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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 천리장성

낙농콩단/Season 1-5 (2000-200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3.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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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한 것은 언젠가 망하고 성한 것은 언젠가 쇠한다. 세상에 영원히 존속하는 것이란 없다. 이러한 사실을 새삼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가까운 곳에서 그 증거를 확인하고 싶다면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자리한 식당들을 보라. 어느새 생겨나고 어느새 망해서 사라진다. 사실 로마와 같은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흥했다가 망하는데는 몇천년이 소요되는 관계로 채 백년도 살까 말까한 인간의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기 어려운 감이 없지가 않지만, 우리 동네 음식점 하나가 흥했다가 망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특히 "생기는 것도 음식점이고, 망하는 것도 음식점인가 하노라”라며 너도 나도 한탄할 정도로 다이내믹한 대한민국 요식업계이고 보면 흥망성쇠에 수반되는 숙연한 비애감을 한눈에 확인하기에는 더없이 적절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아! 우리의,

 

천리장성. 여기에 나는 모든 걸 털어넣었다. 정말 천리를 이어지는 장성은 아니다. 십리가 4킬로미터이니 천리라면 400킬로미터일텐데, 이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그만한 땅이 있다면 벌써 부자가 되어도 떼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누가 길을 닦아도 진작에 내 땅에 걸리고, 누가 빌딩을 세워도 진작에 내 땅에 걸렸을테니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땅이야 말로 최고의 재산이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어디 흥하고 쇠함이 있기를 하나. 발이 달려 도망다니기를 하나. 돈은 돌고 돌지만 땅은 수절하는 열녀처럼 늘상 그 자리에 있다. 이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땅부자는 사라지지 않으며 장담하건데 목숨걸고 땅에 돈을 쳐박는 투기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변만 둘러봐도 그렇다. 가방 끈도 짧고 머리에 쥐뿔 든 것도 없는 놈들도 그 놈의 땅만 있으면 으쓱으쓱 거들먹거리며 다닌다. 마흔 즈음에 물류 회사에서 상자 하나 안고 나란히 명퇴한 동기들만 봐도 그렇다. 참 애달픈 일이지만 이후의 인생이 땅의 소유 여부에 따라 명확하게 갈리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같은 명퇴자라도 땅 없는 놈은 그저 쥐꼬리만한 퇴직금을 은행에 넣어두고 아슬아슬 쪼개 쓰며 새 직장이나 새 사업을 찾아 동분서주한다. 반면에 명퇴자라도 땅 있는 놈은 물 좋고 공기 좋은 지방 어디에 퇴직금을 보태 별장 하나 지어 골프나 치러 다닌다. 땅값 오르는게 그들이 쓰는 돈보다 크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것이 없다는 설명이다. '사실 그러지 않아도 회사 그만 두려고 했어.'라는게 후자군에 속하는 놈들의 주장이다. 그야말로 망할 놈의 세상이다. 각설하고, 

 

천리장성. 진짜 장성이 아니라 음식점이다. 물류 회사를 나오면서 얻은 돈으로 나는 요식업에 손을 대기로 마음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그게 에누리없는 나이 마흔살의 일이다. 마흔이면 불혹이라고들 말하는데 그 당시로는 뭔가에 혹하지 않고 버틸 재간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자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의 마흔은 어떤 것에도 눈길을 돌리지 않고 신선처럼 도도하게 살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나이가 아닌가. 하나 있는 (물론 둘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마누라는 겨우 서른 셋이었다. 하나 있는 (이쪽은 진짜 하나다) 자식 놈은 이제 겨우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앞으로 돈 깨질 구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반면 퇴직금은 너무도 야박한 수준이었고 은행 잔고는 몇 년 안에 쪽박이나 차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도대체 회사에 가져다 바친 십년 플러스 삼년의 세월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알래야 알 길이 없었다. 허무했다. 그러니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란 새 직장을 찾거나 사업을 하는 뿐이었던거다. 그런데 새 직장이라니! 사십은 놀고 먹기에는 이른 나이지만 직장을 새로 구하기에는 턱없이 늙은 나이 아닌가? 어느 정신 빠진 회사가 갓 졸업한 생기 넘치는 스물 몇 살짜리들을 두고 마흔이나 먹은 재고품을 채용하겠는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당연히 그랬다. 더구나 내가 인사팀 직원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가 있다. 물론 눈을 낮추기만 한다면야 적은 돈이라도 벌 수 있는 자리는 얻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가족적인 분위기의 30인 미만 사업장.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명문대 경제학과를 나와 십년하고도 삼년 더 대기업 인사팀을 다닌 자존심이 있지 그런 곳에 구차하게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럼 하나 남은 방법은 내 사업을 시작하는 것 뿐인데 그게 어디 쉬운 말인가. 그때 거짓말처럼 내 귀에 대고 속삭여진 주변 사람들의 충고가 바로 “먹는 장사는 그래도 재미가 좋다”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바로, 

 

천리장성. 어떤 사람은 중국집이라고도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청요릿집이라고도 부르며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짱개집이라고도 부른다지만 내게 <천리장성>은 그냥 <천리장성>이다. 이제 내겐 <천리장성>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왜 청요리를 택했느냐고들 사람들은 묻는다. 나도 잘은 모르겠다. 사실 어떤 음식점이 흥하고 어떤 음식점이 망하게 되느냐 하는 것은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다. 어려운 까닭은 예측이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마땅히 흥할만한 곳이 흥하고 마땅히 망할만한 곳이 망하는 아름다운 일도 있지만, 반대로 흥해도 좋을 곳이 망하고 망해야만 할 곳이 흥하는 기이한 일도 다반사다. 그렇지만 중국집이라면 어느 정도 만만한 편이다. 다만 오해는 마시라. 어제, 오늘, 그리고 또 앞으로 중국음식점을 운영할 모든 분들을 무시하려는 처사가 아니라 흥하고 망함에 있어 중국집은 제법 공평한 편이라는 뜻이다. 가령 전직 별 다섯개 호텔의 중식전문 조리장이 만든 짜장면과 우리 천리장성의 고졸 주방장 용팔이가 만든 짜장면 사이에 아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당연히 차이야 있겠지만 다른 분야의 요리만큼 드라마틱하게 차이가 벌어진다고는 할 수 없다). 외관이야 그 놈이 그 놈이고 영양학적인 차이도 원재료의 차이 이상으로 벌어지지도 않는다. 나아가 맛을 논하자면 짜장면은 세상 그 어떤 분야의 요리보다 주관적인 요소가 진하게 작용하기에 더러 용팔이가 만든 짜장면쪽이 더 맛있다는 이상한 사람들도 봤다. 중국집은 엄청나게 음식을 못하지만 않는다면 손님이 갑자기 끊기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마 맞을 것이다. 이사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 그들의 짐을 날라 주는 이삿짐 센터가 존재하는 한, 입학식과 졸업식과 어린이날이 존재하는 한, 전국 모든 가정주부들이 장금이가 되어 매일 요리하는걸 즐기게 되지 않는 한, 전국 모든 가정이 집에 기식하는 식모를 하나씩 데리고 사는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중국집에는 언제나 배달 주문 전화가 걸려온다. 살기 위해 먹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 산다는 중국 사람들만큼은 아니어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먹는걸 참 좋아하는 탓이고, 그 중에서도 역시 제일 만만한 것이 중국 음식이기 때문이다. 인력 자원도 풍부하다. 인력 수급도 원활하다. 인력 양성도 어렵지 않다.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철가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내가 누군가. 대기업 인사팀에서 13년간 일하면서 사람 뽑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던 사람 아닌가. 인적자원의 스카우트 및 연봉 협상에 있어서는 이 동네 중소상인들과 다른 리그에서 온 사람이다. 그저 동네에서 취미삼아, 장난삼아, 시간남아,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인근 중국집 업계에서 변동 성과급제, 주 5일 근무, 중식 및 석식 제공, 각종 보험 보장 등의 조건을 처음으로 계약서상에 명시한 것도 다름 아닌 우리의, 

 

천리장성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아파트 단지마다 하나씩 있을 정도로 중국집이 넘쳐나니 경쟁이 치열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는 소리다. 이 동네에만 <천리장성>을 포함하여 총 열 세개의 중국 음식점이 있다 (이 바닥 사람들은 13 문파라고도 부른다). 거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하는 혼전이라 하겠다. 그런데 열 세개 중국집모두가 장사를 못해서 망할 정도까지 가지는 않고 그럭저럭 버틴다. 경제학 전공자의 눈으로 봐도 신기한 시장이다. 중국 음식점이 열 세개인 까닭은 아파트 단지가 열 세개이기 때문이다. 이 동네 정중동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불과 십년전만해도 물건을 사거나 외식을 하려면 차를 타고 나가야 할 정도로 심하게 외진 곳이었다. 오죽하면 택시비를 더 준다고 해도 택시기사들이 들어오기를 꺼렸다. 내친 김에 이십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야말로 야산과 공동묘지와 배밭의 3대 2대 5 조합으로 이루어진 허허벌판이었다. 그런데 그 한 가운데 처음 아파트 단지가 하나 들어섰고, 학교와 경찰서와 소방서가 생기더니, 순식간에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은 단지만 열 세개다. 고로 열 세개일 수 밖에 없는 중국집의 이름을 차례로 열거하자면 <안시성>, <와호장룡>, <동방불패>, <우견아량>, <절대쌍교>, <동사서독>, <신조협려>, <열혈남아>, <화양연화>, <천녀유혼>, <비정성시>, <신용문객잔>, 그리고 우리의, 

 

천리장성. 바로 정중동 라파예트 아파트 9단지 상가의 꼭대기 층에 자리잡고 있다. <천리장성>이 들어서기 이전에는 <희극지왕>이라는 중국집이 같은 자리에 있었다. 당시 주인은 나름대로 코믹한 이름이 마케팅의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했던 듯 싶다. (틀린 말은 아니다. <희극지왕>이라니! 한번 시켜먹으면 두고두고 기억날만한 이름 아닌가?) 전 주인이 중국집을 그만 둔 이유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때문이라 했다. 로스엔젤레스의 코리아 타운에서 미국 영주권자인 조카와 합작하여 <킹 오브 코미디>라는 차이니즈 레스토랑을 개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일단 강하게 인상을 남기고 나중에 생각하자’라는 그의 충격적 마케팅 지론에 놀라는 한편 코리아 타운에서 차이니즈 레스토랑을 운영한다는 패기에 감복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확인한 이후 달라지지 않았다면 로스엔젤레스에서 코리아 타운과 차이나 타운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일 것이다.) 아무튼 그런 사연 끝에 인수하게 된 우리의,

 

천리장성에는 시작부터 모아둔 지금의 절반 이상이 들어갔다. 동네 중국집이라면 으례 떠으르는 구질구질함이 싫어서 대대적 리모델링을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비록 아파트 상가 건물에 입주한 작은 가게이지만 강남대로의 고급 호텔의 고급 중식집 못지 않은 차별화된 고객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 (마누라는 이런 내 의견에 ‘가방 끈 긴 것도 병이다’라는 냉정한 코멘트를 남겼다). 오래된 아파트 특유의 색 바랜 타일 조각을 떼어내고 바깥쪽으로는 까페식 통유리창을 배치하였고 안쪽으로는 사암 벽돌을 쌓아 올려 깔끔하게 재단장을 했다. 그 결과 예전보다 훨씬 넓어 보였고 볕이 잘 들고 따뜻해졌다. 복도쪽 입구에는 기와 지붕을 올리고 그럴듯하게 단청도 칠했다. 간판에는 검은 바탕에 노란 흘림 글씨로 (물론 약간 촌스럽지 않을까 염려도 되었지만) <천리장성>이라고 새겨넣었다. 주문만 하면 천리 안의 어디라도 달려가겠다는 뜻을 함축한 상호였다. 사람들은 <천리장성>의 이름이 왜 <천리장성>이냐고 묻는다. 이를테면 <만리장성>이라 하지 않은 이유가 있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만리장성>은 너무 거창하다. 아무리 뛰어난 주방장도 만리를 가는 동안 불지 않을 짜장면을 만들어낼 재간은 없고 가장 빠른 철가방도 오토바이로 만리를 달려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반면에 천리쯤이라면 서울과 부산간의 거리 정도로 우리나라 중식배달업계를 한 손에 넣겠다는 적절한 과장과 야심찬 포부가 들어간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지어진 이름이, 

 

천리장성. 초창기는 힘들었다. 라파예트 아파트 10단지 <신용문객잔>과 8단지 <안시성>의 텃세가 거세었다. 아시다시피 9단지 사람이라고 늘상 9단지에서만 짜장면을 시켜먹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동네에서는 (면이 불지 않을 거리 안에서라면) 소문이 우선이다. 그것이 배달중국요리 시장이 이론과 공식대로 흘러가지 않는 결정적 이유다. <안시성>은 인근에서는 드물게 큰 길쪽 상가 두 층을 온전히 차지하는 중형 음식점이다. 일류는 아니어도 서울 중심가의 큰 호텔에서 일하다 은퇴한 조리장이 무료함도 달래고 후진 양성도 겸할 목적으로 1996년 여름에 열었다고 들었다. 적어도 정중동 안에서는 크기와 기술과 경험으로 대적할 자가 없었다. 정중동에서 유일하게 매장 방문 손님이 존재하는 중국집으로 주방과 홀을 합해 직원 수만 30명이 넘었다. 반면 10단지 <신용문객잔>의 강점이라면 세월로 쌓아올린 신용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정중동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부터 그들은 중국집을 했다고 한다. 1951년 <용문객잔>이라는 이름으로 짜장면 원 메뉴 레스토랑으로 문을 열어 자그마치 3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서 관청과 도서관을 돌면서 기사와 기록을 검색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정중동이 신도시 개발에 포함되면서 아파트 단지가 우후죽순 솟아난 것은 70년대 후반. 그들은 새로 지어진 주공아파트 상가로 첫번째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것이 1979년. 2대 주인인 초대졸 씨가 가게를 물려받은 것은 이듬해였고 이때 이들은 상호를 종전의 <용문객잔>에서 <신용문객잔>으로 변경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라파예트 아파트 10단지가 완공되었던 1992년. 주공 아파트 상가의 옛 자리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보금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이때는 상호를 <신신용문객잔> 따위로 변경하자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3대 주인인 초성체 씨가 가게를 물려받은 것은 지난 2005년. 아버지인 초대졸씨가 정중동 중식계의 패권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 직후 갑자기 포춘 쿠키가 목에 걸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사망한 다음의 일이다. 당시 지역신문의 보도를 찾아보면 이 사건이 우연이 아님을 의심하는 적지 않은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포춘 쿠키 안에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적혀진 종이가 있었고 (‘OO가 잦으면 O이 된다’) 쿠키와 종이 모두 초대졸 씨의 상부 직장에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불과 23세의 소년을 왕좌에 올리게 된 <신용문객잔>이지만 그 역사가 길고 따르는 세력과 무리가 많아 여전히 정중동에서 가장 골수 단골이 많은 집이다.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살았거나 주공 아파트를 거쳐 이 지역에 자리잡은 주민들은 현재 어느 단지에 살고 있는지와 무관하게 짱개가 생각나면 전화기를 들고 <신용문객잔>의 번호로 다이얼을 돌린다고 한다. 그러니 어느 쪽도 쉽지 않은 상대다. 우리의,

 

천리장성. 그러니까 왼쪽엔 범이요 오른쪽에는 용이다.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끼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잡아 먹는 건 바라지도 않고 잡아 먹히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잡아 먹히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었다. 진실로 고민이 많던 시절이었다. 첫 달의 실적은 실망스러웠다. 상호 변경 및 인테리어 신규 투자로 인한 브랜드 재정립의 효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강한 스타트’에 대한 기대에도 불구하고 첫 달 매출은 600 만원 선에 그쳤다. 실망스러운 수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인상적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평범하기 짝이 없는 실적이었다. 나는 이전 <희극지왕> 시절의 지난 5년간 영업실적표 (회사에서는 이런 용어를 썼는데 이 바닥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를 전 주인에게 넘겨받아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 시절과 비교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는 결과였다. 해당 산입 기간 동안 매출은 평균 543 만원이었고 계절 특성이나 원재료 비용 상승에 따라서 편차가 있기는 했다. 오히려 매출에서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 것은 다행이라고 해야 할 판이었다. <희극지왕> 시절과 비교하여 순수익에서는 더 크게 줄어들었으니까. 첫 달에 배부를 수야 없는 법이지만 어떤 세부 지표도 황금빛 미래를 암시하시는 않았다. 그리고 그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후 6개월 동안 매출과 순이익은 나란히 손을 잡고 번지 점프를 하였다. 나는 소자본 창업시장의 높은 벽을 절절하게 실감했다.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은 사업만 아니었다. 거짓말처럼 가정에도 심상치 않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가장 미스터리한 것은 먹인 것도 없는데 쑥쑥 자라는 아들 놈이었다. 몇 개월 사이에 키가 7 센티미터가 더 자라더니만 돌연 중학교에 간다고 선언해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나는 한탄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왜 하필 이런 일들이 내가 자영업자가 된 다음에 벌어지는 것인가! 그러는 동안 마누라는 타고난 재능을 한층 갈고 닦아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켰다. 세상에 목표물이 단 하나 밖에 없는 저격수처럼 집요하게 공격을 시작했다. ‘에휴, 애새끼가 중학교에 가면 학원이라도 하나 보내고 과외 선생이라도 하나 붙여야 할텐데’ 혹은 ‘에휴, 내 팔자야. 돈은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데 나는 돈도 아닌데 돌고 돌겠네’ 같은 푸념들. 밥상을 차리다 말고, 다림질을 하다 말고, 화장실 문을 반쯤 열어 좋고 볼일을 보다 말고 쏟아내는 원망의 아리아.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들릴 것을 알고 하는 고약한 악의를 품은 언어의 폭탄들 속에서 나는 우리의,

 

천리장성에 고스란히 쳐 박은 퇴직금을 떠올렸다. 선천적 치아 부정교합의 불편함조차 잊은 채 이를 악 물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회사에서 얻은 경험을 총동원하여 <천리장성>을 정중동 최고의 중국요리집으로 만들리라 다짐했다. 주변 상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천리장성>의 현실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칠판을 사다 놓고 강점과 약점, 기회와 위기를 적어 넣었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 출신의 노하우를 십분 살려 채용한 직원들 - 주방장 용팔이, 주방 보조 떡팔이, 홀 서버 크리스티나, 배달원 아이언마스크를 모아놓고 매일 아침 7시 30분 전체 직원 회의를 통한 브레인 스토밍을 통해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과 신메뉴 개발 회의를 진행하였다. 남는 시간에는 틈틈이 <희극지왕> 시절부터 이 가게의 단골이었던 사람들의 목록을 전산화했다 (‘해야할 일’ 목록에 ‘언젠가 전산담당자를 채용할 것’이라고 적어 붙여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의 전공(혹은 배운 도둑질)인 인사 관리 측면에서는 보다 과감한 행보를 거듭했다. 먼저 ‘사람이 전부고 사람이 미래다’라는 구호 아래 직원 복지 체계를 대대적으로 손 보았다. 먼저 페이즈 1에서는 주방과 홀 그리고 배달 등 모든 직군에 걸쳐서 정중동 업계 평균 월급의 120 퍼센트 수준을 약속했다. 인센티브 규정도 만들었다. 판매량과 판매단가 및 그릇수에 연동되어 (컴플레인이 없는 한) 팔아낸만큼 보너스를 받게 하는 정책이었다. 휴가 규정도 파격적이었다. 일년 15일의 연차를 아무 조건 없이 (조직장 결재 없이) 보장하였으며 근속 2년차 마다 직원에게는 30일의 유급 휴가와 200만원의 휴가비를 약속했다. 근속 8년차 마다 안식년을 갖고 자기 계발 및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항목에 이르러서는 나 스스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어서 업계 최초로 주 5일 근무를 정착시키기 위해 부주방장과 부주방보조를 새로 고용하였고 한 달 후에는 홀 서버 한 명과 배달원 한 명을 추가로 영입하였다. 물론 직원이 열 명 수준이 되면서 인건비도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인건비를 아까워해서는 결코 조직을 키울 수가 없다는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한 나의 지론이었기 때문이다. 뒤이어,

 

천리장성의 사내 복지 시스템 구축의 페이즈 2가 시작되었다. 비록 그 사이 매출과 순이익의 반전은 없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시스템을 만드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기까진 더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첫째로는 직원 전용 카페테리아를 만들어 격무에 시달리는 직원들이 부담없는 가격에 영양가 높은 식사와 활력을 채워줄 음료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 정책의 실현을 위해 카페테리아 전용 주방장과 접수계산원을 새로 채용하였으며 그들에게도 다른 직원들과 동일한 복지 혜택을 약속했다). 둘째로는 사내 동아리를 활성화하고 전격적인 운영비 지원을 통해 직원들이 일과 여가의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가장 활성화된 것은 길 건너 <정치적으로 올바른 PC방>에서 모이는 스타크래프트 동아리였다). 세번째로는 전 직원이 연 1회의 종합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약속하였기 사내 보건실을 신규 설치하여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역시 이 정책의 실현을 위해 전속 간호사 한 명을 신규 채용하였고 길 건너 <마요네즈 클리닉>과 협약을 체결하였다). 네번째로는 사내 휘트니스를 신규 설치하여 상시 체력 증진 및 건강 관리는 물론 안마, 요가, 필라테스, 스핀이, 서킷 트레이닝 등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역시 이 정책의 실현을 위해서 피트니스 코치 두 명과 안마사 한 명을 신규 채용하였다). 타당성 조사까지 들어갔던 사내 어린이집은 아직 기혼 직원이 없는 관계로 시기 상조라는 판단에 페이즈 3로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로서 나는 눈덩이를 넘어 아발란체(눈사태)가 되어버린 인건비 풀에 허우적거리게 되었으나 마음만은 더 없이 뿌듯하였다. 오직 아쉬운 것은 홀 좌석 수가 30석에서 10석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전체 48평 짜리 가게에 총 20명이 넘는 직원이 부딪히며 생활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매장을 확장할 시기가 되었다고 진단을 내렸으나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마누라는 ‘지랄병도 이정도면 화타도 못 고칠 수준이고 그렇다면 정당한 이혼 사유 아니겠는가’라며 게거품을 물었다.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의,  

 

천리장성 직원 모두를 가족처럼 대하려고 애썼다. 직원들의 가족 모두를 한 달에 한 번씩 모아 청요리가 아닌 정상적인 사람들이 먹는 정상적인 음식으로 단란하게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청요리라면 질릴대로 질린 사람들이었으니까!) 부모도 은사도 없는 용팔이이네 형의 결혼식 때 주례 선생님을 소개시켜준 것도 나였다. 떡팔이의 외조부상 때 앞에 나서서 장례를 지휘한 것도 나였다. 뿐만 아니라 홀 서버 크리스티나가 삼년간 사귀던 애인과 헤어졌을때 밤새 같이 술자리를 지켜준 사람도 나였다. 많은 직원들 중에서도 특히 용팔이와 떡팔이는 나를 친형님처럼 따랐다. 나를 위해서라면 가솔린을 들고 불구덩이로 걸어들어갈 수 있단 정도였다. 뭐랄까, 그건 회사에 있을 적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기분이었다. 매출과 순이익이 쌍바닥을 치는 시점에도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같은 시각 미소를 잃어가고 있던 마누라는 걸핏하면 테팔 프라이팬을 나에게 휘둘렀다. ‘인간아! 집 구석에서 나가서 제발 좀 걔네들이랑 같이 살아’라고 했다. 가뜩이나 무거운 마음인데 아들 놈까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아, 글쎄. 벌써 고등학교에 간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3년이나 지났다고? 나를 둘러싼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얻은 가족이 있다고 진짜 가족을 내팽개칠 수야 없었다. 진짜 가족과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그들이 나를 무능하다고, 나의 천리장성을 무능하다고 여기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천리장성에게도 기회는 왔다. 바로 라파예트 아파트 9단지 입구에 지하철 역이 떡하니 하나 들어서면서 소위 역세권이 만들어지고 우리가 그 안에 자동 편입된 것이었다. 서울 끄트머리 지역답게 종점 역이었다. 들어선 건 역이고 역은 사람들이 지나치는 곳이지 머무는 곳이 아니었으나 매출과 순이익이 거짓말처럼 반등했다. 고맙게도 새 역의 3번 출구가 9단지 상가 입구 방향으로 뚫려주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타고 여기까지 짜장면 먹으러 오는 사람은 없을텐데도 손님이 늘었다. 줄어든 홀 좌석이 아쉬울 정도였다. 손님이 늘어나니 단골도 늘어나고 입소문도 퍼졌다. 따라서 배달 주문도 늘어났다. 기본 메뉴의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 되자 우리는 과감하게 그간 매일 아침 브레인스토밍 시간을 통해 준비해두었던 필살의 메뉴들의 선보이기 시작했다 (‘던전-비프 앤 드래곤,’ ‘마이트-치킨 앤 매직,’ ‘울티-메인 온라인’ 등). 다른 중국집과 차별화되는 메뉴의 등장이 입소문을 타자 방문 고객과 주문 고객이 나란히 늘어났다. 말하자면 즐거운 순환이고 행복한 순환의 시작이었다. 이 무렵부터는 과도한 복지 시스템의 확충으로 떠 안았던 부담을 차곡차곡 상쇄해나가기 시작했다. 아들 놈에게는 명문대 출신의 과외 선생을 붙여주었다. 마누라에게는 샤넬 트위드 원피스와 (손잡이가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되어) 장시간 요리를 해도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 신제품 테팔 프라이팬을 사주었다. 용팔이와 떡팔이와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모든 직원의 기본급도 올려주었다. 은행 잔고의 추세선이 마침내 양의 기울기로 돌아섰고 이후 일년 동안 변동 없이 이어졌다. 모든 지표가 긍정적이었다. 내친김에 <천리장성>과 이웃하고 있는 서예 학원 <혼자옵서예>를 사들여 매장을 넓혔다. (학원장 김말복 선생은 가게를 우리에게 넘기고 낙향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그의 붓끝은 아흔 먹은 할매의 손끝마냥 무뎌서 필력이랄게 전혀 느껴지지 않아 굳이 우리가 아니어도 학원을 접을 시점이기는 했다). 다시 홀 좌석이 30석으로 복원되었다. 주방 보조 둘과 홀 보조 둘과 배달원 둘을 더 고용하였다. 거짓말 같지만 많은 날에는 하루에 짜장면만 백그릇이나 팔리는 날도 있었다. 동네 짱개집에서 하루 백그릇이라니! 호텔 조리장 출신의 <안시성>이나 이 지역 터줏대감 <신용문객잔> 애들은 그렇게 팔아봤을까? 아마 쉽지 않았을꺼야. 그러고보면 대단하고 대단한 우리의, 

 

천리장성. 기회가 갑자기 왔던 것처럼 몰락의 순간도 갑자기 찾아왔다. 따지고 보면 그게 다 세상 만사의 원리 아닌가 싶어 문득 숙연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구청에서 위생검사를 나왔다. 난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관계당국의 위생검사라는게 한두 번 겪는 일인 것도 아니고, 또 다 그렇고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천리장성>의 위생 상태는 단언하건대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내가 아는 어떤 동네 중국집 주방도 이 보다 청결하지는 않았다. 또 설령 문제가 있다고 한들 구청의 위생 검사가 그렇게 빡빡한 것도 아니다. 대개는 지적 사항이 있어도 식사 한 번 대접하고 회식비 좀 쥐어주면 유야무야 넘어가고는 했다.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걸. 무슨 일인지 갑자기 눈에 불을 켜고 검사를 하는거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문제가 많았다. 모든게 다 주인인 내 잘못이다. 용팔이에게는 조리사 자격증과 보건증이 있었지만 떡팔이를 비롯한 나머지 주방 멤버들 중 절반에게는 둘 중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여건이 되면 자격증도 따게 해주고 보건증도 받아오게 한다는게 바쁘다보니 어느새 흐지브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린 위생모자도 쓰지 않았다. 나나 용팔이나 떡팔이나 다들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서 머리에 뭘 쓰는걸 싫어했다. 녀석들은 사내 휘트니스에서 운동을 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씻지도 않고 주방으로 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게 또 딱 걸렸다. 앞치마나 수건은 어김없이 세탁하여 뜨거운 물로 소독하고 사용하였는데 그 정도로는 정상 참작이 안되는 것 같았다. 좋지 못한 소식에는 끝이 없었다. 용팔이나 떡팔이나 다른 주방 멤버들이나 워낙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녀석들이라 시계나 반지로 멋을 한껏 부리는데 결코 인색하지 않았는데, 주방에서 음식을 조리하는 순간에도 그 신념을 엄격히 고수하는 태도 또한 지적 대상이 되었다. 냉장고에선 유통 기한이 지난 단무지와 짱아찌가 발견되었다. 우리 가게에서는 팔지도 않는 연어초밥이 반쯤 먹다 남아 곰팡이가 핀 채로 발견되었다. 아이언마스크를 제외한 배달원 중의 절반은 알고 보니 원동기 면허증이 없었다 (아 글쎄! 채용시에는 위조하여 보여주었다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거실에 앉아 텔레비젼이 폭로하는 남의 식당의 불결함을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연이은 스트레이트 펀치로 나의 혼을 쏙 빼놓은 구청 직원들은 마지막으로 자외선 살균 소독기, 식기 세척기 등등의 위생 상태를 문제 삼으며 대대적 시정을 요구하였다. 변명 같지만 동네 중국집에서 어디 그런 걸 심각하게 생각하겠는가. 물론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어이 곽선생, 우리 사이에 이러긴가? 그런 말은 양심적 공무원의 살아있는 표본이 되어 나타난 그들의 서슬퍼런 엄포에 차마 꺼내지도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의, 

 

천리장성은 장장 15일간의 영업정지를 받았다. 무려 보름씩이나 간판에 전기를 연결하지 않아야 했다. 적지 않은 금액의 벌금도 냈다. 마누라의 매서운 욕 퍼레이드와 더불어 테팔 프라이팬 찜질도 당했다. 이후 2주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다. 우선 지역신문에서 미친개처럼 우리 <천리장성>을 물어 뜯기 시작했다. 하루도 안 빼고? 하루도 안 빼고. 마치 우리가 불결한 일반음식점의 상징이라도 되는 것처럼 악의적인 기사들이 쏟아졌다. 용팔이와 떡팔이, 크리스티나와 아이언마스크에게는 용돈을 조금 쥐어주며 특별 휴가를 주었다. 가게도 못 여는 판에 있어봐야 좌절감만 더 하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들은 마치 죄인이나 되는 양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떠났다. 나머지 24명의 (그러니까 피트니스 코치와 간호사와 직원 식당 주방장을 포함한) 직원들도 마찬가지로 특별 휴가를 받아 떠났다. 미리 예감했다가 결국에 증명된 사실이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2주 동안 일어난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용문객잔>이 짜장면 값을 이천오백원으로, 짬뽕 값을 삼천원으로 인하하며 ‘기본에 충실한 중국음식집’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안시성>은 그릇 대신에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에 모든 메뉴를 밀봉 포장하여 배달하기 시작하며 위생 상태에 자신이 있다는 뜻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라조육, 깐풍기, 부추잡채, 양장피 등 흔히 일년에 한 번 먹기도 힘든 것으로 간주되는 요리들을 1인분 씩 포장하여 판매하였고 하필 그 시점에 다섯 개 이상의 신메뉴를 한 번에 런칭하였다. 그 중에는 우리 천리장성의 던전-비프 앤 드래곤과 상당히 흡사한 소고기 튀김 요리와 마이트-치킨 앤 매직과 거의 유사한 페퍼 치킨 요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골 때리는 일이었다. 타이밍이 정말 절묘하지 않은가? 악몽과도 같은 2주가 지나고, 용팔이와 떡팔이가 돌아오고, 크리스티나와 아이언마스크가 돌아왔다. 다시 우리의,

 

천리장성 문을 열고 깨끗하게 청소를 한 다음 다시 간판에 불을 넣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도 있었다. 초기 멤버들은 제외한 24명의 직원들 중 단 3명만이 다시 돌아왔다 (돌아온 것은 고맙지만 돌아온 나머지 3명이 피트니스 코치와 안마사와 간호사의 조합이라는 점은 아쉬웠다). 손님들도 돌아오지 않았다. 신용이란 게 한번 잃어버리면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 것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식당이라면 더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무척이나 서글펐다. 몇 년의 기적 같았던 성장세가 한낱 짧은 꿈처럼 느껴졌다. 매출과 순이익이 바닥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영업정지 이전의 결과와 함께 엑셀 그래프를 그렸을 때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문을 열고 다시 두 달이 지나는 동안에 어느 지표 하나 개선되지 않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간다면 월세를 내기에도 버겁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1명의 직원이 사라진 것이 어떤 면에서는 다행이었고 그래서 나머지 돌아온 3명에게도 퇴직금을 주어 내보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처음 <천리장성>을 개업하더니 순간의 멤버들만의 남게 되었다. 용팔이, 떡팔이, 크리스티나, 아이언마스크. 나를 포함하여 우리 다섯이 이제 모두 용사되어 돌아온 후레쉬맨처럼 애뜻하게 느껴졌다. 과연 그랬다. 우리는 진정한 가족이었다. 그들은 정중동은 물론 대한민국 요식업계를 통틀어 가장 파격적인 대우를 자랑하던 계약서를 파기하는데도 흔쾌하게 동의해주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들은 토요일과 일요일을 마다하지 않고 일주일에 7일을 나와 함께 했다. 복지 패키지와 인센티브는 중단하더라도 나는 기본급만큼은 그대로 지켜주기를 원했다. 대신 아들 놈 과외를 포기했다. 그 일로 마누라와 9라운드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다. 코뼈가 으스러지고 이빨이라는 몇 개 나갔다. 심판이 있었다면 나의 판정패를 선언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부싸움이 심판 같은 것이 있을지 만무하고 돈이 없어 내보낸 과외 선생을 돈이 없이 다시 들일 재간도 없었다. 두 달이 더 지나자 은행에 가서 대출을 조금 받아야했다. 명색이 명문대 출신에, 대기업 출신에, 청요리집 사장님에, 전과도 없고, 남의 돈 떼먹은 적도 없는데, 신용등급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뭐 하긴, 신용등급은 그런 거랑 상관없다고는 하니까. 하지만 나는, 

 

천리장성이 반드시 부활하리라고 믿었다. 확신이 있었다. 말하자면 천리장성이란 놈은 어깨 부상으로 잠시 슬럼프에 빠져 방황하고 있는 왕년의 강속구 투수와도 같은 존재다. 지금은 사고도 조금 치고 이런 저런 구설수가 있어 아무도 그의 재기를 장담하지 못하지만 두고봐라. 언젠가 반드시 부활하여 옛 팬들 앞에서 멋지게 다시 공을 던질 것이다.  어쩌면 시간이 약이다. 사람들의 기억력이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다. 위생상태 불량으로 관계법령에 의해 벌금을 내고 문을 닫은 것은 치명적인 일이지만 그건 문제조차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천리장성은 다시 예전의 천리장성의 모습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아들 놈이 가출하기 전까지였다. 그 시각 나는 과감한 투자로 천리장성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몇 군데서 자금을 융통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가출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에 빠졌지만 오히려 이를 악물고 천리장성을 부활시켜야겠다는 목표의식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용팔이와 떡팔이가 다가와 나를 위로했다. 크리스티나가 다가와 포옹을 했다. 며칠 쉬시라는 그들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꾸했다. “이 사람들아. 가출 소년을 찾는 것은 경찰이 할 일이지. 내 일은 천리장성을 지키는 거고.” 자기가 아들 놈을 찾아보고 있겠다며 아이언마스크는 오토바이를 몰고 나갔다. 나는 감동했다. 이런 게 바로 가족이지. 다름 아닌 가족의 힘으로 <천리장성>은 부활할 수 있을 것이었다. 삼일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예수처럼. 그렇게 믿었다. 마누라가 집을 나가기 전까지였다. 텅 빈 주방에는 (손잡이가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된) 테팔 프라이팬이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샤넬 트위드 원피스만 가져가고 테팔 프라이팬은 내팽개치고 가버렸다. 프라이팬을 슬그머니 집어들어 맡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듯 위로 아래로 흔들어 보았다. 너무도 감촉이 좋았다.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인 듯 했다. 난 그 테팔 프라이팬을 가져다가 용팔이에게 주었다. 올해는 꼭 보건증을 받을 수 있도록 시간을 빼주겠다는 말에 녀석은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집 나간 마누라를 찾는 것이 경찰이 할 일인지 남편이 할 일인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내 일이 천리장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이 없었다. 집이 너무 허전하니 내친 김에 용팔이와 떡팔이를 들어와 살도록 했다. 곧이어 크리스티나와 아이언마스크도 합류했다. 용팔이 부부가 안방을 썼고 떡팔이와 아이언마스크는 아들방에서 생활했다. 크리스티나는 2층의 작은 손님 방에 들어왔고 나는 쇼파침대를 하나 얻어다가 거실에 두고 지냈다. 어차피 남는 공간이니 각자 집세도 아끼고 일석이조였다. 감히 선언하자면 <천리장성>의 부활을 위한 본격 합숙훈련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해가 뜨면 우리는 주방으로 달려가 주문을 받았다. 해가 지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신메뉴 개발에 매진했다. 설령 주문이 없는 날에도 우리는 내내 <천리장성>의 주방을 지켰다. 어디 청요리 기가 막히게 하는 집이 있다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가 같이 맛을 보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서는 역시 어떻게 해야 그런 맛을 낼 수 있을지 연구를 거듭했다. 이제 우리는 남이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를 가족의 인연으로 이어준 우리 모두의, 

 

천리장성. 이렇게 애를 쓰는데도 끝내 망한다면 그건 하늘의 뜻이리라. 그리고 설령 하늘의 뜻이라고 한들 가족들이 곁에 있는 한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라. 하루 짜장면 판매량이 채 열 그릇을 넘지 못했다. 요리 주문은 일주일에 한 번받으면 운이 좋은 거였다. 통계를 내어보니 그나마의 배달 주문도 대부분 신규 고객이었다. 갑자기 이사와서 가까운 중국집에, 혹은 가장 먼저 보이는 전화번호에 반응한 케이스. 영업 정지 사건 이후 단골 고객이 떨어져 나갔음을 입증하는 결과였다.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어떤 놈이 ‘먹는 장사는 그래도 재미가 좋다’라는 말을 했단 말인가. 그리하여 드디어 나도 중장기 목표 아래 고급 경영 전략에 집착하기를 포기하였다. 아주 단순한 산수의 영역으로 내려왔다. 그저 하루 하루 플러스를 늘리고 마이너스를 줄이자는 생각. 첫째로는 복잡한 메뉴 라인업을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식사는 짜장면과 짬뽕, 요리는 탕수육, 후식은 군만두. 주방 일손이 줄어든 만큼 효율 증진을 위해 불가피한 조처였으며 식재료의 재고 관리 및 주문과 조리와 배달에 소요되는 시간 전반을 크게 단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두번째로는 짜장면과 짬뽕의 가격을 과감하게 천오백원으로 내렸다 (짜장면은 <신용문객잔>과 비교하여 60% 수준의 가격, 짬뽕은 50% 수준의 가격이었다). 단 한 그릇만 시켜도 군만두 서비스를 주었다. 당연히 그만큼 원가 절감을 위해서 식재료의 질을 어느 정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안시성>을 상대하기 위해서 1인분 탕수육 소포장 판매를 추진했다. 우리는 요리를 탕수육 하나만 팔았으므로 훨씬 일이 간편했다. 군만두 역시 업계 최초로 개당 가격을 공시하고 군만두 3개 이상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배달 주문을 받아주었다. 탕수육과 군만두 모두 아침에 한가득 튀겨서 포장해 놓았다가 주문이 들어오면 전자레인지에 한 번 데워 싣고 내보내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이 역시 크게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탕수육 1인분이나 군만두 3개까지 배달을 하려면 아이언마스크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나와 크리스티나는 물론 심지어 용팔이와 떡팔이도 배달에 나서고는 했다. 이러한 거듭된 고육지책은 전체 전쟁의 판세가 아니라 소규모 국지 전투에서 작은 승리라도 거둬 <천리장성>의 숨통을 이어가고자 하는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적자의 행진은 끝이 없었다. 영업정지 직후 바닥을 치던 최악의 시기에 비해 더 싸게 만들어 더 많이 팔고 더 많이 남기는데도 긍정적인 지표가 보이지 않았다. 깊고 거룩한 늪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식사류 싸움에서 우리는 <신용문객잔>을 가격 싸움에서 압도할 수 있어야 했다. 요리류 싸움에서 우리는 대부분의 메뉴에 백기를 들었지만 탕수육 하나에 있어 <안시성>을 효율적으로 압박할 수 있어야 했다. 예상이 빗나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사채라는 낭떠러지 바로 앞까지 몰렸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 <천리장성>은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천리장성>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우리의, 

 

천리장성의 부활을 향한 믿음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떡팔이가 이상한 소문을 가져왔다. 자기가 최근에 <안시성>에서 일하다가 그만 둔 주방 보조 하나랑 술을 마셨는데, 아 글쎄 그 놈이 이상한 소리를 하더라는 것이다. 정중동 중국음식계 패권 다툼의 긴 역사 속에서 대대로 양숙이었던 <안시성> 용씨 집안과 <신용문객잔> 초씨 집안이 몇 달 전에 손을 잡고 경쟁업체 한 곳을 손봐주었는데 그 대상이 다름아닌 우리 <천리장성>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제보를 한 것도 두 집안의 사주를 받은 어떤 동네 한량이었고 구청에서 위생점검이 나와 까탈스럽게 행동하도록 기름칠을 해서 구워 삶은 것도 <안시성> 주인 용수철과 <신용문객잔> 주인 초성체라는 것이다. 겨우 주방 보조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바로 그 녀석이 구청 위생과 곽계장에게 보내는 짜장면 그릇 아래 봉투를 붙여 보낸 장본인이기 때문에 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중동의 중국음식계 13 문파의 암투 역사. 37건의 독살과 21건의 교살과 18건의 실종. 1966년 알 수 없는 이유로 온 몸에 춘장독이 올라서 비극적으로 죽어갔다는 2단지 <동사서독>의 2대주. 1973년 4단지 <절대쌍교>와 6단지 <비정정시> 사이에서 벌어진 혈투 속에서 오백개의 칼침을 맞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비정성시>의 1대주와 심각한 내상으로 주화입마에 빠져 이후 평생을 반 미이라 상태로 살았다는 <절대쌍교>의 2대주. 1974년 1단지 <와호장룡>에 괴한이 침입하여 <와호장룡>이 자랑하던 일곱 주방장의 오른쪽 손목을 순식간에 잘라내고 바람처럼 사라진 사건. 1978년 3단지 <신조협려>의 1대주의 설명할 수 없는 실종 사건. 1986년 11단지 <우견아량> 2대주의 익사 사고. 1992년 7단지 <천녀유혼>의 방화 전소 사건. 가까이는 10단지 <신용문객잔> 2대주의 포춘 쿠키 사건 (‘OO가 잦으면 O이 된다’). 이런 이야기들을 생각하면서 어쩌면 아주 없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일까요? 형님? 원한이 있어서 뛰쳐나온 놈이 하는 소리 아닙니까?" 용팔이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니까 이제서라도 이실직고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는 떡팔이의 반박이었다. 둘 다 일리가 있었다. 이윽고 내가 결단을 내렸다. "그게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우리는 각각 연장을 챙겼다. 용팔이는 고기 다지는 밑둥이 넓은 칼을 들었고 떡팔이는 면을 미는 밀대 두 개를 양 손에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쟁반 짜장용 쟁반 두 개를 양 손에 들었으며 아이언마스크는 배달용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나는 손잡이가 인체 공학적으로 설계되었다는 테팔 프라이팬을 집었다. "어디부터 갈까요?" 용팔이가 물었다. "먼저 <신용문객잔>을 깨부수고 그 담에 <안시성>으로 간다." 우리는 결연하게 문을 나서 석양을 등지고 걸어갔다. 아마 영화의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아아, 우리의, 

 

천리장성(千里長城).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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