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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리버스 스윕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5.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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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도날드는 일종의 베이스 캠프였다. 모든 작전은 스트라다 누오바 점포의 창가 쪽 테이블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되었는데, 가장 큰 장점이라면 역시 지정학적 위치라고 할 수 있었다. 우선 인근 상권의 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누오바 거리를 관찰하며 목표물을 물색하기가 좋았고, 또한 목표물을 인적이 드문 작은 골목으로 유도하여 한 바퀴를 돌린 다음 자연스럽게 다시 맥도날드 앞쪽으로 데리고 돌아오기도 좋았다. 물론 낚시에 실패하고 돌아왔을 때 저렴하지만 따뜻한 맥카페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 또한 중요한 이점 중의 하나였다.

  칼라와 유니스는 월요일과 수요일 담당이었다. 그 말은 곧 다른 요일은 다른 자매님들의 몫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월요일과 수요일마다 그녀들은 오후 두 시무렵부터 누오바 거리의 맥도날드에 자리를 잡았다. 행여 창가쪽 자리에 이미 임자가 있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조금의 인내심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굳이 언급하자면 그건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맥도날드가 무슨 스카이라운지의 고급 레스토랑이 아니고 오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신선 놀음을 하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보통 일의 첫 단계는 관찰이었다. 누오바 거리의 낯선 행인 중 꽤 짭짤해보이는 목표물을 고르는 것이었다. 매일 이 거리에서 눈의 띄는 사람은 제외해야 마땅했다. 두 번째는 미끼를 던지는 것이었다. 보통은 둘 중의 한 사람만 목표물에 접근했다. 세 번째는 당연히 밀고 당기기였다 (그런 면에서는 남녀 사이의 연애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하겠다). 아무리 손쉬운 목표물도 한 번에 쉽게 끌려오는 법은 없었다. 낚시와 마찬가지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상대를 무너뜨려야 했다. 인내심의 싸움이었다. 상대가 먹이를 물면! 뒷골목 쪽으로 유인하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맥도날드쪽으로 데리고 간 다음에 이렇게 묻고는 했다. 
- 다리도 아픈데 잠깐만 앉았다 가요. 이야기 좀 더 들어보고 싶어요.

  일단 목표물이 맥도날드에 들어가면 일은 거의 50% 정도 성공한 셈이었다.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나머지 한 사람은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나서 합석을 하는 것이다. 칼라는 오른쪽에서 유니스는 왼쪽에서, 혹은 유니스는 오른쪽에서 칼라는 왼쪽에서. 그녀들의 찰떡 호흡은 꽤나 훌륭하여서 어지간한 사람들을 무너뜨리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럴 때면 영화에서 형사들이 범인을 취조할 때 2인 1조로 움직이는 이유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녀들이 하는 일은 좋은 일은 아니었다. 사기라고 볼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아니지,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사기는 사기였다. 하지만 아주 질이 나쁜 범죄는 아니었다. 적어도 칼라와 유니스 모두 자기들이 하는 일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음…… 어쩌면 조금은? 나쁠지도 몰랐다. 하지만 완전히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랬다. 세상에 그렇게 옳고 그름을 쉽게 단정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

 

  남자는 완벽한 목표물이었다. 누오바 거리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유순하다 못해 맹한 인상이었고 샌님처럼 두꺼운 뿔테 안경을 썼으며 행동은 조심스럽고 굼떴다. 심지어 옷차림마저도 세련되고 똑똑한 느낌을 주진 않았다 ('아마 패션으로 테러를 할 수 있다면 저런 느낌일 꺼야'라고 그녀들은 생각했다). 하지만 한 손에 든 지저분한 남성용 토드백은 돌체 앤 가바나로 적어도 1,000 유로는 하는 명품이었다. 후줄근한 외투와 낡아빠진 청바지 아래 드러난 다 떨어진 스니커즈는 600 유로는 우습게 넘는 페레가모 제품이니 스니커즈라고 우습게 볼 일도 아니었다. 결국 저렇게 보여도 집에 돈은 꽤 있단 얘기지.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그녀들은 이 일을 아주 오래 해왔다. 5년도 넘는 시간은 그들에게 귀중한 노하우를 체득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아르마니 정장으로 도배를 하고 다니는 건 보통 사람들의 몫이다. 아주 부자는 아닌데 부자처럼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중산계급 사람들. 실제로는 남자처럼 거지에 가깝게 사람들이 더 알짜배기인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이곳은 다름 아닌 관광 도시 베니스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 거리 아닌가! 겉으로 번지르르하게 하고 다니는 놈팽이들은 널리고 널렸다. 중요한 건 껍데기가 아니다. 속이 얼마나 실하게 채워져 있느냐는 것이다.

  잭팟!
  칼라와 유니스는 서로 마주보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서로의 얼굴에는 똑같은 흥분이 서려있었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칼라는 바위를 냈고 유니스는 가위를 냈다. 이번에는 유니스가 먹잇감을 상대할 차례였다. 코트를 챙겨서 서둘러 맥도날드를 빠져나와 잰 걸음으로 남자에게 접근했다. 남자는 플리마켓을 돌아다니며 상점과 좌판 사이를 우왕좌왕하는 중이었다. 스윙 보틀이나 중고 레코드판, 혹은 도금 타이 클립과 같은 자잘한 악세사리들을 집었다 놓았다 하며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돌고 또 돌았다. 같은 좌판으로 다시 돌어가는 일도 있었다. 아마도 뭔가 사고 싶은 눈치인데 쉽게 결정을 못 내리는 모양이었다. 1,000 유로 짜리 토드백을 들고 600 유로짜리 스니커즈를 신은 남자가 길거리 좌판에서 1.70 유로 짜리 스윙보틀이나 3.50 유로 짜리 커프스 단추 하나를 못 사서 저 난리라니. 이윽고 보다 못한 장사꾼이 한 마딜 하는 듯 했다. '거 안 살 거면 다른 데 가쇼!'라고. 남자는 머쓱한 표정으로 (원 스트라이크!)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투 스크라이크!) 쭈삣쭈삣 뒷걸음질을 (삼진 아웃!) 쳤다. 알맞은 먹잇감을 골랐다는 확신은 점점 더 강해졌다.
- 어멋!
  유니스가 남자와 부딪힌 것은 사고가 아니었다. 남자가 뒷걸음질을 하는 방향을 보고 딱 한 발만 앞서 재빠르게 그 자리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런 가엾은 남자들은 자신의 앞에 덫이 놓여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겠지. 그들이 알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때문에 나동그라진 것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 뿐이다. 신사가 아니어도 넘어진 여자를 앞에 두고 태연할 남자는 없을 것이었다. 물론 칼라와 유니스가 항상 이런 방법을 쓰진 않았다. 뭐랄까, 너무 고전적이고 진부하지 않은가. 상대를 봐가면서 먹혀 들어가겠다는 확신이 없었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그녀들에게는 여러 가지 전술이 있었고 상대와 상황에 맞게 그것을 변용할 뿐이었다.   
- 죄송……해요.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다치신 데라도 있으……. 
  남자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의심의 눈치조차 없어 보였다.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거기까지는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녀는 더 좋은 걸 발견했다. 남자가 완전 쑥맥이라는 사실이었다. 얼굴이 귀 밑까지 빨개진 남자는 그녀의 눈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숙련된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를 체크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다 그녀의 아주 잠시 불룩한 가슴에 눈길을 주었고 (괜히 혼자 민망해하며) 더 아래로 시선을 밀어 보냈다. 날씬한 다리를 바라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므로 시선은 그녀의 구두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그 또한 쑥스러웠는지 지저분하지만 비싼 자기 스니커즈로 고개를 돌렸다. 뭐 대단한 일도 아닌데 안절부절을 하지 못했다. 

(이야! 오늘은 정말 쉬운 게임이 되겠는 걸?) 

그녀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타입의 먹잇감은 처음에 적당히만 유혹해 놓으면 일이 훨씬 쉬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감정을 꾸며낼 수 있을만큼의 강한 의도가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는, 순진해 빠진 부류들이기 때문이었다.
- 괜찮아요. 저도 그쪽이 오는 걸 못봤으니 제 잘못도 있네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아하게 일어나서 제 갈 길을 가려는 듯 옷을 털고 뒤 돌아섰다. 속으로 셋을 세었다.

  (하나, 둘, 그리고 셋.)

  그녀는 마치 잊은 것이 있었다는 듯 다시 돌아서 (당연히) 아직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남자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남자는 아예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그녀는 아주 중요한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 초면에 실례지만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네요. 혹시…… 요즘에 근심거리가 있진 않나요?
  (당연히 있겠지. 세상에 근심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 그게……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요…….
- 그럴 줄 알았어요. 보여요.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른 먹잇감이 보여요!)

- 뭐가 보인다는…… 건가요?
- 아니에요. 괜한 말을 했네요.

  그녀는 열두 시의 신데렐라처럼 황급히 돌아서 걸음을 재촉했다. 먹잇감 열 중의 아홉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했다. 따라와 남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걸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허나 남자는 열 중의 아홉이 아닌 나머지 하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궁금하고 찝찝하기는 한데 따라가서 붙잡고 물어볼 생각까지는 없는 쪼다. 휴, 못 살아. 그녀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물론 자신감이 없다는 건 좋은 징조였다. 다만 찌가 유인하는대로 따라올만큼의 자신감도 없단 점은 문제였다. 그녀는 걷는 속도를 늦추었고 행인들의 무리 속에서 완만하고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뒤로 돌아 남자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다행히 (당연히?)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 차마 발 걸음이 떨어지지 않네요. 그냥 가려고 했는데…….
  (댁이 적당히 따라와주면 나도 편하잖아!)
- 그게…….
- 잠시 걷죠. 시간 괜찮으면.
  (물어라, 물어! 제발 좀!)
- 음…….
- 이 이야기는 꼭 해드려야 겠어요.
  (제발 좀 듣겠다고 해줘!)

 

  남자는 쭈삣거리더니만 이미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그래도 큰 고비를 넘겼어. 일단 먹잇감을 따라오도록 만들면 성공 확률은 30%가 되었다. 방금 그 단계를 통과한 것이다.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순발력으로 재치있게 상황에 맞는 전술을 고안해냈다. 그리고 상대를 믿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뿌듯해진 그녀는 속으로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유니스 로즐린 달튼. 어쩌면 너는 배우가 되었어야 해!"

  돌이켜보면 배우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만 아니었으면 말이다. 파푸아뉴기니 원시부족의 추장 같은 세계관을 가졌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꿈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런던 토박이 영국인인 아버지는 어처구니 없게도 야구광이자 바둑광이었다. (그건 확률광이라는 뜻 아닌가!) 아버지는 모든 상황을 야구와 바둑에 빗대기를 좋아했다. 아버지의 표현을 빌자면 '배우로 성공할 확률은 5판 3선승제 시리즈에서 두 판을 내리 내준 다음에 세 판을 뒤집어 승리하는 것과 비슷한 확률'이었다. 그 당시 그녀는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야구나 바둑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그 뉘앙스만큼은 대충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

 

  스트라다 누오바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자와 무심히 걷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맥도날드로 되돌아가는 길을 계산에 넣고 있었다. 남자의 정신이 혼란스러운 틈에 골목 사이로 유도하여 방향을 틀어버릴 생각이었다.
- 짧은 시간이었지만 당신 눈동자에 걱정스러움이 맺혀있는 걸 봤어요.
- 아…….
- 그래서 차마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았죠. 사실 친구랑 약속도 있는데.
  그녀는 노골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항상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남자들의 방어막을 해제시키는 데 있어 헤픈 웃음만큼 유용한 것도 없었다. 남자와 같은 타입은 적당한 경계선에서 마치 남녀간의 긴장처럼 몰아가면 훨신 더 쉽게 그물 안으로 들여 보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버지라면 이런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겠지. 정공법이 아니니까.' 그녀는 스포츠도 바둑도 잘 몰랐지만 규칙이 무엇이든 최종적으로는 승리를 목적함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때로는 변칙도 유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 그래서…… 다시 물을께요. 최근 걱정거리가 있진 않나요?
- 사실은 그래요. 있죠.
- 어떤 건가요? 아! 물론 이런 질문이 실례가 안된다면 말이에요.
- 그건…….
  남자는 실없이 미소를 지었다. 허물어진 옛 신전 같은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 인생을 다 바쳐 이뤄낸 사업이 있는데……
  사업? 그녀는 쾌재를 불렀다.
- 최근 잘 풀리지 않았어요. 정확히는 망했죠.
  (이런 젠장할!)
- 저런 안되었네요. 도대체 어쩌다가!
- 사기를…… 당했어요. 가장 믿었던 친구에게.
  (그럴 법도 해. 댁 같은 사람에게 충분히 있을만한 일이야.)

- 세상에! 정말 많이 힘드시겠네요.
  (그래도 남은 재산은 좀 있으시겠죠?)
- 그 모든 시간을 뒤로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데 마음이 잘 안 잡히는 거죠.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남자의 사연에 가슴 아파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업이 망한 건 딱한 일이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정말 딱한 사람이면 1,000 유로 짜리 토드백을 들고 600 유로짜리 스니커즈를 신지는 않겠지.
- 뭐랄까? 좀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단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할까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든 그녀의 머릿 속에는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맥도날드로 데리고 가야해. 그래서 칼라와 합류하여 좌우 협공으로 이 남자의 정신을 쏙 빼놓아야 해. 일단 먹잇감이 맥도날드로 끌려 들어가면 확률은 80%가 되었다. 굳이 아버지 식으로 따지자면 '1사를 깨지 않고 주자를 3루까지 보내는 격'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여러가지 방법으로 스코어를 올릴 수가 있다고 하셨다. 정확히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여하튼 점수를 낼 확률을 높여야 한다는 부분에 있어서는 그녀도 전작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꼭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예요.
- 정말 그럴까요?
- 다만 다시 앞으로 나가려면 액운을 떨칠 계기가 필요해요.
- 계기……라고요?
  그녀는 살짝 긴장했다. 이 부분에서 놓친 먹잇감들이 있었으니까.
- 안 좋은 일이 반복되는 데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해결해야죠.
- 그게 뭔가요? 어떻게요?
-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저는 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요.
  (웃으면 안돼! 제발 웃지 말아줘!)

  다행히 남자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표정이 심각했다. 아까보다 더 심각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지금이야, 유니스! 생각할 틈을 주면 안돼! 몰아 붙여!)
- 당신을 두고 그냥 제 갈 길 가지 못했던 것도 실은…… 안 좋은 기운이 당신을 감싸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에요.
- 기운이 보인다고요? 어떻게요?
- 색깔. 제게는 그게 색깔로 보이죠. 당신의 주위에는 자홍색 빛깔이 선명하고 짙게 깔려있어요.  
  (웃으면 안돼! 제발! 제발! 제발! 웃지 말아줘!)
- 그럼…….
- 의식을 치르면 되요.
  (그리고 의식에는 돈이 들죠. 세상에 공짜는 없으므로.)

  이 대목에서 도망가지 않는 먹잇감은 거진 저녁 식사로 밥상에 올라갈 거리고 봐도 좋았다. 남자는 도망가지 않았다. 도망갈 생각도 없어 보였다.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남자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그들은 작은 골목을 가로질러 맥도날드로 향하는 중이었고 스트라다 누오바의 맥도날드 창가 자리에서는 칼라 자매님이 날카롭게 칼을 벼려 놓고 대기 중이었다. 아버지라면 3루까지 주자를 안전하게 보냈다고 칭찬하실 것이다. 잘했어! 유니스 로즐린 달튼! 지금까진 아주 훌륭했어. 흠 잡을 곳이 없었어.

  한 블록만 더 가면 맥도날드였다. 그녀와 칼라는 그 곳에서 (해피밀을 먹으며) 남자를 무너뜨려 의식(이라고 그녀들이 부르는 허접한 행위) 치를 돈을 뜯어낼 참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건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 자매님들이 이렇게 불철주야 거리로 나서서 땀흘려 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에도.

  모든 일이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야구광이자 바둑광이었던 유니스의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인용했던 요기 베라의 명언이다.
  레니 크레비츠의 노래도 있다. 아버지는 아마 모르겠지만.

  유니스의 마지막 기억은 맥도날드의 크고 노란 M자 모양 간판에 멈춰 있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려던 참이었다.
- 그런데 너무 춥지 않아요? 잠깐 들어가서 같이 이야기 해요. 맥카페라도 마시면서.
  그녀에게 이 게임은 거의 다 끝난 것처럼 보였다. 물론 때로는 강력해보이는 한 수가 그저 평범한 한 수에 봉쇄되어 판이 넘어가는 경우가 없진 않았다. 열 명의 두 명 꼴로는 맥도날드까지는 순순히 따라왔으나 그녀들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갔다. 그래도 그런 놈들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 그러니 지금 이 분기점까지는 아주 유리한 상황이야.

  그러나 다시 이어진 그녀의 기억은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에서 연결되었다.

 

*


  팔이 욱신거리는 고통 속에서 그녀는 깨어났다. 조금 더 명확히 정신이 돌아오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고 통증은 갈수록 심해졌다. 분명히 뭔가로 세게 얻어맞은 듯 했다. 그녀의 양 팔꿈치는 족쇄 같은 것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양 무릎도 마찬가지였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어 보았지만 족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맨 살과 맞닿은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했다. 절로 몸이 떨렸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 곳에서 단 한 줌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빛이었다. 그리고 희망이었다. 온기는 없었고 대신 습기가 가득했다. 어디선가 작은 동물들이 아주 재빠르게 움직이는 소리도 들려오는 것 같았다. 두려운 마음이 검푸른 안개처럼 피어 올랐다.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유니스 로즐린 달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그러나 그녀는 곧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 똑바로 차린들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차가운 기운이 뼈속 깊숙히 스며들어 생각을 마비시켰다. 그러고 보니 외투가 사라졌어. 여기에 매달아 놓기 전에, 누군가 외투를 벗긴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옷은 그대로였다. 빨간색 롱 가디건과 라비아스 청바지 모두 그녀가 기억하는 그대로였고 (오! 하나님!) 다행히 누가 옷과 몸에 손을 댄 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굽 높은 구두도 그대로 신겨져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그 남자를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늘의 먹잇감' 말이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순간에 바로 옆에 있었으니까.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이런 짓을 한 걸까? 한없이 유순하고 만만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쉽게 믿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사람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조심성 없이 먼저 접근했던 건 너였어.”
  (틀린 말씀은 아니에요. 하지만…….)

  가끔씩 그녀는 자신을 꾸짖고 비난하고 힐책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시달렸다. 물론 그 목소리는 그녀 안의 어느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을 당하는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받은 압박이 만들어 낸 자기 방어의 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녀의 상담의는 이런 말을 했었다. 올바른 분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여전히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기계적으로 등장하는 (잘 이해하지도 못하는) 야구에 대한 비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확률을 우습게 여기면 못써. 악수와 묘수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거든.“ 
  (알아요. 요행을 바라지 말고 정석대로 하란 말씀이죠?)

 

*


  어쩌면 어둠이 시간 인지 능력을 앗아가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도 공포에 압도당하여 소리를 지르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는 확신이 점차 강해졌다. 상대는 멀쩡히 길에서 여자를 납치해다가 이렇게 벽에 매달아 둔 사람 아니겠는가! 좋은 사람일 가능성보다는 나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다면 굳이 만남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탈출 가능성을 떠나 대비할 시간이 있어 나쁠 것은 없었다.

  그녀의 생각은 다시 남자에게로 옮겨갔다. 유순하고 굼뜬 그 남자. 손쉬운 먹잇감. 손쉬운 요릿감. 겉모습만 봐서는 이런 일을 저지를 사람처럼 생각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남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일 수도 있었다. 가령 제 3의 악당이 있어 자신과 남자의 뒤에서 슬그머니 나타났던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맞다면 남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비슷한 처지가 되어 여기 어딘가에 묶여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 보았다. 짙은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도 여전히 단서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만약 여기 어딘가에 묶여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풀려나려고 몸부림을 친다면 지금과는 다른 소리가 들릴 텐데 말이야. 지금처럼 공허한 바람 소리가 아니라 심장이 뛰는 소리,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람의 소리가 들리겠지.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왜 하필 내가 선택된 걸까?

  “누굴 원망할 것도 없다. 네 잘못이야. 길거리에서,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들을 상대로 사기를 쳐서 먹고 산단 생각을 할 때는 단 한 번도 이런 상황에 대해 가정해 보지 않았던 거니? 만약에 그 남자들이 마피아라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니? 혹은 연쇄살인마라면? 세상 일을 그렇게 쉽게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제발, 그만 하세요. 그리고 제 일을 사기라고 부르진 말아줘요.)

  물론 가짜 의식을 핑계 삼아 남의 돈을 뜯어낸다는 관점에서 보면, 그녀와 자매님들이 하는 일은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는 일이 맞았다. 사기의 정의와 범위를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설정하든 상관없이 이 일은 사기였고 범죄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이 일은 사기 이상의 무엇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는 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녀는 밤중에 무작정 신학교를 뛰쳐나와 배를 타고 베니스로 도망을 왔다. 그리고 이 일을 시작했다. 신의 의지에 반한다는 것보다 아버지의 의지에 반한다는 사실이 더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이 일에는 (그녀의 꿈이었던) 연기와 상통하는 요소가 있었다. 본디 훌륭한 사기는 연기력이 뒷받침되어야 칠 수 있는 법이다. 또한 사실 배우의 연기라는 것은 오락 산업이 만들어 낸 사기의 일종(가공의 자아에 더 깊이 몰입할수록 더 많은 박수를 받는)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 윌리엄 달튼경의 딸인 유니스 로즐린 달튼양이 감히 길거리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한 사람의 훌륭한 배우로서 어수룩한 남자들을 벗겨먹는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남을 속여 돈을 뜯는 일에 크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이유에서였다.  

‘칼라. 맞아.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그 애가 신고를 해줄꺼야.’

  유니스의 생각은 이윽고 칼라에까지 다다랐다. 맥도날드 창가 자리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자매님은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먹잇감을 따라갔던 자매가 약속한 시간 내에 돌아오지 않은 적은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으므로. 어쩌면 이미 신고가 들어갔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경찰이 이미 수사를 시작했겠지. 스트라다 누오바로부터 멀리 끌려오지 않았다면 여전히 희망은 있었다. 모든 걸 운명에 맡겨야 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 부디 경찰들이 이 곳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칼라. 이제 내 운명은 자매님 손에 달렸어. 당장 경찰서로 찾아가. 내가 없어졌다고 말해줘. 그리고 우리가 잭팟이라고 점찍었던 그 남자(오늘의 먹잇감 혹은 오늘의 요릿감)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말해줘. 물론 그 남자가 범인일 거라고 꼭 단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면에서든 도움이 될 꺼야. 그런 사소한 조각들을 모아다가 퍼즐을 맞춰 완성하는 게 그 사람들의 일이니까.’

  유니스와 칼라는 3년 전에 만났다. 피렌체 출신의 칼라는 유니스보다 다섯살 정도 어렸다. 빨갛고 탐스러운 머리칼이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본인은 작은 키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 듯 했는데, 아무래도 남자들이 보기엔 그런 자그마한 체구가 오히려 더 매력적일 수 있단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화려한 몸치장에 노력을 기울이는 점, 6인치 이하의 힐을 신지 않는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면 확실히 그랬다. 그 애는 임무를 수행할 때도 악착같이 성적인 매력을 앞에 내세우려고 애썼지. 마치 그런 부분을 배제하면 자신이 한없이 무기력한 어린아이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각자의 스타일을 최대한 존중하는 자매님들이지만 그 사이에서도 칼라의 과감한 방식은 늘상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 액땜 의식을 위한 비용을 뜯어내는 작업과 무슨 연관 관계가 있느냐는 식으로. 그렇지만 유니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유혹도 연기의 일종이며 사기와 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들어 그 애를 두둔하고는 했었다. 파트너로 월요일과 수요일에 함께 나서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자매님들은 그 애를 싫어했으므로. 

‘그러니 칼라 자매님! 이 언니한테 은혜 갚을 기회가 생긴 거야.’

  어김없이 아버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확률을 우습게 여기면 안된다니까. 경찰이 신고를 접수하고 수사를 개시하여 여길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 반면에 널 여기에 묶어놓은 놈이 여길 들여다보기까지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간단한 산수란다. 얘야.”
  (그럼 절더러 뭘 어쩌란 말이죠? 이렇게 묶인 채로…….)

  하지만 아버지의 말이 맞았다. 잠시 후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인기척이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촛불의 일렁거림과 그에 따라 출렁거리는 사람의 그림자 외에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그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안도감이 들다니. 이 대목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것보다는 물론 두려움이 덜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 남자 또한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 아닌가. 그는 천천히 (묶여있는) 유니스를 향해 다가왔다. 지하실 특유의 울림으로 인해 남자의 발소리는 그녀의 귀에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소리가 멈추었을 때 남자는 그녀 앞에 있었다. 작은 촛불은 일렁거리며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떻게 보면 열기에 살짝 달아오른 느낌도 들었고, 다르게 보면 꼭 가면을 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순간 유니스는 느꼈다. 묘한 긴장과 흥분을, 동시에.   

- 일어났어요?
  남자는 (예상보다 훨씬) 부드럽게 말했다. 길에서 여자를 납치해다가 지하실에 감금한 남자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그런 목소리였다. 마치 로맨스 영화 주인공의 것처럼. 그녀는 (예상을 뒤엎는) 부드러운 분위기가 일종의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생각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고, 남자가 해코지할 생각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그래서 얼마든지 몸 성히 살아나갈 여지도 남아있으리라는 생각을. 그래, 맞아. 이건 여주인공이 납치 당하는 내용의 영화이긴 하지만 아주 수위가 높은 건 아닌 거야. 적당히 겁만 주는 선에서 조절하는, 전 연령 관람가 가벼운 스릴러 영화 같은 거지. 그런 영화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 걸 본 적 있어?

 (말인 즉,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는 뜻이야. 유니스 로즐린 달튼!)

  그녀가 의외로 차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확신 덕분이었다. 
- 역시 당신이었군요. 여긴 어딘가요?
- 저희 집입니다. 다만 땅 위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연하지. 누가 봐도 여기는 지하실 아니겠어?)

- 전 왜 묶여 있는 거죠? 이렇게? 
- 뭐랄까, 굳이 설명하자면……당신은 손님이 아니니까요. 
  남자는 무표정했고 대답은 심드렁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긴장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괜찮아. 마음 편하게 먹어! 지레 겁 먹을 필요는 없어!)

- 손님이 아니면…… 늘 이렇게 묶어 두나요?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에서 어떤 징후를 읽어내어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스트라다 누오바를 누비며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을 속이고 지갑을 열게끔 만들었던 내공으로도 쉽지 않았다. 남자는 위험한 표정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눈동자만큼은 텅 비어 있었다.

- 일단은 좋아요. 그럼 제가 풀려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 내가 원하는 답을 주면 됩니다.
- 답이요? 말하자면 일종의 게임 같은 건가요?
- 게임이라……. 그쪽이 오늘 길에서 날 붙잡고 한 건 뭔가요? 그것도 게임인가요?
  그 말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팔꿈치 쪽의 저릿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통증은 작은 알갱이들의 무리라도 되는 것처럼 혈관으로 몰려갔다.
- 알았어요. 우선 지금 팔 다리가 너무 저린데 말이에요. 혹시 조금 느슨하게 해줄 순 없나요? 아니면 최소한 족쇄를 다른 위치로 좀 옮겨줘요. 관절이 있는 곳에, 그러니까 팔꿈치와 무릎에 직접 채우는 건 솔직히 조금 심했어요. 정말 고문 당하는 기분이라고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이쯤해서 승부수를 한 번 던져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 차라리 노끈으로 묶는 건 어때요? 아니면 수갑이나? 솔직히 고백하면 나도 그렇게 노는 걸 꽤 좋아하는데.
  (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제발 제 짐작이 맞게 해주세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그녀는 남자의 허를 찌르고자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녀는 남자가 여성을 상대하는데 익숙치 않아 어려움을 느끼는 타입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세게 나가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어.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거지. 물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살짝 ‘그래도 너무 나간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공격에 앞서 먼저 내 수를 지키라는 격언이 있단다. 무모한 도발은 절대 금물이야.”
  (알아요. 하지만 상대의 의도를 알고 싶으면 일단 붙어보라는 말도 있죠……)

  남자는 미소지었다. 그 미소는 햇살 좋은 날의 지중해 바다처럼 부드러워서 그녀 또한 한결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녀도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남자는 아주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고, 덩달아 마음이 놓였는지 그녀도 절로 웃음이 튀어 나왔다. 남자가 ‘하하하’ 소리를 내며 더 크게 웃었다. 그녀도 '깔깔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물론 그녀가 내는 소리는 ‘일단 풀어주기만 해봐. 본 때를 보여줄 테니까’라는 뜻이었다. 웃음이 밀어낸 눈물을 닦아내며 남자는 그녀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여전히 부드럽고, 또 한없이 차분하게.
- 그렇게 노는 걸 좋아했던 분이 저기도 있죠.

  아마 그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남자가 무심하게 촛불을 들어 가리킨 방향에서 물결처럼 일렁거린 이미지를. 남자는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기를 원했는지를 몰라도 초를 하나 더 가져와 반대쪽 벽에 놓았다. 그곳에는 그녀와 똑같은 모양으로 묶여있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여자였다. 양쪽 팔꿈치와 양쪽 무릎에 족쇄가 채워진 상태로, 그곳을 경계로 사지가 끔찍하게 뒤틀려 무기력하게 축 늘어진 몰골이었다. 순간 그녀는 맞은 편에 거울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설마 내가 저런 꼴로 매달려 있는 건 아니겠지?' 밀려오는 두려움에 평상심이라는 이름의 방파제가 무너졌다.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좋게 끝나기 어려울지도 몰라.)

 

*


  거울은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주문을 걸었다. 미약한 촛불에 의지한 빛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사위가 눈에 익어왔다. 눈을 몇 번 더 깜빡일 시간이 지나자 (그 사이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팔짱을 끼고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맞은 편의 여자는 체구가 꽤 작아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빨간 머리처럼 보인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의심과 확신의 경계에 있었지만 이미 마음 속으로는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작은 체구의 빨간 머리를 알았다. 몇 년 사이 꽤 가까이 지냈다. 오늘만 해도 짝을 지어 함께 길을 나서지 않았던가. 칼라 자매님. 작은 체구가 (정확히 말하자면 작은 키가) 컴플렉스였던 그 애는 늘상 위험하리만치 높은 구두를 신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맞은 편 여자의 뒤틀린 다리 끝에 걸려 있는, 아주 눈에 익은 크리스찬 루부탱의 검정색 6인치 하이힐을 향해 있었다. 여자들에게 구두란 지문이나 치열만큼 확실한 신원 확인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 오! 하나님! 오! 하나님! 오! 제발!
  신학교가 싫다고 야반도주한 주제에, 이제와서 하나님을 찾는단 사실이 아이러니하긴 하다는 생각을 잠시 (아주 잠시) 했던 것도 같았다. 아버지라면 틀림없이 이런 말씀을 하시겠지.

  “그러게 내가 뭐랬니. 정석대로 둘 때 두 배는 강해지는 건 인생도 마찬가지야.”
  (제발 좀 닥쳐요!)

  두려움과 슬픔에 유니스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두 눈은 퉁퉁 부었고 입 안에서 단내가 났다. 그러자 남자의 얼굴은 부끄러움이라도 타는 것처럼 귓볼까지 빨갛게 변했다. 아마도 그녀의 그런 반응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눈 앞의 (끔찍한) 업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귀속된 것임을 확실히 하려는 듯, 구석에서 자루가 긴 해머를 끌고 와서 그녀 앞에 수줍게 섰다. 

  (그러니 따단! G등급 전연령 관람가처럼 여러분을 방심하게 했던 이 영화는 사실 NC-17 등급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 칼라는…… 오, 하나님. 도대체 칼라는 왜 여기에? 
- 저 숙녀분 이름이 칼라인가요? 어쩐지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 왜? 도대체 왜? 뭘 잘못했길래?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다시 퀴즈를 시작을 해봅시다. 저 여자는, 그러니까 칼라는 도대체 뭘 잘못했던 걸까요?
- 몰라. 모른다고! 이 미친 새끼야!

  해머의 끝이 그리는 완만한 곡선은 느린 화면처럼 눈에 들어왔다. 기존에 인지하던 체계와는 다른,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 놀라운 경험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그녀는 미처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족쇄에 걸려 있는 오른쪽 무릎 바로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발목 아래로는 중력을 따라 고정된 무릎과 다른 방향으로 돌아갔다. 맙소사! 칼라에게 (적어도 칼라의 오른쪽 다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남자를 유혹하는데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그 외엔 철저하게 무능했던 칼라 자매님은 네 번의 소중한 기회를 허투르게 써버리고 만 것이었다. 

 

*


유니스의 어린 시절. 야구광이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야구가 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딸을 무릎에 올려놓고  경기 내용을 해설하는 실로 고약한 취미가 있으셨다.
- 야구나 바둑이나 마찬가지야. 아마추어들은 한 수 한 수의 성공에 일희일비하지.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전체 대국의 큰 그림을 파악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항상 형세판단을 게을리 하면 안되지. 국지전에선 얼마든지 질 수 있어. 져도 괜찮아. 그 대신 전체 대국에서 이기면 돼. 

  “지금도 마찬가지란다. 네 귀(귀퉁이) 중에 한 귀를 빼앗긴 셈이지만 그 정도로 지지는 않아.”
  (하지만 너무 아파요. 아프다 못해 감각을 느끼지도 못하겠는걸요.)

 

*


  해머가 축축한 시멘트 바닥 위로 털털거리며 끌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왜소한 체격을 감안하면 그 정도 무게의 연장을 자유자재로 다룰만큼 힘이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남자의 (짧고 가벼운) 한숨 소리를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고통과 추위 속에서도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세 번 더 얻어 맞고 칼라 자매님과 똑같은 꼴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나저나 칼라는 어떤 상태인걸까?' 처음엔 그 애가 죽기라도 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 얻어 맞았으면, 사지가 부러졌겠지만 죽었을 거라고 미리 단정할 이유는 없었다. 혹시 견디지 못하고 혼절이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떤 신호들 - 앓는 소리라던가, 침 삼키는 소리라던가, 의지와 무관하게 경련으로 나는 소리라던가, 그런 것들조차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주 작은 소리도 천둥처럼 울리는 지하실이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그녀가 놓쳤을 리 없었다.

- 두번째 질문입니다. 아마 지금 가장 궁금하게 생각할 내용을 이야기해보죠.
  남자의 목소리는 끔찍하리만치 차분했다. 방금 막 다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소름이 끼쳤다. 몸을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다만 여전히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는 않았다. 여성과 상대하길 두려워하는 것……. 그저 등쳐먹기 쉬운 먹잇감의 특성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하필 이런 사이코가 걸릴 줄이야! 그녀는 남자에게 '닥쳐!'라든가 '꺼져!'와 같은 말을 하고 싶은 말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불필요한 자극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깨달았기 때문에 애써 그런 마음을 제어하려고 노력하여야만 했다.   

- 당신이 여기 이렇게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 그건…….
  (몰라서 물어? 네 놈이 납치해다가 여기 묶어놓았기 때문이지!) 

- 내가 뭐가 잘못을 했기 때문이군요.
  그녀는 실없이 웃었다. 스스로도 꽤 괜찮은 한 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질문의 답을 그녀는 알지 못했지만 (정말로 그녀는 자신이 왜 잡혀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적절한 회피와 방어를 겸해 어쨌든 답안은 제출했다. 또한 남자가 원할만한 대답이다. 이런 끔찍한 일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으니, 그야말로 저런 사이코들이 좋아할만한 모범답안 아닌가! 게다가 남자의 요구는 내는 문제를 맞춰보라는 것이었지 틀리지 않은 답을 말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적절히 대처한 것 같아 그녀는 다소 의기양양해졌다.

  (자! 이제 우리는 한 점씩 단수로 몰린 상태로 서로 물려 있어. 어떻게 나올 건데?)

  생각해보니 참말로 야구광이자 바둑광의 딸 다운 표현이기는 했다. 아버지라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그걸 바둑 용어로 '패'라고 한단다. 야구에서 비슷한 상황으로는…”

아니면,

  “얘야, 조심해! 해머가 또 날아온다?”

 

*


  고통이란 무엇일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 아버지 바람대로 신학교를 몇 년 더 잠자코 다녔으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다른 먼 곳의 누군가를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남자의 말("그런 장난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어쩌고 저쩌고")을 들으며, 예측 가능한 가장 빙퉁그러진 전개가 만들어 낸 괴상망측하게 뒤틀린 왼쪽 다리를 보며, 맞은 편 벽에 매달려 영원한 침묵에 빠진 칼라 자매님의 무존재를 느끼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자문했다.

  (내가 도대체 저 남자에게 뭘 잘못한 거지?)

  고통의 성분을 이해하는 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진짜 고통이 밀려 들어왔다. 너무 아팠던 나머지 그녀는 있는 힘껏 악을 썼다. 악을 쓰면서, '왜 진작 이렇게 해보지 않았던 걸까?'하는 생각도 했다. 운이 좋았다면, 인근 지역의 누군가 듣고 경찰에 신고를 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살려줘요!"라고 소리 내어 절규해 본 다음에서야 그녀는 남자가 이제까지 굳이 그녀에게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은 마음에 후회스러움이 밀려왔다. 형세 판단이 잘못되었어. 남자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대로 한복판에서 납치되어 벽에 매달렸다는 극단적 조건에서도.

  남자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젖먹던 힘 다하여 괴상을 뽑아내는 그녀의 입을 막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건 좋은 소식이자 나쁜 소식이었다. 숨쉬고 말할 자유를 당장은 박탈당하지야 않는다는 건 좋은 소식, 이렇게 소리를 지른들 소용이 없으리란 사실이 남자의 계산에 들어가 있다는 건 나쁜 소식, 대단히 나쁜 소식.교묘한 패는 한 방에 박살났고 이제 네 귀 중의 두 귀를 빼앗긴 상태다. 남은 수가 뭐가 있을까? 아니, 남은 수가 있기나 할까? 

  “얘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뒤집기가 불가능하진 않단다. 세 판 중 첫 판을 내주고도 두 판을 내리 이길 수 있지. 다섯 판 중 두 판을 내주고도 세 판을 내리 이길 수도 있고. 바둑에서도, 야구에서도, 스모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가끔 아버지가 영국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워요.)

 

*


- 힌트, 힌트를 좀 줘요.
  그녀는 애원하듯 말했는데 사실 악다구니를 쓴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해 보였다. 양쪽 무릎 아래에서 강렬한 고통이 치밀어 올라오니 터져나오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쪽 다리만 아프던 조금 전의 상황이 미치도록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 좋아요. 힌트 겸 세번째 질문을 하도록 하죠. 힌트는 맞은 편의 저 여자분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질문은 이겁니다. 저 여자분은 또 왜 여기에 저런 꼴로 있는 걸까요?

  힌트는 칼라 자매님이다. 그녀는 머리를 굴렸다. 굴리려고 노력했다. 칼라와 유니스는 똑같은 일에 휘말렸고 (아마도 시간 차를 두고) 똑같은 위협을 겪고 있다. 이 일은 두 사람 사이의 어떤 공통분모와 연관이 되어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5년 전에 만났다. 칼라는 어떤 애였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너무도 명확했다. 여러 번 떠올렸다시피 칼라는 화려한 걸 좋아했다. 화장도, 명품도, 그리고 그 결과물을 뽐내기도. 유니스는 그런 타입은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리고 자그마하고 화사한 칼라를 볼 때마다 그녀는 솔직히 열등감을 느꼈다. 나이도 많고, 은근히 살도 찌고, 전혀 예쁜 얼굴도 아니고, 사각턱에, 안경제비에…….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이런 일로 파트너를 이루지 않았다면 어울렸을 타입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녀는 칼라에 집착하는 남자들이 그동안 꽤 많았더라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길에서 스쳐가는 남자들이 너나없이 한 번쯤은 돌아볼 타입이었지.
- 칼라와 만나던 남자들 중 하나였군요. 저 앤 끝이 좋지 않게 헤어진 남자들이 꽤 있었어요.
  남자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따뜻하게 보여 사람을 안심시키는 지중해 미소.
- 이제야 조금 노력을 하는군요. 그렇지만 답은 아니에요. 
- 아니에요?
  남자는 해머를 들어 그 끝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 그렇다면 그쪽을 잡아올 이유는 없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둘 사이의 치정 문제라고 한다면 제 3자를 잡아올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녹이 슨 쇠맛이 나는 것 같았다. 남자는 해머를 만지작거렸다. 이 퀴즈쇼에 시간 제한이 없다고 가정하면 안될 것 같단 생각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칼라와의 공통점. 그녀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이 같이 오해나 원망을 살만한 일을 하고 다닌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대개 사고를 치는 쪽은 칼라였지. 경찰에게 오해를 산 적도 있었고. 스트라다 누오바에서만 여러 차례 그녀들은 경찰의 심문을 받았다. 그 애의 지나치게 화려한 차림새도 그렇고 남자들에게만 (적극적으로) 지분거린다는 점에서 종종 매춘부로 오해받았던 것이다. 순수한(?) 의도의 종교인(?)으로 종교 의식(?)를 주선하고 있음을 설명하여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유니스는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해머를 만지작 거리는 남자의 손에 시퍼런 힘줄이 불거져 나오려는 찰나에 그녀는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 알겠어요. 당신은 우리가…… 몸 파는 여자라고 생각한 거예요. 당신은 그런 사람들이 불결하고, 또 그래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릴 잡아다가 가둔 거죠. 범죄소설 같은 걸 보면 그런 사건이 많이 나오잖아요. 물론 칼라 저 년이 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충분히 오해했을 법도 하지만…… 우린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순수하게 종교적인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좋은 뜻으로 사람들 기를 읽어주고, 또 나쁜 기를 없애는 의식도 열어주고…….
  남자는 실소했다. 그녀는 그것이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아니에요. 생각지도 못한 해석이네요. 상상력은 높이 사지만 정답과는 거리가 멀어요.

  얼마나 기회가 남아있을까.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어디선가 바람은 지하실 안으로 약하지만 꾸준히 새어들어오고 있었고 촛불은 이미 반 이상 타들어가고 남은 상황이었다. 한 번 더 틀리면 어깨로 해머가 날아오겠지. 오른쪽이 먼저일까? 왼쪽이 먼저일까? 순서에 상관 없이 몇 달은 미이라 꼴로 병원 신세를 져야겠지? (물론 일단 살아나간다면 말이다) 그렇게 치면 칼라도 마찬가지다. 저 애는 괜찮은 걸까? 다시 일전의 의문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칼라가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 저 애가 아직 살아 있다면 어째서 조용히 있는 걸까? 정신을 잃었어도 살아있는 생명은 끊임없이 소리를 내기 마련인데…… 통증이 만들어 낸 장난이었는지는 몰라도 순간 그녀는 이런 환각을 보았다.

칼라는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칼라가 고개를 들었다. 족쇄가 묶여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잠겨 있지는 않았다. 팔과 다리를 어렵지 않게 빼내었다. 빨간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고 씨익 웃었다. 초승달 모양으로 그려진 연분홍색 입술(디올 어딕트 454번의 색이다)에 생기가 흘렀다. 그러면 그렇지. 이럴 줄 알았어. 다른 설명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어. 정말 그렇다면 열에 아홉은 남자와 한 패이겠지. 칼라가 남자를 향해 걸어왔다. 루부통 하이힐 소리(그 높은 걸 신고 어떻게 균형을 잡고 걷는지 모르겠어)가 물방울이 물웅덩이에 똑똑똑 떨어지는 소리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칼라는 남자의 어깨에 다정하게 기댄다. "우리 어디로 같이 도망가요"라고 속삭인다. 비율이 맞는 그림이다. 꽤 어울린다. 거 봐, 항상 말했잖아. 키는 문제가 아니야. 오히려 그래서 남자들이 더 좋아할 거라니까.
  신이라도 들린 사람처럼 그녀는 남자를 향해 내뱉었다.
- 이제야 알겠어요. 당신과 칼라는 이미 아는 사이에요. 말하자면 한 패죠. 사실 저 애는 멀쩡하게 살아있고요. 저렇게 보이는 건 날 속이려고 분장을 한 거겠죠. 아니, 저 애가 맞긴 한가요? 인형 같은 걸 매달아 놓고 칼라라고 믿게 만든 건 아니고요? 아무튼 이게 다 날 등쳐 먹으려고 만들어 놓은 판이죠. 마지막 반전을 위해 숨죽여 기다리고 있던 저 헤픈 년은 때가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당신 어깨에 기대어 은밀한 말들을 속삭일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대답해봐요. 내 말이 틀렸나요?
  남자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요. 아니면 정말 어디가 좀 모자라던가.

  미처 대꾸할 틈도 없었다. 세번째 응징은 빠르고 신속하게 오른쪽 어깨에 이루어졌고 유니스는 그대로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


   영화를 많이 봤다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배우가 되길 희망했던 유니스의 십대 시절은, 영화를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가 없는 시간들이었다. 루키노 비스콘티, 로베르토 로 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페데리코 펠리니, 피에르 파 올로 파졸리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영화를 꿈꾼다. 로마에 가서 배우가 되어 다른 이들의 삶을 연기하길 꿈꾼다. 스트라다 누오바에서 자매님들과 작당하여 벌인 작고 악의없는 사기들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밑천이었다. 영국인 여배우가 필요한 역할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헐리우드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비록 예쁘지는 않고, 나이도 많고, 은근히 살도 쪘고, 사각턱에, 안경제비이기는 하지만……. 연기력만 인정받으면 성공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


  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한 가지는 충격으로 정신을 잃기 전 패닉 상태였던 자신이 온갖 부끄러운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이제 오른쪽 팔 하나만 남았다'라는 사실이었다. 이미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왼족 팔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위가 공포가 적절히 동반된 덕분에 통증의 정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아픈 게 맞는 건가? 혹은 더 아파야 맞는 건가? 혹은 의외로 덜 아픈 걸까? 고통을 인식하는 기준이라는 것이 망가져버린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미 바둑판 위의 세 귀를 빼앗겼고 남은 건 오직 한 귀 뿐이었다. 가망이 없는 게임인지도 몰랐다. 귓바퀴 언저리를 타고 어김없이 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귀를 모두 빼앗기면 돌을 던지거라. 진 게임에 힘을 뺄 필요는 없어.”
  (이미…… 돌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에요. 너무 지쳤어요.)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긴 자루 해머에 비스듬히 기대어.
- 마지막 질문으로 넘어갑시다. 당신은 여기서 어떻게 될까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질문만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주 쉬운 질문이었다. 정답은 이미 눈 앞에 있었으니까. 칼라와 똑같은 운명이 되겠지.
- 그 전에 나도…… 알고 싶은 게 있어요. 딱 하나만 질문하게 해줘요. 그래야 공평하잖아요.
  '공평'이란 단어에 남자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 도대체 공평하단 게 어떤 건지 알고나…….
  떨리는 목소리가 분노로 물들어 있었던 건 놀라운 일이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드러난 남자의 감정이었다. 그의 빈틈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뭔지도 알 수 있을텐데.
- 좋아요. 물어보도록 해요. 다만 내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 칼라는, 저 애는 어떻게 된 건가요? 살아 있긴 한가요?
  남자의 반응은 더 없이 차갑고 냉소적이었다.
- 그게 중요한가요? 당신과는 상관 없는 여자잖아요.
- 상관이 없다니, 우린 친구라고요.
- 당신은 친구를 그런 식으로 매도하나요?
- 그건…….
  (이봐요. 지금 내 꼴을 좀 보라고요. 물불 가리게 생겼나요?)

  남자는 양 팔을 높이 벌렸다. 극적인 장면의 연극배우처럼.
- 좋아요. 얼마든지 보여주지.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촛불을 칼라의 옆에 놓았다. 그리고는 그 풍성한 붉은 머리칼을 (마치 채소의 뿌리라도 뽑는 것처럼) 한 움큼 억세게 쥐어 잡아 들어 올렸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며 연약한 불빛 아래 칼라의 얼굴이 드러났다.
- 아!
  유니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탄식을 뱉었다. 유감스럽게도 남자의 해머가 다녀간 곳은 칼라의 두 팔과 두 다리만은 아니었던 듯 했다. 그리고 남자의 퀴즈쇼는 네 문제가 아니라 한 문제를 더해 다섯 문제로 구성되어 있는 듯 했다. '마지막 질문' 이후에 어떤 형태로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랐지만 (패자 부활전? 보너스 문제?) 한 문제가 더 남아있단 사실은 명백했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하게 인지하였다. 앞으로 두 문제를 더 틀렸을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를. 

 

*


  남자는 말했다.
- 자!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유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 저 애와 똑같은 결말로 끝날 것 같아요.
  남자는 피식 웃었다.
- 이래서 나중에 문제를 푸는 사람이 유리한 거죠. 이미 답을 봤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격양된 목소리로.
- 그런데…… 왜요? 왜 이런 결말이어야만 하는 거죠? 도대체 뭘 잘못했길래?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쩌다보니까? 아님 내가 미친 놈이라서?

  결국 또 이렇게 원점으로 돌아갔다. 왜 여기에 붙잡혀 와서 이런 변을 당하고 있느냐. 그 이유가 뭔진 스스로 알아서 생각해봐라. '그건 반칙 아니야?'라고 주장할 힘도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미친 놈 아닌가! 미친 놈을 상대로 무슨 반칙을 운운한단 말인가!) 그녀는 역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자신과 칼라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과연 저 남자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첫째, 저 남자는 스트라다 누오바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다. 둘째, 유순해 보이는 인상에 행동은 굼뜨고 바보같았다. 셋째, 꾀죄죄한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돌체 앤 가바나 토드백을 들고 페레가모 스니커즈를 신고 있었다 (그래서 돈 깨나 있을 거라고 가정했었지). 넷째, 스윙 보틀이나 중고 레코드판, 혹은 도금 타이 클립 같은 자질구레한 것들을 사러 다니는 중이었다. 아마 그 정도? 이런 단편적 정보들이 합쳐져 가리키는 사실이 있을까? 아버지의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녀는 인정하기 싫은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간주했었으니까.  

  “얘야, 우리는 지금까지 이 게임 하나만을 놓고 생각했는지도 몰라. 저 놈이 계속 우세를 점하는 사이에 우리가 판세를 뒤집으려고 애썼다고 말이야. 하지만 이것이 일련의 게임으로 이뤄진 시리즈라고 가정한다면…….”
  (맞아요! 어쩌면 이미 앞서서 다른 게임이 있었을 수도 있겠네요. 저 남자와 우리 사이에…….)

  “그렇다면 지금의 이 상황은 독립된 게임이 아니라 어제와 내일을 이어가는 연속적인 걸 수도 있어. 생각해 봐. 너와 네 자매님이 저 남자를 만난 게 오늘이 처음이었니? 확실해?”
  (모르겠어요. 이 일을 해온 게 벌써 몇 년인데 그걸 다 기억하겠어요?) 

  “먼저 한 판을 내준 게 너희가 아니라 저 남자라면? 이 모든 끔찍하고 기괴한 상황이 처음부터 저 남자의 극적인 뒤집기를 위한 짜여진 연출이었다고 한다면? 먼저 한 판을 내주고 내리 두 판을 따내기 위한 함정이었고 한다면? “
  (정말 그게 가능할까요?)

  “가능해. 바둑과 야구와 스모에서 그러하듯이. 그리고……. “
  (그리고 인생과 테니스처럼 말이죠?)

  그제서야 어둠 저 편에서 빛이 반짝거리는 듯 했다.
- 맙소사!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군요. 우리가 당신에게 접근했던 것이…….
  남자는 해머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혀가 보일 정도로 입을 딱 벌렸다. 질렸다는 표정으로.
- 그걸 기억해내는데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 거요?

 

*


  유니스와 칼라는 예전에도 한 번 그 남자를 '손쉬운 먹잇감'으로 골라잡았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그처럼 어벙하고 굼뜨게 돌아다니며 그녀들의 눈에 띄지 않을 가능성은 낮았을테니 말이다. 다만 같은 남자를 두 번 표적으로 삼을 확률에 대해서는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유니스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때 남자는 5만 유로를 지불하고 액운을 떨치는 의식을 치뤘다. 물론 실제로 의식에 들어간 비용은 채 8백 유로도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 액땜 의식이라는 것도 자매님들이 만들어 낸 가짜 연극이었고 말이다 (가짜 의식이 불운을 떨쳐내는데 있어서 어느 정도 효력을 장담할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었다).
- 얼마짜리 의식이었나요? 3만 유로, 5만 유로, 아니면 10만 유로?
- 5만.
  남자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내 비어있던 그 공허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파도가 일었다.
- 효력이 없었나요?
- 효력? 효력이라고? 지금 내가 무슨 고객센터에 컴플레인을 하는 거라고 생각해?
  남자는 해머를 들어 벽을 쳤다.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벽돌의 일부가 부스러져 내렸다.
- 당신들이 저지른 일은 사기야!
  유니스는 잠자코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 그런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당신들은 그게 사기라는 인식조차 못하지. 저 여자…….
   남자는 몸을 반쯤 돌려 칼라를 가리켰다.
- 저 여자한테 다섯 번 기회를 줬어. 그런데도 날 기억 못하더군. 뭐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징징 짜기나 하고. 그리고…….
  남자는 다시 유니스를 마주보고 섰다.
- 그쪽도 마찬가지야.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되는 거지. 당신들이 길에서 '기를 아십니까?' 짓거리를 해가며 사람들을 속였어. 그리고 거짓 의식으로 돈을 뜯었어. 뭐를 잘못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남자의 눈동자, 그 안에선 이미 번개가 치고 있었다.
- 물론 당한 놈이 병신이겠지. 알아, 나도 인정해. 그런데 이거 알아? 당신들이 해준 5만 유료짜리 의식이 정말로 액운을 사라지게 하는 거라면 나는 오늘 왜 또 당신들을 만난 걸까?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고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는 건 그녀 쪽이었다.

  “외통수에 걸렸구나!”
  어김없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이제 초는 거의 다 타들어가서 꼬리 같은 심지만이 남았다. 빛은 곧 사라지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남자의 해머가 높이 올라 갔을 때 그녀는 눈을 감으며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빠, 이제 돌을 던져야겠어요. 불계패로 끝나네요). 뒤이어 벼락 같은 고통이 오른쪽 어깨에 내리고 그녀는 그대로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득한 무의식 속에서 그녀는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가눌 수 없이 부유하는 의식 속에서 의외의 소리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 그녀의 귓바퀴를 맴돌았다. 갑자기 지하실 문이 열리는 소리, 손바닥이 보이게 양 손을 들라는 소리, 손 들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는 소리, 탕탕탕탕 총 소리, 묵비권이 어떻고 변호사 선임이 어떻다는 소리, 저쪽 여자는 정말 지독하게 당했다는 소리, 저쪽 여자는 꽤 미인이었던 것 같은데 참 안타깝다는 소리, 루부탱 하이힐이 굽이 6인치는 되어 보이는데 어떻게 신고 다니는지 모르겠단 소리(그것 봐! 다들 그렇게 얘기하지), 이쪽 여자는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소리, 이쪽 여자 얼굴은 멀쩡하다는 소리(평생 예쁘단 소린 못 들을 팔자군), 팔 다리가 다 으스러진 것 같으니 빨리 구급대원을 보내라는 소리, 소리, 소리, 그리고 또 소리.

  만약 그녀가 무의식 속에서 들었던 것들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그녀는 인근 병원에서 깨어날 것이다. 물론 미이라 꼴로 온 몸에 깁스를 하고 병상에 누워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면 옆에서 졸고 있던 형사가 화들짝 깨어나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시작할 것이다. 서툴게 수첩을 넘기고, 연필 끝에 침을 묻혀가며 말이다. 그녀는 생각할 것이다. '궁금한 게 많겠지만 이제 질문이라면 지긋지긋해'라고. 

(201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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