 무서운 말이라는 편집자의 논평 -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자라왔으나, 다만 당최 웃지를 않는게 흠이었다. 웃지 않는 딸따니(어린 딸을 귀엽게 부르는 말 - 역자 주) 때문에 조참판은 늘 근심 속에 살았다. 그는 수시로 종놈들을 몰아세워 딸을 웃게 만들 방법을 찾았다. 장에서 제일가는 광대들을 청해다가 마당에서 탈춤판도 벌여보고, 입담 좋은 종놈들을 데려다가 한바탕 만담판도 벌여보았으나, 꿀에 입을 발랐는지 입에 꿀을 발랐는지 소녀는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얼음공주가 동살(새벽에 동이 터서 훤하게 비치는 햇살 - 역자 주)만치 환하게 웃었으니 이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아가 소녀는 자기를 웃게 만든 소년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 어디, 도련님에게 늘픔(앞으로 좋게 발전할 가능성 - 역자 주)이 있나 보자. 아,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뭔가 싹수가 있어 보여야 나도 믿고 일신을 의탁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맹랑한 꼬마 아가씨는 급기야 소년의 뒤를 쫓아간다. 이끼 낀 돌담 뒤에 숨어 깨끔발(뒤꿈치를 들어올린 발 - 역자 주)을 들고 반대편을 건너다 본다. 잘 갈무리된 논두렁과 밭두렁 사이로 저 구름발치(구름과 맞닿아 뵈는 먼 곳 - 역자 주) 어딘가에 소년이 보였다. 그는 뭔가를 타고 있었는데, 소녀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늠름한 가리온(털이 희고 갈기가 검은 말 - 역자 주)처럼 보였다. 고우되 힘찬 갈기는 석양에 희번덕거렸고, 튼튼한 네 다리는 영웅신화에나 나올법했으며, 꼬리의 현란한 움직임은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런 영물을 리드하는 소년의 움직임이었다. '아아, 저토록 아름답게 말을 다루다니.'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소년은 참 듬쑥(사람의 됨됨이가 가볍지 아니하여 속이 깊고 차있는 모양 - 역자 주)했다. 말하자면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이다. 소녀는 급히 자기와 띠앗머리(형제 자매 사이 - 역자 주)처럼 지내는 같은 또래의 하녀 팔월이를 불러 눈을 또랑거리며(눈동자 따위를 아주 또렷하고 똑똑하게 움직이며 - 역자 주) 말했다. 

- 저 분을 소양정으로 모셔오거라. 혹 오지 않으시겠다면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노라고 하거라. 이 일은 남의 눈에 들키지 않도록 은밀히 진행해야 한다.

  속닥거림을 끝낸 둘은 마치 거사라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소녀의 하녀는 저 분을 소양정으로 모셔오기 위해, 소녀는 내 님을 맞이할 단장을 하기 위해. 팔월에 태어나서 팔월이라는 말도 있고, 여덟달만에 세상에 나와서 팔월이라는 말도 있는 팔월이는 너울가지(남과 잘 사귀는 솜씨 - 역자 주)가 좋았다. 안차게도(겁이 없고 야무지게도 - 역자 주) 이대감 댁 하인 덕팔이를 살살 꼬드겨 아기씨의 서찰을 도련님에게 전했다. 금년 봄에 신축한 뒷 마당 정자에 앉아 높새바람(북동풍 - 역자 주)을 맞으며 도련님인 소년은 편지를 읽었다. 그리고는 행간에 서려있는 달보드레한(연하고 달큼하다 - 역자 주) 향기에 소년은 그만 취해버린다. 세익스피어도 울고 갈 '오얏 이(李) 로미오'와 '나라 조(趙) 줄리엣'의 다솜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때이른 귀뚜라미 울음과 때늦은 매미 울음으로 천지(天地)가 진동했고, 꽃보라(떨어져서 바람에 날리는 많은 꽃잎들 - 역자 주)는 연못에 수를 놓았다. 그날 둘은 소양정에서 만났다. 

  바로 다음 날부터 이씨 집안의 소년과 조씨 집안의 소녀는 도담다담(어린애가 탈없이 자라는 모양 - 역자 주) 잘도 만나서 돌아다닌다. 팔월이와 덕팔이의 우편 배달부 노릇이 더욱 바빠졌음은 물론이다. 조씨 소녀는 이씨 소년의 듬쑥함(사람의 됨됨이가 가볍지 아니하여 속이 깊고 차있는 모양 - 역자 주)이 마음에 들었고, 이씨 소년은 조씨 소녀의 곰살궂음(성질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 역자 주)이 좋았다. 둘은 사랫길(논 밭 사이로 난 길 -역자 주)을 따라 달리기도 하고, 남의 밭에서 머드러기(크고 굵은 과일 - 역자 주)를 따다 나누어 먹기도 했다.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그 해 무서리(처음 오는 묽은 서리 - 역자 주)가 내리던 날까지 이어졌다. 민충한(미련하고 덜되다 - 역자 주) 이도령댁 하인 덕팔이가 취중에 그 일급 비밀을 발설(發說)하기 전까지 말이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그 사실은 마름의 귀에, 그리고 다시 행랑아범의 귀에, 다시 몸종들의 귀에, 다시 첩들의 귀에, 그리고 마침내 이대감의 귀에 들어간다. 

  그리하야 대두리(큰 다툼 - 역자 주)가 벌어졌다. 이대감측은 판서 집안과 참판 집안의 스펙 차이가 엄연함을 들어 불가함을, 조참판측은 소년의 나이가 소녀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을 들어 불가함을 통보했다. 피차 상대에 일방 통보한 것에는 차이가 없건만, 양측은 일방적으로 통보받았다는 사실에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우리 어디가 어때서.' 때문에 그들은 아궁이 위의 어린 송아지처럼 펄펄 뛰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숭늉부터 찾아마시는 양가 어른들에게 놀라버린 소년과 소녀는 조그만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모색한다. 그러나 둘은 너무 어렸다. 안타깝게도 이런 문제를 해결할 깜냥(일을 가늠보아 해낼 만한 능력 - 역자 주)이 없었다.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문제를 아퀴짓기(일을 끝마무리하다 - 역자 주) 위해 죽음을 가장하고, 또 독약까지 마셨다지만, 이들이야 어디 그럴수야 있으랴. 소년과 소녀는 버티기로 결심한다. 정녕 비극적인 연인의 아우라를 형형히 발산하며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기로 한다. 누가 뭐래건 사랫길을 함께 달리고, 남의 밭 머드러기를 함께 서리하며 버티기로 조그만 두 손을 꼭꼭 걸고 약속한다. 그 이후에 어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언제인지 정확치 않은 조선시대의 언젠가 있었다는, 어쩌면 세익스피어마저 안타까워 했을 수 있겠다는, 열살짜리 이씨 소년과 여덟살짜리 조씨 소녀의 이야기란다. 믿거나 말거나.

- 무림연가-

  소년의 이름은 똥 쭈안 꽌 리, 소녀의 이름은 촉 탁 직이었다. 그들은 중국 허난성 덩펑현 쑹산 기슭의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공교로운 일이지만 둘은 한 날 한 시에 태어났고 더욱 더 공교로운 일이지만 그들은 작은 마을에 사는 유일한 소년과 소녀였다. 까닭인즉슨 그들이 태어난 다산 세대의 앞 뒤 십년 간격으로 역병과 전직, 정기적인 정권교체, 그리고 주기적인 출산 트랜드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쑹산 기슭의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란 험준하기로 유명한 꽌 위 언덕을 넘어야 닿을 수 있는 오지 중의 오지였기에 이방인의 발길이 뜸했다. 여담이지만 이쯤해서 잠시 꽌 위 언덕에 대하여 설명하고 넘어가자. 이곳은 본디 그 유명한 삼국지의 관운장이 그의 애마 적토와 함께 요산요수를 누리던 곳으로 따사롭고 푸근하기 그지 없는 정말 언덕스러운 언덕이었다. 그런데 후일 관운장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적토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게 되자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푸른 빛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원인불명의 국지적 요곡운동으로 경사는 날로 급해져 갔으며, 매일같이 돌덩이가 부서져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엔 지금과 같이 평균 경사각도 78.6도의 무시무시한 준령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이건 관운장의 한 때문이라고. 그러더니 하나 둘 씩 솟대처럼 높다랗게 솟은 그것을 가리켜 꽌 위 언덕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말 한이 맺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걸 넘어다니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하는 일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그 작고 작은 마을에서 단 한 명의 소년(리)와 단 한 명의 소녀(직)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본들 리에게 자기랑 같은 또래라고는 직 밖에 없었다. 또 직에게 있어서도 온 마을을 샅샅이 뒤져본들 자기랑 말이 통할만한 상대는 리 밖에 없었다. 자연히 둘은 늘상 같이 붙어다녔고, 같이 놀고 자랐다. 마을 어른들은 이토록 사이가 막역한 소년과 소녀를 대견스럽게 지켜보았다. 더러는 진정으로 하늘이 점지해준 운명적 한 쌍이라 감탄했다. 그들은 문제의 그 소년과 소녀가 이제 겨우 열 살이고, 이 마을에는 더 이상 다른 또래의 아이들이 없으며, 쑹산 기슭의 작은 마을이 접근불가형 자연환경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듯 했다. 물론 영특한 소년과 소녀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년에 한 두번쯤 리는 직이 아닌 다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직도 일년에 두 한번쯤 리가 아닌 다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스러지기 쉬운 재질에 평균 경사각도가 78.6도에 이르는 사고 다발 지역 '꽌 위 언덕'을 넘어 다른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온다는 것은 관운장의 저주가 풀리기 전에는 거의 불가능하고도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일없는 화창한 날에도 꽌 위 언덕은 때때로 부서져 내렸으니까. 때문에 그들 리과 직은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동안 그 작은 마을의 유일한 소년과 유일한 소녀가 될 운명으로 지워져 있었다. 

  그건 행운이었을까. 아니면 불행이었을까.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사람과만 이어져 있다는 것은, 아니 이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 바깥쪽 세상에 자기들 또래의 수많은 소년과 소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불행처럼 정의내려지는 것은 선택이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이야기이다. 반대로 선택이라는 개념이 없을때, 그러니까 리과 직만이 함께 하던 순간 동안에 그것은 결코 불행이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웬 낯선 이방인이 나타났을 때 (그가 도대체 악명놓은 꽌 위 언덕을 어떻게 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결과 소년과 소녀 사이의 또다른 가능성이 열리고 선택이라는 개념이 새로이 정립되었을때, 상황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방년 열한살이라는 외롭고도 날카로운 턱선의 낯선 이방인은 소년 검객이었다. 하늘을 올려다 볼 면목이 없어 삿갓을 쓰고 다닌다는 그에게 마을의 유일한 소녀인 직은 설명할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다. 종전까지 마을에 유일한 소년이었던 리가 위협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리은 그가 역용술(易容術)을 써서 얼굴의 모양새를 바꾸고 있음을 단번에 간파하였다. 뭔가 숨기는게 있구나. 하늘 아래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은 저런 짓을 하지 않는 법이다. 소년은 몰래 숨어서 그가 행하는 내가심법(內家心法)을 훔쳐보았다. 그것은 평생 듣지도 보지도 못한 호흡법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소림, 무당, 아미, 곤륜, 화산, 점창, 그 어느 문파의 것도 아니었다. 뭔가 단단히 수상쩍다는 직감이 온 몸을 엄습했다. 

  소년은 즉시 소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여전히 마을의 유일한 소녀인 직은 그걸 몰랐다. 그녀는 이 새로운 인물 ‘삿갓'에게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꽌 위 언덕만큼이나 날카로운 턱선을 지닌 낯선 검객은 때로는 가부좌를 틀고 절벽 끝에 앉아있었고, 때로는 흔들바위 위에서 박투술(搏鬪術)을 연습했으며, 때로는 소용돌이치는 계곡물 위를 무력답수(無力踏水)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소녀는 몰래 숨어서 그걸 지켜보았다. 리는 비록 나이 어린 소년이었지만 이미 천안통(天眼通)에 능통해 있었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는 조심스레 직의 뒤를 밟았다. 예상대로 소녀가 삿갓을 쓰고 다니는 낯선 검객의 꼬임에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을때 소년은 낭아봉(狼牙棒)에 얻어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실제로는 낭아봉에도, 유성추(流星鎚)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내상(內傷)을 입는다는 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자고로 말로, 행동으로, 마음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경혈(經穴)에 손상을 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 했다. 그는 사랑때문에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사형(師兄)들의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어왔었다. 예전에는 잘 몰랐지만 이제는 정말 그럴수도 있는 일이겠구나 싶어졌다. 소년은 호흡을 서서히 멈추고 기공을 한데 모았다. 바로 귀식대법(龜息大法)이었다. 체온을 낮추고 심장의 박동을 멈추어 아무런 인기척을 내지 않은 채 그는 상황을 주시하였다. 

  그러나 외롭고도 낯선 삿갓은 그리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턱선만큼 날카로운 그는 주변의 기운이 묘하게 흔들리는 것을 감지하였고, 번개와 같은 동작으로 비표를 날렸다. 빠르고 힘있는 암기에 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의 귀식대법(龜息大法)은 쑹산에서 따라올자가 없었다. 일곱살때였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제 꽉 들어찬 열 살에 이르러 완숙의 경지에 접어들었는데, 그걸 알아채다니 정말 만만치 않은 상대로구나.' 

  반대편에 선 삿갓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까지 이 비표에 거꾸러지지 않은 놈은 없었다. 여덟살때였다면 모르겠지만 이제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른 어엿한 열한 살인데, 저 조그만 녀석이 감히.' 

  그러나 그들은 전혀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쑹산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통곡을 할 고수중의 고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소년은 아무도 모르게 마음으로 식은땀을 닦았고, 삿갓은 남몰래 내공으로 눈썹을 밀어올려 식은땀을 닦았다. 그러나 여전히 얼굴은 엽자안면(葉子顔面 : 포커 페이스)였다. 이제 정말로 둘은 마주서게 되었다. 

  삿갓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그의 발도술(拔刀術)은 그 자체로 위용이 넘쳤다. 어려서부터 사리발천근(四兩發千斤 - 넉 냥만으로 천 근의 힘을 발휘한다)으로 유명했던 소년이건만 잠시나마 움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팽팽한 긴장을 놓치지 않으며 지력(指力)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꺾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힘을 주니 예리한 검기(劍氣)가 뿜어져 나왔다. 이렇듯 소년의 무예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둘은 바람처럼 빠르게 달려나가 맞붙었다. 칼과 칼을 빙자한 나뭇가지가 부딪힐때마다 문자 그대로 불꽃이 튀었다. 장비와 여포가 맞붙는다해도 이만큼 치열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렇게 육십여 합(合)을 싸웠다. 지친 소년이 나뭇가지를 크게 한번 휘둘러 상대를 물러 나게 한뒤 뒤로 돌아 달아났고, 삿갓은 삿갓이 벗겨져라 뒤쫓았다. 옳거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소년은 달아나기를 멈추고 몸을 뒤로 제껴 화살을 쏘았다. 활을 떠난 화살은 세월처럼 빨리 흘러 삿갓의 귀퉁이를 맞췄다. 거의 그와 동시에 삿갓은 어깨를 충분히 사용하여 칼을 던졌는데, 그것이 소년의 나뭇가지를 반으로 토막내어 버렸다. 

  둘은 고대로부터 20세기 현대전까지 내려온 유서깊은 순서에 따라 무기를 버리고 맨 몸으로 뒤엉켰다. 손과 발이 보이지 않을만큼 화려한 박투술(搏鬪術)이 마치 활동사진처럼 펼쳐졌다. 삿갓은 법정연고권(法廷緣故拳)을 선보였다. 푸른 빛이 감도는 파형이 소년의 가슴에 작렬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곧바로 일신전속권(一身專屬拳)이 이어졌다. 소년이 매처럼 날래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맞았더라면 몸과 마음을 모두 빼앗길 뻔 하였다. 소년은 물권적청구권, 유아인도청구권, 부양청구권, 부부동거청구권, 상속회복청구권등을 연속적으로 물 흐르듯이 이어가며 반격을 시도했다.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공격에 그 험한 꽌 위 언덕을 한달음에 넘어 들어온 천하의 삿갓도 주춤하며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삿갓은 다시 분묘기지권(墳墓基地拳)으로 치고 들어왔고, 소년은 재빠르게 양도담보권(讓渡擔保拳)으로 막아섰다. 궁지에 몰린 삿갓이 새로운 권법을 시도하려는 순간 소년은 유명한 호법(護法)이었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게 전수받은 전설 속의 비전 가등기담보권(假登記擔保拳)으로 허점을 노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은 삿갓은 상당한 내상을 입었는지 몇 번 쿨럭이더니 시뻘건 선혈(鮮血)을 쏟아내었다. 소년은 승리를 직감했다. 

  그래서였을까. 소년은 마을에서 유일한 소녀인, 그리고 설사 유일하지 않다 할지라도 자신에게는 유일할 소중한 사람을 힐끔 돌아보았다. 분명히 삿갓은 죽이기엔 아까운 놈이었다. 하지만 강호의 세계는 언제나 냉정한 법. 소년은 천지만물의 기를 모아 세상에서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무서운 권법인 행복추구권(幸福追求拳)으로 상대의 심장을 통타하고자 하였다. 하필이면 바로 그때 소녀가 앞을 막아서지만 않았다면 바로 그리하였을 것이다. 정말로 그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과는 달리 소녀는 소년과 삿갓의 사이를 막아섰다. 피투성이가 된 삿갓을 일으켜 세웠고, 슬픈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그걸 멍하니 지켜봐야 하는 소년의 손에는 기의 집합체가 길을 잃은 채 이글거리며 하염없이 맴을 돌고 있었단다. 이것이 바로 지도에도 없는 쑹산 기슭 마을의 열살 꼬마들의 첫사랑이 무협지쪼가리처럼 시시하게 끝나버린 명나라 신종 만력(明朝萬曆年)때의 이야기란다. 믿거나 말거나. 

- 더 킬러 -

  소년은 킬러였다. 킬러란 사람을 죽이는 사람을 말한다. 킬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동기의 직접성과 기술의 전문성의 여부가 그 차이를 가른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금 새롭게 정의한 소년의 직업은 전문적인 살인 기술을 사용하여 직접적인 범죄 동기로 연결되지 않은 피해자를 남모르게 처리하는 일종의 대행 서비스업이다. 킬러의 본질은 고독하다는데 있다. 고독하니 킬러이고, 킬러이니 고독하다. 킬러인데 고독하지 않다거나 고독하지 않은데 킬러이기란 자기 팔꿈치와 혀를 만나게 하는 것 만큼이나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고독할 수 밖에 없는 소년은, 이제 겨우 열 살이다. 소년이 어린 나이에 킬러가 된 까닭에는 (여러분도 예상하셨겠지만) 소년 가장으로 여동생을 돌보아야 한다는 어려운 가정 환경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듯 원래 형편이 어려운 집 아이들이 빨리 성숙하는 법을 배운다. 대신 부모 노릇을 해야 하는 아이들은 더욱 빠르게 성숙하는 법을 배운다. 오늘날 가요계에서 갓 데뷔한 새파란 풋내기 십대 신인들이 음반시장의 불황에 책임감을 느낀다며 제법 어른스럽게 한탄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소년의 여덟살 난 여동생은 오빠가 킬러라는 사실을 몰랐다. 사실 애초에 킬러라는 단어를 알기에는 너무 어렸다. 소년은 여동생에게 학교 앞을 돌며 계란빵을 판다고 거짓말을 했다. 때문에 소년은 고된 하루 일을 마친 뒤에 늘 계란빵을 몇 개 사가지고 집에 들어가야만 했다. 갱지 봉투에 담겨있는 식고 찰진 몇 개의 계란빵을 동생에게 건네고 소년은 욕실에 들어가 옷을 빨았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일이니만큼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작업'을 한 날에는 피가 튀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끔 생각했다. 조금 더 부담이 덜 한 일을 했으면 하고. 이를테면 풀숲에 누워 소나 돼지나 개를 겨냥해야 한다면 그래도 마음은 훨씬 편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에게 소나 돼지나 개의 사진을 보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독한 소년이 받는 편지에는 언제나 약간의 돈과 약간의 설명과 사람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을 죽여달라는 것이다. 어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어떤 생물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감히 동종의 생명을 앗아야겠다는 생각을 할까. 역시 그것은 그 편지의 발신인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대신 피를 묻힌 소년은 매일 빨래를 해야만 했다. 하루는 여동생이 빼꼼히 욕실에 고개를 디밀고 묻기를, 

- 오빠야는 빨래할 때 왜 그렇게 표백제를 많이 쓴대요? 우리는 돈도 없는데? 

  고독한 소년이 변명하길, 

- 계란빵을 만들다가 자꾸 계란을 옷에 흘려서 그래. 

  하루는 소년의 앞으로 새로운 편지가 배달되어 왔다. 편지봉투 속에는 예전에 그러했듯이 한 장의 사진과 작은 메모가 첨부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점도 있었는데, 바로 소년의 주거래 은행으로 직행하여 미래를 대비할 든든한 자산이 되어줄 현금 뭉치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예의 작은 메모는 그 모든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제가 가진게 없어서 돈으로 드리기에는……' 가진게 없어서 킬러가 된 소년은 가진게 없어서 킬러에게 보수를 줄 수 없다는 엉뚱한 사람의 편지를 받았다. 그 '없는 마음'을 십분 이해하는 소년은 '이래저래 가진게 없다는 건 슬픈 일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을 덥석 맡을 수는 없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사람의 생명을 앗는 일을 인정만으로 맡을 수는 없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봉투의 바닥에서 말라 비틀어지기 시작한 몇 개의 꽃잎과 볼품없는 몇 개의 돌맹이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소년의 결심은 정말 확고했던 것이다. 반전은 이렇게 시작된다. '삼백원이 제가 가진 돈의 전부였어요. 봉투에 넣으려고 했으나 봉투에 붙일 수 밖에 없었지요. 우표가 없으면 편지가 가지 않을테니까요. 그래서 대신 우체통에 가는 길에 들꽃 몇 송이와 예쁘장한 조약돌 몇 개를 주워 넣습니다. 부디 이거라도......' 덜컹하고 호기심이 내려 앉았다. 아마도 이런 이상한 타입의 사주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한번 맡아보기는 하자, 어렵게 결정은 했다. 그러나 사진을 보고나니 또 한 번 갈등이 생겨버린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자아이. '이거 이래도 되는걸까?' 하는 갈등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그가 처음 킬러일을 나가던 그 날과 비슷한 기분이다. 소년이 여태까지 처리해 온 타겟들은 생각만큼 큰 고민을 안겨주지 않았었다. 사업가, 악덕 사업가, 고리 대금업자, 악덕 고리 대금업자, 정치인, 악덕 정치인, 깡패, 정치 깡패, 악덕 정치 깡패 기타등등. 그러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저 어린 아이다. 그 작고 예민한 틈이 고독한 킬러의 본성에 균열을 일으킨다.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좋은 자리를 잡아 놓고도, 그의 조준경 안에 타겟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하는데도, 며칠을 망설이고만 있는 까닭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조준경 속의 소녀는 (그러니까 소년의 목표물은) 소년이 아는 누구보다도 밝고 쾌활하고 명랑했다. 이름 따윈 몰랐지만 나이는 소년과 같은 열 살. 집에는 혼자 살고 있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저런 아이가 죽기를 바라는 걸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방아쇠를 당기기가 더 어려워졌다. 소년은 조준경 속의 소녀가 자신의 여동생과, 그리고 기억도 나지 않는 엄마와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끝내, 킬러가 해서는 아니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건 킬러가 감히 머리에 담아서는 안되는 망령이다. 

  소년은 어슬렁 번쩍 휘파람을 불며 소녀의 집 근처를 배회한다. 고독한 킬러가 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행동이다. 소년은 소녀의 낮은 집 담장을 훌쩍 넘겨다 보기까지 한다. 이 역시 고독한 킬러가 하기에는 그리 적합한 행동이 아니다. 소년은 고독한 킬러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면서까지 지금 소녀를 살리려 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던 일이니 더욱 이상하다. 이렇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뭐라고 말하더라. 까치발을 든 소년의 눈에 문패가 들어온다. 소녀의 집 문패다. 여동생을 닮은, 꿈 속의 엄마를 닮은 조준경 속의 소녀, 말라 비틀어진 몇 개의 꽃잎과 볼품없는 몇 개의 돌맹이를 받고 죽여야 하는 바로 그 소녀의 문패다. 그리고 알아챈다. 자신에게 사진과 메모와 꽃잎과 조약돌을 보냈던 발신자의 주소와 같다는 사실을. 

  터벅터벅 노을을 뒤로 한 채 산동네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소년은 학교 앞으로 길을 돌아 계란빵 한 봉지를 산다. 입이 수박처럼 벌어진 동생을 뒤로 하고 소년은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빤다. 욕실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여동생은 언제나처럼 묻는다. 

- 오빠야는 빨래할 때 왜 그렇게 표백제를 많이 쓴대요? 우리는 돈도 없는데? 

  고독한 소년이 변명하길, 

- 계란빵을 만들다가 자꾸 계란을 옷에 흘려서 그래.

  빨래판에 대고 벅벅벅 문지르는 소년의 옷에는 사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훨씬 더 깨끗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웬지 뭔가 씻어내야 할 것만 같아서 더욱 힘을 주어 빨래를 한다. 오늘따라 뭔가 씻어내고 게워내어야 할 것이 많은 듯 하여 그렇다. 조금 눈물이 낫는가 싶은데 확실치는 않다. 비누 거품이 묻은 고무 장갑으로 눈을 훔치면 따가울 듯 하여 그냥 두었단다. 이것이 바로 애매하고도 모호한 고용인과 피고용인 관계에 놓인 열 살 꼬마들의 첫사랑이 홍콩 느와르도 되지도 못하고 끝나버린 세기말(世紀末) 같은 세기초(世紀初) 때의 이야기란다. 믿거나 말거나.

- 병아리 -

  소년과 소녀는 ‘까페벌레'에서 만났다. 이른바 소개팅이었다. 소년은 3학년이었고 소녀도 3학년생이었다. 물론 초등학교 3학년이다. 서먹한 긴장감 속에 소년은 킹콩라떼를 마셨고 소녀는 헛개라떼를 마셨다. ‘까페벌레’ 아닌 곳에서는 마실 수도 없는, 특별 시즌 계절 스페셜 음료였다. 소년은 어색해했다. 소녀도 어색해했다. 처음이라서 그랬다. 소년과 소녀 사이의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년은 어렸다. 소녀도 어렸다. 일단 말을 놓고 보니 의외로 빨리 친해졌다. 소년과 소녀는 여느 십대들이 그러하듯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보이 밴드에 대해서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공들여 의견을 나누었다. 이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역시 아주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공들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년은 열살이지만 키가 183 센티미터였다. (어려서 보약을 잘못 먹었다) 소녀도 열살이지만 키도 175 센티미터 정도 되었고 (역시 어려서 보약을 잘못 먹었다.) 구두 높이를 더하면 소년과 거의 균형이 맞았다. 누가 봐도 사복차림의 소년은 초등학생처럼 보이지 않았고 누가 봐도 사복차림의 소녀는 초등학생처럼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이라기보단 차라리 금방 TV에서 튀어나온 이십대 초반의 모델들 같았다. 누구도 소년과 소녀가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을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또한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비슷한 패턴의 만남이 몇 번인가 이어진 다음 소년과 소녀는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했다. 장소는 항상 ‘까페벌레’였다. 소년의 학교와 소녀의 학교 사이의 정확한 중점에 위치했다는 지정학적 위치도 위치였지만, 무엇보다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소년과 소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가짜 풀이 서걱거리는, 가짜 나무가 우거진 까페 깊숙한 곳에서 소년과 소녀는 남들 눈을 피해 안락한 데이트를 즐겼다. 탄력이라고는 없는 싸구려 쇼파와 너무 낮아 불편한 테이블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년은 소녀가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소녀는 소년이 첫사랑이라고 말했다. 유치원생들도 첫사랑 스토리를 한 캐비닛씩 가지고 있는 21세기에 소년과 소녀가 이제서야 첫사랑을 운운한다는 사실을 과연 믿어도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달리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소년과 소녀의 말을 곧이 믿어주지 않을 도리도 없다. 아무튼 소년은 소녀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 앉았다. 소녀 또한 소년의 심장박동이 들릴 정도로 가까이 붙어 앉았다. 소년은 주로 까페모카를 마셨다. 소녀는 보통 화이트모카를 마셨다. 소년과 소녀는 다른 음료를 마시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같은 걸 마시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소년이 속닥거리면 소녀가 키득거렸다. 소년이 키득거리면 소녀가 속닥거렸다. 그 소리는 어떻게 들으면 웃음 같았고 어떻게 들으면 울음 같았다. 논문 작성을 위해 ‘카페벌레’에 잠복중이던 천문학자이자 마흔살까지 솔로인 남자 김유석(Kim, You Suck) 씨가 몇 번인가 그들 가까이 앉았던 적이 있다. 물론 가짜 풀이 무성히 달려있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나 유령처럼 넘어 들어오는 속삭임을 막을 재간은 없었다. 김씨는 이렇게 한탄했다.

- 니들이 무슨 개뿔, 아담과 이브라고 숲 속에 틀어박혀 사랑을 속삭이냐?

  소년과 소녀의 만남은 자연스럽게 궤도에 올랐다. 어느 순간 서로가 돌처럼 단단한 관계로 맺어져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학교와 카페벌레와 집으로 이어지는 단조로운 생활패턴과 곧 다가올 진급에 대한 (초등학교 4학년) 스트레스가 그런 환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소년과 소녀는 관계를 한 단계 진전시키기로 했다.  바로 병아리를 키우기로 한 것이다.

  ‘병아리 돌보기’는 언제부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젊은 연인들에게는 어느새 당연한 통과 의례처럼 받아들여진지가 오래다. 그들은 백일이 되면 돈을 모아 병아리를 사고 함께 돌보았다. 공동 양육의 개념이었다. 여건상 24시간 함께 돌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대개는 일주일씩 번갈아 책임을 졌다. 대신 데이트하는 날에는 모두가 오붓하게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보통은 2주령 수컷 병아리가 많이 선호되었고, '좀 산다' 하는 집의 자제들은 2주령 암컷 병아리를 키우기도 했다. 한때 자취를 감추다시피했던 학교 앞 병아리 좌판이 다시 부활했고, 오백원 천원하던 병아리 한 마리 가격이 오천원까지 뛰었다. 이 무렵부터 한동안 병아리파는 할머니들이 벤츠타고 출퇴근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거대 자본이 팔을 걷고 시장 잠식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상술과 비례하여 판이 커졌다. 일부 까페 프랜차이즈에서는 매장 한 구석을 들어내고 병아리 좌판을 깔았다. ‘병아리 라떼’라는 희대의 스페셜 음료도 등장했다. 덩달아 병아리 서비스 산업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바쁜 연인을 위해 낮시간이나 시험기간에 시간제로 병아리를 돌보아주는 서비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베이커리 프랜차이즈는 매장의 반을 잘라 병아리집으로 바꾸었다. 자연스럽게 '병아리 데이'라는 날이 만들어졌다. 12월 14일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1월 14일이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중엔 결국 12월 14일로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원래 12월 14일 자리에 있었던 ‘허그 데이’ 같은 건 가치 창출도 안되는 날인데 뭘.) 겨울에 산 병아리들은 아무리 잘 돌보아도 오래 가기 힘들었다. 아무리 옛날 학교 앞에서 팔리던 놈들에 비해 품질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병아리는 병아리였던 것 같다. 한겨울에 데이트에 끌려다니며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병아리 모자, 병아리 잠바, 병아리 장갑, 병아리 부츠, 병아리 히트텍까지 쏟아져나와 코 묻은 돈을 긁어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병아리는 병아리였다. 보통은 크리스마스 이후 며칠 더 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연인들의 애정 곡선과 상당부분 일치하는 결과이기도 했다. 장사꾼 입장에서는 이래저래 좋은 일이었다. ① 병아리가 죽고도 남아있는 연인들은 머지 않아 새로운 병아리를 구입할 것이다. ② 병아리가 죽었기에 관계가 끝난 연인들 또한 머지 않아 새로운 상대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며 새로운 병아리를 구입할 것이다. ③ 병아리와 상관 없이 파토난 연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새로운 상대, 새로운 연애, 새로운 병아리의 수순을 밟아갈 것이다. (똑똑히 보았느냐 허그 데이? 이런 게 바로 가치 창출이란다!)

  소년과 소녀는 병아리를 안고 ‘까페벌레'에 나타났다. 월요일은 병아리 돌보기 책임을 교대하는 날이었다. 진동벨이 울리자 소년이 카운터로 가서 모카 라떼와 화이트 모카와 병아리 라떼를 받아 왔다. 소녀가 소년에게 병아리를 넘기며 말했다.

- 일주일 간 잘 부탁해.

  소녀는 병아리를 쓰다듬고 뽀뽀를 했다. 소년은 손을 모아 병아리를 넘겨받았다. 마치 이혼한 부부가 미성년 아이를 두고 연출하는 풍경 같기도 했다. 울타리 넘어 옆 테이블의 김유석씨는 그런 유년 시절의 경험이 상처처럼 남아있는 남자다. 열여섯 살때까지 그는 이혼한 부모 아래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집과 어머니집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쓸쓸한 표정으로 노트북에 고개를 처박고 그는 자판을 두들겼다.

  소년과 소녀의 병아리 양육에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문제는 커녕, 완벽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소년과 소녀가 맞공부커플이라는 점에서부터 불안한 조짐이 있기는 했다. 맞공부커플의 병아리 공동 양육은 대개 트러블을 일으키기 마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란히 학교에 매여있는 상태에서 병아리 키우기가 쉬울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년과 소녀가 병아리집에 병아리를 맡길만한 풍족한 처지나 되는 것도 아니다. 병아리집은 시간당 아무리 후진 곳도 한 달 등록비가 35만원이었다. 위탁 서비스를 이용해도 시간당 6천원이었고 그렇게 고작 몇 시간 맡겨서는 그들 관계에 숨구멍을 내줄 수가 없었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아직 초등학생인 소년과 소녀에게 부담스러운 것은 당연했다. 어차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소년과 소녀 두 사람 안에서 해결을 봐야했기에, 양육에 있어 책임 분배 문제가 대두되었다. 소년은 전반적으로 남자인 자신에게 너무 큰 부담이 지워져 있다고 생각했고 소녀는 대체적으로 여자인 자신이 아무래도 더 많은 희생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소년이 말했다.

- 공부를 좀 쉬는 게 어때? 

- 뭐? 너는? 너는 학교다니고?

- 나는 빨리 졸업해서 돈을 벌어야 하잖아. 그래야 우리 세 식구 제대로 좀 먹고 살지.

- 나는? 나도 졸업해서 돈을 벌면 되는데?

  소년은 소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 냉정하게 보자고. 우리 둘 중에 좋은 대학 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내 쪽일 확률이 높아.

  그 말이 소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 뭐야? 그럼 나랑 저스틴은 그 동안 당신 뒷바라지나 하라고?

  소년과 소녀는 병아리 이름을 저스틴이라고 붙였다.

- 잠시만이야. 9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 그 다음에는? 대학만 가면 돈이 저절로 생겨?  

- 어떻게든 수를 써봐야지. 지금보다야 낫지 않겠어?

-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또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하겠지?

- 내가 뱉은 말 내가 책임지겠다는데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아?

  소년은 흥분하여 벌떡 일어났고 쿵쾅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만 마치 로봇청소기라도 되는듯 전후좌우로 안절부절 돌아다녔고 입 모양으로 보건대 여기에 옮겨적을 수 없는 종류의 상스러운 말도 몇 가지 뱉은듯 싶었다. 잠시 후 소녀가 따라 나가자 상당한 온도차를 동반한 격론이 벌어졌다. 소리지르고, 울고, 불고, 때리고, 코로 입으로 귀로 연기를 뿜어대는 꼴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는데 까페 안에서는 소리가 들리지는 않아, 밖에서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일종의 무성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후 소년과 소녀는 일주일 가까운 시간 동안 냉각기를 거쳤다고 알려졌다. 다만 그 기간 동안 병아리 저스틴을 누가 데리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모르긴 몰라도 병아리 저스틴에게 그 일주일은 마치 공룡들에게 있어 빙하기와 같은 느낌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한다.

  몇 건의 편도 문자메세지가 왕복한 이후 소년과 소녀는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감정보다는 관성의 문제처럼 보였다. 서로가 그리웠다기보단 익숙한 패턴이 그리웠던 쪽에 가까웠다. 불쌍한 병아리 저스틴에 대한 책임감도 약간의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생겨난 균열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다시 메워졌어도 메워진 것이 아니었다. 찢어진 벽지를 덧대어 붙인 것처럼, 못을 박았던 구멍을 메운 것처럼, 미묘한 흔적이 남아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었다. 똑같이 ‘까페벌레’에서 만나 똑같이 모카 라떼와 화이트 모카와 병아리 라떼를 나누어 마셔도, 학교와 카페벌레와 집으로 이어지는 익숙한 일상을 다시 유지하게 되었어도, 결코 완벽하게 예전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소년도 그걸 알았고 소녀도 알았다. 누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이제와서 되돌릴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점차 부딪히는 일이 많아졌다. 소년과 소녀는 상대의 수와 패턴을 모두 꿰고 있었다.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속전속결로 끓어올랐다가 허무하리만치 빨리 식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의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을 많이 발견하고 있었다. 자신이 '소녀의 첫사랑'이라는 말을 소년은 믿지 않았다. 자신이 '소년의 첫사랑'이라는 말을 소녀 역시 믿지 않았다. 같이 앉아 있는 동안에도 서로의 시선을 피하는 일이 많아졌다. 부러 화장실에 다녀오는 빈도가 많아졌다. 그 사이 다른 한 사람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저스틴을 쓰다듬으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 손길 또한 날로 시큰둥해졌다. 

  파국은 갑작스럽게, 그러나 사실 전혀 갑작스럽지 않게 찾아왔다. 드라마의 결말처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 아무래도 여기까진 것 같다.

라고 소년이 말했다.

- 우리가 좋았던 시절이 있기나 한거니?

라고 소녀가 대꾸했다.

  소년과 소녀는 각자의 짐을 챙겼다. 백팩과 손가방, 그리고 종이봉투를 들었다. 휴대폰을 바지주머니에 집어넣고 이어폰을 외투주머니에 구겨넣었다. 그리고 병아리를 보았다. 그들은 저스틴을 어찌하겠다는 합의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소년이 데리고 갈 수도, 소녀가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저스틴은 서로에게 있어 서로를 환기하게 하는 존재였다. 지난 사랑의 결실이자 끝난 사랑의 잔해였다. 이미 끝난 마당에 떠맡을 이유가 없었다. 니가 데려가. 아냐 니가 데려가. 길게 말해보아야 싸움만 될 것 같았다. 소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녀도 ‘까페벌레’ 아르바이트생들 눈치를 보았다. 소년과 소녀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병아리 저스틴을 그냥 테이블 위에 남겨 놓은 채로.

  수풀 사이로 들려오는 말소리가 사라지자 옆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천문학자이자 마흔살까지 솔로인 남자 김유석씨는 귀마개를 뺐다. 드디어 이제 좀 조용하게 논문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의욕적으로 자판을 두드리려다가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문득 애들이 진짜 갔는지가 궁금해졌다. 정말 싸우고 가버려서 조용한 건지, 아니면 막판에 극적으로 불타올라 다른 짓을 하느라고 조용한 건지, 확인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카운터에 가는 척하면 힐끔 돌아볼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부자연스러운 방법을 택했다. 원시림을 탐험하는 심정으로 울타리 사이의 수풀을 헤치고 천천히 머리를 디밀어 조심스럽게 옆 테이블을 확인했다. 그리고 보았다. 테이블 위에서 뒤뚱거리고 있는 병아리 한 마리를. 

  한 통계에 따르면 이렇게 버려지는 병아리가 연간 12만 마리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열 살 꼬마들의 첫사랑이 어른이 되기도 전에 끝나버린 시작부터 어두웠던 새로운 세기의 이야기란다. 믿거나 말거나.

 

(2004년 02월)

반응형

'낙농콩단 > Season 1-5 (2000-2005)' 카테고리의 다른 글

051. 마지막 콩쿠르  (0) 2004.05.30
049. 세팍타크로 서클 동아리  (0) 2004.04.04
046. 조교 공손급의 조교병법  (0) 2004.01.11
045. 민족기록화: 눈싸움대첩  (0) 2003.12.14
044. 천리장성  (2) 2003.11.16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