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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 프린세스 메이커

낙농콩단/Season 6-10 (2006-2010)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06.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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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아가 전교에서 일등을 했다고 난리다. 전학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덜컥 말이다. 대단하고 대단한 우리 딸은 옛날 옛적 입학식때부터 있었던 (그러니까 진작에 이 학교에 적응을 마쳤을) 애들 코를 불과 한 달 만에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다. 도대체 누굴 닮았기에 머리가 그리 좋은 건지 모르겠으나, 이쯤 되면 위험을 무릅쓰고 이사온 보람이 있다 하겠다.- 일등한 기념으로 뭐 사줄까?- 엠피쓰리요. 엠피쓰리!   이런, 괜한 말을 꺼냈다. 항상 그렇지만 입이 방정이다.- 무슨 초등학생이 엠피쓰리는 엠피쓰리야. 그건 졸업하면 사줄께. 그거 말고 다른 건?   그랬더니 또 입이 삐쭉나온다. - 치. 무슨 소리야. 우리 반 애들 다 엠피쓰리 하나씩은 기본으로 가지고 있는데.  그리고 기어이 한 마디 덧붙인다. - 아빤 도대체가 뭘 모른다니까.


*


  라성지구로 이사한 것은 지난 7월의 일이다. 아내가 갑작스럽게 발령이 나는 바람에 하루 아침에 정해진 일이었다.  두달만에 이사갈 아파트를 알아보고 열흘만에 짐을 꾸렸다. 거의 기네스북에 올라가도 좋을 속도였다. 아내는 직장 일의 인수인계에 정신이 팔려 정작 우리 집 이사는 정작 전업주부인 나의 몫이었다. 정신이 홀랑 빠질 지경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라성지구의 교육환경이 그렇게 좋다는 말에 내심 기대도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모름지기 대한민국의 평범하고 평균적인 가정에 있어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면 바로 자식에게 가장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일 것이 아니겠는가.


  라성지구는 서울 서북쪽에 위치한 국제복합단지로 당초부터 교육 특구로 계획되고 공사되어 완성된 곳이다. 불과 50만평 안에 아홉개의 특목고와 일곱개의 국제중이 있을 뿐더러 국내외 명문대 캠퍼스까지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 S대의 일부 학과도 서울을 떠나 이 곳에 새로 만들어진 캠퍼스로 옮겼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그런데 S대가 서울을 떠나도 S대인가? 서울을 떠난 S대 학과도 S대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인가? 등 여러가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차마 아내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S대 시간강사인 아내는 이번의 학과 이전으로 신경이 가득 곤두선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내는 내가 그 바닥, 그러니까 학계의 오묘한 정치적인 기작에 대하여 뭔가를 물어보면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보아하니 학과가 라성 캠퍼스로 옮겨가는 것에 대하여 썩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내의 보스 또한 그걸 달가워할리가 없으니 결국 그 스트레스가 아랫사람인 아내에게 쏟아졌고 다시 집에서 안살림을 하는 내게 덩달아 불똥이 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아파트 전세를 알아보느라, 기존 전셋집에서 원만하게 방을 뺄 방도를 알아보느라, 그리고 새로운 도시에서 민아가 다닐 학교를 알아보느라 정말 정신없는 몇 주를 보냈다. 이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 쇼파에 드러누웠을 적에는 12라운드 복싱을 풀-타임으로 뛰고 난 것처럼 온 몸에 힘이 다 빠졌다. 물론 이사 다음 날부터 바로 출근해야 하는 아내의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즈음하여 아내께서는 전에 없이 신경질적으로 돌변했는데 강산이 1.2번 바뀔 동안 같이 살아본 경험에 의하면 이럴 땐 섣불리 건드리지 않고 제 풀에 기분이 풀어질 때까지 기다리는게 상책이었다. 당분간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행동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귀찮아도 매일 새로운 반찬거릴 마련하고자 장을 보러 나갔고 저녁 식탁에는 꼭 신경을 써서 국물있는 음식을 차렸다. 특히 좋아하는 것이 북어국이지만 그러면서도 매일 북어국을 내놓는 센스없는 남편이 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시간강사의 숙명인지 신경성 위염으로 고생하는 그녀는 얼큰한 국물 없이는 밥을 먹지 못했다. 의사는 맵고 짠 국이며 찌개류야 말로 가장 조심해야할 음식이라고 했지만 밥에 국에 최소 삼찬을 한 상 가득 차려놓고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전형적 한국인인 그녀에게 그런 경고는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을 거다. 


  시간강사라는 독특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나에겐 무리한 일이다. 어째서 그 고생을 하여 공부를 해놓고선 여전히 그 고생을 하고 있는 걸까? 요컨대 그건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법칙'에 부합하지 않는다. 모름지기 고생이란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잠시 꾹 참고 감당하는 것이지 고생하여 오늘을 살고 내일도 해야하는 고생이라면 그건 그냥 삽질이다. 누가 뭐래도 고생 끝에는 행복이어야지 고생 끝에 또 다시 고생이어서야 안되는 것이다. 헌데 유감스럽게도 (전국의 시간강사들이여! 대단히 죄송하다) 시간강사 인생이 그렇지 싶다. 초고학력 비정규직. 처절한 보따리 학문장수. 간신히 월 이백만원 벌어 4대 보험 떼고, 국민 연금 내고, 왕복 차비까지 빼면 대학원생 때와 크게 다름없는 간당간당한 인생. 결국은 학교 팔아서 생계형 과외라도 해야 하는 것까지 똑같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 집안의 생계를 위해 밤마다 인근 중고생들의 논술 과외를 다닌다. '전임'이라는 표현은 사실 다소의 과장이 첨하여진 것이지만 과외비를 지불하는 중고생 학부모들의 관심은 '전임'이 아닌 '현직'에 가서 찍히는 법이다. 그녀는 과외로만 대학에서 주는 강의료의 두 배 이상을 번다. 우리 세 식구가 멀쩡히 집세를 내고 하루 세 끼를 먹고 가끔은 남들처럼 외식도 할 수 있는 비결이란 결국 그녀의 과외 수당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강사짓 집어 치우고 차라리 전업 과외선생으로 나서는 게 낫지 않겠어?" 라는 말이 슬금슬금 기어올라와 목구멍을 간지럽히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일정한 수입도 없이 집에서 애나 보는 '하우스 남편' 주제에 감히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마 난 뼈도 못 추릴거다. 


*


  물론 내가 애를 본다고 표현하기에는 좀 멋적은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우리 딸 민아는 이미 내 보호 반경을 벗어난지 이미 오래다. 이번 일등만 해도 그렇다. 자기가 알아서 잘해서 일등했지 난들 뭘 하기나 했나. 뭘 알기나 했나. 도대체가 뭘 모르는 아빠일 뿐인 것을. 


  그저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우리 가정이 텔레비젼 아침 드라마에 나오는 집안처럼 콩가루가 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는 것 뿐이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마치 국정원 사람들처럼. 그리하여 나는 아침마다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민아 엄마의 위를 달래고 빵을 굽고 콘프레이크에 우유를 부어가며 사춘기 딸내미의 투정을 달래고, 한바탕 전쟁이 지나간 다음의 초라한 식탁에 남은 식은 음식을 대충 집어 먹으며 불륜 받고 불륜을 하나 더 얹은 방송 3사의 아침 드라마를 차례로 챙겨보고, 마트에서 장을 보며 민아 모녀가 좋아하는 반찬을 사고, 섬유 유연제 양에 각별히 신경을 써가며 우아하게 드럼 세탁기를 돌리고, 한경희 스팀 청소기로 거실을 청소하고, 화요일마다 종이와 플라스틱, 그리고 캔과 병을 일일이 분리수거하여 내다 놓고, 웃는 낯에는 절대 침 못 뱉는다고 그때마다 경비 아저씨들 비위 맞춰주며 적당히 농담도 받아주고, 뭐 대충 그런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시간이 많지만 그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적도 많다. 한창 정력적으로 나가서 일할 땐 하루라도 더 쉬고 싶어서 있는 변명에 없는 변명까지 붙여 총동원했는데 막상 매일 집에 있다보니 그 조차도 쉽지가 않다. 쓸쓸한 식탁에서 점심을 대충 때우고 오후 세 시쯤 되면 고독은 산등성이를 훌쩍 넘어 끝내 정상에 깃발을 똦는다. 말도 못 할 거대한 지루함이다. 아! 이래서 가정주부들이 우울증에 걸리는구나. 활기를 되찾고자 신청도 않은 케이블 텔레비젼을 훔쳐보지만 대부분이 재방송 우려먹기 퍼레이드로 역시나 딱히 관심을 끌만한 것은 없다. 그나마 번쩍 눈이 뜨일만한 ‘로맨틱 아일랜드’니 ‘라이언의 은밀한 부분 구하기 (Saving Ryan's Privates)’니 ‘뜨거운 양철모시기 위의 고양이들’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심야에 방송된다. 제길, 대낮에 해주면 좋으련만. 정작 밤 중에는 곤란하다. 우연히라도 그런 걸 보려고 하면 마누라님의 지엄한 꾸중이 쏟아지기 마련이니까. 게다가 그닥 넓지도 않은 우리 집에는 한창 정서적으로 예민한 사춘기 여자애도 무럭무럭 크고 있지 않은가. 돈도 안 내고 케이블 TV 도둑 시청하는 것도 교육상 좋지 않은데 그렇게 보는 프로그램이 그런 류의 거라면 정말이지 '자격과 개념을 동반 상실한 아빠' 소리를 듣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하릴없이 텔레비젼 홈쇼핑으로 만족한다. 무료함에 젖어있는 눅눅한 생활 속에서도 그나마 ‘마감이 임박했습니다’ 따위의 긴박한 메세지를 보면 비로소 세상이 이렇게 고요하지만은 않구나 하는 감각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른다. 집안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흔히 가장들은 밖에서 받는 스트레스, 뭐 그런 얘기를 하곤 하지만 개에 견줄 지독한 상사만 없을 뿐, 집안이라고 그만한 스트레스가 없을리는 만무한 것이다. 나가서 일할 안사람 (아니, 밖사람인가?) 챙기랴, 나가서 공부할 아이 챙기랴 주부가 얼마나 바쁜 '직업'인데. 그나마 그런 피로가 눈 녹듯 싹 풀려버리는 것은, 그래 이번처럼 민아가 기특하게도 알아서 잘 크고 있을 때, 초중고생 학력수준이 비상식적 비윤리적으로 높기로 유명하고 교육열이 유황불보다 뜨겁기로 정평이 난 이 동네로 이사오기가 무섭게 '전교 일등'으로 핫 샷 데뷔하는 것처럼. 그런 때 비로소, 은근히, 남 몰래, 얼씨구, 지화자, 만만세 주부된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


  민아네 학교 엄마들에게 연락이 걸려온 것은 민아가 전교 일등을 차지한 다음 날 오후의 일이다. 그때 나는 빨래를 하다말고 쑤시는 허리 때문에 잠시 쇼파에 앉아 홈쇼핑 호스트가 설명하는 1.5킬로그램에 39,900원이라는 국내산 프리미엄 간장게장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주문하면 정말 저런 게 오는지 모르겠으나 알알이 실하게 들어찬 기가 막힌 녀석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박민아 학생집이지요?   대뜸 수화기 건너편의 낯선 목소리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대뜸 이렇게 물어왔다. -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 아, 전 민아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3학년 2반 최예지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 - 예, 그러시군요. - 민아 아빠 되시는 가봐요. - 예, 그렇습니다.   차마 '그런 셈입니다'라고 말할 뻔 했다. 민아가 알았으면 두고 두고 구박했을거다. - 음, 민아 엄마가 집에 계신가요?   (나도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만.) - 아, 그렇지 않아요.   '없어요'를 '그렇지 않아요'라고 표현하는 이 낭비적 화법이란 도대체. - 죄송하지만 언제쯤 들어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나도 댁만큼 그걸 알고 싶다우.) - 오늘 좀 바쁜 일이 있어 늦게나 돌아올 것 같군요. 연락처를 남겨주심 제가 전해드리도록 하죠. - 그래주시겠어요? 


  예진지 지옌지 엄마의 전화를 끊고나니 5분 후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 거기 민아 학생집입니까?   굵은 남자 목소리. 좀 전과는 다르게 처음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혹시 이 놈의 지지배가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그럴리가. 바로 어제 전교 일등을 한 애가 오늘 저지를 수 있는 일이란 몇 가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문득 생각났는데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딸내미가 그렇게 물성 없는 아이가 아니기도 하고.) - 그, 그렇습니다만. 어디세요? - 음, 여기가 어디냐면요 라성지구에서 제일 맛있는 짱개집인데요.   남자는 자기가 말하고도 웃겼는지 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만, - 아, 전 3학년 10반 송연화 애비 되는 사람입니다. 민아 학생네 옆 반인가, 옆옆 반인가. - 아, 예. 그러세요? 헌데 무슨 일로……. - 민아 엄마한테 여쭤볼 게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댁에 계신가요?   (오늘 이 사람 인기 많네.) - 오늘 좀 바쁜 일이 있어 늦게나 돌아올 것 같군요. 연락처를 남겨주심 제가 전해드리도록 하죠. -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까 놀라게 해드린 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남자는 또 한 번 호탕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하하하, 웃었다. 그리고는 끊기전에 덧붙이길. - 짜장면이 생각날 땐 저희 집 좀 애용해 주십쇼. 짱개하면 ‘천리장성’입니다! 


  그 날만 그런 전화를 스물여덟 통 받았다. 공통적으로 모두 거기가 민아네 집인지를 물었고, 민아 엄마가 어디갔냐고 물었고, 연락처를 남기라니까 꼭 좀 부탁드린다고 했다. 한두 통이면 모르겠으나 스물여덟 통에 대한 메모를 어떻게 전할런지도 걱정이었고, 남들이 생각하기에 ‘애 엄마’ 없는 집에서 오후에 전화나 받는 ‘애 아빠’가 이상하게 보일까봐도 살짝 걱정이 되기는 했다. 퇴근한 민아 엄마에게 슬그머니 다가가서 분위기를 살피는데 대뜸 신경질이다. - 밥은?- 물론 해놨지.- 반찬은?- 말해 입 아픈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뭐가 문젠데?  (아무래도 오늘 일진이 또 좋지 않았나보다.) - 그게 말이야. 민아네 친구 엄마들이 전화를 좀 했었어. 집에.  (정말 그 애들이 모두 민아의 친구인지는 알 수 없건만 아무튼.) - 그래서?- 자기하고 통화를…… 좀 하고 싶어하는데.  민아 엄마는 가소롭다는 듯 픽 바람빠진 소리를 냈다. - 그런 건 종일 집에 있는 사람이 좀 하시면 안될까?  역시나 가시가 돋혀 있었다. 단번에 농담이 아님을 알수있는 어투였다. - 물론 그 말이 백 번 맞지만, 그 사람들이 꼭 자기하고…….  화산이 폭발하기 전에는 항상 징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나는 '하우스 남편'의 본능으로 지금이야말로 입 다물고 찌그러져 밥상이나 차려야 할 시점임을 알았다. 주방으로 냉큼 달려가 꽃무늬 앞치마를 두르는데 학교갔던 민아가 돌아왔다. - 다녀왔습니다., 아빠.- 저기, 민아야.- 왜요?- 우리…… 짱개, 아니 짜장면이나 시켜먹을까?


*


  다음 날 오후, 다시 전화통에 불이 났다. 나는 어떻게든 수를 내어야 하는 시점임을 알았다. 민아 엄마는 기분이 풀릴 때까지 절대 이런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당연하지. 가장이시니까!) 혹여 기분이 풀려도 삼십명이 넘는 (향후 더 늘어날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하라면 다시 기분이 나빠질지도 모른다. 기분이 나빠지면 가뜩이나 힘든 내조가 더 힘들어질테다. 고로 내가 직접 상대하기로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남의 집 귀한 딸네 집에 벌건 대낮부터 전화를 넣어 다짜고짜 남의 집 귀한 딸의 엄마를 찾는 것인지 직접 묻고자 했다. 어제와 같은 맥락의 전화에 나는 민아 엄마에 대해 가타부타 언급없이 "제게 직접 말씀하세요" 라고 잘라 말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윽고 돌아온 대답이란 아 글쎄, - 그게 말이죠. 민아가 어디 학원을 다니는지 궁금해서요. - 예, 그럼 실례지만 민아가 과외라도 하나요? 좋은 데 있음 소개라도 시켜주십사……. - 민아 문제집 뭐 풀어요? 우리 앤 동아출판꺼 쓰는데……. - 우리 애랑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3학년 1반에 윤아무개라고. - 학원을 안 다녀선 그런 성적이 나올 수가 없지. 안 그래요? - 일설에 따르면 민아가 그룹 과외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어요. 한 달에 백만원짜리라면서요? - 초등학교 삼학년짜리가 수학의 정석을 술술 풀어제낀다면서요? - 좀 같이 먹고 삽시다. 학원을 알려주던 문제집을 권해주던, 둘 중의 하나는 좀 해주세요. - 다름 아니라 엘리트 그룹 과외 모집중이에요. 전교 10등 안에 드는 아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비장의 클럽이거든요. 애들 공부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서로 서로 친분도 쌓고 같이 잘 키워서 외국으로 유학도 보내자는 장기적인 취지에서 만들었어요. 민아네도 생각이 있으시면 저한테 연락을 주세요. 자, ‘메이져리그’에 초대되신 걸 환영해요. 진심으로. - 이거 정말 정말 실례되는 질문인 줄은 알지만…… 민아가 5년을 꿇었다던데 사실인가요? 5년째 초등학교 3학년, 그래서 그렇게 남의 집 애들보다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이로군요. 역시나 그럴 줄 알았어요. - 민아네 집에 과외 선생 들어가는 걸 똑똑히 봤는데 어디서 시치미를 떼세요? - 전교 3등 정혜인이 엄맙니다. 지금 민아 때문에 전교 2등으로 밀린 오수연이네 엄마가 벼르고 있습니다. 밤 길이나 후미진 곳을 조심하셔야 할 것 같다고 알려드리려고요. 예, 제가 이런 말 했다고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 아, 전 그냥 안부 인사나 하려고 했지요, 호호호. 아무쪼록 어려운 점이 있으시면 연락하시고요. 그런데 민아 학생이 풀다 남은 문제집이요. 나중에 버리지 말고 꼭 저희 주세요. 예? 아, 저희 애는 지금 라성 초등학교 1학년이에요. - 문득 짜장면이 생각날 땐 저희 집 좀 애용해 주십쇼. 짱개하면 ‘천리장성’입니다! 
  이런 간장 게장 같은 경우가 - 스물여덟 통의 이딴 전화를 상대하고 보니 스물여덟 개의 별이 허공을 떠다니는 듯 어지럼증이 일었다. 라성지구의 교육열이 유난한 수준임은 진작에 들어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중고생도 아니고 초등학교, 그것도 3학년생들의 부모가 이렇게나 극성맞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거 애가 중학교 3학년쯤 되면 능히 살인까지 하겠다. 백만원짜리 과외라니! 우리 한 달 생활비가 얼만데. 퇴근한 민아 엄마에게 이 웃지못할 곡절을 들려주니 배를 잡고 웃는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좀 괜찮은 가보다. - 이 참에 육성회에도 들어가지 그래. 아침마다 녹색 어머니도 하고.  그 말에 안사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일었지만 꾸욱 눌러 참았다. 오늘은 가장님이 기분 좋으신 날이 아닌가. 일 년에 몇 번 없는 이런 평화로운 날을 망칠 수만은 없었다. - 아무래도 민아가 외지에서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오자마자 튀니까, 물론 좋은 쪽이지만 아무튼, 견제를 좀 받는 게 아닌가 싶어.  솔직한 얘기를 털어놓자 민아 엄마도 그제야 정색을 하고 진지한 얼굴을 한다. - 혹시 학교에서 괴롭힘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지들 뭐시기를 침범했다. 그 뭐라고 하더라.- 나와바리.- 그래, 맞다. 나와바리.  하루 종일 서서 강의하느라 퉁퉁 부었다는 종아리를 주무르며 민아 엄마가 묻는다. -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그걸 생각해봤어. 그 그룹 과외말이야.- 그룹 과외?- 응. 전교 10등 안쪽 애들만 한다는 거. 이름이 ‘메이저리그’라고 하더라. 거기 끼면 민아도 걔네들과 친해질 수 있을테고 우리도 걔네 부모들이랑 친해질 수 있을테고.  민아 엄마도 고개를 끄덕인다. -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밑지는 장사는 아니네. 여기 애들이 결국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올라갈 가능성이 크니까. 그 유명한 라성지구잖아.- 그렇지. 만약 우리가 여기 눌러산다면 당연히 그런 준비를 해야지.  문득 궁금해졌다. - 자기 여기서 계속 눌러 살 생각이야?- 당연하지. 이제 내 직장과 우리 사장님이 여기로 이사왔잖아. 그럼 나도 여기 사람인게야.  아내는 늘 자기 지도교수를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자리가 날 때까지 버틸 수 있겠느냐는 뜻에서 물어본거야. 언제까지 시간강사만 할 수는 없잖아. 자기네 사장님이 뿔 두 개 달린 도깨비라도 만나 개과천선을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더 늦기 전에 어디 새로 생긴 지방대에 자리 하나 얻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지금보다 수입도 나을테고 정신적으로도 조금 더 편하지 않겠어?   민아 엄마는 피식, 하고 나의 진지함을 비웃는다. - 가만히 있음 이등이라도 가지. 이봐요. 아저씨는 아저씨 앞 길이나 궁리하세요. 집에서 판판이 노시는 주제에.  그러더니만 나간다. 방문을 닫으려도 말고 낮게 웅얼거린다.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다 민아를 위해서야”라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닫는다, 방문을. 다 민아를 위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내어 본다. 


*


  ‘메이저리그’ 엄마들을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의 일이다. 회합은 라성지구의 중심지 캘리포니아 오거리에서 제일 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스토론쪼(Stronzo)’에서 열렸다. 모두 아줌마들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메이저리그 아빠들은 직장에서 열심히 과외비를 마련하고 있겠지. 물론 우리 집은 반대이지만. 메이저리그 엄마들은 신입 회원이 남자라는 것에 대해 할 말이 퍽이나 많은 눈치였으나 명색이 전교 일등한 딸을 둔 복 받은 남자라 그 말을 모두 마음에 꾹꾹 눌러 담아 두는 것처럼 보였다. 나중에 자기들끼리 만나서 기어이 배설하고야 말겠지만 말이다. 


  ‘메이저리그’에는 라성 초등학교 3학년의 전교 2등 오수연이네만을 빼고 아홉 집 부모들이 모두 속해있다고 했다. 오수연이 일등을 도맡아 할 때 전교 2등부터 전교 10등까지 부모들이 만나 결성한 일종의 견제집단이었던 셈이다. 전 전교 1등 조아름은 최근에 전교 11등으로 밀렸지만 정 많은 회칙상 매정하게 내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하필 그 얘기가 나오자 아름이네 엄마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은 입학 때부터 무려 3년을 이어져오던 오수연 독재체제가 끝난 것에 굉장히 통쾌하게 생까하며 기뻐하는 눈치다. 또한 클럽에 들어오기를 거부할 정도로 콧대가 높은 오수연네 엄마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난 것도 기뻐 죽겠다는 눈치다. 나중에 또 다른 자리에선 우리 민아와 나를 저렇게 욕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만큼은 내가 주인공이고 민아가 주인공이다. 누군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덧붙인다. - 참, 민아 엄마가 S대 교수님이라면서요?   이런 경우 참 난감하다. 아니라기도 그렇고 기라고 할 수는 없고. 그러거나 말거나 아줌마들은, - 어쩐지. 민아가 엄마 닮아서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구나.   난리법석이다. 그래, 나 닮았으면 공부 못했겠지. - 민아 아버지.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신데 한 말씀 뽑으시죠. 


  현 전교 3등 전 전교 2등 정혜인네 엄마가 어디서 주워 본 건 있는지 와인잔을 포크로 깽깽치며 좌중의 주목을 강요했다. 그리고 내게는 짤막한 스피치를 강요했다. 이 또한 죄라면 잘난 딸을 둔 죄다. '따님이 전교에서 1등 했으니 기념으로 한 말씀'이라니. 내 평생 이런 기억은 없다. 마치 평생 처음으로 1등 먹어 본 가수처럼 나는 멍멍해졌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제가 1위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았고요. 아, 지금 정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음, 제 노래를 좋아해주신 여러분들, 관객석의 팬 여러분들, 지금 텔레비젼으로 시청하고 계신 시청자 여러분들, 아, 감사드립니다. 정말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여기 함께 후보에 오르신 아무개씨한테도 감사드리고,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음, 그리고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으신 선후배님들, 저의 음악적 동지들, 애써주신 음반 관계자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집에서 자식 놈 텔레비젼 나온다고 지켜보고 계실 아버지, 어머니…… (울먹거리느라 말을 잊지 못한다)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옛날엔 가수가 ‘가요 톱 텐’에서 1위를 하면 이런 식으로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정신을 못차리고 감격과 그간의 설움을 향한 회고로 버둥거리고 있노라면 진행자와 그 날의 출연자들이 모두 몰려와 격려해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넨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진창. 그러는 사이에 슬그머니, 그 주의 1위곡이 된 그의 노래 반주가 시작된다. 반쯤은 울음이고 반쯤은 부들부들 떨림인 완전 잠겨버린 목소리로 가수는 동료들에게 등 떠밀려나와 앵콜을 부르기 시작한다. 이따금 끝까지 부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엔 정 많은 관객들이 대신 나서서 목청껏 그 노래를 합창해준다. 가수는 감격하여 끝내 고개를 떨구고 통곡한다. 아! 이건 정말이지 감동의 도가니탕이 아닌가? 텔레비젼으로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물론 옛날에나 가능했던 이야기다. 요즘은 차트의 공신력이라는 것이 사라지다보니 '누가 1위 했나?'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없다. 가수라고 나오는 애들도 워낙 어리다보니 설움이나 쓴맛 등의 단어와는 거리가 멀기도 하고. 1위를 하고 생글생글 웃으며 장난을 친다. 마치 준비해온 듯한 멘트를 읽는다. 아니, 옛날 그 시절에도 멘트는 준비했을텐데 어쩜 이렇게 세상이 바뀌었고 요즘 애들은 어쩜 이렇게들 다르지. - 그러니까 쟤네는 신인류인게지.  언젠가 나의 의문에 민아 엄마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 신인류?- 그래. 쟤들은 우리처럼 도가니탕을 좋아하지 않아요. 쿨한 걸 좋아하지. 1등은 좋은건데 왜 울어요? 축제하듯 즐겨야죠. 그게 쟤네들 마인드야. 올림픽 때 박태환이니 누구니 젊은 애들 봤지? 걔네가 어디 쌍팔년도 운동선수들처럼 금메달 따고나서 통곡하디? 그냥, 와우 내가 해냈다, 이게 바로 내 실력이다, 손 번쩍 들고 환호에 답하잖아. 그게 쿨한 거야. 이제 우리는 '언 쿨'한 거고.
  그래도 난 어쩔 수 없이 '언 쿨'한지, 
- 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저희 딸이 전교 1등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않았고요. 그것도 전학하자마자요. 아, 너무 갑작스러워 지금 정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음, 제 부족한 자식 놈이 어쩌다보니 운이 좋아 일등을 했습니다만, 음, 지도 편달을 아끼지 않으신 학교 선생님들께, 여기 계신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입니다. 그리고 저희를 회원으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열심히 시키겠습니다. 


  누군가 외쳤다. - 민아 아버지, 기념으로 노래 한 곡조 뽑으시죠. 


  식당 한 구석에는 거짓말처럼 노래방 기계가 있고 기왕에 마이크는 내 손에 쥐어져있다. 쪽 팔리지만 그래, 민아를 위해서. 다 우리 딸 민아를 위해서다. 

 

♬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사랑의 이야기 담뿍 담은 편지,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하늘이 푸른지 마음이 밝은지. ♬ 
 
♬ 즐거운 날도 외로운 날도 생각해 주세요. 
나와 둘이서 지낸 날들을 잊지 말아줘요. ♬ 
 
♬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함께 못 가서 정말 미안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 
 
♬안녕 안녕 내사랑. ♬ 
 
♬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꽃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어보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예쁜 차를 타고 행복을 찾아요. ♬ 
 
♬ 당신과 함께 있다하면은 얼마나 좋을까. 
어울릴꺼야 어데를 가도 반짝거릴텐데 ♬ 
 
♬ 나성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 
함께 못 가서 정말 미안해요. 
나성에 가면 소식을 전해줘요. ♬ 
 
♬ 안녕 안녕 내사랑 
안녕 안녕 내사랑 
안녕 안녕 내사랑 ♬ 
 
……안녕 안녕 내사랑.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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