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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화성연대기: 2020 겨울농활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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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활이 무엇인지는 니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내게 농활을 정의하라고 하면 나는 '온기의 나눔'이라고 정의하겠다. 요즘 우리 농촌이 많이 어렵다. 중국산 농산물에 자유무역협정에 조류독감에 돼지콜레라에 광우병에. 이미 농촌은 몸도 마음도 모라토리움 상태다. 백기 들고 나가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란 뜻이다. 우리 작은 할아버지도 모범적인 영농후계자로 나라에서 상도 받고 그랬는데 돌아가실 때 남은 건 빚 밖에 없었다고 한다. 숙부들은 아직까지도 경운기, 트랙터, 콤바인, 이양기 얘기만 나오면 입에 거품을 물고 경기를 일으킨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 빚 심은데 빚 나는 걸 몸으로 겪은 양반들이라 그렇다. 하물며 지금도 그 땅을 지키고 사는 분들이야 오죽하겠나. 앞서 ‘온기의 나눔’이란 얘기를 했는데 정리하자면 이런 뜻이다. 농촌은 춥다. 무척 춥다. (물론 화성이라 더 춥다. 평균 기온이 섭씨 영하 60도 정도이니까.) 젊고 건강한 우리가 가서 일손도 돕고 애들도 놀아주고, 36.5도씨의 활기를 전파하고 돌아오자 이런 얘기다. (우리가 가서 까짓거 100도 정도만 올려주고 오면 된다.) 그게 얼마나 농촌 사회에 큰 힘이 되는지 너희들은 모를 것이다. 어차피 2학년 올라가면 여기서 반쯤은 안가게 될거다. 3학년 올라가면 거의 안가게 될거다. 4학년 올라가면 아예 니들끼리도 서로 연락도 안될거다. 니들 중 나중에 화성으로 이주해서 농사지으려고 대학에서 공부하는 놈은 없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지금 아니면 평생 가볼 일도 없단 말이다. 우리에겐 일년에 며칠에 불과하지만 그 분들에게는 큰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다들 기쁜 마음으로 참석해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농촌은 춥다. 무척 춥다. 서울이랑은 다르다. 파카랑 잠바랑 단단히 껴입고 가야할 거다.

  무생대학교 커피바리스타학과 김유석(Kim, You Suck)은 후배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열변을 토했다. 그는 일행에서 유일한 18학번이다. 내년이면 4학년에 올라갈 그의 동기들은 토익책을 끼고 군대에 있거나, 토익책을 끼고 도서관에 있거나, 토익책을 끼고 휴학 중이었다. 여러모로 농활 따위를 신경쓰기에 적절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유석이 ‘2020 겨울농활: 36.5 온기를 나눠드리려 저희가 왔습니다’에 참가하게 된 것은 19학번 애송이들과 20학번 잔챙이들만 달랑 보낼 수는 없다는 의무감 때문이었다. 물론 부가적으로는 시계쥬얼리학과 20학번 유석미(You Suck Mee)라고, 요즘 마음에 두고 있는 후배 여학생과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보려는 흑심도 있었다. 

- 형, 그런데 농활을 왜 여름에 안 가고 겨울에 가요?

  축산경영학과 19학번 박유범(Park, You Bum)이 그에게 다가가 묻는다. 육류용 아이스박스의 관리 감독 및 책임을 맡은 아주 중요한 녀석이었다. 무려 삼겹살 40인분이 놈의 손에 달려있었으니 말이다.

- 짜샤, 원래 농활은 겨울에 가는 거다. 그래야 제 맛이다.

- 왜요?

- 아, 이 녀석. 답답하네. 여름에 가봐라. 더우니 한 식경마다 멱 감는다고 뛰어 댕기지, 밤엔 모기 물린다고 난리 법석을 피우지, 수박 쳐먹지 참외 쳐먹지, 그렇게 서리 해서 또 쳐먹지. 그건 일손 돕는 게 아니라 민폐 끼치는 거다.

- 아, 그렇구나. 그렇게 깊은 뜻이.

- 하지만 겨울에 가면 우리도 덥지 않고 그분들도 덥지 않다. 유난 피울 일도 없고 모기도 없고 얻어먹을 과일도 없고 결정적으로 서리할 과일도 없다. 고로 민폐 끼칠 일도 없는 것이다.

-아, 이제 이해하겠어요.

 

*

 

  하지만 화성 남반구 헬라스 플레인의 역세권 (Yeok, Se-Kwon) 이장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작년에 무생대학교 학생들이 겨울 농활을 다녀간 이후 왕소금, 가는소금, 구운소금, 천일염, 정제염, 암염, 심지어 맛소금까지 뿌려댄 장본인이니 말이다. 그가 올해 겨울 농활에 대비해 엽총을 사두었다는 얘기도 있다. 헬라스 플레인은 마지막으로 절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한지 36년이나 된 마을이다. 1세대 정착민이 자리 잡은 것이 37년 전이니 초창기에 한 번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달랑 삽자루 하나였다. 또한 맹수는 커녕 맹수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이다. 헬라스 플레인에서 사람을 다치게 한 금수라고는 산비둘기가 유일했다. 산비둘기가 사람을 공격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헬라스 플레인 주민이자 읍내에서 닭집을 하는 초대졸 (Cho, Daejeol) 씨가 산비둘기를 잡으려고 그물 손질을 하다가 손을 베인 사건이었다. ‘닭집 주인이 산비둘기를 왜 잡으려고?’라는 의문이 떠오르겠지만 여기 더 중요한 의문이 있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서 왜 엽총이 필요한가?’하는 것이다. 그 이유란 너무나도 뻔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18학번 김유석은 무생대 19학번 아가들을 전세 로켓에 실어 화성으로 이끌고 있다. (로켓 옆면에는 ‘2020 겨울농활: 36.5 온기를 나눠드리려 저희가 왔습니다’라는 플랜카드까지 붙이고 말이다.) 아마도 방금 유석이 한 말을 역세권 이장이 들었다면 "지랄하고 자빠졌다"라며 씩씩 분을 삭이지 못했을 것이다.

 

*

 

  무생대 레크레이션학과 19학번 문사철(Moon, Sa-Cheol)은 이번 겨울농활을 위해 6개월 전부터 고민해왔던 바 있다. 그는 전공을 살려서 이번 겨울농활의 레크레이션을 담당하기로 했다.

- 어떻게 농활이라고 하루 종일 일만 합니까? 그럼 '농활'이 아니라 '농일'이라고 불렀겠지요. 제가 보기에 농활은 추억입니다. 어쩌면 7할, 최소 8할은 추억입니다. 그래서 짜임새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겁니다. 첫째날 저녁은 환영의 밤입니다. 저희가 다 같은 과 친구는 아니잖아요. 술자리가 필요하겠고 자연스럽게 친해지도록 몇 가지 게임을 준비해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다짜고짜 스피드퀴즈'나 '진실게임', '왕게임', 뭐 그런 식이죠. 둘째날 저녁엔 정말 게임 토너먼트를 할 겁니다. ‘킹 오브 파이터즈’와 ‘위닝 일레븐’을 가지고 왔지요.

  그의 옆에서 무생대 리조트개발학과 19학번 최돈호(Choi, Don-Hoe)가 '플레이스테이션 7 슬림'을 흔들어보인다.

- 예이!

- 셋째날 밤이 피크입니다. 이틀동안 적당히 친해졌겠다, 시동도 걸렸겠다, 본 게임에 착수하는 거죠. 1부엔 눈썰매, 2부엔 장기자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헬라스 플레인엔 야트막한 야산이 많아서 눈이 5센티미터만 내리면 바로 온 동네가 천연 눈썰매장으로 변신한다고 하더군요. 2부 우리 무적무생 청년들의 끼와 재능을 마음껏 펼치는 장기자랑 시간입니다. 벌써 열세팀이 참가 신청을 했어요. 1등상이 스마트폰이거든요. 대통령 할아버지께서도 강조하셨듯 모름지기 스마트폰쯤은 써봐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 있는게 아니겠어요? 아마 다들 밤새워 연습했을 겁니다. 넷째날 밤에는 읍내 찜질방 가서 피로 좀 풀고 돌아와 끝내주는 캠프파이어를 할 생각입니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구워먹으면서 시즌이 시즌이니 다같이 캐롤도 부르고 '내맘대로 시상식'에 '이상형 월드컵'도 할 겁니다. 정말 좋은게 뭔지 아세요? 여기선 캠프 파이어에 돈이 하나도 안든다는거에요. 화성에는 천지에 깔린게 공짜 나무이니 만사 오케이라 이 말입니다."

  그의 옆에서 무생대 리조트개발학과 19학번 최돈호(Choi, Don-Hoe)가 손도끼를 흔들어보인다.

- 예이!

 

*

 

  같은 시각 화성 남반구 헬라스 플레인의 청년회장 복지병 (Bok Ji-Byung) 씨는 달력을 들여다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12월 20일, 21일, 22일, 23일, 24일, 25일로 예정된 무생대 학생들의 농활 때문이다. 사실 처음 무생대 학생회장인지 뭐시깽인지한테 연락을 받았을 때 그는 난감하다는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다.

- 그러니끼 쬐끔 더 일찍 오거나 쬐끔 더 늦게 오면 안되는 거여?

  그가 말한 '쬐끔' 더 일찍이란 뭐 6월에서 7월쯤. 그리고 그가 말한 '쬐끔' 더 늦게란 뭐 내년 4월에서 5월쯤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학생회장인지 뭐시깽인지는 그만큼 스케일이 크지못했다.

- 죄송해요. 저희가 12월 18일에 기말고사가 끝나서요. 레포트로 대체하는 경우에는 그 주 일요일까지 제출하는 경우도 있고요. 더 일찍은 곤란하고, 또 날짜를 더 늦게 잡으면 애들이 다 고향에 내려가버려서 어쩔 수 없어요.

- 그거 참 미치겄네. 하는 수 없지. 글면 그렇게 해. 20일에 오는 걸로 우리도 알고 있을께. 

  올해로 마흔넷이 되는, 청년 아닌 청년회장 복지병은 전화를 끊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숫제 직여라. 그날 저녁 그는 청년회 전원을 소집해놓고 울분을 토했다. 

- 아니 12월에 농활이래니 이게 말이 되는거여? 인터넷 지식 검색에 '겨울에 농촌에선 뭘한담유?'라고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아, 진짜 이럴 수는 없는거여. 내가 비록 검색해보진 않았지만 이렇게 나올게 확실한지라.

  겨울에는…… 내년 농사 준비를 합니다.

  그러자 헬라스 플레인의 부청년회장 강건신 (Gang, Gun Sin) 씨가 맞장구를 친다.

- 그러니 쟈들이 무신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단 말 아니유. 여름에 온다고 또 각별히 도움이 되는 건 또 아니지먼 그려도 짜장 아무 할 일 없는 겨울에 굳이 와서 뭘 해먹겠다고 저 난리 부르슨지 모르겠단 말이유. 우리도 내년 준비는 해야겠는디 올해도 적자였으니 마음은 깝깝하지, 다른 동네는 비닐하우스에서 꽃도 과일도 키워 판다는데 우리는 그럴 여건도 안되지, 그냥 대책 없이 쉬자니 허무하기 시간만 흘러가지, 사실 우리도 앞으로 뭘 해야할지 모르겠슈. 우리도 뭘 해야할지 모르겄는데 쟈들이 ‘인제 뭐한데유?'라고 자꾸 물어싸니께 돌아버리겠단 말이유.

- 정말 궁금한건디. 쟈들은 그걸 알고 오는거유? 모르고 오는거유?

- 함 직접 물어볼거여?

- 관둬유. 도시 애들이 월매나 영악한데유. 괜히 건디렸단 본전도 못찾쥬.

 

*

 

  같은 시각. 18학번 농활대장 김유석은 배낭에서 커피 메이커를 꺼냈다. 로켓이 헬라스 플레인에 도착하기 전에 후배 여학생들의 환심을 사보겠다는 전략이었다. 19학번 여학생은 모두 아홉명. 물론 그는 20학번 유석미에게 관심이 있지만 모름지기 밑밥을 넓게 뿌려 손해 볼 일이란 없는 법이었다. 유석은 20학번 후배 중 하나에게 지시하여 모든 숙녀분들의 오더를 받아오도록 시켰다. 하지만 막상 돌아온 똘마니가 내민 쪽지를 보고 나자 입맛이 싹 가셨다. 

까페 라떼: 우유 빼고

에스프레소: 물 많이

헤이즐넛 카라멜 모카

타조차이 티 라떼

아이스 아메리카노: 우유 조금

민트 초코 할리치노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빼고

다크 모카 프라푸치노

파스쿠찌 카라멜 마끼아또

  이런 양심 빠진 지지배들! 흔들리는 로켓 안에서 7만 6천원짜리 커피 메이커 하나로 저걸 다 어떻게 만들어 바치라는 거야! (게다가 ‘파스쿠찌 카라멜 마끼아또’는 뉘 집 따님이냐?)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험한 말을 양 손으로 틀어막으며 대공은 애꿎은 20학번 후배의 하복부에 화풀이용 펀치를 날렸다.

 

*

 

  같은 시각. 헬라스 플레인 역세권 이장의 동생 역세일 부이장은 무생대 농활 학생들이 도착하면 도대체 뭘 시켜야할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중이었다. 말 그대로 지금 시점의 헬라스 플레인에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마을은 겨울에 더 바쁘다고도 하던데 유감스럽게도 헬라스 플레인는 그런 마을이 아니었다. 정말로 겨울에는 별 일이 없었다. 옛날 같으면 장정 놈들 시켜다가 며칠 장작이나 실컷 패게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었을텐데 요즘 누가 아궁이를 때겠는가. 이미 애저녁에 다 바꾸었는데. 헬라스 플레인에서도 이미 모든 집이 위로 아래로 두 번 탄다는 그 유명한 ‘찌르레기 보일러’를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도시에서 자란 애들을 데리고 농기구를 손질하고 정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서라. 괜한 사단만 일으키고 말지. 작년에도 그랬다. 비료 푸대나 몇 개 나르게 하고 마을 청소나 시켰다. 있는 일손도 빠져나가는 농촌에서는 그나마도 물론 고마운 일이지만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한 일이었다.

  이제 겨우 12월 중순. 앞으로도 두 달은 땅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할 것이었다. 사람이 그렇듯 땅도 푹 쉬게 내버려 두는 것이 상책이다. 무엇보다 역세일 부이장 그 스스로가 유난 법석을 떨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돈도 안되는 농사 한 철 땀흘려 열심히 지었으니, 인간적으로 크리스마스에 신정, 구정까지는 쉬엄쉬엄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의욕으로 차고 넘칠 애들의 성화가 그에겐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애들이 콘도나 스키장에 갔으면 좋을텐데. 돈만 많다면 자기 돈을 줘서라도 그런 데로 보내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다. 

 

*

 

  커피로 환심을 사려던 작전이 실패하자 08학번 김유석은 세치 혀로 후배들 마음을 녹여보고자 한다. 마이크를 잡고 어설프게 서서 꼴에 또 선배라고 목에 힘을 준다.

- 니들 다 농활 첨이지?

후배들이 합창하듯 대답한다.

- 네, 처음이에요.

- 그래, 많이 낯설고 힘들거다. 혹시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 있어?

  후배들은 서로를 둘러본다. 서로 묻는다.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상경한 아이들이라도 대부분의 고향이 도시다. 사실 농활에 대해 많이 아는 척하는 김유석도 일산 토박이다.

- 한 명도 없어?

  후배들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 뭐야 시골 애들은 농활 안간다는 거야? 미리 다 배우고 와서 그런 거야? 

  후배들은 묵묵부답이다.

- 여기 우리 중에 아니라도 학과 애들 중에 농촌에서 자란 애 없어? 혹시 아는 사람?

  맨 뒷 자리의 머리 덥수룩한 남학생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말한다.

- 20학번 중에 유소민(You, So Mean)이 농어촌 자녀 특별전형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갈까 저어한 그는 다같이 노래 배우는 시간을 갖기로 한다. 테이프를 기사 아저씨에게 건넨다.

- 농활을 가서는 이런 노래를 불러야 한다. 너희들도 잘 듣고 배우길 바란다. 무려 35년째 우리 무적 무생대 농활단에게 전수되어 내려온 민중 가요로 73학번 대선배님께서 직접 만드신 우리만의 농활가다.

♬ 우리 밥상 맛난 음식 누가 만들까/ 누가 만들까

그건 바로 다름 아닌 농부 아저씨/ 농부 아저씨

(후렴)

싸우리라/나의 피가 씨앗이 되어/ 

싸우리라/너의 피가 씨앗이 되어/ 

싸우리라/우리 피가 씨앗이 되어 

  아기자기한 동요처럼 시작하다 정신줄 놓고 폭주하는 후렴구에 공기가 싸해진다. 물론 70년대 학번에는 저게 정상적인 농활가였을 수도 있기는 한데…. 뭔가 말을 해보려다 머쓱해진 08학번 김유석은 조용히 입에 지퍼를 채우고 자리에 앉는다. 19학번과 20학번 후배들은 다시금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엄지를 놀리기 시작한다.

 

*

 

  같은 시각, 역세권 이장은 버려둔 밭에 똥거름을 뿌리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얇게 펴바르고 있다. 이유인즉 바로 이 밭에서 무생대 농활 학생들이 캠프 파이어를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3년 전부터 놀리기 시작했던 이 밭에서 작년에도 농활 학생들은 캠프 파이어를 했다. 이변이 없는 한 올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잘 펴발라 섞어둔 거름은 밤 사이 단단하게 얼고 굳어 흙과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이틀이 지난 모레쯤에는 악취도 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들은 여기서 엉덩이를 비비적 거리고 놀 것이다. 캠프파이어를 하면 거름도 함께 타오를 것이다. 똥거름 타는 냄새도 모르고 좋다고 놀 것이다. 생각하니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

 

  헬라스 플레인에 드디어 로켓이 도착했다. 꼬박 62시간이 걸린 비행이다. 그들을 환영하려 마을 주민 서른두명이 나와 플랜카드를 흔든다. <환영! 무생대학교 2009 겨울농활팀> 한편 산들바람이 화성의 푸른모래와 민들레 홀씨를 실어 나른다. 휘파람처럼 달콤한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정겹다. 로켓의 등장에 깜짝 놀란 방아깨비가 홀짝 뛰어 달음질을 친다. 이윽고 로켓에서 내린 무생대 학생들이 손을 흔든다. 로켓 측면에서 플랜 카드를 떼어 흔든다. <36.5 온기를 나눠드리려 저희가 왔습니다> 겨울농활 일행의 유일한 18학번인 무생대 커피바리스타학과 농활대장 김유석이 대표로 나서 역세권 이장과 손을 잡고 흔든다.

- 잘들 오셨어. 학생분들.

-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가 고맙지. 아, 말 그대로 농한기(農閑期)인데 월매나 큰 도움이 되겄어.

-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 됐어. 일 없어. 자 얼른 들어가기나 해. 뒤지게 추춰서 요샌 밖에 나다니기도 힘든데 뭐 하러 여까지 왔어?

- 날이 추우면 추운대로 안에서라도 뭐든 돕겠습니다.

- 아, 농한기라서 우리 노인네들이 지쳐서 하릴없이 쉬고 있는데 자네들이라도 의지가 넘치니 짱하게 고맙네.

  겨울농활단은 마을회관 숙소로 안내받고 환영을 위해 모여들었던 농촌 주민들은 삼삼오오 흩어진다. 

 

(2007년 01월)

# Inspired By Ray Bradb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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