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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그들 모두가 비웃었었지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5.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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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스와 내가 미래를 약속했을 때 많은 이들은 우리를 비웃었었다. 그들은 우리의 상성이 물과 기름과 같아 결코 섞여 들어가지 못할 거라고 내다봤다. 그런 우려가 (혹은 냉소가) 사랑을 축복하는 바람직한 방법이야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악랄하고 빙퉁그러진 것이었다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맥스와 나의 사이는 이종 존재간의 관계로 상이한 생물학적 기원과 견고한 사회적 편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풀어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고양이다. 맥스는 개다. 비유가 아니다. 그가 개 같은 수컷이고 내가 고양이 같은 암컷임과는 별개로, 종속과목강문계의 저 위대한 분류법에 따르면 우리의 뿌리는 식육목에서 이미 갈라진다. 개는 개아목 (Caniformia)으로 들어가고 고양이는 고양이아목 (Feliformia)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그들 모두가 우리의 사랑을 비웃었던 것도 무리는 아닐지 모른다.


  맥스와 내가 서로를 원한다고 했을 때 (정말) 많은 이들이 우리를 비웃었었다. 그중에는 그의 개 같은 친구들도 있었고 (개아목에는 여러 가지 동물들이 있다) 나의 고양이라기 보다는 여우 같은 친구들도 있었다 (고양이와 여우는 역시 한 뿌리다). 그리고 온건한 반대자였던 그의 어머니와 강경한 반대자였던 그의 아버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조지 거슈인이 쓴,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노래 중 하나를 떠올리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가 1937년작 영화 에서 불렀던 그 노래. 우리의 사랑을 비웃었던 그들은, 콜럼버스가 세계가 둥글다고 말했을 때도 비웃었을 이들이고, 에디슨이 소리를 녹음할 수 있다고 했을 때도 비웃었을 이들이고, 라이트 형제가 사람을 날게 할 수 있다고 했을 때도 비웃었을 이들이고, 마르코니의 무선 전신, 록펠러 센터, 엘리 휘트니의 조면기, 북쪽 강 증기선, 허쉬 초콜릿바, 헨리 포드의 모델 T를 비웃었을 이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누가 마지막에 웃는 자였는가 - 결국에 누가 옳았고 누가 틀렸는지 말이다. 비웃을 줄만 알았던 비열한 이들은 이제 모두 꼬리를 내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맥스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개가 고양이를 원할 수 있고 고양이도 개를 사랑할 수 있다. (당사자간의 사랑을 굳이 제 3자에게 증명할 필요가 있으랴!) 언젠가 우리는 비웃음을 이겨내고 영원한 축복을 선물받을 것이었다. 그렇게 여겼더랬다. 그때까지는.


*


  많은 커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관계의 뇌관 또한 2세 문제였다. 어느 정도는 본능에서, 어느 정도는 의무감에서 우리는 아이를 원했다. 그것도 절실히. 어쩌면 그 절실함의 일정 비율은 불안감에서 잉태되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이는 잘 생기지 않았다. 아무리 시도해도 희망적인 징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신체적, 정신적, 과학적, 비과학적, 초자연적 모든 층위에서의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상상 임신 증세도 보였다. 주기가 불규칙해지고 입덧을 밥 먹듯이 했다. 하지만 결국엔 마음이 만들어 낸 세계 속에서나 있을 법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실패는 잔인했다. 우리에게 '다름'을 연상하게 했다. '차이'를 확인하게 했다. 종이 다르다는 것. 식육목에서 이미 갈라진 우리의 조상. 상이한 생물학적 기원. 견고한 사회적 편견. 남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이종교배'라는 단어. 개와 고양이의 관계. "너희들 그거 아니? 개와 고양이는 서로 앙숙이기 마련이야! 그게 자연의 이치야." 아니었다. 아닐 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거듭된 실패는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맥스를 지치게 만들었다. 우리를 지치게 만들었다. 신체적, 정신적, 과학적, 비과학적, 초자연적 모든 층위에서.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분명 우리는 아니었다.


 결혼은 우리 사랑의 완성이 아니었다. 그때 그렇게 믿었던 건 실수였다. 우리의 관계는 카드로 세운 집과도 같았다. 카드 집에 완성 따윈 없었다. 무너질 위험이란 항상 함께하는 것이었다. 자연의 이치였다. 2세 문제는 갑자기 불어닥친 한 줄기 바람이었다. 카드로 세워진 집 따윈 단번에 날려버릴 바람. 그리고 그건 많은 이들의 은근한 바람이기도 했다. 우리의 사랑을 비웃었던 주위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의 어머니, 그의 아버지. 그들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바람을 일으켜 이 작고 위태로운 집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었다. 폐허만이 남게 되면 그들은 자랑스럽게 떠버릴 것이다. "거봐! 내 말이 맞았지?" 이 싸움은 우리에게 있어 싱글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와도 같았다. 몇 번 고비를 무사히 넘겼는진 상관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지면 끝이 난단 사실만 중요할 뿐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지면, 저들의 승리가 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왜? 어쨌든 결국 우리가 무너지기만 하면 그들이 웃는 구조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구역질이 났다.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제발 그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


  맥스에게는 음주 문제가 있었다. 그는 술을 사랑했다. 술만 마시면 개가 되었다 (물론 술을 마시지 않을 때 개가 아니란 뜻은 아니다). 가장 오래 술을 끊었던 기록이 3년하고도 7개월 8일이었다. 허니문을 기점으로 이전의 1년 2개월 3일 (나는 이 기록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 이후로 2년 5개월 5일 (동시에 이 기록은 안타깝다). 맥스의 영혼이 술에 적셔졌을 때 나타나는 문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더 적셔지지 않고자 하는 노력을 철저하게 거두었다. 폭음이 더 한 폭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둘째, 난폭해졌다. 날뛰고, 난릴 피우고, 집어 던지고, 심한 말을 하고, 심지어 때리기도 했다. 물론 술에서 깼을 때 그는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럴때면 내게도 그런 마법의 약이 있어 함께 나란히 기억을 지우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그럼 조금 덜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세번째 임신 촉진 시술이 실패했을 때 우리는 (정말 오래간만에) 크게 싸웠다. 맥스는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3번가의 <앤톤스 바>에서 떡이 된 채로 돌아와 3년 7개월간의 오프 시즌을 마치고 다시 화려하게 경기에 나섰다. "신사 숙녀 여러분, 다시 개가 되어 돌아온 그이의 무대입니다." 컴백 쇼는 화려했다. 크리스탈 꽃병은 직선에 가까운 궤적으로 힘차게 날아가 42인치 소니 평면 텔레비젼을 박살내었다. 이케아 팍스 옷장을 쓰러뜨리고 시몬스 침대를 뒤집은 다음에 매트리스를 발로 걷어찼다. 어떤 면에선 다행한 일이었다. 날 건드리기 전에 힘을 뺀 것이었으므로. 덕분에 난 울긋불긋한 손자국이 남을만큼 목을 졸리는 정도의 일 밖에 당하지 않았다. 참, 머리채를 잡혀 조금 끌려다니기도 했다 (상당히 아팠지만 다음 날 일어나니 견딜만 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의 맥스는 평범한 남자였다. 오히려 섬세하고 예민한 구석도 있었고, 지적이고 교양이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탓에 사회에서 실패하고 좌절하는 타입이었고, 그 분노를 연약한 가슴 안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타입이었다. 말하자면 포의 <검은 고양이> 주인공의 '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었고 혹은 ‘개 버전’의 잭 토런스라고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두 남자가 개가 아니란 뜻은 아니다). 음주와 폭행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 날 그는 말없이 출근했다. 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았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이케아 옷장을 일으켜 세우고 시몬스 침대를 다시 뒤집었다. 오후 4시 30분쯤 42인치 텔레비젼이 말없이 도착했다 (다시 소니를 살 여유가 되지 않아 3분의 1쯤 저렴한 웨스팅하우스의 특가 제품을 주문했다). 베스트 바이의 기사들은 마치 간밤의 자초지종을 다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박살난 옛 텔레비젼의 빈 공간에 새 텔레비젼을 걸었다. 오후 6시를 조금 넘자 카라꽃 20송이가 도착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맥스가 보낸 것이었다. 순백색 꽃잎이 아름답기는 했지만 박살난 것은 꽃이 아닌 꽃병이었으므로 주방에서 스테인레스 수저통을 가져다가 꽂아야만 했다. 카라의 꽃말이 아마 순수, 환희, 열정이라지. 


  이윽고 6시 30분이 되었을 때 드디어 맥스가 돌아왔다. 말없이. 그리고는 이층 침실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쭈삣거리며 주방에 들어와 냉수를 한 컵 받아 마시더니만 드디어 사과했다. 아주 어렵게. 엑토플라즘을 뱉어내듯 괴로워하며. 미안하다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다시는 물건을 집어 던지지 않겠다고. 절대로 날 때리지 않겠다고. 그 순간에 그 말이 거짓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믿었던 것도 아니다. 본능이랄까 예감이랄까. 그리고 그 느낌은 윌리엄 텔의 화살처럼 빗나가지 않았다.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분명 우리는 아니었다.
 

*


  불임 커플들이 싸우게 되는 전형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서로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태도 때문이라고 한다. 남편은 부인 탓으로. 부인은 남편 탓으로. 하지만 그들은 같은 편이어야 했다. 윌버와 오빌처럼. "비행에 실패할 때마다 윌버와 오빌이 서로를 비난했다면 어떻게 3축 조정을 발명할 수 있었겠어?" 맥스와 나도 그랬다. 정확히는 맥스쪽이 그랬다. 마치 순전히 내 잘못처럼 이야기했다. '맥스쪽'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 맥스가, 그의 어머니가, 그의 아버지가, 그의 가족처럼 친한 친구들이. 하지만 이 불행한 비극은 우리 사이에서 공유되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함부로, 무심하게 내 탓으로 돌릴 문제는 아니었다. 


  난 적군이 아니었다. 피해자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가 마치 '용왕의 구슬'을 빠뜨려 일을 망친 주체라도 되는 양 비난을 퍼부었다. 맥스가 개부모, 아니 시부모의 뒤로 숨어버렸단 사실은 내게 적잖은 상처를 입혔다. 우리의 결혼을 (누구보다도 극렬하게) 반대했던 사람들, 그 모든 비웃음 중에서 가장 아프고 치명적으로 남은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주둥이에서 튀어 나온 것들이었다. 너흰 안돼. 너는 개고 쟤는 고양이야. 개와 고양이는 이루어질 수 없어. 그건 자연의 이치에 반하는 거야. 나아가 맥스에겐 문제가 없어. '이종교배'만 아니라면 진작에 맥스는 강아지들을 낳았겠지. 귀엽고 토실토실하고 건강한 강아지들. 고로 모든 문제는 저 꼴 같지 않은 고양이 탓이야. 


  결국 다 내 탓이란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편이어야 했다. 윌버와 오빌처럼. 맥스는 당연히 내 편을 들어주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힘들다는 이유로, 지쳤다는 이유로, 절망했단 이유로 저들 편에 나란히 섰다. 비난의 화살을 내게 돌렸다. 힘들고 지치고 절망했던 건 비단 그만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라고 했다.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순간 나는 (바보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나 때문인가?' 나 스스로도 그 부분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물론 임신 클리닉 주치의 터빙튼 경이 장담하기는 했다.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라고. 우리의 (나의) 주치의는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시대에서 소환되어 나온 듯한 긍정과 낙관으로 물든 남자, 수컷, 고양이였다. 하지만 만약 그가 틀렸으면? 정말로 우리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있는 거라면? 사랑을 나누는 순간조차도 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물었을 때 주치의 터빙튼 경은 (예의 그 고양이 좋은 미소와 함께)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엔 국경도 없다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이의 관계는 '국경' 정도의 차이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었다 (감자를 '포테이토'라고 발음하는 남자와 '포타토'로 발음하는 여자 사이의 사랑? 혹은 토마토와 토메이토? 그 정도는 장난 아니야?) 말하자면 그것이 우리 관계에 내재한 근원적 불안이었다. 나는 그 불안을 해소하고자 터빙튼 경에 집착했다. 대신 맥스는 술에 집착했다. 그 사실을 합리화하는데도 내 탓을 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라고. 취하고, 부수고, 때리고, 다음 날 하얀 카라꽃과 함께 사과하는 과정은 하나의 루틴이 되었다 (카라의 꽃말이 아마 순수, 환희, 열정이라지?) 그리고 잔인한 한 마디와 함께 다시 아득한 원점으로 돌아왔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한때 우리는 한 팀이었다. 극적으로 용왕의 구슬을 되찾아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맥스는 헤엄을 쳤고 난 그이의 등을 꼬옥 껴안고 구슬을 입에 물고 있었다. 그때까지 우리의 목표는 하나였다. 그가 물었다. "구슬은 잘 가지고 있지?" 난 대답을 할 수 없어 (구슬을 입에 물고 있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채근을 했다. "구슬은 잘 가지고 있느냐고!" 여전히 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가 버럭 화를 냈다. "대답해! 있어? 없어?" 어쩔 수 없이 난 대꾸를 해야만 했다. "잘 가지고 있어!"라고. 그 순간 구슬은 입에서 빠져 풍덩 소리와 함께 강물 깊숙히 사라졌다. 그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된 그는…… 화를 냈다. "그럼 대답하질 말았어야지. 밥통같은 년이 멍청하게 입을 놀려서!" 그는 자기가 대답을 채근했단 생각을 조금도, 정말로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 순간 우리의 팀워크는 깨졌다. 그리고 이 카드로 만든 집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책임이 되어 부셔져 날아갈 것을 알면서도 두 손으로 잡아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다.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분명 우리는 아니었다.    

*


  맥스와 내가 미래를 약속했을 때 우리를 비웃었던 많은 이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랑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에디슨의 축음기, 마르코니의 무선 전신,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 록펠러 센터, 엘리 휘트니의 조면기, 북쪽 강 증기선, 허쉬 초콜릿바, 헨리 포드의 모델 T와는 달랐는지도 모른다. 개와 고양이 사이의 사랑이란, 어쩌면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런 팻말을 뒷범퍼에 붙이고 달리는 웨딩카를 본 적이 있다.
  
  축하해주세요! 지금 막 깨졌습니다!


  사연이야 어찌 알겠는가. 결혼식을 앞두고, 어떤 이유로, 아슬아슬하게 깨진 커플이 아니었을까 그저 솓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사랑의 서약이니, 신부님의 주례사니, 웨딩 마치니 하는 거창한 것들이 속전속결로 흘러가 버리기 전에 날렵하게 결혼을 무르는 것도 꼭 나쁜 일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싶다. 끝까지 살아보기 전까지 감히 그 어느 커플이 알 수 있겠는가? 자기 앞의 그 반쪽이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 말이다.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웨딩카의 그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최소한 막다른 골목까진 가지 않았잖아. 현명하게도.)

 

*


   진료와 상담을 반복하면서 나는 주치의 터빙튼 경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다만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내 마음 속에는 불안의 울림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어쩌면 실패의 경험은 인식의 영역을 확장케 하는 계기가 되곤 하는가보다. 비록 인식의 확장이 우리를 달관과 염세로 인도하는 경우가 많단 사실은 함정이겠지만. 


  맥스를 처음 만날 때만 하더라도 나는 사랑에 있어 낙관론자였다. '남녀가 만나 아름답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총천연색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겪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둡고 긴 동굴 같은 현실은 내 환상 속에서 명도를 앗아갔다 ("술고래 맥스가 돌아왔다!”). 나는 알았다. 터빙튼 경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관계 역시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터빙튼 경은 많은 부분에 있어 맥스와는 정반대의 남자였다. 항상 차분하고 부드럽고 젠틀하고 지적이었다. 터빙튼 경에게는 맥스가 가지고 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안한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터빙튼 경이 좋았다. 이 남자야 말로 함께 3축 조정을 발명할 만한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서로 너무 잘 통했다. 신체적, 정신적, 과학적, 비과학적, 초자연적 모든 층위에서. 단지 온 마음을 다 주는 것이 쉽지 않게 느껴졌을 뿐이다 (그렇다. 맥스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 그때 이미 나는 알아 버린 상태였다. 모든 남자들의 마음 속엔 괴물이 살고 있단 사실을. 그저 차이가 있다면 일찍 깨어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나는 더 이상 열여섯이 아니었고, 스무살도 아니었고, 어떤 마법을 부려도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사실은 터빙튼 경 역시 결혼 생활에 실패한 경험이 있었단 것이었다. 내가 아는 걸 그도 알았다. 사실 더 잘 알았다. (맞다. 게다가 상담 전문의이기도 하지 않은가!) 자기 사연, 남의 사연 할 것 없이 많이 듣고 접하여 이해해 본 경험이 있는 남자였다. 적어도 어떤 사람들처럼, 관계의 파탄을 전적으로 여자측에 묻는 사람은 아니었다. 음주 문제도 없었고 ("술고래 맥스가 돌아왔다!") 약물이나 도박 문제도 없었으며, 물론 여자를 때리는 비열한 짓도 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횃불을 들어 살펴본 그의 세계 안에는 아직 그런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자기 산부인과 주치의와 사랑에 빠진 여자라면 그들은 또 비웃겠지. 콜럼버스가 세계가 둥글다고 말했을 때처럼, 에디슨이 소리를 녹음할 수 있다고 했을 때처럼, 라이트 형제가 사람을 날게 할 수 있다고 했을 때처럼, 마르코니의 무선 전신, 록펠러 센터, 엘리 휘트니의 조면기, 북쪽 강 증기선, 허쉬 초콜릿바, 헨리 포드의 모델 T의 등장을 마주했을 때처럼.)


심지어 그의 전처조차 여전히 호의적이었는데 나는 그 사실이 불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은 증거라고 여겼다. 최소한 전처가 치를 떨만한 이유로 이혼하지는 않았다는 증거일테니까. 터빙튼 경과 레이디 비앙카는 (그것이 페르시아산 암고양이인 전처의 이름이었다) 아주 오래된 친구처럼 지냈다. 그들은 잘 배우고 가방 끈 긴 좋은 집안의 고양이들답게 특유의 귀족적이고 우아한 말투와 몸짓으로 자신들의 결별이 물리 법칙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심지어 레이디 비앙카는 자신의 전 남편과 나의 관계가 단순한 의사-환자 사이의 관계만은 아닐거라고 짐작하면서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나의 결혼 생활이 (공식적으로 아직은) 유효하다는 사실도 알았겠지만 역시 신경쓰지 않았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터빙튼 경과 나의 사이를 은근히 응원하며 슬며시 밀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 남편의 새 여자친구에게 전 남편과 관계를 구축해가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는 여자라니……. 터빙튼 경은 한술 더 떠서 우리가 함께 보내는 시간에 그녀를 부르곤 했다. 늦은 아침 식사나 오후의 티 타임이나 저녁 만찬에 레이디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동석하여 내게도 살갑게 굴었다.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터빙튼 경이나 레이디 비앙카과 같은 이들 아닐까? 마지막에 웃는 자는? 그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 역시 마지막에 웃는 자는 아니었다. 그때까지는 몰랐지만…….

 

*


  한편 그 무렵 맥스도 제 나름대로 새로운 관계로 활로를 찾았다. 메리가 그 불운한 철부지의 이름이었다. '메리 메리 쫑쫑' 할 때의 그 메리 말이다. 메리는 맥스가 일하는 보안 업체에서 경리 사무를 보는 어린 강아지였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때의 맥스가 꽤 정상적인 남자처럼 보였던지 ("술고래 맥스가 돌아왔다!") 푹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물론 그 점에 있어서는 그 놈과 결혼까지 했던 내가 할 말은 없겠지만……. 내가 맥스의 불륜을 염려했을까? 천만의 말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다. 감히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댈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렇게 치면 나와 터빙튼 경의 관계는?) 물론 살짝 불안한 마음은 들었는데 그것은 맥스-메리 관계가 (이렇게 이름을 붙이고 보니 무슨 세기의 커플 같아!) 개과 동물들 사이의 동종간 동질감에 기반했단 사실 때문이었다.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고 그건 사실 질투라기 보다는 경멸에 가까웠다. 하지만 주위 고양이들은 내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충고했다. 결혼 생활의 위기에 봉착한 남자와 어린 여자애는 멘토스와 다이어트 콜라와 같은 위험한 조합이라고 했다. 하지만 뭘 어쩔 수 있었겠는가. 내가 주의를 기울인다고 맥스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나서 이야기한다고 어리고 철없는 강아지 메리에게 '술고래 맥스'의 진가를 이해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해봐야 멘토스 콜라 화산이 부글거리며 솟아올라 바닥을 좀 더럽히는 정도 아니겠어?’
잘못된 생각이었다.

 

*


  나와 터빙튼 경 사이의 관계를 맥스가 알아차린 것은 언제였을까. 봄이 시작되던 무렵이었을까? 여름이 끝나가던 무렵이었을까? 생각보다 빨랐을 수도 있었고 생각했던 것만큼 빠르지는 않았을 수도 있겠다. 터빙튼 경이 같이 도망가자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니, 서로 죽고 못사는 절친사이인 댁의 우아한 전처는 어쩌고?)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던 것 같다. 해피엔딩 비슷한 거라도 가까이 가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터빙튼 경의 제안을 뿌리쳤던 것은 뭐에 홀려 판단력이 흐려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 판단력은 더할 나위없이 멀쩡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그들’의 비웃음을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너희는 안된다고 자신만만하게 단언했던 그들. 만약 내가 터빙튼 경과 도망을 친다면 그들의 예언이 옳았음을 몸소 입증해주는 꼴 밖에 되지 않았다. 그게 싫었다. 다른 모든 걸 다 떠나 바로  그게 용납되지 않았다. 치가 떨렸다. 그러다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내가 결혼했던 남자로부터 도망칠 기회를. 


  내가 결혼했던 남자는 샘이 많은 코찔찔이 유치원생 같았다. 동시에 그런 어린 것들을 충분히 상대하는데 전문화된 노회한  유치원 선생님이기도 했다 ‘아주 잘했어. 내 마음에 쏙 드는 짓을 하네. 그럼 상을 내려줄께. 아니야, 넌 날 짜증나게 만들었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 내가 두고 두고 벌을 내릴테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 간밤의 화끈한 손찌검을 (벌) 열두시간 후의 카라꽃 20송이로 (상) 교환하는 사고방식. 꽃말이 순수, 환희, 열정이라고?


  맥스는 자기 본위의 기준으로 타인들의 행동을 평가하였고 그것에 바탕하여 상과 벌을 내림으로써 타인들을 조종하거나 지배하려는 성향이 있었다. 터빙튼 경은 그런 맥스의 성향을 '편집성 성격장애'라는 말로 설명했다. 전문 용어야 뭐라도 좋았다. 자기 부인을 때리고 술이나 처먹는 (어느 쪽이 먼저인 건지 가끔 선후관계가 혼동될 때가 있다) 개 같은 놈에게는 어떤 용어도 설명도 아까웠다. 

  나는 분노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심했었다. 놈의 실체를 뼈저린 경험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에 (“술고래 맥스가 돌아왔다?”), 그리고 곁에 있는 든든한 남자가 놈의 행동을 꿰뚫어보듯 너무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기에 (“별거 아니에요. 그냥 편집성 성격장애지. 헤르페스나 치질처럼 되도록 피하고 싶을 뿐이지 죽을 병은 아니란 말입니다”). 치명적 오판이었다. 이제 분명히 알겠다.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맥스의 새로운 애인, 어린 강아지 메리는 아니다. 정다웠던 (정말로?) 우리 신혼집 바닥에 축 늘어져 피웅덩이를 그리고 있는 그 아이의 표정은 원망으로 가득하다. 웃는 표정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날 더러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어요?’ 라고 따져 묻는 모양새다. 그게 나로 하여금 가벼운 죄책감에 젖게 한다.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 잘못이다. 다이어트 콜라에 멘토스를 집어 넣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일이라고, 결국 이렇게 되리라고 때문에 (“술고래 맥스가 돌아왔다!”) 생각했어야 했다.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터빙튼 경은 아니다. 레이디 비앙카도 아니다. 지적이고 교양있고 다정다감했던 나의 주치의, 그리고 그이의 전처. 그들이 웃고 있기는 하나 마지막에 웃은 것 아니었다. 선후관계를 또 따지자면 마지막이 먼저였고 웃음이 나중이었다. 고로 그들의 마지막을 보고 웃음 지은 이가 따로 있었다 (“술고래 맥스가 돌아왔다!”) 그는 지독하게 찌든 술 냄새를 풍기며 얼어붙은 내 등짝에 헹켈 쌍둥이칼을 겨누고 미소짓고 있다. 그 칼은 신혼 무렵 아마존에서 29.95불에 구입한 3종 세트 중 하나다 (무료배송 제품이었다). 뒤를 돌아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것이 6인치 유틸리티 나이프라는 걸 짐작했다. 왜냐하면 8인치 세프의 나이프는 터빙튼 경의 등에, 3인치 페어링 라이프는 레이디 비앙카의 등에 각각 우악스럽게 꽃혀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선박 계류용 폴리프로필렌 로프에 양손을 묶여 허공에 매달려 검붉은 피와 함께 굳어버린 그들의 모습은 내게 푸줏간을 떠올리게 했다. 이내 격렬한 욕지기가 이어져 몸조차 가누기가 어려웠다. 맥스는 내 머리채를 움켜잡더니 고개를 똑바로 들어 그들을 쳐다보게 만들었다. “야! 피하지 말고 똑똑히 보란 말야” 라고 말했다. 저들은 고양이와 고양이. 그리고 맥스는 개. 순간 나는 식육목에서 갈라진 위대한 혈통에 대해 생각했고, 맥스와의 사이에서 (그 저주스러운 표현 ‘이종교배’를 통해) 정말로 아기가 생겼을 수도 있었단 생각이 올라와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어쩌면 맥스와 나의 사랑을 비웃었던 그들이 옳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랬다. 우리의 사랑은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그것처럼 해피 엔딩이 될 수 없었다. 이젠 인정해야 했다.


  맥스는 손을 틀어 내 얼굴을 자기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그의 눈동자는 진작에 추수가 끝난 초겨울의 들판을 연상케했다.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잠식된 (혹은 포의 작품에서처럼 저주와 폭로를 담은) 울음소리를 내어 악마가 바로 여기 존재한단 사실을 남들에게 알릴 수만 있다면. 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헤르페스나 치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릴 수만 있다면. 그의 침묵은 나를 향한 비난이었다. ‘카드로 만든 집을 무너뜨린 것도 너고, 용왕의 구슬을 빠뜨린 것도 너고, 물론 저들을 죽게 한 것도 바로 너고, 우리 관계를 처참하게 망가뜨린 것도 너야. 우리의 결혼을 비웃었던 이들이 결국 옳았다고? 그렇다면 축하해. 네가 공짜 점수를 헌납해서 승리를 갖다 바쳤으니까.’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헹켈의 6인치 유틸리티 나이프에 대한 것이었다. 중도와 과도를 겸할 수 있다고 했었지. 광고에서 분명 그렇게 말했어. 중도와 과도를 겸할 수 있어 아주 유용하다고.      


  하! 하! 하! 마지막에 웃는 자가 누구지?
  정말 누구지?

(2015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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