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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8. 패닉룸 대소동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7.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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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로스는 칼을 잘 다뤘다. 식칼, 과도에서부터 철도, 굴도, 예도, 협도, 패도, 야도, 구겸도, 언월도, 기형도, 은장도, 노말 소드, 쇼트 소드, 롱 소드, 브로드 소드, 바스타드 소드, 발키리 소드, 소드 브레이커, 그라디우스, 스파다, 시미터, 세이버, 에스터크, 레이피어, 팔치온, 프람베르그, 클레이모어, 커플러스, 카타르, 코페시, 스크래머색스, 망고슈, 에페, 플뢰레, 사브르, 대방도, 소방도, 회칼, 채칼, 우스바, 데바, 커터칼, 조각칼. 맥가이버칼까지.

  카를로스가 우리 집에 쳐들어 온 까닭은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서다. 빌려준 돈이란 다시 받으려고 빌려준 것이지 받지 않으려고 그냥 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듯 일면 수긍이 가는 면이 없지 않으나, 그래도 친구네 집에 회칼을 들고 난입하는 것은 해도 너무한 일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멕시코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웬 회칼인지 모르겠다.) 하고 많은 칼을 다룰 줄 알면서 하필 회칼이라니.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그냥 발라버리겠단 압박이 아닌가.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만큼 치사한 놈이다. 아니 샤일록보다 더한 새끼다. 돈이 있었으면 갚았을 것이다. 진짜다. 당연히 갚아도 진작에 갚았을 것이다. 없어서 못 갚은 돈을 채무자를 발라낸다고 받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정도 논리력도 없는 걸까? 하긴 그럴런지도 모른다. 카를로스는 내가 아는 치카노 중에 가장 머리가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집 안에 '패닉 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천만에 다행한 일이었다. 카를로스가 졸개들을 데리고 찾아와 현관을 얼쩡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번개보다 빠른 동작으로 비상박스의 유리를 깨고 손도끼를 꺼냈다. (그렇게 머리가 빨리 돌아간 걸 보면 언제고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손도끼로 다시 또다른 비상박스를 깨고 열쇠를 꺼냈다. 다름 아닌 패닉 룸의 문을 여는 열쇠다. 서재의 책장과 책장 사이에 숨겨진 구멍에 열쇠를 끼우고 힘차게 돌렸다. 드르르릉, 드르르릉, 드르르릉 소리와 함께 책장과 책장 사이가 극적으로 열리며 패닉 룸이 그 안전찬란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닫기’라고 새겨진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비상’이라고 적혀진 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이제 이 곳, 패닉 룸의 문은 내가 따로 메인 컴퓨터에 암호를 입력할 때까진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열리지 않을 것이다. (조금 과장하여 표현하자면) 모든 산맥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려도 이 곳만은 범하지 못할 것이다. 안에서도 못 여는 문을 밖에서 열 수 있을리 만무하다. 카를로스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할지라도 무려 15 센티미터의 철갑판 뒤에 숨을 나를 어찌할 도리는 없다. 날고 기고 불까지 뿜어봐라. 별 수가 있나. 그만큼 패닉 룸은 강력하고 안전하고 당력 안전한 장치다. 아는 분들은 다 아시리라 믿는다. 그렇다. 좀 짱이다. 

  한숨을 돌린 나는 패닉 룸 안에 마련된 모니터를 통해 카를로스와 그 졸개들이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는 내 서재에 들어와 길길이 날뛰었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발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하고 죄없는 졸개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더러 주둥이를 꿍얼거리는 것으로 보아 쏟아지는 욕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을성 싶은데 안타깝게도 폐쇄회로 카메라는 영상만 잡아줄 뿐 음성까지 전달해주지는 못했다. 아무튼 그런 카를로스의 찌질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춤을 추듯 사뿐 사뿐 걸어가 와인 냉장고에서 ‘케를랑 제브리 샹베르땡’을 한 병 꺼냈다. 드라이한 레드 와인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런지도 모르겠다. 2백불짜리 와인을 마시는 놈이 왜 돈은 못 갚느냐고. 그런 혹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딱 한 가지다. 

  “여보게, 갚을 돈이 있으면 내가 왜 술을 마시겠나.”

 

*

 

  쇼파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 앉았다. 카를로스와 그의 치카노 졸개들이 펴는 난장의 파노라마가 여섯개의 모니터 화면을 통해 한 눈에 들어왔다. 사뭇 연극적인 광경이었다. 패닉룸 덕분에 마음이 편안했다. (이놈들아, 백날을 쑤시고 들추고 조져봐라. 뭐가 나오긴 하나.) 와인을 마셔서 그런지 문득 안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역시 이게 조선놈의 한계다. 뭔짓을 하던 조용히 술만 마시는 것은 심심하다. 왁자지껄 어울려 마시지 못할 바에야 안주발이라도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심지어 와인을 마시면서도 말이다. 패닉룸 안의 팬트리를 열고 리츠 크래커를 한 상자 꺼냈다. 패닉룸 내의 냉장고에서는 참치 통조림과 그린 자이언트 캔옥수수, 그리고 코스트코에서 구입한 잭 링크스 육포를 한 봉지 꺼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이처럼 치밀한 준비를 해두었던 것은 아니다. 비상시가 아닌 경우에도 종종 안락한 이 곳에 홀로 틀어박히다보니 자연스럽게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이다. 과연 나에게 이 패닉 룸은 물리적 은신처 이상의 놀이 공간이었다. 처음에는 이걸 짓느라 들어간 적지 않은 돈 때문에 (20만불이 넘는 청구서가 날아왔다) 함부로 들락거리기 쑥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한두번 들어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느새 패닉룸 안에 틀어박히는 감각이 만족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려니 와인 냉장고가 필요해졌고, 와인 냉장고에는 마른 안주나 과일 안주나 다른 안주나 알콜 음료나 무알콜 음료나 탄산 음료나 기타 등등을 잡다한 넣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일반 냉장고가 필요해졌다. 내침김에 아예 한 구석을 바처럼 꾸미게 되었고 (여유가 있었다면 전담 바텐더를 고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보니 간이 당구대와 쥬크 박스, 사랑점 기계에 핀볼 기계까지 설치하여 맨케이브를 완성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현대인의 필수품 텔레비젼을 장만했다. 거실에 있는 32인치보다 훨씬 큰 50인치 벽걸이형이다. 좋은 텔레비젼이 여기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몸의 관성도 거실보다는 여기로 향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래서 끝내 쇼파가 필요해졌다. 마침내 쇼파까지 장엄하게 자리를 잡고 나자 나는 거실이 거실인지 패닉 룸이 거실인지 혼란스러움을 느낄 지경이 되었다. 

  카를로스와는 업무 관계상 만났다. 나는 이 나라에 썩어나는 외제(물론 여기 사람들에게는 국산) 크래커을 대량 매입하여 고국의 남대문시장에 반입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고 카를로스는 이 바닥 크래커 시장을 지배하는 중간 보스였다. 어떤 경로로 획득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 동네에 한해서만큼은 누구도 카를로스를 거치지 않고 대량으로 크래커을 사고 팔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조직의 상부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내막까지 알 수야 없었다. 카를로스를 찾아다니며 오물거린 오레오만 오십상자는 될 것이다. 두번인가 총도 맞을 뻔했고 진짜 한번은 칼에 스쳤다. 불에 데인 적은 세 번이고 길에서 폭력배들에게 두들겨 맞은 것은 일일이 셀 수도 없었다. 카를로스가 순진한 도매상은 아님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카를로스를 만났을 때, 나는 그를 조선식으로 접대하려고 애썼다. 고향에서 장사하며 공무원이나 사장님들에게 베풀던 그 나쁜 버릇 그대로 말이다. 동포가 운영하는 단란한 주점에 단란한 방을 잡고 단란하게 생긴 아가씨들을 불렀다. 동동주와 소주와 맥주와 양주를 모두 모아놓고 평생 단련해 왔던 접대 기술을 발휘하여 온갖 종류의 폭탄주를 만들어 권했다. 나에겐 일상적이고 당연한 이 모든 과정들이 카를로스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던지, 그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물량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적어도 이 동네 안에서는 다른 코리언이 나와 같은 이유로 크래커을 떼어가지 못하도록 단속하겠다고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사업적 관계를 맺었고 몇 번을 만나 같이 술잔을 기울이다가 보니 속내를 털어놓는 친구까지 되었다. 서로 부끄러울 것도 없는 사이였다. 카를로스는 아무래도 땅을 잘못 잡아 태어났는지 화끈한 조선식 음주문화에 놀랍도록 잘 적응했고 무한한 동경까지 보였다. 원자폭탄주, 수소폭탄주, 중성자탄주, 충성주, 회오리주, 샤워주, 골프주, 타이타닉주, 뿅가리주, 쌍끌이주, 드라큘라주, 칙칙폭폭주, 물레방아주, 수류탄주, 소주폭탄주, 동동폭탄주, 병아리주, 소콜달이주, 용가리주, 난지도주, 삼풍주, 다이아몬드주, 황제주, 금테주, 빨대주, 내곁에있어주 등의 해괴하고도 너저분한 폭탄주 제법을 배워가는 재미에 빠져 카를로스는 제 본분인 크래커 시장 관리 마저 등한시할 정도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나와 폭탄주 혼합 비율을 토론하고, 시음하고, 헤롱대고, 시름하고, 다시 헤롱대고, 이윽고 토해내고, 다시 시음하고, 맛이 가고, 필름 끊기고, 다음 날 동이 틀 무렵엔 술과 구토물에 범벅이 되어 세멘 바닥에서 일어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이미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 중의 친구였다. 

  카를로스와의 공고한 우정은 내게 평생 과자 장사를 하면서도 만져보지 못한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예금 잔고가 불어났고 은행에서 깍듯한 대접을 받게 되었으며 교외에 아담한 집도 가지게 되었다. 이 패닉 룸을 지은 것은 그로부터 몇 달 후의 일이다. 좀도둑이 들어 '올해의 성공한 아시안계 남성' 트로피와 함께 페퍼리지팜스의 ‘골드피시' 신제품을 700상자나 훔쳐간 이후,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았다. 첫째, 성공할 수록 연연할 것도 많아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 둘째, 많이 가질 수록 더 안전한 고국과는 달리 여기는 많이 가질 수록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사실. 그즈음 바로 몇 블럭 떨어진 다운타운에서 장난감 도매 시장에 겁없이 손을 대었던 일본인이 ‘뒤지니'라는 갱단에게 살해당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비로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죽으면 이 모든 부귀와 영화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그 다음 날로 나는 업자들을 불러다가 집 안에 패닉 룸을 마련했다. 유사시 목숨도 보전하고 재산도 지키고자 하는 의미에서였다. (견적은 18만불이었는데 최종 청구 금액은 결국 20만불이 넘었다.) 물론 그때까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술친구 카를로스 때문에 거기에 숨어야 하는 일이 생길 줄은. 

 

*

 

  까무룩 잠이 들었다. 와인을 연거푸 몇 병 마신 덕분에 취기도 올랐고 카를로스와 졸개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던 탓에 피로까지도 밀려왔기 때문이다. 다시 일어나기가 무섭게 시계부터 찾았다. 밤 10시 30분이었다. 이쯤 되었으면 카를로스도 포기하고 돌아갔겠지. 톰 브라운 뿔테 안경을 찾아 쓰고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저런! 젠장할! 빌어먹을! 

카를로스는 아직도 서재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졸개들과 함께. 

  짜식이 오늘 단단하게 마음을 먹었구나. 내가 돌아올 때까진 포기하지 않을 작정인가보다. 입맛을 쩝쩝 다시는데 문득 잠에서 깰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기억났다. 요의. 아참, 소변이 보고 싶었지. 이게 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렇다. 와인을 마시니 목이 타고, 목이 타니 에비앙 생수를 따서 들이킬 수 밖에 없었고, 타는 목마름이 가라앉으면 안주를 집어 먹고, 안주를 먹고나니 와인이 다시 땡기고, 그런 식으로 반복하다보니 수분을 지나치게 섭취하고 말았던 것이 화근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폭발적인 요의.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방광이 가득 찬 느낌'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제대로 걸음을 걷기조차 어려웠으니 하는 얘기다.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어쨌든 화장실까진 가야했다. 힘겹게 몇 걸음을 옮겼다. 아랫배가 아팠다. 가자, 가자, 화장실로 가자. 가자, 가자, 그런데, 

어디로? 패닉 룸은 더없이 명료한 공간이다. 비록 냉장고, 간이 냉장고, 간이 당구대, 쥬크 박스, 사랑점 기계, 핀볼 기계, 쇼파, 50인치 벽걸이형 텔레비젼을 치우면 더도 덜도 없는 정사면체다. 이 안엔 냉장고, 간이 냉장고, 간이 당구대, 쥬크 박스, 사랑점 기계, 핀볼 기계, 쇼파, 50인치 벽걸이형 텔레비젼이 있지만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그 곳이 없었다. 화장실. (화장실? 화장실이 없다고? 어떤 미친 놈이 설계를 했길래 패닉 룸을 만들면서 화장실도 생각을 하지 않은 거지? 그럼 유사시에는 아쉬운대로 맥주캔, 와인병, 콜라페트에다 해결하라는 얘긴가? 나는 또 이제까지 몇 년을 들락거리면서 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거지?) 아무튼 여기서 살아나가면 시공한 그 새끼부터 찾아서 고소를 해야겠다. 그러는 사이에도 쉬지 않고 배가 땡겼다. 마치 악랄한 뭔가가 몸 속에 숨어 들어와 안쪽에서부터 뱃가죽을 쥐어 짜는 것 같았다. 와아! 생리현상이라는 것이 이렇게나 강력한 것인지 상상을 못했다. 후들거리던 다리가 나도 모르게 안쪽으로 꼬이고 온 몸을 배배 꼬게 되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쉬운대로 맥주캔, 와인병, 콜라페트 중에서 골라야 했다. 밸트를 풀고 바지와 속옷을 내리며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에 나 홀로 있으면서 누가 볼까 두려워하다니. 별 꼴도 반쪽이다. 소변은 나이아가라 폭포 뺨치도록 웅장하게 쏟아져 콜라페트를 거의 반 이상 채웠다. 그만한 양을 뱃속에 넣고 있었다니 내 스스로 생각해도 용한 일이었다.

  첫번째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나는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폐쇄회로 카메라 속에서 카를로스와 졸개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을 보면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문제는 체증만 내려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두 번째 위기는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화장실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정말 화장실이 필요했다. 요의는 잠시 부끄러움을 참으면 되었다. (혼자인데 뭐 어때?) 하지만 변의는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아쉬운대로 맥주캔, 와인병, 콜라페트에다 해결할 수가 없었다. 이 안엔 냉장고, 간이 냉장고, 간이 당구대, 쥬크 박스, 사랑점 기계, 핀볼 기계, 쇼파, 50인치 벽걸이형 텔레비젼이 있지만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그 곳이 없었다. 아랫배부터 엉덩이까지 퍼시픽 서프라이너가 최고 속력으로 지나가는 것 같았다. 식은땀이 바짝바짝 흘렀다. 당구대 틀를 잡고 양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고 섰다. 더이상 어렵겠다고 생각한 순간 천정이 핑글 돌았다. 어딘가에 기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반쯤 쓰러졌다. 간이 당구대 위다. 십오개의 적구와 한개의 수구가 그림처럼 흩어지며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따그닥, 서로에게 물리력을 전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곳에 긴장을 풀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대한민국 육군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사나이 중의 사나이답다. 스스로 생각해도 정신력 하난 상당하지 않은가 싶다. 까딱 방심하여 힘을 뺐으면 초대형 홍수 플러스 산사태가 터질 뻔 했는데.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곳 패닉 룸의 바닥엔 최고급 아라비아에서 공수해 온 캐쉬미어 양탄자가 깔려있다. 워낙 올이 섬세하고 예민해 드라이 크리닝도 안되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런지도 모르겠다. 2만불짜리 양탄자를 구두로 밟고 다니는 놈이 왜 돈은 못 갚느냐고. 그런 혹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딱 한 가지다. 

  "여보게, 갚을 돈이 있으면 내가 왜 여기서 2번을 참고 있겠나." 

  돈이 없어 생리 현상을 참아야 하는 슬픔과 고통에 허덕이며 모니터 속에 맺혀지는 카를로스의 상을 바라보았다. 자기 졸개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꼴을 보니 역시 포악하고 잔인무도하게 보인다. ’그래도 한땐 친구였는데 오줌 쌀 동안만 타임을 하자면 안될까?' 아마 안될 것이다. 카를로스는 칼을 잘 다뤘다. 식칼, 과도에서부터 철도, 굴도, 예도, 협도, 패도, 야도, 구겸도, 언월도, 기형도, 은장도, 노말 소드, 쇼트 소드, 롱 소드, 브로드 소드, 바스타드 소드, 발키리 소드, 소드 브레이커, 그라디우스, 스파다, 시미터, 세이버, 에스터크, 레이피어, 팔치온, 프람베르그, 클레이모어, 커플러스, 카타르, 코페시, 스크래머색스, 망고슈, 에페, 플뢰레, 사브르, 대방도, 소방도, 회칼, 채칼, 우스바, 데바, 커터칼, 조각칼. 맥가이버칼까지 형태와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런 무시무시한 놈이다. 게다가 단돈 20만불에 친구도 회칼로 발라버리겠다는 놈이 뭔 짓을 못하겠나. 아마 '거길' 잘라 버릴런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서야 곤란할 것이다. 문득 왜 돈을 들여서 패닉 룸 따위를 만들었나 싶다. 안전한 것이 아니라 숫제 갇혀버린 셈이 아닌가. 기본적인 화장실도 없는 이 거지같은 것을 만드느라 20만불이 넘게 쓰다니. 혹자는 이렇게 물을런지도 모르겠다. 집 안에 패닉 룸까지 만들어 일신과 재산을 지키고자 하는 놈이 왜 돈은 못 갚느냐고. 그런 혹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딱 한 가지다. 

  "여보게, 그 돈을 빌려 만든 것이 바로 이 패닉 룸이라네."

 

(2007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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