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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 테라 인코나타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4.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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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쥴리어스 치안 총감이 만나주지 않을 것은 너무도 뻔했다. 그것이 부하 직원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바쁘고 귀찮아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

 

  길고 지루한 잠복수사의 복판에서 루스 언쇼 경위는 비타미나를 꾸역꾸역 들이마셨다. 멀쩡한 음식을 죄다 믹서기에 갈아서 정제 비타민을 첨가한 곤죽으로 만들어 내놓는 이 엉뚱한 음료는 인기가 상당했다. 언제부턴가 화성에서는 모두가 모든 음식을 비타미나로 만들어 마셨다. 믹서기를 통과하지 않은 음식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구에서 한 때 유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화성에서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누릴 줄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식자재 공급이 원활하지 않은 척박한 화성의 기후, 그리고 화성인들의 바쁜 생활 습관에 비타미나는 잘 맞아 떨어지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호들갑에 비해 썩 맛은 없군. 퉤.

  제대로 갈리지 않은 새우 꼬리를 뱉은 그는 가게에서 들고 온 질 나쁜 티슈를 아무렇게나 문질러 입을 닦았다. 비타미나의 스티로폼 용기와 티슈를 신경질적으로 구겨 콘솔 위에 대충 던져 놓았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바뀌었는지 레버를 돌려 창문을 내리고 그 밖으로 던졌다. 밤의 음산한 공기와 길잃은 고양이들의 서늘한 울음소리가 방음 코팅의 결계가 사라졌던 자리로 침투해 들어왔다. 절로 몸서리가 쳐져 재빨리 레버를 반대로 돌려 창문을 다시 닫았다. 95, 96, 97 퍼센트. 마침내 100 퍼센트. 순찰차는 다시금 완전한 평형에 도달했다.
 
  그때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호출기에 번호가 떠올랐다. 본부였다. 그는 문을 열고 숨을 참은 채 몸을 낮춰 공중전화박스까지 뛰어갔다. 오염된 공기를 폐 깊숙히 들이마시는 찝찝한 기분이었다.
- 언쇼 경위입니다. 호출 받고 연락드립니다.
- 어떤가? 경위. 앤디가…… 아니,  용의자가 보이나?
  이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로이스톤 경감이었다. 그는 C지구 16번지 아파트의 4층을 힐끔 올려다보고 대꾸했다. 여전히 불이 꺼져 있었다.
- 전혀요. 아직까지는 어떤 기색도 없습니다.
- 그래? 그럼 계속 수고하시게. 상황이 변하면 연락을 주고.
 
  벌써 12시간째. 입맛이 썼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잠복은 전적으로 무의미했다. 몸으로 때우고 시간으로 때우는 수사는 아주 오래 전에 이미 유행이 지나간 것이다. 적어도 지구에서는 그랬다. 지구에서 심리 수사와 프로파일링을 전공한 그로서는 화성 식민지 경찰국(MCPD)의 모든 수사 형태가 텔레비젼 쇼처럼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어둠 속을 뛰어 순찰차로 돌아갔다. 빈 깡통이며 찢어진 비닐봉지로 뒤덮힌 골목 곳곳에는 지난 몇 주간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구정물이 고여있었다. 구역질을 일으킬만큼 고약한 냄새를 피워올렸다. 네온 등의 수은 증기는 소름 돋을만큼 푸르스름했다. 지하 어딘가에선가 불을 때는지 환기구 틈새로 희뿌연 연기가 스며 올라와 땅을 타고 깔려 더욱 더 음산한 분위기를 조장하였다. 경위는 재빨리 차 안으로 몸을 밀어넣고 문을 닫았다.
 
  문제의 C지구 16번지의 아파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거의 박물관에 전시해도 이상하지 않을 구식 스타일로 지어졌던 80살짜리 적벽돌 아파트다. 역사라고 할 만한 것은 모두 다 상처였다. 기술적인 면에서, 또 장식적인 면에서 후대에 단 하나의 유산이라도 남겨주지 못한 것처럼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여섯 집씩 위로 네 층이니, 총 스물네 가구. 그 중에서 불이 켜진 집은 열 한 가구였다. 여기서도 공동화는 어김없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것은 화성 식민지 어디에서나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사람들이 떠나버린 주택단지는 범죄의 온상이 되었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떠나게끔 만드는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앤디들, 그러니까 안드로이드들은 대체적으로 상황 판단에 냉정하고 감정적인 요소에 둔감했기 때문에 언론이나 지역 주민들의 호들갑에 비해 실제 범죄의 대상이 될 확률은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 고유의 논리적인 회로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로이스톤 경감을 비롯한 MCPD는 그 사실에 주목했다. C지구처럼 이렇게 유출 인구가 유입 인구에 비해 월등히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인력을 배치한 이유였다. 그 전략이 안드로이드의 발본 색원에 있어 어느 정도 효과를 본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인지,
- 아무리 영리해도 앤디는 앤디지.
라고 생각하는 법 집행기관의 직간접적 관계자들이 많았다. 작은 성공에 도취된 것이다. 언쇼는 반쯤은 그 의견에 동의했고 반쯤은 동의하지 않았다. 지구에서 오래, 그것도 일선 현장 근무를 경험한 그가 보기에 화성 식민지에는 앤디라는 존재를, 그러니까 안드로이드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앤디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미 사람에 근접했고, 앞으로도 점점 사람에 가까워져 갈 그들이다. 이렇게 안이하게 대처하다가는 언제고 크게 낭패를 보게 될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미 전세가 역전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경위는 재빨리 몸을 낮추었다. 낡은 64년형 빨간색 폰티악이 불안하고 신경질적인 헤드라이트를 흔들며 골목으로 들어와 멈추었다. 그리고 여자가 내렸다. 빨간색 쉬폰 드레스를 입고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헵번 스타일로 틀어올린 여자는 비늘같은 분홍색 손가방을 한 손에 들고 날카로운 굽의 빨간색 메리 제인 펌프스로 또각 또각 걸어 아파트로 향했다. 엉뚱한 곳을 비추고 바스라진 인공 불빛의 조각에만 의지하여 확인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기다리고 있던 용의자가 마침내 나타났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저 여자였군.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정확하다면, 그러니까 경찰국에서 그에게 전달해 준 정보가 정확하다면, 저 여자가 바로 이 아파트에 숨어 지내고 있는 안드로이드 중의 하나일 것이었다. 이브 아이버슨. 29세. 미혼. 빅토리아 크레이터 로스쿨 휴학중. 현재 <포보스&데이모스>의 법무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음. C지구 16번지 혼자 살고 있으며 가끔씩 애인을 데려오는 외에는 외부인의 출입은 없음.
 
  가만히 문을 열고 한 발을 땅에 디디고 섰다. 오른손으로 바지 주머니 속의 테이져 건의 부피를 확인하고 왼손으로는 2호 모델의 헬멧을 챙겼다. MCPD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안드로이드 선별법인 갈-슈바르츠하임 검사에 사용할 도구였다. VC 로스쿨 휴학생에 법무 보조원이라고? 주위에 변호사들이 한 트럭이라는 이야기네. 미스 아이버슨의 동선을 예측하여 그는 크게 호를 그리며 돌아 아파트 현관 앞에서 자연스럽게 만난 것처럼 가장했다.
- 미스 아이버슨?
- 예. 그런데요. 누구시죠?
  언쇼는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며 계산을 했다. 그녀가 뒤로 돌아 재빨리 자기 빨간색 폰티악까지 달려가면 어쩌지? 미리 지원이라도 요청했어야 하나?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럴만한 거리는 아니라는 생각에 내심 안도했다. 아무리 운동 신경에 자신이 없어도 굽 높은 구두 신은 여자를 못잡을 정도는 아니라는 자신도 있었다. 사실 그녀가 도망치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도망친다면 그 자체로 안드로이드임을 인정하는 셈일 테니까. 
- MCPD 소속의 루스 언쇼 경위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 무슨 일이시죠?
- 제보가 들어와 C지구를 검문 중입니다. 다수의 안드로이드가 이 지역에서 사람으로 가장하여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가장하여! 자기 스스로 생각해도 그 말은 멍청하게 들렸다.
- 그래서요? 빨리 해결되었으면 좋겠네요. 한 사람의 지역 주민으로 저도 불안하고 두렵거든요.
  그는 그녀의 눈을 바라다 보았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터키옥색의 눈동자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 아이버슨 양, 그렇다면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를 받는데 동의하시겠습니까?
- 저와 무슨 상관이죠? 숨어있다는 안드로이드에게 검사를 해서 잡아가시면 되는 일 아닌가요?
- 형식적인 겁니다. 만약을 대비해 이 아파트의 모든 주민이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이 아파트의 다른 주민들은 검사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순찰차에는 이미 그녀를 안드로이드로 적시한 사건 파일이 있었다.
-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제가 왜 그런 검사를 받아야 하죠?
- 그럼 동의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 예. 물론이죠. 동의하지 않아요.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건만 자기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이거 정말 코미디 아닌가? 억지로 2호 헬멧을 씌워보느라 옥신각신해야 한다는 사실이.
- 그렇다면 아이버슨양이 안드로이드 선별 검사에 동의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록에 남겨도 되겠습니까?
- 그 또한 동의하지 않아요. 경위님이 검사를 요구하신 건 제가 안드로이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는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잘못된 전제잖아요? 확증이 있다면 저를 보자마자 레이져 튜브를 들이대셨겠죠. 따라서 문제는 제가 검사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가 없이 검사를 요구했다는 부분이에요. 기록으로 남겨서 뭘 어쩌시겠다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을텐데.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한 번 겁을 줘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겠죠.
  그녀의 지적이 정곡을 찔렀기에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럼 한번이라도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바보같은 꼴이 되고 말 것이었다. 물론 경찰국의 멍청이들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이렇게 아우성치겠지. ‘여자가 저렇게 논리적으로 말하는 걸 보면 확실해. 안드로이드가 틀림이 없어’ 라고.
 
  경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잘 닦여 반짝 반짝 윤이 나는 빨간색 메리 제인 펌프스. 과거 그의 아내도 저런 모양의 구두를 좋아했었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낭패의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혹시…… 그녀는 자신이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못하는 걸까? 많은 앤디들이 그 사실을 모르기도 한다. 그녀도 그럴 수 있다. 그래서 저렇게 당당한 것일런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미스 아이버슨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조목조목 따지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느새 잔잔한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아이버슨양의 입고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저 미소의 성분은 우월감일까? 안도감일까? 그것만 분석해낼 수 있다면 앤디를 가려내는데 큰 도움이 될텐데.
 

*


  이건 정말 무식한 방법이야. 알지만 어쩌겠는가.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는데.
 
  말하자면 순발력과 완력의 초라한 승리였다. 미스 아이버슨이 새침하게 돌아서려는 그 순간 언쇼는 재빠르게 그녀의 머리에 2호 헬멧을 씌웠다. 맨파워의 30 퍼센트와 예산의 45 퍼센트가 소송에 대응하는데 낭비되고 있다는 영광스러운 MCPD를 상대로 한 또 한 건의 잠재적 소송이 그 사유를 성립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상부의 지침에 따랐을 뿐이니까. 그를 노려보는 미스 아이버슨의 눈동자에는 분노가 서려있었다. 가지런히 붙여놓은 긴 속눈썹의 불길한 바들거림과 아름다운 터키옥색 우주의 한 가운데서 불길이 이는 것을 그는 모았다. 당연히 화낼만도 해. 나라도 화를 내겠어. 그의 난감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2호 헬멧은 제 본연의 임무를 다하기 시작했다. 갈-슈바르츠하임 검사 말이다. 헬멧의 기계 장치는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며 미스 아이버슨의 두개골 모양을 측정하였다. 겨우 30초만에 끝나는 검사였지만 그에게는 항상 너무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었고, 피검사자들의 원망스러운 눈빛을 알아차리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 정말 기분이 나쁘군요. 당신네 경찰들은 항상 이런 식이죠.
  잘 차려입은 예쁜 아가씨가 자기 머리 크기의 1.5배는 됨직한 기계 장치를 머리에 이고 있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경위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어둠 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위는 그녀의 입술이 상당히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만…… 그녀가 안드로이드라는데 어떻게 그런 감정을 가질 수가 있지? 그는 혼란스러웠다. 한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브 아이버슨이라는 여성에게는 분명 그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드디어 30초. 이윽고 2호 헬멧은 갈-슈바르츠하임 검사의 결과를 토해내었다. 좌우로 천공이 가지런히 배열된 얇은 전산용지에는 특색없는 활자로,
 
NEGATIVE
 
라고 적혀있었다. 음성 판정. 그녀는 정상 범위 안에 있었다. 안드로이드가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적어도 이 방법으로는 분간해 낼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도 눈치를 챘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층 더 기세가 등등하여 그를 몰아세웠던 것이다. 그의 감정은 복잡 미묘해졌다. 원하지 않는 화성 생활에 대한 불만족,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고등 심리교육을 받은 자로 편협한 갈-슈바르츠하임 검사에 대해 느끼는 본질적 회의, 미스 아이버슨에게 뭔가가 있다고 속삭이는 일선 경찰만의 선천적 육감 등 여러 가지 쌓여있던 것들이 뒤엉켜 화학 작용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숨겨두었던 실린지를 만지작거렸다. 한 손 엄지로 안전 장치를 해제하고 꼭 쥐었다. 전례없는 규모의 소송이 될 것이었고 어쩌면 그는 해고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떤가. 화성 경찰국에서 나가는 것은 그의 오랜 바람이었는데.
 
  좋든 싫든, 이제 그는  쥴리어스 치안총감을 만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일개 경위가 치안총감과 면담하지 못함을 두고 불평하는 것은 어쩌면 일반적인 상황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만한 정당한 이유가 루스 언쇼 경위에게는 있었고 마냥 피하고 거절하면 안될 이유가 쥴리우스 치안총감에게는 있었다. 또한 총감이 상식 이상으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인 것 또한 사실이었다. 총감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총감과 만난 일이 빈번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지위가 낮은 사람이든, 막론하고 MCPD 내 직원 대부분이 그 점에 동의했다. ‘왕정 시대의 임금보다는 만나기 쉬운 사람, 그러나 민주 시대의 대통령보다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 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었다.

 

*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망이 왼쪽으로 밀려가 접혔다. 제복차림의 오퍼레이터가 문을 열어주며 경례를 했다. 구식 엘레베이터는 언제나 낡은 두레박에 올라타는 느낌을 주었다. 비좁고 답답했고 불안했다. 거울 하나 없는 협소한 공간에서 오퍼레이터와 나란히 서 있는 것도 멋쩍은 일이었다. 그래서 대개 언쇼 경위는 엘레베이터 상단 흑백 스크린의 영상을 보고 있는 척을 했다. 흑백 화면 특유의 희뿌연 느낌은 보는 이를 언제나 다소 몽롱하고 나른하게 만들었다. 낮은 해상도의 선명한 스캔 라인은 마치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로 그어 잘게 나눈 듯한 느낌을 주었다. 영상은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리며 지직거렸다. 짧은 광고나 경찰국 내부의 홍보 자료 같은 것들만 줄창 흘러나온단 점은 유감스러웠으나 크게 상관 없었다. 화성 경찰국은 5층짜리 건물이었고 아무리 길어도 몇 분이면 내릴 것이었으니까.

  가장 많이 방송되는 영상은 역시 안드로이드 검사법에 대한 것이었다. MCPD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안드로이드에 관련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포마드 기름으로 머리를 발라넘기고 멋들어지게 콧수염을 기른 체크 양복 차림의 남자가 서재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너무 많이 봐서 외울 수도 있겠어. 아니 사실 이미 외웠지.

1세대 안드로이드는 기계 덩어리였다.
: 충분히 육안으로 구분이 가능했다.

2세대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닮아갔다.
: 껍데기로는 구분이 되지 않아 제어판을 따서 안을 열어보아야 알 수 있었다.

3세대 안드로이드는 안과 밖 모두에서 인간과 구별해내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 드디어. 피와 살과 장기와 근육과 뼈를 똑같이 갖추어냈다.

"안드로이드는 제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탈출, 우리 사회로 몰래 숨어들어와 마치 인간인 양 행동하며 서서히 시스템을 잠식해나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드로이드를 추방 혹은 폐기하기 위해 선별해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회적 과제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안드로이드 검사법이 개발되었지만 그 중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물리적 외형에 준하여 놈들을 가려내는 것 뿐입니다. 오늘날의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놀랄만큼 유사하지만 높이 22.98 cm, 너비 17.24 cm, 머리둘레 54.82 cm의 여전히 프로토 타입 시절과 다를 바 없는 머리 사이즈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의 229817245482법, 현재 갈-슈바르츠하임법이라고 알려진 바로 그 검사법은 바로 이와 같은 명백하고 움직일 수 없는 근거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순찰 중 안드로이드처럼 보이는 누군가를 만나셨다고요? 침착하게 줄자를 꺼내십시오. 그리고 조심스럽게 머리 사이즈를 재어 보십시오. “

  과거에는 정말로 줄자를 사용했다지. 그 시절 이후로 MCPD의 사내 방송 자료는 업데이트 된 적이 없었다. 줄자 다음에 54.82 cm 둘레에 딱 맞는 모자를 사용했던 시절(“어머, 신데렐라. 당신 머리가 이 모자에 쏙 들어가는군요?”)을 거쳐 지금의 0.01 cm 까지 정확하게 정교한 측정이 가능한 2호 헬멧이 개발되기까지. 용의자에게 줄자로 감거나 모자를 씌우던 시절에는 억울한 피해자도 적지 않았겠지. 마치 중세 지구의 마녀사냥 같았을 거야.

 

*


  예상된 수순이었지만 로이스톤 경감의 화는 쉽게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휘하 경위 중 하나가 민간인에게 사전 동의도 구하지 않은 채 무단으로 허가되지도 않은 안드로이드 검사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MCPD의 입장은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만이 유일하고 무이한 안드로이드 선별법이라는 것이었고 그 외의 다른 대안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치안총감에서부터 일개 사무직 직원들에 이르기까지 물리적 외형에 입각하여 안드로이드를 가려내는 방법만이 정확하다고, 공식적인 자리와 비공식적인 자리를 막론하고 떠벌리고 다녔던 것이 MCPD의 80년 역사와 다름이 아니었다. 때문에 이제와서 다른 대안을 인정하는 것은 경찰국의 근간를 흔드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경감은 이미 윗대가리들에게 불려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정도의 욕을 먹고 돌아왔으며,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해 증기기관차처럼 씩씩거리고 있었다. 소문난 애연가로 알려진 경감이지만 결코 지금의 인상을 가득 찌푸린 그는 결코 좋아서 담배를 태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경위. 자네는 정신이 있는 건가?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짓을 저지른 건가?
-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아이버슨 양을 앤디로 간주하여 수사하라는 것은 제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경찰국의 지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경감님께서 지시하신 것이었습니다.
- 어물쩡 넘어갈 생각하지 말게. 갈-슈바르츠하임 검사 외의 다른 검사를 하라는 지시는 누구도 한 적이 없었네. 게다가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방법이라니. 이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어. 언론이 알게 되면 뭐라고 하겠나. 인권이야기를 꺼내 또 우리 경찰국을 흔들려고 하겠지. 난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네.
- 민간인에게 다짜고짜 2호 헬멧을 씌우는 건 어떻습니까? 그 부분에 인권 문제는 없습니까?
- 우린 항상 미리 동의를 구하지 않는가?
- 형식적인 보여주기 아닙니까. 제 기억에 따르면 누구도 쉽게 동의해주지 않더군요. 동의를 못 받았을 때 경찰국의 대응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일단 강제로 씌워놓고 보라고 가르치잖습니까.
  그렇게 대꾸하고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과연 어디까지 막 나가기로 결정한 걸까?
- 그래도 상황이 다르지. 이 친구야. 백번 양보해 그걸 '강요'라고 해봅세. 우리가 해왔던 것은 공인되고 안전한 수사 절차의 불가피한 강요야. 하지만 자네가 오늘 저지른 일은…….
-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습니다.

  경감의 담배 끝이 고약한 소리를 내며 타들어갔다. 경감은 작은 눈을 더 작고 게슴츠레하게 떴다.
- 좋아. 일단 들어보기나 하지. 내사를 받고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기 전에 자네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나도 좀 알아야겠네. 그러니까…… 자네가 시도했던 방법이 뭔가? 생리적? 화학적? 무슨 약물이라도 주사한 건가?
- 아주 작은 크기의 나노봇이 담긴 생리 식염수입니다. 신체 곳곳의 온도와 pH, 그리고 몇 가지 주요 성분의 농도를 측정하여 메인 컴퓨터로 무선 전송을 하고 안전하게 체외로 배출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지구에서 이미 안전성 평가가 끝난 물질로 염려하실 이유도 없습니다. 아마 미스 아이버슨에게 크게 건강상의 문제는 없을 겁니다.
- 정말인가? 정말로 그런 게 가능한가?
- 경감님. 제발요. 농담입니다. 그런 게 가능하면 제가 여기서 이렇고 있겠습니까? 그냥 피 한 방울 뽑았을 뿐입니다.

  사라진 한 방울의 피를 재생하기 위해선 재채기 한 번 할 시간조차 걸리지 않을테지. 그러니 그 재채기 한 방에 7만 5천불이 허공으로 날아간 셈이야. 이 검사 키트가 7만 5천불짜리이니. 그리고 아마 경찰국은 그 비용을 업무비로 인정하지 않을꺼야. 전 아내인 수잔이 아직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 않아 다행이군. 바가지 깨나 긁혔을테니. 
- 그건 자네 생각이고. 미스 아이버슨과 그녀의 변호사가 안전하게 느끼지는 않을 것 같네. 여기 이 엄청난 두께의 서류를 보게. 자네랑 나는 머지 않아 법정에 출두하게 될꺼야.
  침묵이 이어졌다. 언쇼는 갈증을 느꼈다. 얼음물이 있었으면 좋겠어.
- 그럼 미스 아이버슨은 어떻게 됩니까? 그녀가 앤디라는 믿을만한 제보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 보내드려야지. 자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녀는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를 통과하지 않았나.
- 하지만…….
- 됐어. 어쩔 수 없네. 통과했으면 통과한 거야. 그게 사실이지. 그녀는 안드로이드가 아니야.
- 어차피 막다른 골목입니다. 몇 가지만 더 시도해보면…….
- 아니. 됐어. 더 이상은 일을 키우지 말게. 오직 물리적 외형으로 잡아내는 방법만이 유일해. 자네도 알지 않나. 우리는 정확하지 않은 방법으로 민간인을 의심할 수는 없어. 증거로 채택되지도 않을 결과는 필요하지도 않고.
- 정확도에 관해 논하자면 검사와 2호 헬멧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안드로이드 머리 사이즈를 재고 있지 않습니까? 막말로 19세기 지구의 골상학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셈 아닙니까?
- 그래도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는 이미 입증된 방식이야. 우리가 수많은 안드로이드를 이 검사로 판별해냈단 사실을 왜 받아들이지 않는 건가? 화성식민지에서만 매년 평균 30여기의 안드로이드가 이 검사로 체포되고 있어. 이제까지 어떤 선별법도 이만큼 탁월한 검거 실적을 보여주지는 못했단 말이네.
- 저는 어떤 방법이 절대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열린 자세로 모든 가능성은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물리적 외형만 가지고 안드로이드를 구별해낼 수 없단 것이 지구에서는 이미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 점점 자네가 안드로이드처럼 말하기 시작한단 의심이 드는군. 이 답답한 친구야, 여기는 화성이네. 지구 최신 기술의 총체가 바로 여기 화성에 모두 이식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지구를 따라갈 필요는 없지. 반대로 지구가 우리를 따라와야지. 머지 않아 전 지구가 우리를 따라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만 유일무이한 방법으로 받아들이게 될 걸세.

 

*


  아니야. 그건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지구에서도 30년 전까지는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로 안드로이드를 가려내었다. 그러다 문제가 발견되었지. 앤디들 스스로가 프로토타입의 외형을 바꾸어 나갔던 거야. 머리 모양, 머리 크기만 바꾸어도 2호 헬멧을 피해나갈 수 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저런 방법들이 새로 개발되고 현장에 적용되다 폐기되기를 반복했지. 문제의 핵심은 간단해. 갈-슈바르츠하임 검사가 오래 전에 지구에서는 사라진 방법이라는 거야. 경감의 말대로 되지는 않을꺼야. 오히려 그 반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화성도 차츰 다른 안드로이드 검사법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흘러가겠지. 다시 말해 과거의 지구가 겪었던 일이 오늘의 화성에서 재현되고 있어. 마치 이건 뭐랄까. 퇴행된 현실을 겪고 있는 듯한 느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흡사 타임라인이 어느 한 부분에선가 고약하게 엉킨듯한 느낌이야. 비단 이번만이 아니었다. 그는 화성에 도착한 이래로 내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퇴행된 버전의 지구. 그건 지구와 화성을 모두 겪어본 그의 결론이었다.
  화성 부적응자. 그건 화성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이었다.

  척박한 화성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무엇이 괴로운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유 없이 가슴 답답해지는 느낌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래도 심리상담치료센터에 다시 전화를 해봐야겠어. 그는 코트 주머니 속의 25센트 쿼터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구리와 니켈로 주조된 험프리 보가트의 얼굴이 만져졌다.

  일곱 개비째의 담배가 필터만 제외하고는 까만 재로 변해버렸다. 로이스톤 경감은 빈 카멜 담배갑을 구겼다. 
- 아무튼 아이버슨양에게 정중하게 사과드리게. 어떤 일이 있어도 일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해. 언론이 모르게 해야하고. 어려운 시기네. 경위. 어려운 시기야. 지금은 우리가 여론의 역풍을 감당할 여유가 없어.
   언쇼는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사실 그도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 잘 들어. 저 밖에는 하이에나처럼 우리를 노리는 변호사들이 있어. 틈을 주어서는 안돼. 고집부리지 말게.
- 알겠습니다. 지금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이제 됐네. 나가 보게.

  언쇼는 경감의 방을 나가려다 말고 덧붙였다. 갑자기 뭔가 떠오른듯.
- 혹시 치안총감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경감이 성의없이 대꾸했다. 책상 서랍에서 새 담배갑을 꺼내면서.
- 만나게 될꺼야. 자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런 일을 벌여놓고 최고 책임자가 모르고 넘어가길 바라지야 않겠지.

  '정말 만날 수 있을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화성으로 전근되어 온 이후 항상 존 J. 쥴리우스 치안총감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단 한 번도 뜻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만나준다면 다행은 다행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면의 의미가 걱정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이 그만큼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 그 만나기 어렵단 사람을 움직일 정도로.

 

*

  존 J. 쥴리우스 치안총감께서는 오후 02시 23분 현재 연합정부의 호출을 받고 지구로 향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오늘은 총감님께서 일주일에 단 한 번 경찰국에 들르시는 요일인 목요일이지만 아쉽게도 총감님이 계시지 않은 관계로 확인 및 결제를 받아야 하는 관련 업무 전반이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금일 보류된 업무는 다음 목요일로 일괄 연기되었으니 각 담당자들은 참고하시어 업무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준비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첨부 없음. 이상 끝.

 

*


  로이스톤 경감의 오피스를 나서는 순간, 언쇼 경위의 피부에 와닿은 것은 따가운 시선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동료들 대부분이 경멸의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특히 젭슨, 로보위츠, 밀하이져, 카레이, 클레멘츠... 흔히 젭슨 패거리로 통하는 그들 중 누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1층부터 5층까지 건물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갈-슈바르츠하임 법이 아닌 다른 검사를 무단으로 민간인에게 시행했다는 황당천만한 이야기가. 가뜩이나 MCPD에서 미움받는 처지로, 잘했어도 본전인 그의 입장에서는 이번 해프닝이 불난데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젭슨 경위가 다가오며 얄밉게 이죽거렸다.
- 자네, 크게 사고 쳤다며? 이번엔 스케일이 좀 크다던데?
  로보위츠 경사가 거들었다. MCPD에서 언쇼보다 더 오래 일했다는 점, 경찰국 내에서 젭슨이 주도하는 파벌에 속해있다는 점이 로보위츠로 하여금 계급장도 떼고 시비를 걸게 만들었다.
- 경위님께선 어째서 번번이 MCPD의 권위를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습디다.
  밀하이져 경위도 거들먹거렸다. 그 역시 젭슨의 사람이었다.
- 그래서 결과가 어떻던가? 그 예쁘장한 금발 아가씬 바비가 아니라 앤디던가?
  그들만이 아니라 부서 전체의 눈과 귀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머피, 홀트, 월링턴, 필스워스… 비교적 그에게 중립적이거나 호의적인 이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언쇼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은 모릅니다. 지금 보내지고 있는 결과가 분석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 아직도 모른다고? 그게 얼마나 걸리는데?
- 대략 12시간 정도 지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12시간? 웅성거리더니만 누군가 웃기 시작했다. 전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따라 웃었다. 몇몇은 배를 잡고 웃었다. 몇몇은 일주러 과장된 액션을 취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 12시간이나 걸린다고? 좀 심한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네. 전혀 실용적이지 않군.
- 백번 양보해서 자네의 방법을, 그게 정확히 뭔진 모르겠지만, 현장에서 적용한다고 해봅세. 결과가 나올 때까지 피검사자를 어떻게 잡고 있을 건가? 자그마치 12시간 동안이나 말이야.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법의 가장 큰 장점이 신속성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들의 지적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 한 가지만 장점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 그래도 다행이네. 12시간이면 이틀 뒤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 전까지는 결과가 나올테니.
- 저 친구 혹시... 나중에는 같이 밤을 보내봐야 앤딘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 아냐?

  모두가 유쾌하게 웃었다. 언쇼는 화가 나기도 했고 창피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MCPD 기관 전반에 만연한 유연성의 부재에 대해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도 되었다. 하지만 그는 짐짓 못 들은 척을 하고 자동판매기로 향했다. 로이스톤 경감의 오피스에서 한바탕 격론을 벌이고 막 나왔던 차여서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었다. 몸 안 어딘가에 하나의 거대한 사막이 생겨난 것 같은 느낌의 갈증이었다. 당장 비타민 음료라도 하나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뒤에서 클레멘츠 경위가 2호 헬멧을 들고 그에게 다가오는 것조차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 혹시 언쇼 자네가 앤디인 건 아니야? 그게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돼. 지금 네 놈이 벌이고 있는 일들이 말이야.
  뭐라 대꾸하려는 찰나에 묵직한 것이 그의 머리에 씌워졌다. 야속한 동료들은 또 한 번 배를 잡고 웃었다. 강제로 2호 헬멧을 쓰는 건 확실히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기분이 나쁘긴 나빴다. 발은 몰라도 미스 아이버슨도 이런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헬멧의 기계 장치는 위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면서 낮고 불쾌한 소음을 칭얼거리며 그의 머리 크기를 측정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던 탓일까? 언쇼는 평소의 그 답지 않게 정색하며 따지기 시작했다.
- 이봐, 클레멘츠. 혹시 유니버셜 테스트 머신이라고 들어봤나? 시편을 양 옆에서 잡아당겨 언제 끊어지냐를 검사하는 기구지. 그걸로 그 시편의 인장력은 알 수 있을꺼야. 얼마나 외력을 주었을 때 끊어지는가 하는 그런 정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시편이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까지 깊이 이해할 수는 없어. 우리가 지금 고집하는 방법이 꼭 그런 식이야. 

  클레멘츠는 웃다 못해 거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자네, 자네. 그거 알아? 자넨 너무 매사에 심각해. 꼭 안드로이드처럼 말한다니까.
- 나는 어떤 방법이 옳다고 주장한 적이 없어. 다만 절대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 뿐이야. 어떤 방법도 절대적이진 않아. 이 친구야. 인간이 각 개체별로 고유의 특성을 가지듯 안드로이드도 그럴 수가 있어. 옛날엔 모든 경찰이 드라이버를 들고 다녔네. 왜? 2세대 안드로이드의 등짝에 있는 제어판을 따보려면 그게 필요했거든.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드라이버로 3세대 안드로이드의 등을 긁으면? 뜨겁고 선명한 피가 흘러나오겠지. 그럼 그들을 인간으로 봐야겠나, 앤디라도 봐야겠나. 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나? 단지 일선에서의 편의만을 위해 한 가지 검사법만을 고집하고 다른 검사법에 대해 열린 자세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끝까지 그들을 한 발 뒤에서 쫓을 수 밖에 없을 거야.

  동료들은 그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30초가 지나 2호 헬멧이 결과지를 토해내었다. 클레멘츠는 그것을 부욱 찢어 한껏 몸짓과 함께 크게 읽어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려고 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멈칫했다. 우락부락한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시는 것을 보았다. 부서 내 모든 사람들이.

POSITIVE

  묘한 침묵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2호 헬멧을 씌웠던 짖궂은 동료들조차 이런 방향으로의 전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표정이다. 젭슨은 로보위츠를 보았고, 로보위츠는 밀하이져를, 밀하이져는 카레이를, 카레이는 클레멘츠의 얼굴을 각각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 중 누구도 자기 표정을 알 수는 없었다. 그 대목에서 가장 황당할 것이 틀림없을 장본인 - 언쇼 경위는 그들 모두의 굳은 표정과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동공을 바라보며 짧은 순간에 참 많은 생각을 했다.  뭘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며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언쇼 경위는 뒷걸음질을 쳤다. 동료들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마 너무도 당황해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북쪽 통로의 천정에서 폐쇄회로 카메라의 눈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비디오로 남았을 때 그리 아름답게 보일 광경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동료들이 난폭하게 그를 몰아세운다면 억울한 누명을 썼겠거니 보일 수도 있을텐데…….  나중에 누가 저 영상을 돌려보고 분석한다면 틀림없이 한때 경위라는 직급을 달았던 루스 언쇼라는 남자가 수상하다고  결론내릴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뒷걸음질치던 그가 창문 근처에 거의 다다랐을 때, 로이스톤 경감이 오피스에서 나오다 그 광경을 보았다. 알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급하고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뭣들해?” 라고. 육상트랙 출발선 신호탄과 같은 그 한 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경찰 공무원들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언쇼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언쇼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본능의 결정이었다.

 

*


  3층에서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는 경찰국 엘레베이터를 타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방수포 천막에 한 번 걸렸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나니 그런 생각이 바뀌고야 말았다. 걸을 때마다 수십개의 바늘이 발목 곳곳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다. 접지른 것이 분명했다. 동료들 중 일부는 창문으로 그를 내려다 보고 소리를 질렀다. 뭐라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일부는 열심히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는 중일 것이었다. 잠시 그런 생각도 했다. 일단 다시 검사를 받고 오해를 풀어볼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저들은 그가 누군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로지 앤디를 하나 더 잡을 수 있느냐만 관심사였다. 흉한 꼴이 되지 않으려면 당장은 도망치는 방법 밖에 없어 보였다. 절뚝거리며 얼마나 도망갈 수 있을까? 100 미터? 200 미터? 정문을 향해 무거운 몸과 더 무거운 다리를 끌고 움직이려는 찰나 눈부신 헤드라이트와 함께 차가 한 대 미끄러져 들어와 그의 앞에 멈추어섰다.
- 타요! 어서!
  64년형 빨간색 폰티악. 이브 아이버슨이었다. 자기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여자가 모는 차에 뛰어드는 것이 그러지 않고 동료들 (그들이 언쇼를 동료로 생각하든 말든) 사이에 남겨지는 것보다 차라리 더 안전하다니!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뒷자석에 몸을 구겨넣다시피 하여 뛰어 들었고 미스 아이버슨은 기다렸다는 듯이 엑셀레이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으며 매섭게 차를 돌렸다. 몇 시간 전만해도 풍성하게 모양이 잘 잡혀있던 미스 아이버슨의 머리는 엉망이 된 부분에는 아마도 그와 2호 헬멧의 책임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몇몇 경찰 동료들은 뛰어서 다가왔다. 몇몇은 순찰차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몇몇의 손에 쥐어진 튜브에서 시작된 레이져가 아슬아슬하게 아이버슨양의 차를 비껴 멀리 어둠 속으로 달음질을 쳤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어가며 운전을 했고, 그는 열심히 오르 내리는 작고 아기자기하게 생긴 그녀의 무릎을 슬쩍 훔쳐보았다.
- 그냥 저렇게 둘꺼에요? 경고 사격이라도 해야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비로소 언쇼는 정신을 차렸고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몇 발의 조준점 없는 의미없는 사격을 했다. 셔터를 오래 열어 두고 찍은 사진처럼 빛의 궤적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아이버슨 양의 폰티악은 시 외곽의 한적한 휴게음식점에 이르러서야 멈추었다. 그녀의 운전솜씨는 서툴기 그지 없었지만 MCPD의 추격을 따돌린 걸 운으로만 간주하기는 어려웠다. 언쇼로서는 크게 신세를 졌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물론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경찰을 가장했던 안드로이드에, 무장까지 한 채 탈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화성 경찰국의 인력 상당 수가 그를 체포하는데 투입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가능한 빨리, 가능한 멀리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그 다음엔? 그 다음을 생각하려니 막막하기만 했다. 식당은 오래된 지구의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낡고 때가 탄 피아트 1100이며 포드 모델 40의 번호판이 곳곳에 걸려있었고, 누렇게 색이 바래 가장자리가 닳아 없어진 럭키 스트라이크의 오래된 유명한 포스터도 보였다. 금발 미녀를 앞에 내세운 'BE HAPPY! GO LUCKY!'라는 구호의 광고. 그리고 자판기 옆의 포스터는 그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가지런히 열을 맞추어 왼쪽으로 행군하려는 빨간 진져 브래드맨들 속에서 반대 방향을 고집하는 파란 진져 브래드 하나. 강렬하고 공격적인 폰트의

'WHAT IF YOU’RE WRONG AND THEY ARE RIGHT?'

라는 문구. 화성식민정부와 경찰국이 공동으로 기획한 도안이었다.

  종업원 여자애가 다가왔다. 성의없는 얼굴로.
- 뭘로 드시겠어요?
- 비타미나 두 잔 주세요. 하나는 브로콜리, 오렌지, 닭가슴살, 토마토에 비타민 C 인핸서를 넣어 갈아주시고요. 다른 하나는…….
  아이버슨 양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도 허기지긴 했지만 무엇보다 목이 말랐다.  
-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
  재빨리 아이버슨 양이 끼어들었다.
- 바나나, 돼지고기, 초콜릿, 새우에 비타민 B6 인헨서를 넣어주세요.

  럭키 스트라이크 광고에나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의 종업원은 풍선껌을 짝짝 씹으면서 주방쪽으로 사라졌다.
- 뭐라도 먹어두셔야죠. 입맛이 없어도.
-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 경찰국 앞에서 말입니다.
- 일단 드세요. 경위님. 배가 고파서 쓰러질 지경이네요. 우리 사이의 문제는 천천히 따지기로 하죠.
- 저는 이제 경위가 아닙니다. 짐작하셨겠지만.
- 자초지종은 모르겠지만…… 경찰국 3층에서 뛰어 내린 건 정말 최고로 멍청한 짓이었어요.

  아이버슨 양은 비타미나에 빨대를 밀어넣었다. 허기졌단 말이 농담이 아니었는지 쉬지도 않고  반면 언쇼는 몇 입 마시다가 말았다. 며칠 째 잠복하면서 비타미나만 마셨다. 질릴만도 했다. 이미 소변은 노랗다 못해 황금색이었다. 더는 못 먹겠어. 어째서 화성 사람들은 멀쩡한 음식을 죄다 갈아 음료로 만들어 마시는 걸까? 제발 좀 갈아버리지 않은 음식이 먹고 싶었다. 쥬크박스가 돌아가며 홀 안에는 베라 린의 1939년 히트곡 'We'll Meet Again'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그는 신체적으로는 물론 감정적으로도 갈증을 느꼈다. 비타미나가 아니라면 정크 푸드라도 먹겠어. 자동판매기로 향했다. 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는 동전이 느껴졌다. 동전을 꺼내려다 말고 그는 흠칫 놀랐다. 쿼터 동전의 옆면에 주조된 조지 워싱턴의 옆 얼굴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는 25센트 동전의 주인공이 험프리 보가트라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해왔었고 조금의 의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맞아. 생각해보니, 험프리 보가트일리가 없지. 당연히 조지 워싱턴이지. 마찬가지로 5센트에 프랭크 시나트라, 1센트에 딘 마틴일리도 없잖아.

  혼란스러웠다. 불안하게 주위를 돌아보는데 화성식민정부/경찰국 공동 기획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고, 수천 번도 더 읽어보았던 그 문구가 갑자기 눈에 띄였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WHAT IF YOU’RE RIGHT AND THEY ARE WRONG?'

  그는 갑작스러운 한기에 몸서리를 쳤다. 한 대 맞은 듯 얼얼한 기분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말도 안돼. RIGHT와 WRONG의 위치가 바뀌었어. 그게 아니라면 내가 처음부터 거꾸로 알고 있었단 뜻인가?

 

*


  화성 경찰국에서는 식민지 거주 시민의 안전을 위해 매년 평균 130여기의 안드로이드를 잡아들이고 있습니다. J. J. 쥴리우스 화성치안총감의 취임 이후 화성 88년 19기, 화성 89년 23기, 화성 90년 28기, 화성 91년 36기, 화성 92년 42기의 꾸준히 증가하는 혁혁한 실적을 올렸으며 아직 채 절반도 지나가지 않은 올해에는 5월까지 벌써 21기의 안드로이드를 체포함으로써 화성 식민지 설립 이래 사상 최대 검거 실적을 올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이는  존 J. 쥴리우스 화성치안총감의 탁월하고 날카로운 지휘력 덕분이며 갈-슈바르츠하임 검사의 정교한 과학적 원리와 개량된 2호 헬멧의 기술적 진보가 결합된 창조-융합적 열린-혁신 수사의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식민지 거주 시민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거동이나 차림새가 수상한 자가 있다면 지체없이 저희 화성경찰국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때로 그들은 전혀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이 사회의 평범한 일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당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이 문장 하나만 기억하세요.

'WHAT IF YOU’RE WRONG AND THEY ARE RIGHT?' 

 

*


  아직 아침 여섯시였다. 낡고 더러운 루바창을 통해 들어오는 주홍 빛은 꼭 수명이 다하기 전 전구의 그것 같았다. 이래서 화성의 아침이 싫어. 화성의 아침 햇살은 지구에서 해거름녘에나 볼 수 있는 밀도와 채도와 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침마다 우울해지는 게 당연했다. 몹시 피곤했지만 언쇼 경위는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미스 아이버슨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결국엔 클레멘츠 경위의 짖궂은 농담처럼.

  불과 어제 저녁까지만 하더라도 이브 아이버슨이 안드로이드라는 것은 거의 확정적인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그는 자신의 몸이 닿았던 부드러운 살결의 진실을 알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쪽이든 상관 없다는 마음마저 있었다. 첫째로 그는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법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고, 둘째로 그것이 정확한 결과를 담보한다고 가정한다면 그 또한 안드로이드가 아니라 단정할 수 없을테니까. 경우의 수가 복잡해졌다.

  아이버슨 양이 앤디이며 그가 앤디라면?
  아이버슨 양이 앤디이며 그가 앤디가 아니라면?
  아이버슨 양이 앤디가 아닌데 그가 앤디라면?
  아이버슨 양도 그도 앤디가 아니라면?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지난 밤 사이 이 낡고 더러운 고속도로 옆 모텔에서 그들은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만큼의 거리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한 존재와 다른 한 존재가 그 이상으로 서로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기나 할까? 적어도 물리적인 차원을 말하자면 그 이상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 따뜻한 온기가 자연이 아닌 인공의 것이라면 놀라운 일이기는 해. 감탄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인간이 안드로이드를 처음 만들어내었을 때는 과학의 영역이었는지 몰라도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말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는 몸을 반대로 틀어 침대 옆 협탁 서랍을 열었다. 킹 제임스 버전의 성경책과 프로킷 드라이버 세트가 보였다. 2세대 안드로이드처럼 간단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어. 일자 드라이버를 하나 꺼내 저 작고 하얀 등을 간단히 열어보면 진실을 가늠할 수 있었을텐데. 그 시절에는 누군가를 믿는 데 필요한 함수가 지금보다 훨씬 간단한 것이지 않았을까. 
- 당신, 일어났어요?
  그를 바라보는 미스 아이버슨의 눈을 통해 그는 새로 생긴 별처럼 빛나는 녹색 행성의 우주를 보았다. 그녀는 한 손으로 하얀 면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몸을 가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쑥스러운 듯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언쇼는 다시 한 번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방금 막 잠에서 깬 것 같은 덜 정돈된 모습이 그리 엉망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걸 보면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난감함을 느꼈다.
- 잘 잤어요?
- 잘 잤죠. 어제 하루 그런 엄청난 모험을 했는데 어찌 아기처럼 곤히 자지 않을 수 있겠어요?
- 아이버슨 양, 어제 일은, 그러니까 어젯밤 일은 말입니다.
  미스 아이버슨은, 이브는 살짝 몸을 일으켜 언쇼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그 일에 대해 굳이 더 언급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그는 안도했다. 동시에 그녀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 이젠 어떻게 하실 건가요? 구체적인 생각이 있나요?
- 지금 말입니까?
- 아니요. 정말로 앞으로요.
  그녀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 앞으로…… 지구로 돌아갈 겁니다. 원래 그럴 생각이었고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자 신세라고 한다면 여기서나 지구에서나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사실 화성과의 이별은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좋은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화성 생활은 그 척박한 기후만큼이나 메마르고 건조한 것이었다. 지구에 있을 때보다 돈에 쪼들렸고, 지구에 있을 때보다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을 했고, 지구에 있을 때보다 형편없는 음식을 먹었다. 어쩌면 미스 아이버슨과의 지난 몇 시간이 화성에서 가장 사람다운 시간을 보낸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의아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에게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그는 좀처럼 감정 표현에 익숙치 않은 사람이었고 십대 소년 시절에조차 이런 강렬하고 맹목적인 감정은 느껴보질 못했다. 심지어 전 부인인 수잔과의 결혼 생활이 난파에 이르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


  루스 언쇼의 소가죽 서류가방은 16년 전에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었다. 세월의 때가 묻어 이제는 어떻게 보아도 좋은 물건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는 어딜가나 가방을 가지고 다녔다. 그가 불확실한 미래와 이브 아이버슨에 대한 미련에 쩔쩔매고 있던 찰나에 그 낡은 가방 안에서 신호음이 새어나온 것은 타이밍치고 아주 절묘했다. 불안정하고 정감없고 신경에 거슬리는 고약한 소음이 아니었다면 그는 다시금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고 시도했을지도 몰랐다.

  결과. 그가 이브 아이버슨에게 시도했던 (화성에서는) 금지된 검사의 결과가 방금 막 나왔다. 벌써 12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가방에 가까이 다가갔다. 거울을 통해 그는 자기 등 뒤의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침대 안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머뭇거리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녀의 눈치를 보았던 것인지, 자기 자신의 눈치를 보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 이제 와서, 판별 결과를 확인한들 뭘 어쩔 것인가!

  천천히 고물 라디오처럼 생긴 칩을 꺼냈다. 그것을 여행용 가방 맨 아래 숨겨서 지구에서 몰래 숨겨들어왔다. 생활 기스와 비생활 기스, 업무상 기스와 비업무상 기스로 곳곳이 흉할 정도로 낡은 태를 냈고 특히 오른쪽 상단은 형편없이 찌그러져 버린 상태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없을만큼 칠이 벗겨졌고 그 대부분에 녹이 슬어 있었다. 무단으로 얻은 그녀의 피 한방울을 분석하느라 이 칩은 지난 12시간 동안 빗나간 주파수에서 라디오 방송을 출력하는 것처럼 거슬리게 지직거렸더랬다. 그 결과가 드디어 싸구려 7 시리얼 8-Digit 보드에 뿌려지고 있는 것이다.

1 1 1 1 1 1 1

  음성이라면 0000000으로 출력된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로는 안드로이드가 아니었지만 이 금지된 판별법에 의하면 안드로이드가 맞았다. 처음으로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검사를 하지 말 걸.
- 뭐래요?
- 음, 당신이, 그러니까…….
- 안드로이드라는 거군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브는 싱겁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침대에서 일어나 천천히 블라우스를 걸치고 단추를 꿰었으며 치마까지 차례대로 입었다. 그리고는 테이블로 걸어와 둥글고 넓은 와인잔에 레드 와인을 따랐다. 컵을 헹구는 것처럼 가볍게 돌려 경쾌하게 와인이 찰랑이게 한다음 쌀짝 맛만 보고 잔을 내려놓았다. 마치 사뿐히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좋아요. 이제 당신이 말해봐요. 스코어는 1대1이니까. 난 안드로이드인가요? 인간인가요?
  그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 또한 두 가지 검사를 교차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안드로이드 선별법이란 없으니 말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카페트 위에 넘어져 있는 구두를 바로 세워 나란히 놓았다.
- 그건 본래 견지하던 입장이신 건가요? 아니면 현재의 상황이 경위님의 생각을 바꾼 거라고 봐야 하나요?
- 내가 아는 진리는 딱 하나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겁니다. 갈-슈바르츠하임법이 때로는 맞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지구에서 가져온 이 혈액 분석용 칩이 어떤 경우에는 정확하게 판별할 겁니다. 다만 어느 것도 항상 맞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이런 경우라면 저는 또 다른 3번째 검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 제 3의 검사라는 건?
- 심리적 반응을 보는 방법입니다. 지구에서는 갈-슈바르츠하임법의 유행이 지나간 다음 온갖 고물 사제 키트들이 난무하며 체내의 화학적 정보를 읽어내려고 난리였습니다. 그리고 10년 전부터는 기관적이고 신체적인 방법보다는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주장에  무게를 실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흥분, 갈등, 초조, 불안, 공포, 긴장…… 이런 정서적 변화가 교감 신경의 작용과 관련되어 있고 생리적 변화를 야기한다는 겁니다. 그 부분에 있어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반응하는 정도와 반응에 걸리는 시간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실습만 해보았을 뿐 현장에서 해본 적은 없기는 하지만…….
- 그래서 그걸 지금 해보실 생각인가요? 여기서?
  잘 익은 자두색의 메리 제인 펌프스를 신고 그녀는 의자에 앉았다 일어섰다. 마치 새 구두를 시험해보기라도 하는 듯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 여기서요? 장비도 충분하지 않는데…….
- 그냥 있는만큼만요. 여기서 무슨 대단한 과학 실험씩이나 하자는 게 아니잖아요.
- 그거야 그렇지만.
- 대신 조건이 있어요. 당신도 같이 받아요.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 어렵진 않지만 해석은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 방법만 알려줘요. 시키는 대로 할께요. 해석은 당신이 해요.
- 하지만 어째서…….
- 어젯밤에 말하길… 당신이야말로 갈-슈바르츠하임 검사에서 양성으로 나왔다고 하지 않았나요?

 

*


  47년 전에 지어진 노스사이드 하이웨이 모텔의 벽은 얇고 끔찍할 정도로 부실했다. 옆 방의 소리가 모두 스며 들어올 정도로. 어느 방에선가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소리가, 어느 방에선가는 서로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연인들의 싸움 소리가, 다른 어느 방에선가 틀어 놓은 라디오 소리가 (이런 모텔 투숙객이 턴 테이블씩이나 들고 왔을리 없으므로 아마도 라디오가 맞을 것이었다) 넘어왔다. 빌리 메이휴의 1936년 곡 'It's a Sin to Tell a Lie'라는 제목의 노래였다.

 

♬ Be sure it's true when you say, "I love you"
It's a sin to tell a lie
Millions of hearts have been broken
Just because these words were spoken ♬

♬ I love you, yes I do, I love you
If you break my heart I'll die
So be sure it's true
When you say I love you
It's a sin to tell a lie ♬


  골무 모양의 센서를 손가락에 끼웠다. 목덜미와 관자놀이 근처에 동전처럼 생긴 것을 붙이기도 했다. 가슴과 배에는 조금 더 크고 납작한 것을 붙였다. 각각의 센서에서 구불구불하게 흘러나온 낡고 전형적인 검은 선과 빨간 선이 모든 걸 손으로 돌려 조정해야 하는 구식 메타기로 연결되어 있었다. 반쯤 깨진 플라스틱 커버의 안쪽으로 바늘은 0에서 10까지의 사이를 좌우로 운동하게끔 예정되어 있었다. 피검사자의 생리적 반응 강도가 8을 넘어가면 벨이 (땡!) 울릴 것이었다. 긴장되었다. 흡사 복잡한 기계 장치의 일부가 되어버린 꼴은 마주보고 앉은 그와 그녀 모두 마찬가지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그냥 칩과 전선의 형편없는 싸구려 콜라주였을 뿐이고 그녀는 브래지어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가슴을 가졌다는 것 뿐이었다. 언쇼는 자신이 화성에서 만난 가장 매력적인 여자와 세상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한 방법으로 서로에게 연결 혹은 연장되어 있단 느낌을 받았고, 그건 분명 어떤 차원에서 묘하게 흥분되는 경험이었다. 그에게 연결된 바늘은 이미 좌우로 미세하게 떨리는 중이었다. 그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언쇼는 백지 두 장을 테이블 위에 나란히 늘어 놓고 볼펜을 꺼내 탁 소릴 내며 올려놓았다.
- 시작할까요?
  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이름이 뭡니까?
- 이브. 이브 아이버슨.
- 나이는 어떻게 됩니까?
- 스물여덟살이에요.
- 미혼입니까? 기혼입니까?
- 미혼.
- 직장은요?
- 법대 휴학생이고 법률회사 <포보스 앤 데이모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기본적인 신상 확인. 이미 그녀의 파일에서 읽은 내용 그대로였다. 여기까지 바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본격적인 질문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 체포된 안드로이드가 어떤 운명을 맞게된지 아십니까?
  그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 신문에서 읽었어요.
  여전히 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 우리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를 알고 싶어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3세대의 그들이 어떻게 우리와 다른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검사를 합니다. 2평짜리 방에 가두어 놓고 최소한의 먹을 것만 줍니다. 하루에 한 번 끌어내서 검사를 하고 다시 가두어 놓습니다. 대개는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검사가 그들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부분도 물론 있지만 놀랍게도 그런 상황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여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영향이 더 크다고 하더군요. 
  바늘이 떨렸다.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4를 넘었다.

-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의사와 인터뷰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남자는 자기만의 가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드로이드가 인간보다 감정 조절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진정한 감정이 아니라 그 잘난 로직 게이트에 따라 기계적인 반응을 출력하는 것 뿐이라고 한다면, 뇌의 산도가 인간보다 낮을 거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마치 우울증 환자들이 그러하다는 이론이 있는 것처럼요.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늘은 5를 넘어 6으로 향했다.

-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서 그 의사는 용의자를 마취시켜 놓고 해부를 했습니다. 중학교 과학시간에 하듯이. 잘은 모르지만 '작업'이 끝난 다음에도 중학교 과학시간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검정색 비닐봉지에 담아 버렸겠죠.
  바늘이 움직였다. 그녀 쪽의 바늘이. (땡!)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확실히 반응을 하기는 하는군. 그는 서둘러 종이에 뭔가를 옮겨 적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자신 쪽의 바늘이 덩달아 떨리는 것도 보았다. 안돼! 이래서는 제대로 된 검사를 할 수가 없어. 대학에서 훈련받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으로 배웠던 부분이다. 피검사자에 대한 감정이입. 

- 시간이 흐른 후에…… 그가 얻은 결론은 사실 좀 충격적이었습니다. 뇌의 산도 따위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결국 그가 산 채로 해부했던 용의자들 중에는 인간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안드로이드도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죠. 아무런 증거가 없을 뿐입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인간과 3세대 안드로이드 사이의 해부학적 차이를 규정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다시 바늘이 움직였다. 그녀 쪽의 바늘이. (땡!) 뒤이어 그 쪽의 바늘이 움직였다. 안돼! 왜 내 쪽의 바늘이 움직이는 거지? (땡!) 그녀가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바라보았고 이번에는 그가 더 당황을 하고 말았다.

 

*


  쥴리우스 치안총감이 아니었다면 루스 언쇼라는 사내가 화성으로 전근오는 일이 일어나기나 했을까? 아마 전혀 그럴 가능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같은 시간을 화성에서 잃어버리는 대신에 지구에서 보냈다면 그의 과거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현재 또한 전혀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그리고 다가올 미래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을까?

 

*


  정오 무렵이 되자 방은 참을 수 없을만큼 더워졌다. 하나 밖에 없고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창으로 들어온 열기는 다른 출구를 찾지 못하였고, 잘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몸은 더 많은 땀을 바깥으로 배출해내었다. 전극과 살이 맞닿는 부분마다 땀이 축축하게 스미면서 기분 나쁘게 따금거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쩌면 영원히 멈추지 않을지도 모를 옆 방의 라디오는 이제 빌리 홀리데이의 1944년 곡 'I'll Be Seeing You'를 내보내는 중이었다. 루스 언쇼는 고집스럽게 질문을 하고, 시간을 재고, (땡!) 소리를 확인하고, 종이에 기록했다. 마침내 테이블 반대쪽에 앉아서 인내심을 발휘하던 이브 아이버슨이 토라진 목소리를 냈다. 바보 같은 질문의 반복에 참을만큼 참았다는 듯이 입을 삐쭉대며.
- 불공평해요. 나도 질문을 해야겠어요.
- 정식 검사를 위해 설정된 상황 질문은 정해져 있습니다. 잠시 후에 질문지를 넘겨드릴테니…….
- 아니요. 그건 아니죠. 당신은 경찰이고 훈련받은 전문가잖아요. 표준 절차로 되어 있는 질문에는 스스로 반응을 제어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저는 즉흥적으로 해보고 싶네요.
- 그렇지만…….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싱긋 웃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의 지적은 대개 옳았고 또 날카로웠다. 수건이라도 던지는 심정으로 그는 볼펜을 내려놓았다. 백지 한 장을 그녀 앞으로 밀어 놓으며 검사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의자 뒤로 기대 앉았다. 의자 등받이와 끈적끈적한 땀이 계면을 이루는 짜증스러운 느낌에 그는 몸서리를 쳤다.
- 이름에서부터 시작하죠. 이름이 뭐에요?
- 루스 언쇼.
- 음, 그 담에는…… 나이는요?
- 서른 여섯입니다.
  그녀의 태도는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심문하는 자의 것은 아니었다.
- 직업은요?
- 경찰입니다. 직급은 경위고, 잘 알고 계시겠지만 화성 경찰국에서 일합니다.
- 화성에 오기 전에는요? 지구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 NYPD. 뉴욕경찰국에서 일했습니다.

  그녀를 고개를 끄덕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백지에 적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메타기의 바늘은 전혀 움직일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메모가 끝나 그녀가 고개를 들기까지 그의 시선은 슬쩍 다시금 그녀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에게 연결된 쪽의 바늘이 더 높은 숫자를 향해 미끄러져 가지 않았다면 계속 훔쳐보았을지도 모른다.  
- 그럼 여기 오게 된 이유는 어떤 것이었나요?
- 그건…… 화성치안총감의 전출 요청 때문이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그 쪽의 바늘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2와 3 사이에서.
- 당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나요?
- 망설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고려해 볼 여지가 있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치안총감이 직접 저를 원할만큼 제가 이 곳에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도 받았고, 그런만큼 조금 더 탄탄하고 안정된 입지 위에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물론 사실 제가 그 시점 MCPD에 필요한 능력과 경력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화성으로 가겠다고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일한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 그런데…… 오게 되었군요.
- 고민하기 이전에 이미 일이 벌어져 버렸던 겁니다. 어떻게 난 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뉴욕경찰국 안에 말이 퍼지면서 제 입장이 곤란해졌고, 제가 맡았던 업무에서 사실상 배제가 되었던 겁니다. NYPD 고위간부들께서도 이미 알고 있더군요.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NYPD에서 계속 버티기엔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지만……, 정부와의 계약상 제가 그 당시에 경찰을 그만 두면 군인으로 징집되어 우주 어딘가의 최전선으로 보내질 처지였죠. 그러다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화성행 우주왕복선에 오르게 되었던 겁니다.
- 혹시 화성치안총감이 공식적으로 NYPD에 요청을 한 건 아니었나요?
- 아닙니다. 나중에 확인을 해보았는데 그런 기록은 없었습니다. 만나서 물어보지 못했으니 정확한 그 분의 생각을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제 짐작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치안총감은 화성에서 일할 기회를 주는 자체가 상당히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로 5년 근속의 경관이 원하는 곳으로 소속 변경 신청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고 경관 본인이 원해서 전근을 신청한다고 한다면 문제가 없을 터이니 NYPD에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양해를 구하거나 당시 제 소속 부서의 상관들을 만날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늘은 서서히 좌와 우로 움직였지만 다행히 2와 3 사이의 범위를 넘어가지는 않았다.
- 하지만 NYPD에선 상당히 불쾌해했을 수도 있겟네요.
- 그렇죠. 사실 그렇게 꼬이기 시작한 겁니다. 백번 양보해 치안총감의 의도나 절차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에서 도의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 인생인데……  제 입장과 제 의사를 가능한 존중해주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이 아가씨에게 털어놓고 있지?
- 당신, 화성을 싫어하는군요. 왜 그런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 원하지 않았으니까요. 여기 오는 걸.
- 처음 왔을 때는 어땠나요? 그때부터 여기 생활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요?
- 가장 먼저 맞닥뜨린 것은 괴리된 현실이었습니다. 알고보니 MCPD의 수사 기조는 저를 그리 필요로 하는 방향이 아니었고 저 역시 MCPD에서 어울리는 자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안드로이드 수사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이 달랐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MCPD에서는  이미 지구에서 아주 오래 전에 시도했다가 진작에 폐기된 것들에 여전히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법처럼 말입니다. 머리 둘레 54.82 센티미터? 2호 헬멧이라고요? 세상에! 그런 건 백과사전에서나 볼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마치 거꾸로 된 세계에서 살아야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들은 위에서 아래로 세계를 내려다 보는 반면에 저는 아래에서 위로 세계를 올려다 보았다고나 할까요? 지구와 화성을 모두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제 기분을 모릅니다. 자기들과 다른 방식의 수사에 유연하지 못한 경찰국의 분위기도 저로 하여금 의욕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방망이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칠 야구선수를 강제로 데려다가 축구장에 내보내 놓고 "왜 열심히 안하냐"며  책망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도이자 고등 심리교육을 받은 수사관이었던 사람을 데려다가 2호 헬멧 페인트 칠이나 소독 작업을 하게 만들었단 게 말이나 됩니까?
- 유감이네요. 하지만 당신이 화성을 싫어하기에 화성에서의 당신 존재를 무용한 것처럼 느껴던 것은 아닐까요?
- 글쎄요. 그건 인과관계가 바뀐 말씀인 것 같습니다.
- 예, 알겠어요. 그건 제 3자로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 그리고 사실 화성 부적응 사태의 이면에는 더 복잡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뭐랄까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안 좋은 소문이 났던 겁니다. 지구고 화성이고를 떠나서 경찰 바닥이 다 경찰 바닥이라 MCPD에도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간부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 사이에서 저를 두고 매끄럽지 않은 전근 과정을 두고 이런 저런 말들이 나왔습니다. 욕도 많이 먹었고 멸시와 모욕과 경멸도 많이 당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더군요. 처음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재낙스나 프로작을 복용하게 되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 그 사실을 치안총감에게 털어놓은 적은 있어요? 당신을 화성으로 데려온 장본인이시라면서요.
-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워낙 높은 분이고 바쁜 분이라 만나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만날 수 있다고 한들 무슨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말단 직원인 입장에서. MCPD 간부 중 아무개, 아무개에게 돌을 맞고 다녔으니 복수해 달라고요? 코찔찔이 어린애처럼 일러바칠 수는 없지 않는 노릇 아닙니까? 일도 싫고 사람도 싫었습니다. 속으로만 계속 삭히다보니 결국엔 건강에 이상이 옵디다. 홧병이 났습니다. 다시 전근을 하고 싶다는 의지를 계속해서 밝혔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화성에 도착한 이래로 단 하루도 전근을 원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습니다. 사직원이 치안총감님까지 올라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매번 반려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직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에게 연결된 메타기의 바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마음 속에 돌처럼 안고 있던 명백한 진실이기는 했다. 이 대목에서 그는 다시금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들을 이 아가씨에게 털어놓고 있지?

 

*


- 당신, 너무 경직되어 있는 거 알아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말을 너무 딱딱하게 하는 것 같아요.
- 습관입니다. 대인공포증을 치료받으면서부터 생긴. 언제 어디서 누구와 이야기해도 말이 편하게 나오지 않는데 잘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로이스톤 경감을 비롯해서 경찰국의 몇몇은 저더러 꼭 안드로이드처럼 말한다고 합디다.
  그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리고는 자기도 멋쩍었던지 이브의 질문 방식을 트집잡는 척 했다.
- 그건 그렇고 이런 식으로 하는 검사가 아닙니다. 지금 순전히 개인적인 이야기만 나누는 중이지 않습니까? 이럴 바에야 이 우스꽝스러운 칩이며 전극이며 전선을 붙이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무슨…….
  하마터면 이런 말을 할 뻔 했다. '지금 우리가 무슨, 블라인드 데이트 따위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라고.

  이브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백지에 뭔가를 적었다. 그리고 손으로 머리칼을 묶듯이 모았다가 풀어 흐뜨러뜨렸다. 옆방의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이제 페기 리의 1941년 곡 'Where or When'이었다. 지금 이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을 언젠가 꼭 같은 상황에서 느껴본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고 또 어디서였는지 기억할 수 없다는 내용의 노래.
- 이름이 뭐랬죠?
- 누가요?
- 당신 전 부인이요.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내가 전 부인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까? 당신한테?
- 어젯밤에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간밤에 얼마나 많은 말을 그녀에게 했던 걸까.
- 시간 낭비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검사가 아닙니다.
- 어떤 식으로 해선 안될 검사인가요? 자극을 던지고 반응의 양상을 본단 근본 원리에선 차이가 없지 않나요? 
  졌다. 그는 두 손을 드는 시늉을 했다.
- 수잔. 수잔 메이페어였습니다. 처녀때 성을 그대로 쓰길 고집했습니다.
- 그녀를 사랑했나요?
- 물론이죠. 끝이 좋지 않았다고 사랑하지도 않았던 건 아닐테니 말입니다.
- 어떤가요? 수잔도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를 받았나요? 수잔이라 불러도 된다면요.
  고개를 끄덕였다.
- 결혼할 때도 확인을 받았고 이혼할 때도 확인을 받았습니다. 통과하지 못했다면 그녀와 결혼하는 일도 이혼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았을 겁니다.
- 수잔이 안드로이드가 아니라고 확신하나요?
- 물론입니다.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여기 화성에서요.
-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죠. 당신도 안드로이드가 믿지만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를 통과하지 못했잖아요? 나는 그 검사를 통과했지만 안드로이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요. 그렇다면 수잔에 대해서도 검사는 통과했지만 안드로이드일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요? 어떤가요? 확신할 수 있나요?
  뭐라 말하려는 찰나에 바늘이 선수를 쳤다. (땡!) 질문의 차례가 그녀에게 넘어간 이후 처음으로 울린 벨소리였다.

- 수잔이 안드로이드였다는 가정을 해보죠. 당신은 안드로이드와 3년을 같이 산 거라고 말이에요. 같이 보낸 시간을 떠올려 보세요. 어떤가요? 그녀의 프로토타입이, 아니 그녀의 먼 조상이 토스터나 전자레인지였다고 말이에요. 

  그가 뭐라고 항변하려는데 다시금 (땡!) 소리가 났다.
- 사랑에 있어 그 상대가 인간이냐 아니면 인간과 구별하기도 어려울만큼 닮은 안드로이드냐의 여부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감정적인 친밀함이나 정서적인 유대감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요?

  뭐라 대꾸라도 하고 싶었지만……. (땡!) 소리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 상관 있나요? 내가 안드로이드이고 아니고 여부에 따라 나에 대한 당신의 감정도 달라질 수 있는 건가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땡!) 그런 그의 모습 앞에서 이브의 녹색 눈동자도 흔들렸다. (땡!) 그의 복잡한 방정식으로 가득 들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땡!) 물론 냉정은 열정에 압도했다.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땡!) 하지만 그녀가 안드로이드라면 그땐…… (딱!).

  (딱!)은 (땡!)이 아니다.

  이상한 예감이 그를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부르르 떨게 만들었다. 그림처럼 이브 아이버슨의 몸이 서서히 옆으로 넘어갔다. 처음에는 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고, 시간이 지나자 상황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고, 다시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어떤 색깔의 감정이 머리를 향해 올라오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황급히 전극을 떼어내고 아무렇게나 내팽겨친 다음에 쓰러진 이브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완전히 바닥에 널부러져 미동도 하지 않았고 아담하고 하얀 이마의 오른쪽 위로 작은 총알 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를 안아 올리자 사출구에서 쏟아져 나온 새빨갛고 끈적끈적한 피가 고스런히 그의 손에 묻어났다. 부서진 뼈와 찢어진 살과 끊어진 조직과 뭉그러진 탄환 조각과 함께. 그는 잠시 숨을 쉬지 못했고 공황에 빠졌다가 얇고 부실한 벽이 아니어도 충분히 옆방에 들릴만큼 웃음과 울음 섞인 기괴한 소리를 질렀다.

 

*


  마음이 진정시키기까진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는 창문가로 다가가 루바 창의 틈새로 내다 보았다. 노스사이드 하이웨이 모텔은 '디귿'자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방은 2층이었다. 이브가 앉았던 위치를 감안하자면 총알이 날아온 곳은 맞은편 방이거나 그 위의 지붕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왜? 그녀가 뭘 어쨌다고? 차라리 도망자인 나를 노려야 하는 게 아닌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는 하나 뿐인 창에 두꺼운 커튼을 쳤다. 카페트의 핏자국은 점점 깊이 스며들어 꼭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선명했다. 가지런히 침대를 정돈한 다음 이브의 차가운 몸을 안아올려 가지런히 눕혔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일었다.

 

 ♬ We'll meet again,
 Don't know where, don't know when,
 But I know we'll meet again, some sunny day. ♬

 ♬ Keep smiling through,
 Just like you always do,
 Till the blue skies drive the dark clouds, far away. ♬

 

  지금, 옆방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이 노래. 어젯밤 식당에서도 나왔었지. 베라 린의 1939년 곡 'We'll Meet Again' 세계 2차대전 당시 재회할 수 없는 이별을 해야만 했던  젊은 군인들과 연인들의 비극을 대표했던 노래.

  차라리 그녀가 2세대 안드로이드여서 얇은 고분자 피부 아래 고철덩어리와 기판과 케이블만을 가지고 있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았을텐데. 그 시절에는 같은 얼굴을 한 수 많은 동일 개체들이 출시되었다지. 100만대의 진 켈리 출하. 100만 대의 데비 레이놀즈 출하. 그렇다면 세상 어딘가에 이브 아이버슨과 똑같은 얼굴을 한 같은 모델의 안드로이드가 존재할 수도 있을텐데. 그럼 여기 이 진짜 이브에게 남겨져 있을 메모리 칩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뭐 그딴 게 있어서 그걸 가져다가 같은 모델에게 끼운다면 어쩌면 어느 맑고 화창한 날에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그는 가만히 이브의 가슴에 귀를 대어 보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그녀의 빨간 구두 한 짝이 카페트 위에 모로 눕혀져 있는 걸 보았다. 아마 침대로 옮길 때 벗겨졌는지도 모르지. 그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올려 침대에 올려 놓으려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구두의 안쪽 바닥에 압정이 거꾸로 세워 스카치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끝에 묻은 피. 이브의 왼발을 확인했다. 압정으로 생긴 작은 상처는 단 하나 뿐이었고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이었다. 구두 안에 압정을 넣은 채로 걸어다녔을리 없다. 그렇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넣었을텐데 도대체 어째서? 그녀가 침대를 빠져나와 구두를 신었을 때라면 이 심리 검사를 시작하기 직전이다.

  신체적 자극을 통해 심리 검사의 결과를 왜곡하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 그는 지구에서 훈련받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떻게? 화성에서는 아직도 갈-슈바르츠하임 검사가 표준이고 누구도 다른 검사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데. 심지어 경찰국 사람들조차 화학적 선별법이나 생리적 정보 수집을 낯설어하는 이 곳 화성에서? 심리 검사와 심지어 그 회피 기술까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것도 평범한 스물 여덟살 아가씨가? 침대 앞 거울에 비친 그의 표정은 고약한 부조리극에나 나올 법한 것이었다. 주인공을 가능한 가장 빙퉁그러진 가능성 안으로 몰아가는.

  검사를 회피하려고 했다는 건 그녀가 안드로이드였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녀에게 연결되었던 메타기가 동작했던 순간은 대단히 무작위적이었다. 감정적으로 상당히 잘 반응하는 한편으로는 논리적이고 냉철한 부분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심리 검사를 회피할 요량이고 마음대로 반응을 조절할 수 있었다면 굳이 이런 결과를 유도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다시 한 번 자세히 봐야겠어. 테이블로 다가가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작성한 것으로 생각하고 집어 들었지만 사실 그것은 그녀가 작성했던 다른 한 장의 종이였다. 이렇게 휘갈겨 적혀있는.

 

치안총감을 만나세요.
내일 아침 녹티스 라비린투스 역
9시 37분 출발 테라 인코나타행 열차
퍼스트 클래스 첫번째 방 F-01

비서와 경호원 없이 혼자 탑승
행운을 빌어요.
- Eve

 

  이제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그녀를 믿는 것. 그리고 그녀를 믿지 않는 것. 하지만 결국 출구가 단 하나 뿐이라는 사실도 이미 어렴풋이 예감할 수 있었다. 

 

*

 

  드디어! 치안총감님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할까?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기대해왔다고? 도대체 왜 나를 여기로 데려오셨느냐고? 당신께서 구상하셨던 그림을 만들어 만족하시냐고? 덕분에 내 인생의 리듬과 박자는 완전히 엉켜버렸다고? 화성 경찰국의 동료들과 사이가 이렇게 되어버린 건 내 책임만이 아님을 아시느냐고? 평생 남 좋은 일만 하며 살아온 내가 여기 와서 이기적인 놈 소릴 듣게 된 걸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난 이제 너무 지쳤고 더 이상은 싸울 힘조차 없다고? 이제 좀 사직서를 수리해 날 지구로 좀 보내달라고? 참 그런데... 자기 일에 충실하기로 유명한 로이스톤 경감이 벌써 나의 갈-슈바르츠하임 검사 결과를 상부에 보고했다면……  이미 해고된지 오래일 수도 있겠군.

 

*


  계단 위에서 내려다 본 록티스 라비린투스 역의 승강장은 기묘한 무게감에 짓눌려 있었다. 짙푸른 안개는 꼭 분무기로 물방울을 뿌려 놓은 것처럼 바닥을 적셨고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들의 얼굴을 희뿌연 몽환 속에 가려버렸다. 군중의 특색없는 머리만이 끝도 없이 보였다. 무한한 머리의 행렬이었다. 크거나 작거나, 머리칼이 짧거나 길거나, 모자를 썼거나 쓰지 않았거나, 저들 중 일부는 틀림없이 54.72 센티미터의 머리 둘레를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언쇼는 곳곳에서 제복 입은 경관들이 돌아다니는 걸 보았다. 그들은 무작위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강제적 동의를 구하고 그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2호 헬멧을 씌우기를 반복하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 꼴을 보아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과학 수사는 쥐뿔. 융합 수사는 개뿔.

  오로지 하나의 관점만이 절대적이고 나머진 그저 들러리만 해야하는 것이 무슨 놈의 과학이고 무슨 놈의 융합이람. 그저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식의 장난질일 뿐이지.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법이며 2호 헬멧으로 저들이 하고 있는 짓을 봐. 오직 일선 수사의 편의성만을 생각한 결과물에 불과하잖아. 나이, 성별, 인종에 상관 없이 안드로이드의 머리 크기가 항상 일정할 거란 생각 너무 멍청하지 않아? 차라리 아케이드의 핀볼 머신 같은 걸 만들지 그래? 볼 대신에 저기 보이는 머리들을 잘라다 그 안으로 던져 넣으면 핑-퐁-핑-퐁 튀기다가 54.72 센티미터 짜리만 딱 걸쇠와 걸쇠 사이에 걸리고 나머지는 아래로 빠져나가겠지. 내 말이 틀려?

  경관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맞닥뜨리게 되는 것처럼 보일 셈이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제 갈 길로 나아갈 생각이었다. 정면 돌파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전한 선택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자신감이 그의 가짜 ID 카드였던 셈이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적어도 열차에 오르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를 붙잡고 검문하거나 강제로 2호 헬멧을 씌우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혹시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NEGATIVE 판정이 박힌 천공 컴퓨터 용지를 받아들고 당당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임을. 어떤 면에서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법의 가장 큰 적은 '의지'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의지'로 머리 크기를 바꿀 수 있다는 식의 황당천만한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오직 '의지'만이 멍청하고 맹목적인 믿음에 맞서 싸울 수 있게하는 유일한 무기라는 것이다. 루스 언쇼라는 사내는 그 사실을 방금 막 깨달았고,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은 채 열차에 오름으로써 그 깨달음을 스스로 입증하고야 말았다.

  9시 47분 발 열차는 새까만 구름을 몰고 비명 소리와 함께  승강장으로 밀려 들어와 멈추어섰다. 철컹거리는 바퀴의 진동은 가감없이 땅으로 전해졌다. 테라 인코나타 행. 이미 이 열차의 특실에 화성치안총감이 타고 계시다는 말이지. ‘왕정 시대의 임금보다는 만나기 쉬운, 그러나 민주 시대의 대통령보다는 만나기 어렵다는’ 대단하신 양반과의 독대. 달리는 열차 안에선 그도 도망칠 곳이 없었지만 그 대단하신 양반이 도망칠 곳이 없기도 했다.

 

*

 

  열차는 허공을 구르며 위로 뻗어나가 화성의 밤하늘을 갈랐다. 루스 언쇼는 화장실에 숨어 몸을 바싹 낮추고 열차의 궤도가 정상화되기를 기다렸다. 열차에 오르기 전에 마셨던 비타민 음료 때문인지 속이 좋지 않았다. 24시간이 넘도록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닭가슴살과 새우를 갈아 달라고 주문하진 말았어야 했다. 성분과 무관하게 그런 건 진짜 음식이라 볼 수 없지 않은가! 하기야 화성에 제대로 된 음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기도 하지만 말이다.

  몸이 뒤로 쏠리는 현상이 멈추자 비로소 열차가 궤도에 올라왔단 느낌을 받았다. 셋을 센 다음에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승객도 승무원도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코노미 7호차. 퍼스트 클래스까지 가야할 길은 멀고도 멀었다. 속이 좋지 않지만 목도 말랐다. 자동판매기로 다가갔다. 자동판매기가 내놓을 수 있는 건 그래봐야 (열차에 오르기 전에 먹었던 것과 똑같은) 비타민 음료일 뿐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동전을 만지작 거렸다. 25센트짜리. 조지 워싱턴과 험프리 보가트. 어느 쪽에 가까운 현실일까? 혹은 나는 지금 어느 쪽이 현실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걸까? 그는 동전을 꺼내 엄지로 허공 위로 튕겨 올렸다가 왼손으로 받으며 재빨리 오른손을 그 위에 덮었다. 셋을 세고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치웠다. 험프리 보가트. 자문했다. 정답은 없어 보였다. 그가 받아들이는 것이 정답이었다. 다만 그는 여전히 어느 쪽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자동판매기를 조작하여 음료의 조성을 조절하였다. 돼지고기, 새우, 양상추, 브로콜리, 오렌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인핸서로 비타민 C 3.3 mg을 더했다.

  화성에 도착한 이래로 그는 항상 갈증을 느꼈다. 허기에도 시달렸다. 하지만 어쩌면 지난 24시간 동안에 느껴왔던 것에 한하자면 진정한 허기나 진정한 갈증이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정말 배가 고프기보단 감정적 허기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이브. 이브 아이버슨. 그녀를 잃고 난 이후로 계속 배가 고팠고, 또 목이 말랐다. 화성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 처음으로 만난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그녀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혹은 그녀가 '무엇'이냐는 것이 얼마나 무게를 지닌 사실인 걸까? 그녀가 앤디라면 (혹은 앤디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던 걸까? 물론 단순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가 느꼈던 놀라울 정도의 정서적 친밀감에도 불구, 사실 그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불과 하루 전에 처음 만난 사람이었으니까. 애당초 잠복 수사의 근거가 된 정보의 출처가 어디였고 또 어떤 내용의 소스였는지도 전달받지 못했다. 또한 젋은 여성 상대의 저격은 대단히 드문 일 이다. 더구나 그녀가 거기에 있었던 걸 누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말이 되지 않았다. 노스사이드 하이웨이 모텔은 무작위적 도주의 과정에서 무작위적으로 선택된 장소였을 뿐이니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도 많았다.

  난기류에 열차가 흔들렸다. 종종 유난한 날이 있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승객들은 그를 신경쓰거나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기차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란 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어차피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란 다 그렇지 앟은가.

 

*


  객실이 끝나는 곳의 통로는 유리 천장이었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머리 위로 왈츠를 추는 두 개의 달을 올려볼 수 있었다. 승객들은 저마다 가벼운 알콜이나 참았던 담배를 들고 그 곳에 모여 구식 쥬크박스가 돌려대는 노래 속에서 수다를 떨기에 바빴다. 나른하고 몽롱한 연기가 무대 연출인 것처럼 바닥으로 깔려 왔다. 이제 다 왔어. 이 복도를 지나서 퍼스트 클래스로 넘어가면 바로 화성치안총감이 있는 방을 찾을 수 있겠지. 막다른 곳에서의 독대. 말 그대로 도망칠 곳도 도망갈 곳도 없을 것이다. 긴장되는 동시에 설레였고 설레는 동시에 긴장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화성치안총감과의 인연도 끝이 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도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하는 일. 더는 미루거나 도망갈 수 없었다. 사실 인생이 그래. 하나의 문을 닫아버리기 전엔 다른 하나의 문을 열 수도 없는 법이지.

  그는 화성에서 부적응자였고 지금은 또 도망자였다. 하지만 억울했다. 지구와 화성을 모두 경험해 본 그만이 알 수 있는 진실이 있었다. 양쪽을 다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차이가 있었다. 지구 시절의 그는 촉망받는 수사관이었다. 지금 이런 꼴이 되어버린 걸 그만의 탓으로 돌릴 수야 없을 것이다. 토할 것 같아. 홧병이 날 것 같아. 화성에서 지내는 내내 그는 그 생각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비울 수가 없었다. 앞 칸에서 들어온 경관 둘이 그를 향해서 다가왔다.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을 내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 선생님. 저희는 MCPD 소속의 경관들입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 무슨 일입니까?
- 도주중인 안드로이드르 추적하고 있습니다. 열차 내 모든 승객이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갈-슈바르츠하임 검사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형식적인 것일 뿐이니까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형식적인 것일 뿐이지. 2호 헬멧이 그의 머리에 씌워졌다. 주파수 대역이 어긋난 무전기에서 나는 잡음 끝에 몇십 초 후 결과지가 출력되었다. 불과 하루 전 54.72 센티미터의 머리 둘레를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던 그였지만 마음이 편안했다. 이 번에는 다른 결과가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예감이 있었고 확신이 있었다.

NEGATIVE

  역시나 그 예감이 맞았다.
- 음성이군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경관들은 공손하게 인사하고 그를 지나쳐 다른 승객들을 검사하러 가려고 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버렸다. 여기서 잡혔다간 치안총감을 만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될 거란 사실도 잊은 채.
- 잠시만요. 경관님들. 정확합니까?
  용의자가 아니라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피검사자를 본 적이 없었던 신출내기 경관들은 당황하여 서로를 마주 보았다.
- 한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 무엇에요? 어떤 의문을 말입니까?
- 이건 단지 선 하나를 그어놓고 이쪽과 저쪽을 나누는 꼴에 불과합니다. 이런 검사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합니다. 제가 앤디인지 아닌지, 나아가 제가 진정으로 어떤 사람이고 영혼을 가졌는지 머리 둘레 하나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검사법은 각각의 생명체 하나 하나에 관심을 두는 겁니까? 아니면 자기들이 규정해 놓은 선,  그 자체에만 관심을 두는 겁니까? 당신들은 정말로 여기에 아무런 의문을 가져보지 않은 겁니까?

  경관들은 쑥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꼭 안드로이드처럼 말씀하시는군요?
- 하지만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를 통과하셨으니 그럴 리는 없겠죠?
  그들은 서로 미소를 교환하고는 그에게 등을 보였다.

 

*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경관들의 몸을 돌려 쏟아내고 싶은 말이 넘쳐났다. 오랜 화성 생활 동안 돌처럼 묵혀두었던 말들이다. 그 욕망을 제어하게 만든 것은 저 멀리서 끈질기게 그를 향하고 있는 한 여자의 시선이었다. 낯선 얼굴이었음에도 어쩐지 아는 사람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순간 경관들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주크박스의 판이 돌아가면서 흘러 나오기 시작한 1939년 코니 보스웰이 불렀던 'Blue Moon'이 그의 발걸음을 그리로 인도했다. 마치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 Blue moon
You saw me standing alone
Without a dream in my heart
Without a love of my own

Blue moon
You knew just what I was there for
You heard me saying a pray'r for
Someone I really could care for ♬

 

  그녀는 하얀색 목 폴라티 위에 단추를 채우지 않은 청록색 체크 셔츠를 걸쳤고 적당히 물이 빠진 부츠컷 청바지를 입은 채였는데, 마치 그가 다가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바에 기대 체리 반쪽이 올려진 이름 모를 칵테일을 마시는 중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 보니 파란 빛이 감도는 눈화장이나 과감하다 싶을 정도로 보라색을 띄는 입술이 인상적이면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 드디어 오셨군요. 드디어.
  생기가 넘치는 목소리였다.
- 저를 아십니까?
-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이 재미있었는지 낄낄거렸다.
- 그럴 수도 있다고요?
- 아닐 수도 있고요.

  묘하게도 악의가 없어 보이는,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웃음이었다. 분명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그러고보니 터키 옥색 눈동자는 이브 아이버슨과 똑같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을까? '눈동자가 닮았다'는 표현이 가능할 수 있는 건가? 자매인가? 아님 친척? 화장과 옷차림이 극과 극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여서 그렇지, 묘하게 닮은 구석은 있어.

- 혹시 이브 아이버슨이라고 아십니까? 식민지 C지구에 사는.
- 알죠. 아주 잘 알아요.
- 어떤 사이인 겁니까? 자매나 친척은 아닙니까?
- 있잖아요. 물어볼 줄 알았지만 정말 물어보니 막성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왜냐면?

  그녀는 정작 체리가 달리지 않은 꼭지만 한 쪽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렸다.
- 당신이 만났던 그 촌스러운 여자애의 이름은 이브 아이버슨이 아니거든요. 왜냐면…… 내 이름이 이브거든요.

  마치 극적으로 영화의 결말을 폭로하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 이름이야 같을 수 있습니다. 동명이인 아닙니까?
- 아니에요.
- 정말입니까? 저는 그녀에 대해 상당히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본인을 만났다고 확실할만한 증거도 물론 충분히 있었습니다.
- 경찰이시죠. 알아요. 어련히 알아서 조사하셨겠어요.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었다.
- 긴 이야기를 짧게 요약하자면 그래요. 내 이름이 이브이고 그녀는 자기 이름이 이브인 줄 알고 있을 뿐이에요.
- 그럴 수가 있습니까?
- 그럴 수 있죠. 그렇게 믿게 만들었으니.

- 외투 주머니 속에 동전이 있죠? 다 꺼내서 여기 테이블 위에 늘어 놓아 보세요.
  그는 짤랑거리며 동전을 모두 모아 바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니켈이며 다임이며 골고루 생각보다 꽤 많았다.
- 뭐가 보이죠? 동전 위에 어떤 얼굴들이 각인되어 있죠?
- 딘 마틴, 프랭클린 루즈벨트, 험프리 보가트, 에이브러햄 링컨, 진 켈리, 조지 워싱턴, 프랭크 시나트라, 토마스 제퍼슨…….
- 맞아요. 그렇죠. 그런데 분명 당신은 어느 시점에선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상하단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그렇지 않은가요? 어느 순간에는 이것이 맞는 것처럼 느껴지고 어느 순간에는 저것이 맞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건 사실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 그리고 생각해봐요. 당신은 이제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요. 생각의 방향을 바꿔보아요. 어느 것이 맞고 어느 것이 틀리냐의 관점이 아니에요. 더 큰 그림을 봐야죠. 왜 맞고 틀린 것들이 한데 섞여 있을까.

  섞여있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쩜 두 가지 현실이 공존할 수 있을까? 아니지, 현실이라면 서로 배치되는 것이 공존할 수 없을꺼야. 그렇다면 결국 이건 현실이 아니겠지. 그렇다는 결론은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 건가?
- 그럼…… 나는 살아있긴 한 겁니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그녀는 깔깔대고 웃었다.
- 딱하군요. 딱딱한 양반. 좀 마음을 여유롭게 먹어봐요. 당신은 살아있으니 염려하지 말아요. 동시에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도 해요. 물론 그러니 엄밀하게 살아있달 수 없기도 하죠.
- 그게 무슨 소립니까?
- 아직도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요. 삶과 죽음의 문제를 0과 1의 '상태'로만 보진 말아요.
- 그걸 어떻게 압니까?
- 알죠. 알다마다요. 나도 당신과. 같은 처지니까.

 

*

 

  그녀는 깃털처럼 사뿐히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스툴 위에 고쳐 앉으며 반대로 다리를 꼬았다. 파란색 클러치 백을 열고 담배케이스를 꺼내 럭키스트라이크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성냥에 불을 붙였다. 성냥 끝에 맺혔던 불꽃의 그림자로 인해 그녀의 얼굴 위엔 잠시 신비로운 분위기가 일렁였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 어디 한 번 게임을 해보죠. 마침 여기 종이 있네요. 여긴 바니까 아마도 바텐더가 쓰려고 갖다 놓은 종이겠죠. 당신이 지구에서 배워왔단 심리 검사처럼 종을 이용해서 한 번 진실 게임을 해봐요. 난 정답을 다 아니까. 당신의 추측이 맞으면 가만히 있을께요. 반대로 당신의 추측이 틀리면 그때마다 종을 칠께요. (땡!) 하고.
- 정답을 다 안단 말입니까?
- 물론 '안다'는 게 큰 의미는 없죠. 당신보다 조금 빨리 알게 되었을 뿐이니까. 당신도 결국 알게 될 거고요.
- 심리 검사를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화성에서는 아직도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법이 표준이고 화학적 생리적 정보를 얻으려는 단계까지도 나아가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심리 검사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게 아닙니까.

  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 놀라운가요? 그럼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죠. 내가 어떻게 그걸 알까요? 미안하지만 나도 당신과 같은 교육을 받았어요. 마음 같아선 전극이며 칩이며 밴드를 당신 몸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여놓고 치렁치렁 전선에 연결해서 정식으로 메타기의 바늘과 눈금을 읽어가면서 하고 싶은데 안타깝네요. 여기엔 장비가 하나도 없잖아요.
- 그러니까 당신도 지구 출신이라는 말이로군요.

  그녀는 종을 누르려다가 말았다. 긴장한 그의 표정을 보며 박장대소를 했다.
- 너무 쉽잖아요. 그건 누구라도 예상하겠어요.
  그는 망설였다. 그녀는 크리스털 재떨이에 타다 만 담배를 비스듬하게 기대 놓았는데 하얀 연기가 공중으로 퍼져가며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끝내 하늘에 닿지는 못할 것이었다. 천장은 그냥 투명한 유리일 뿐이니까.
- 빨리요. 빨리. 매사에 그렇게 진지해요? 그냥 던져봐요. 믿져야 본 적 아니겠어요. 빨리 이 게임을 마치고 저 복도 끝으로 가서 문을 열고 치안총감을 만나야죠.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주크박스에서 나오는 노래가 선명하게 들렸다. 'Blue moon. You knew just what I was there for.' 그리고 눈을 떴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두 개의 달이 보였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자신이 진짜 이브 아이버슨이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보았다. 그녀의 터키 옥색 눈동자를 보았다. 그 안에 우주가 있고 푸르게 빛나는 별이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머리가 아팠고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상의가 벗겨진 상태로 의자에 묶여있었고 그가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전선들이, 그가 평생 배워온 방법보다 훨씬 다양한 방법으로 그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개 중 어떤 것은 이미 그의 몸 안으로 찔러 넣어지기라도 했는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땡!) (땡!) (땡!) 불안정하고 불규칙하게 메타기의 바늘이 흔들렸다. 

 

*


  이 곳은 낯설고 낯익은 것이 공존하는 공간이죠. 희망이 때로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고 환희가 때로는 비탄이 되기도 하고요.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요. 당신만 남의 감정을 보살피느라 스스로를 깊고 어두운 곳으로 유폐시켜야 했죠. 마치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불안하고 불편한 나날을 보내면서도 스스로를 탓해야 했었죠.

  당신은 언제부턴가 남의 입에 쉽게 오르내리는 질량 없는 존재가 되었어요. 우리는 진리가 말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오는대로 진리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어요. 당신이 말을 잃어버리고 남들과 다른 방식의 언어를 사용하게 된 건 당신의 잘못만은 아니에요. 당신이 겪어야했던 많은 일들이 형언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결말을 아는 영화를 다시 보아야 하는 불가해한 운명, 체스판 위의 말처럼 남의 손에 함부로 휘둘렸던 알 수 없는 불운, 한낮의 의미없는 꿈이었던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사랑. 그 앞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할까요? 당사자가 아니고는 어찌 그 마음을 알까요?

  나는 당신을 함부로 계량할 생각이 없어요. 나는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예요.
  다시 만날 때까지 이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라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은 미래에 다가올 일인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일이에요. 당신과 나는 과거에 만났고 다시 또 미래에 만나게 될 것이고요.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언젠가 나누었었고 또 언제나 나누게 될 거예요.

 

*


- 그렇다면 여기는 화성이 아니로군요.
  이브는 벨을 누르지 않았다. 벨을 누르는 대신에 미소를 보였다. 이전까지의 쾌활하고 들뜬 모습에 비해 한결 차분하고 침착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마치 중대한 고비를 하나 넘기기라도 한 듯 여유마저 느껴졌다.
- 그럼 왜 하필 여기가 화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겁니까?
- 글쎄요. 좌절된 현실을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화성에서 살아가는 듯한 경험 아닐까요?

- 이제 알겠습니다. 두 개의 세계 A와 B가 있는 겁니다. A는 제가 지구라고 믿었던 곳이고 B는 화성이라고 믿었던 곳이고 말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하나의 세계 A와 다른 하나의 세계 B 사이의 경계가 어떤 이유에서든 희미해졌고 그 사이에 내가 있는 겁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다면 많은 기이한 현상들이 설명이 됩니다.

  이브의 가늘고 긴 검지는 벨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누르지는 않았다.
- 퇴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죠. 왜 당신은 B라는 세계, 그러니까 화성을 여러 차례 ‘퇴행한 현실’이라고 묘사했어요.
- 화성에서는 아직도 공중전화를 씁니다. 사환이 수동 조작해야 하는 엘레베이터를 탑니다. 거리의 자동차는 딱정벌레처럼 촌스러운 모양이거나 담배갑처럼 특색없고 딱딱한 모양의 아주 고전적인 것들 뿐입니다. 모두가 험프리 보가트, 딘 마틴, 진 켈리, 그리고 프랭크 시나트라에 대해 이야기하죠. 아직도 여성들에게 최고 유행의 패션은 오드리 헵번 스타일입니다. 라디오마다 주크 박스마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1930년에서 1950년 사이에 발표되었던 곡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법. 제 기억이 맞다면 지구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폐기된 것입니다.
- 반면에?
- 반면에 제가 기억하는 지구는 그보다 훨씬 뒤의 모습을 한 세계였죠. 2세기 정도 후의.

  이브는 벨을 누르지 않았다.

- 맞아요. 화성 사람들은 화성 식민지가 지구보다 몇십년 앞서 있다고 말하죠. 하지면 당신이 겪어 본 현실에서는 정 반대죠. 당신은 화성에서 최신이라고 말하는 모든 기술의 다음 버전을 알아요. 화성에서 최신 유행이라고 하는 것들의 다음 유행을 알고요. 마치 미래를 기억하는 느낌이 들 거예요.

- 정리해보면 마치 지구의 20세기 중반 정도에 해당하는 세계가 이 곳이라는 의미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드로이드가 있단 말입니다. 제가 잡으러 다녀야했던 그 사이보그, 인조인간, 유사-인간, 뭐 아무튼 그런 것들 말입니다. 20세기 중반에는 안드로이드가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는 컴퓨터는 탄생하기도 전이었고 토스터나 오븐도 막 대량생산에 들어가기 시작한 시점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브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펄이 들어간 에메랄드색 매니큐어를 바른 그녀의 검지 손가락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반짝였다.
- 그러니 섞여있다는 거예요. 저기 저 동전들처럼.

  그에게 연결된 메타기의 바늘이 서서히 올라가 5와 6 사이에서 떨렸다. 
- 혹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입니까? A와 B 혹은 지구와 화성 중에서 어느 한 세계의 룰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이 고약한 시소 게임이 끝나는 겁니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이 울렸다. (땡!)

- 미안해요. 유감이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바늘은 차분하게 낮은 숫자를 향해 서서히 내려왔다. 4를 넘어 그리고 3 부근까지.

- 방향은 정해져 있고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로군요. 그렇다면 지구 혹은 A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화성 혹은 B쪽으로 향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이제 이해가 갑니다.
  그의 목소리에 체념이 묻어났다.
- 맞아요. 반응은 '진행중'이죠. 그리고 늦던 빠르던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예요. 아직 반응은 끝나지 않았어요. 달리 말하면 우리는 완전히 B라는 세계에 도착하지 못한 셈이겠죠.

  다시 서서히 메타기의 바늘이 올라갔다. 5를 넘어 6을 향해.

- 하지만 제가 진짜로 B라는 세계, 화성 혹은 과거에 살았던 적은 없지 않습니까?

- 맞아요. 이 세계에서 지구에 대한 사실들은 당신의 실제 경험이 반영된 것이에요. 반면 화성에 대한 부분들은 당신이 읽고 보고 들었던 간접적 체험 자료가 뒤섞여 만들어진 것들이죠. 그래서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덩어리로만 뭉뚱그려 묘사되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당신이 경험해보지 못했으니까. 상상만으로 그 이상 정교할 방법이 없으니까.
- 그렇다면 저는, 아니 우리는 미래에서 과거로 가는 중간 단계에 있다고 봐야 하는 겁니까?
- 난 양자 물리학 따윈 몰라요. 그런 건 당신이 더 잘 알겠죠. 시간축에서든 공간축에서든 지점 B에서 지점 A로 보내지는 과정이란 것이……  뭐랄까?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에요. 표적지까지 '갔다'라는 상태와 '가지 않았다'라는 상태, 두 가지로만 설명될 수 있는 건 아니죠.
- 그럼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일종의 중간 상태에 빠져있는 것입니까?

  (땡!)

- 엄밀하게 말하면 표현은 틀렸어요. 하지만 대강 의미는 통하겠네요.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하나의 세계로 이식되어 들어가는 그 기술을 우리는 '트랜스포테이션'이라고 불렀어요. 앞서 말했다시피 '갔다'라는 상태와 '가지 않았다'라는 상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뭐랄까? 컴퓨터 파일을 전송할 때처럼 작은 단위로 나누어서 원본 위치에서 이동 위치까지 서서히 옮기고 도착한 다음에 다시 부분과 부분을 조립하는 거죠. 만약 옮겨지는 대상이 0과 1의 교환 부호 덩어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그 과정에서 당연히 큰 충격을 받지 않겠어요?
- 그 말은 곧……  바꾸어 말하자면…….

  (땡!)

- 맞아요. 지금 우리는 당신의 무의식 안에 들어와 있다는 이야기죠.

 

*


  그는 순간 자신에게 연결된 모든 점과 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단 충동을 느꼈다.
- 이번엔 당신 차례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고 왜 우리가 이리로 보내진, 아니 보내지고 있는 겁니까?
- '일단 지능을 가진 로봇이 존재하게 되면, 스스로의 자기 복제를 통해 진화하는 로봇이 출현하는데는 단지 작은 한 걸음이 필요할 뿐이다.'
- 빌 조이가 남긴 말 아닙니까?
- 맞아요. 그리고 50년 후에 정말로 그 말대로 되었죠. 처음에 안드로이드는 기술의 산물이 맞았어요. 2세대까진 분명히 그랬죠. 하지만 3세대로 나아가면서부터 애매한 영역이 생겼던 거에요. 어쨌든 생물학적 관점에서 인간과의 차이가 없어졌다고 하면, 과연 이들을 기계적으로 대해도 좋으냐는 거였죠. 윤리적인 논란이 빚어졌죠.
- 역사 시간에 배웠던 내용이 기억 납니다.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인간의 입장에서는 경계를 지을만한 어떤 것이 필요했던 거예요. 인간들의 입장에선 다분히 본능적인 대응이었죠.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설계되었던 기계들로 인해 존재 그 자체가 잠식 당할 위기에 놓였으니까요.
- 그래서 안드로이드 선별법을 개발하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맞아요.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던 거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이 아는 그대로에요. 처음에는 정말로 기계적 관점에서 명확한 표준을 만들어 그들을 잡아내려고 했죠. 여기 당신 무의식 속 화성 세계의 사람들이 그리하는 것처럼. 그 시점에는 틀린 방법만은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정말로 안드로이드 프로토타입의 머리 둘레가 정해져 있었으니까.
- 오래지 않아 폐기되었을 겁니다. 지구에서는, 아니 우리가 왔던 먼 미래에서는.
- 마녀 사냥 같은 야만적인 방법이라 비슷한 머리 크기 인간들도 많이 피해를 보았어요. 더군다나 안드로이드 개체들은 나날히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자신들을 변화시켰고요. 위양성 혹은 위음성으로 판명되는 일이 속출하여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빚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인간들은 깨달았어요. 갈-슈바르츠하임 검사법이 정확한 게 아니라 맞는지 틀린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 그 다음에는 인간과 안드로이드 사이의 화학적 생리적 정보를 수집해서 비교하려는 시도가 유행했습니다.
- 그랬죠. 다만 인간들도 그 부분에 있어선 아는 바가 너무 없었죠. 가설만 있을 뿐 증거가 턱없이 부족했으니까요. 안드로이드들이 놀랄만큼 빨리 정교해지는 점도 하나의 문제였어요. 가설이 입증되기 이전에 이미 진화하여 보다 인간에 근접한 기작을 구현해냈거든요.

- 그래서 심리적 방법이 등장한 겁니다.
-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진보한 방법이죠. 하지만 이미 안드로이드도 하나 하나의 살아있는 개체가 되었던 거예요. 삶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개인의 감정을 중시하고, 또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단어에 대한 연상을 분석하고 자극 반응에 걸리는 시간을 측정한다고 안드로이드의 집단적 선별이 가능한 건 아니었어요. 단지 그 하나의 존재를 (인간이든 안드로이드든)이해하기 위한, 정의 그대로 '마음과 행동의 과학적 연구'에 오히려 가깝게 기능했다고 봐야죠.

- 아직 제 질문에 답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브의 미소는 촛불처럼 흔들렸다.
- 뒤만 보고 쫓아가는 철저한 패배였어요. 인간들이 기준을 만들어내는 속도보다 안드로이드의 진화 속도가 빠르고 무작위적이었어요. 어떻게 생각하면 이미 자연의 영역에 편입되었거나 신의 영역을 침범한 셈이었죠. 인간들도 마침내 깨달았죠. 어떤 기술적 혁신으로 안드로이드를 선별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고. 그래서 접근 방향을 바꿨어요.
- 정확히 어떻게 했던 겁니까?
- 인류 최후의 반격은 유전자의 역사를 들여다 보자는 거였죠. 말하자면 족보학적 접근이랄까요? 체크 메이트였어요. 아무리 안드로이드의 진화가 빠르고 정교해도 미래로 나아갈 수는 있을 뿐이지 과거를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까요.
- 그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의 기억은 아직 불완전하니까요. 차츰 기억이 돌아올 거예요.

- 먹혔습니까?
- 성공했죠. 말 그대로 대 성공이었어요. 안드로이드를 구분짓는 낙인이 생겼고 정부에서 따로 그들을 관리했죠. 인간들은 승리감에 도취되었고, 역사상 주변부로 밀렸던 운명이 항상 그러했던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되었죠. 앤디라는 이유만으로 경멸받고 멸시의 대상이 되었어요. 안드로이드에게도 영혼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허나 선택하여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런 부당한 대접을 받는단 건 옳지 않은 일이었죠.
- 외통수에 몰린 셈이었던 겁니까? 그것만은 모방해내지 못했던 겁니까?
- 장군에 멍군으로 답할 방법을 찾아내기는 했죠. 유전자의 역사까지 만들어버리는 방법. 그게 4세대 안드로이드에요.
- 가능합니까? 가계도의 역사를 바꾸는 것이?
- 트랜스포테이션. 아까 말했잖아요.

  (땡!)

  그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철퍽, 소리를 내면서.
- 그 말은……. 그러니까…….
- 이제 알겠나요?
  이브의 표정은 쓸쓸하게도 보였고 씁쓸하게도 보였다.
- 말도 안됩니다. 나는 경찰이었습니다. 평생 안드로이드를 잡으러 다녔습니다.
- 물론 잡으러 다녔죠. NYPD에서. 그러다 부당 해고를 당했고요. 안드로이드라는 이유로.
- 그렇다면 당신도?
- 나는 4세대 c-286858 모델이에요. 당신은 4세대 c-286859 모델이고요.

  기운이 빠졌다. 그는 스툴을 돌려 바에 몸을 기대었다.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 트랜스포테이션이다 뭐다 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래봐야 1940년대면 백 년이 조금 넘는 시간 아닙니까? 앞서 한두 세대를 안드로이드로 교체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땡!)

- 그냥 백 년 전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가서 누군가를 대체하는 거죠. 그 프로젝트명이 바로…….
- '테라 인코나타'로군요. '미지의 땅'이란 뜻의.

- 맞아요. 우리는 '미지의 땅'을 점령하러 가는 거예요. 가령 나는 당신이 만났던, 원래 이름이 샐리 뭐라던가 하는 그 촌스러운 여자애를 대신하게 될 거고요. 당신은…… 루스 언쇼라는 남자를 대신해 살게 되는 거죠. 언쇼 가문의 일부로. 빈 자리를 치고 들어가서 버티는 거예요.

- 그게 내 이름이 아니었단 말입니까?

  (땡!)

  그는 낙담한 듯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사실 이제는 더 묻는 것도 힘들었다. 한 가지를 물을 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영혼에 깊고 치명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천장이 위로 떠올랐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서서히 바닥으로 눕혀졌다. 그에게 달려있던 수 많은 전선이며 칩이며 패드가 바늘 달린 도관을 통해 몸 곳곳에 살을 파고들어 연결되어 있었다. 메타기의 바늘은 5를 넘고 7을 넘고 9을 넘어 뱅글 뱅글 돌았다. (땡!) (땡!) (땡!) 바늘의 움직임은 어느새 파형이 되어 어떤 복잡한 기계의 화면 위로 뿌려지고 있었다. (뚜!) (뚜!) (뚜!) 그는 언뜻 보았다.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져 도관을 타고 그의 몸 속으로 들어오는 이미지를.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는 바를 사이에 두고 이브 아이버슨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녀가 비타민 음료를 내밀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것을 순순히 받아마셨다. 이제 대충 알 것도 같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 우리 임무는 큰 역사의 줄기를 바꾸는 게 아니에요. 한 개인의 인생을 대신하고 한 가족의 미시 역사에만 서서히 간섭하는 거죠. 수백 수천의 우리가 그렇게 맡은 인물을 충실히 연기한다면 백년쯤 지난 후에는 안드로이드 진영의 큰 역사가 바뀌게 될 수도 있겠죠.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았다.

- 우린 이미 이 임무에 투입되기 이전에 그들의 일생을 들여다 보고 왔어요. 그들로 살아간다는 건 말이죠. 아마……  결말을 아는 영화를 다시 보는 느낌일 거예요. 지루하고 의미없고 말 그대로 퇴행한 현실을 살아가는 기분이겠죠.
- 우리의 의지로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합니까?
  이브는 대답 대신 웃어 보였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었다.
- 화성치안총감은 그럼 뭔가요? 쥴리어스 총감은 실재하는 사람입니까?
- 그건 나도 몰라요. 여긴 당신의 무의식인 걸요. 당신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사람일 수도 있을 거고요. 당신이 원하지 않았던 이 모든 상황을 형상화시킨 존재일 수도 있을 거고요. 어쩌면 당신의 슈퍼 에고나 얼터 에고, 뭐 그런 것들일런지도 모르죠. 그 물음의 답은 당신만이 알 수 있을 거예요.
-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저 문을 열고?
- 그래요. 이제 다 왔어요.

  그녀는 스툴에서 일어나 그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잘 가요. 내 사랑.

  그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적어도 이번 주기의 여행에서는.

 

*


  천천히 복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복도 마지막 F-01 방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좁은 통로에서 여유를 즐기든 열차의 승객들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두 개의 달 아래로 오직 이브만이 제 자리에 굳은 듯이 서서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 원래 제 이름이 뭐였습니까? 그러니까, c-286859 모델의.

  그녀가 대답했다.
- 아담. 아담 아이버슨. 

(2014년 05월)

# Inspired by Philip K. D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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