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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프로젝트 베르테르

낙농콩단/Season 11-15 (2011-2015)

Written by Y. J. Kim    Published in 2015.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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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머리를 감았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고슴도치가 집을 지은 듯한 삐쭉빼쭉한 그림자가 보도블럭 위를 어른거린다. 등 뒤에서 내리치는 따가운 볕에 압도 당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뜨거운 목덜미가 서늘하다. 뒷목을 쓰다듬으니 따끔따끔하다. 조금 더 윗쪽 - 뒷통수로 올라가보니 흉하게 눌러 붙은 머리칼의 기름진 감촉이 느껴진다. 아마, 자다 그냥 일어나 나온 것이 맞는가 보다.
 
홀리. 그 애를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난다. 그 애의 빨간 머리칼은 꼭 작고 부드러운 불꽃 같았디. 주근깨 가득한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달아 있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지난 몇 년간 홀리가 잃어버린 순수함이 아직은 고스란히 남아 있던 시절. 그 애도, 나도 그때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나의 경우라면 좋지 않은 쪽으로). 그 애는 어리고 잠재력있는 가수 지망생이었던 것에 반해 나는 늙고 운이 다해 경쟁에서 밀려난 뮤직 에이전트였다. 몇 번의 거듭된 실패는 지워질 수 없는 각인과 상처를 내게 남겼다. 냉소는 하얀 와이셔츠 위의 커피 얼룩과도 같아서 한 번 물들면 좀처럼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랬다. 나는 그때 이미 더 이상 잃어버릴 게 없는 상태였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홀리의 에이전트를 맡았던 것은 내게 있어 기적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남의 재능과 남의 스케쥴을 관리해준 댓가로 인생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꽤 해볼만한 장사 아닌가.
 
  어젯밤에 마신 레이카 보드카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취한 걸 후회하진 않는다. 홀리의 자살 소식을 전해 준 전화를 받았단 사실을 후회할 뿐이다. 덕분에 밤새 술집에 처박혔다. 덕분에 다른 전화는 한 통도 받지 못했다. 덕분에 오늘 아침에야 다시 열어본 블랙베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회신 요망' 따위의 문자 메세지로 터져나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좋다 이거야. 근데 회신을 해서 뭘 어쩔건데? 그럼 홀리가 살아 돌아오기라도 해?

 

*


   홀리의 장례식은 산 호세에 위치한 한 교회에서 진행되었다. 내가 아는 한, 그 애에게는 종교적인 배경이 없었다. 그러니 이 시끌벅적한 행사는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할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려나?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더 이상 내 관심사가 아니었으니까. 그 애, 홀리. 그 애를 생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아려왔다. 교회가 아닌, 이슬람 사원이나 모스크에서 식이 진행된다고한들 무슨 상관이랴. 모든 것이 귀찮았다. 어떤 위로와 격려도 싸구려 연예 기자들의 무책임한 질문 공세처럼 느껴졌다. 파파라치들의 부주의한 카메라 소리처럼 신경을 긁어놓는 듯 했다. 정장을 입은 것도 몇 년만이었다. 휴고 보스의 쥐색 솔리드 타이가 꼭 목을 조이는 것처럼 답답했다. 아래로 길게 끌어 당겨 느슨하게 만들고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꼬박 하룻밤을 묵힌 지독한 갈증에 목이 칼칼해졌다. 냉수를 마셔 목을 축였다. 한 숨 돌리고 나니 그제서야 홀리의 사진이 보인다. 크게 확대 인쇄하여 이젤에 세워 놓은, 밝게 웃고 있는, 몇 년 전의 얼굴이다. 그 애의 좋을 때만 기억하잔 취지라면 적절한 사진을 골랐다. 저 무렵 이후로는 좋은 시절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 애에게도, 나에게도.
 
  물론 홀리는 좋은 아이였다. 언제나 그렇듯, 이 바닥의 시스템이 좋은 아이를 좋은 아이로 남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난 몇 해간 - 굳이 정확히 셈하자면 거의 28개월 동안 우리는 엔터테이너와 탤런트 에이전트라는 특수한 위치에서 길고 지난한 싸움을 벌여왔다. 에이전트 자리를 수락할 당시 나는 당장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흔 다섯살이었다. 그때 홀리의 나이는 데뷔하기에는 조금 이른 열 일곱살이었다. 그 애는 "출생연도가 19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단 사실에 충격을 받았"노라고 후일 털어놓았다. 분명 육십년이라는 세월은 노력만으로 메워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설령 친할아버지와 친손녀 사이라고 할지라도 세월의 간극이 빚어낸 판이하게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비즈니스 관계에서라면……. 
 
  그 다음은 조금 뻔한 얘기다. 성공이 찾아오기 전까지 갈등이란 놈은 뾰족한 발톱을 감춘 채 조심스럽게 잠복해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찾아온 인기는 놈에게 우리 사이의 실금을 파고 들 기회를 주었다. 십대들의 열띤 환호 속에 그 애는 자유를 얻었고, 그렇게 얻은 힘을 나와의 관계에서 지렛대로 활용하려고 했다. 간헐적 화해와 무의미한 휴전이 있었을 뿐 긴장은 끝도 없이 고조되어 갔다. 일 년만에 그 애는 이 바닥의 교과서라고 해도 좋을 모범적 코스를 밟아가며 서서히 삐뚤어져 갔고 나보다는 헐리우드에서 만난 방탕한 엔터테이너들의 말을 더 신뢰했다. 술과 담배와 성교와 약물과 마약이 차례로 아직 스무살도 되지 않은 아이와의 언쟁에 단골 소재로 등장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난 내 친손녀를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이미 그 애는 내가 처음 만났던 아이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직업상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을 싸움이 될 것임을 진작에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황량한 폐허 위에 나 홀로 남게 되는 결말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그 애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생각난다. 
- 엉클 샘, 목 말라요. 페리에 좀 갖다줘요.

 

*


  업계 사람들의 추모에는 끝이 없었다. 예수상 바로 아래의 흉물스러운 전광판에는 시답잖은 셀레브리티들이 보낸 트윗이 생중계되는 중이었다. 140자 안에 밀어넣을 수 있는 비탄의 크기는 나를 뜨악하게 만든다. 심지어 그들 중의 대부분은 홀리와 일면식도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아쉽게도 실제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녀 노래의 빅 팬이었어요. 블라 블라 블라.'  

  그래, 어련하시겠어요. 빅 팬(big fan)을 빅 펜(Big Pen)이라고 쓰시는데. 자칭 똑똑한 여배우님. 

'#WeRememberHolly 당신의 노래는 제 인생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블라 블라 블라.' 


  50대 중반의 남자 배우가 열아홉살 짜리 여자애 노래로부터 인생의 동력을 얻었단다. 미친 또라이가 아니라면 저 놈도 홀리가 어울리고 다녔던 이 바닥의 더러운 놈팽이들 중의 하날 것이다.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WeRememberHolly 우리는 그녀와 그녀의 노래를 잊지 않을거예요. 블라 블라 블라.' 

 

  트윗의 홍수 속에 한 보이 밴드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스위트 카르마>, 익숙한 이름. 그 놈들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건 그저 우스꽝스러운 그룹 이름 때문만이 아니었다. 처음 에이전트로 일을 시작했던 30여년 전, 처음 담당했던 가수가 그 놈들이었다. 21세기의 <듀란 듀란>이 되겠다고 큰 소리치던 네 저능아 놈이 잉카 개구리를 숭배하는 이단 종교에 빠져 대형 사고를 치고 아홉시 뉴스 헤드라인에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


   다음 날, 크툴루 레코드사 사장 윌리엄 H. 앤더슨씨가 나를 불렀다. 홀리의 전속계약기간은 아직 27개월이나 남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두 장의 스튜디오 앨범과 한 장의 컴필레이션, 그리고 한 장의 캐롤 앨범이 (캐롤 앨범이라고? 농담인가?) 잔여 옵션을 잔뜩 떠안은 형태로 남아 있었다. 계약서 속의 작고 빼곡한 글자들과 크고 무거운 숫자들이 매직 아이처럼 떠올라 내 두 눈을 매섭게 후벼팠다. 맙소사! 순간 괴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홀리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 애가 살아있었어도 남은 27개월은 생지옥이 되고도 남을 판이긴 했다. 
- 유감이네. 홀리는 좋은 아이였어.
- 그랬죠.


  앤더슨씨의 말은 반쯤 맞았다. 홀리는 좋은 아이였고 되도록이면 그렇게 영원히 남았어야 했다. 그렇지 못하게 된 책임의 대부분은 엔터테인먼트 업계나 이 바닥의 비즈니스 시스템에게 있었지만 크툴루 레코드사에도 분명 일정 지분이 있었다. 문득 헤로인에 취해 널부러졌던 홀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눈동자의 공허함은 평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 크툴루 레코드사에게도 커다란 손해야.
- 그럴 겁니다. 
  계약서를 건성으로 넘겨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지옥행 열차의 표를 나 혼자 끊은 셈이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독소 조항이 많은 계약이 이루어진데는 에이전트인 나의 책임도 적지 않은 것을. 그래도 크게 걱정이 되진 않았다. 홀리는 십대 스타로 발돋움했고 덕분에 그 애의 노래엔 아직 상품으로 가치가 있었다. 전여 계약은 어떤 식으로든 처리가 될 것이고 크툴루 레코드사에 손해가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그래서 말인데…….
  앤더슨씨가 말을 이었다. 옳지. 이제 본론이 나오는군. 내 이럴 줄 알았지.
- 홀리를 위해 몇 가지 해주고 싶은 게 있어. 그 애를 추모하는 팬들을 위해서도 의미있는 일이 될 걸세.
  베스트 앨범을 기획하기에 지금보다 적기는 없을 것이다. 비틀즈와 앨비스가 힘을 합쳐도 못 이기는 게 있다면 바로 방금 막 죽은 가수이니까.
- 압니다. 그 문제에 대해선 굳이 제 의견을 물어보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계약서에 적혀있는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마치 미리 준비해놓은 것처럼 던진 나의 대답에 앤더슨씨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 아니, 그게 아니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그는 두꺼운 안경 너머로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뜸을 들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서류철 아래에 깔아 놓았던 스크랩북을 슬그머니 내쪽으로 밀어놓았다. 
- 자네 혹시 여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그건 신문과 잡지 기사의 출력물이었다. 한달여 전, 그러니까 4월 29일, 뉴욕 타임즈는 <존 덴버 vs. 버디 홀리: The Ancient Arts of Warfare>라는 기사를 실었다. 컴퓨터로 되살려 내어 인터넷을 바탕으로 활동을 재개한 소니 BMG의 존 덴버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점령하자, 이에 맞서 유니버셜이 버디 홀리를 같은 방법으로 되살려 내어 대응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롤링 스톤지는 같은 내용을 한 술 더 떠서 라는 제목의 자극적인 기사를 인터넷판에 게재하였다. 그 밖에도 뉴요커는 <G-선상의 위스퍼러: 유령의 목소리가 빌보드를 점령하다>, 버라이어티는 <파라노말 액티비티: 다음 유령은 누구인가? 존 레논?>, 시카고 트리뷴은 <EMI와 워너, ARC, 그리고 Decca: 그들은 자신들이 납골당의 초석을 닦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가디언은 <음반사들, 뮤라토리움(Muratorium)을 선언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식스 핏 원더: 음악시장은 지금 역사상 유례가 없는 변화에 직면하였다>, 이코노미스트는 <레코딩 룸에 콘솔 보드 대신 위자(Ouija) 보드를 설치하라>라는 기사를 각각 내보냈다. 직업적인 이유로 이미 대충 읽어본 것들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지만……. 고개를 들어 앤더슨씨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질런지는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내가 듣고 좋아할만한 방향이 아닐거라는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말없이 스크랩북을 뒤적거렸던 것은 앤더슨씨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리 덥지 않은 날이었지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유니버셜의 존 덴버, 소니 BGM의 버디 홀리……  CNN 보도자료의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보였다. <유니버셜과 소니 BGM의 유령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제 워너의 선택은?> 크툴루 레코드는 워너 뮤직 그룹의 산하 레이블이었다. 이름만 보면 잘해야 인디펜던트 록밴드 두어 개쯤 안고 있는 변방 회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홀리와 같은 십대 팝 스타들만 아홉 명이고 (그 애들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지만 배를 가르지 않아도 이내 못 쓰게 된다) 연간 수익도 2천6백만불에 이른다. 
- 홀리는 버디 홀리가 아닙니다. 존 덴버는 더더욱 아니죠.


  나의 지적은 간결했지만 핵심을 꿰뚫는 것이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의 리바이벌(Revival)이 가능하기에 홀리는 너무 어렸고 경력이 일천했다. 달랑 두 장 발표한 앨범에서 운 좋게 다섯 곡이 히트하긴 했고 그 중의 두 곡이 플래티넘이라지만…… 디즈니 채널의 십대 스타들과 붙어보는 것도 아니고 감히 전설적인 가수들 앞에서? 레저렉션 파이(Resurrection Pie)도 뭐라도 남은 음식이 있어야 만들 수 있는 법이다. 그 애와 그 애의 음악에는 뭐랄까, 고유의 색깔이라고 할만한 것도 없었다 (물론 아주 최근까지 그 애의 에이전트였던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그저 요사이 유행하는 스타일의 잡탕에다가 십대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를 적당히 섞은, 또 하나의 버블검 팝일 뿐이었다. 홀리가 없어도 누군가 비슷한 노래를 들고 나와 거짓말처럼 또래 청소년들의 마음을 메워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앤더슨씨는 내 지적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 맞네. 그 앤 존 덴버도 아니고 버디 홀리도 아니지. 그래서 특별한 거야.

 

*


   습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은 날이었다. 허공에 손을 뻗어 엄지 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을 비비면 물방울이 부스러질 것 같은 느낌이었다. 땀은 이마를 적시고 뺨을 타고 흘러내려 와이셔츠의 칼라를 축축하게 적셨다. 2068년 8월의 어느 날. 나는 유타주와 네바다주의 경계 근처 어딘가에 있는 고속도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햄버거에선 쇠맛이 났고 에어컨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었다. 불쾌지수가 말도 못할 정도로 높았다. 그리로 날 불러내었던 사람이 앤더슨씨였다. 당시 나는 은퇴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21세기의 <듀란 듀란>이 되어보겠다던 저능아들이 초대형 사고를 벌인 이후 나의 에이전시 사업은 부침도 없이 추락만 거듭했다. 한 때 열 명이 넘던 직원을 다 내보내고 나니 회사라기도 쑥스러운 지경이었다. 그때 크툴루 레코드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그들은 어린 여자애를 데뷔시키려고 이미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업계에서 드문 일이었다. 부동산에 비유하자면, 잡을 살 사람과 팔 사람이 거래를 끝내놓은 다음에서야 중개인을 찾는 격이랄까? 처음에 나는 제의를 고사했다. 너무 지쳐 여력이 없었던 탓이었다. 되려 그런 날 설득했던 것도 앤더슨씨였다. 은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그게 홀리였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은 반쯤은 잘한 일이었는데 어린 홀리가 난파한 내 커리어의 마지막 챕터를 화려하게 칠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말 그대로 정말 반쯤만 잘한 일이었다. 이제와서 결국 또 다시 타블로이드지의 가쉽 기사를 도배하는 것으로 커리어를 종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 저한테 선택권이 있기는 한 겁니까?    
  앤더슨씨의 굴절된 미소는 두꺼운 안경 위를 어른거렸다.
- 물론이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전적으로 자네의 선택에 맡길 생각이야. 다만…….
- 다만?
- 자네가 하든 말든 홀리는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될꺼야. 그리고…….
- 그리고요? 
- 솔직히 자네 입장에서도 계속 함께 가는 것이 좋을 거야. 세상에 에이전트 사정 봐줘가며 사고를 치는 클라이언트들은 없지. 하지만 그렇다고 맡는 클라이언트마다 자살하게 만드는 에이전트도 없지. 현실을 직시해. 이 바닥에서 자넨 이미 '007 살인면허'로 통하게 생겼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홀리까지 더하면 다섯 명째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살아서 헤어진 가수가 없다. 물론 그 숫자는 <스위트 카르마>, 또는 네 놈의 저능아들로 알려진 잡것들이 단체로 멍청한 짓을 하는 바람에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죽은 아이를 돈벌이를 위해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 돈을 번다는 건 말야. 결국 '남의 돈'을 번다는 거야. 모든 돈벌이가 남을 이용해서 가능한 거지. 음반 업계에서는 죽은 가수들의 베스트 앨범을 곰탕 끓이듯이 우려내고 있는데 그건 괜찮다고 생각하나?
-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그 애를 생각하면 뭐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 샘, 우리는 그 애를 이용하려는 게 아니야. 되살리려는 거지. 물론 다만 인터넷 안에서만 살아 있는 거야. 사실 큰 상관 있나? 요즘 세상에 인터넷 안에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거고 인터넷 바깥에 있으면 살아있어도 죽어 있는 거야. 그게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야. 다들 유튜브나 트위터나 그런데 뭐가 올라오는지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고.


  뭐라 대꾸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스크랩 기사의 큼직한 헤드라인에 다시 시선이 가서 박혔다. <워너의 선택은?>
- 생각해 봐. 이건 우리 업계의 모범적인 미래야. 모두가 죽은 가수들의 재능을 그리워하잖아. 그들이 영원히 활동할 수 있다면 모두가 좋아할꺼야. 게다가 우리 입장에서는 훨씬 편하지. 이제 그들은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아. 프로그래밍된 그대로만 동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한 사고를 치지 않을꺼야. 멍청하게 오버 도즈의 헤로인을 밀어넣다 호텔방에서 뒈지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물론 페리에도 지들 손으로 꺼내 먹겠지.
- 페리에를 꺼내 먹는다고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솔깃했다. 홀리가 페리에 타령을 할 때마다, 디톡스 쥬스 넘버 나인 타령을 할 때마다, 글루텐-프리 샌드위치 타령을 할 때마다 솔직히 난 돌아버릴 것 같았으니까. 
- 아니, 물론.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프로그램 따위가 어찌 정말로 페리에를 마시겠어? 

 

*


  처음 은퇴 결심을 했을 때 앤더슨씨는 어린 고아 홀리를 내게 맡겼다. 그리고 두번째 은퇴 결심을 한 지금 앤더슨씨는 죽은 홀리(를 되살린 무언가)를 내게 다시 맡기려고 한다. 다시금 그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나는 확신이 없었다.
 
  그 사이 메이져 레이블들의 유령 전쟁 2라운드가 이어졌다. 소니 BMG가 재니스 조플린을 부활시켰다. 유니버셜은 짐 모리슨으로 응수했다. 롤링스톤지에 다시 특집 기사가 게재되었다. <히어로즈 리본(Heroes Reborn): 최후의 승자는 히로(Hero)인가 히로인(Heroin)인가?>. 다음 날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27 클럽의 Reunion이 멀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엠바고까지 깨가며 터뜨렸다. 다른 27 클럽의 요절 가수들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부활시켜 ‘따로 또 같이’ 활동을 펼칠 계획을 세우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업계의 야심을 발빠르게 보도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워너 뮤직 그룹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많은 전문가들이 워너 산하의 레이블들에 소속되었던 전설적인 20세기 가수들의 이름을 놓고 갑록을박을 벌였다. 물론 나는 내막을 알고 있었다. 워너의 선택이 조금 다른 방향이 될 거라는 사실을.
 
  크툴루 레코드의 앤더슨씨는 집요하게 일을 추진했다. 그의 말마따나 '내가 있든 말든'이었다. 물론 워너 뮤직 그룹의 보이지 않는 전폭적 지원이 있었겠지만.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스스로를 열아홉살의 팝 스타라고 믿고 있는 이상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홀리의 모든 기억과 기록을 입력시켜 네트워크 내에 풀어놓았다. 그 애는 이제 세상 어디에나 존재했고, 또 복수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었다. 홀리의 전 생애에 걸쳐 인터넷에 남겨진 글과 사진과 음성과 영상이 수집되었다. 그리고 그 양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아예 특별전담팀이라도 꾸려질 판이어서 일손도 심각하게 모자랐다. 적어도 워너의 방향이 한 가지에서는 옳았다. 20세기 가수의 데이터 베이스는 21세기 가수의 그것과 양적인 면에서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불과 3년 남짓 활동한 홀리였지만 자원으로 활용 가능한 데이터는 앞서 등장한 유령 가수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백 배 이상 많았다. 작곡가들이 새로 곡을 썼고 테크니션들은 저장된 기존의 영상과 음성을 세밀하게 쪼개어 재조합했다. 누군가에 설명에 따르면 '오직 필요한 건 맞는 세그먼트를 제 위치에 어셈블링하는 것' 뿐이었다. 
- 홀리는 매일 자기 비디오 로그에 팬들에게 보내는 일상을 올리고 있어. 페이스북과 트위터, 그리고 인스타그램이 멀쩡히 살아있는 가수들보다 더 잘 관리되고 있는 걸 자네도 봤을거야. 같은 맥락에서 새로운 노래와 뮤직비디오도 발표할 수 있네. 세계 각지에서 공연한 영상을 만들어 (실제로 공연을 했는지 여부가 그렇게 중요한가?) 유튜브에 업로드 할 수도 있지. 그래서 다시 묻겠네. 홀리는 살아있는 건가? 살아있지 않은 건가?
 
  나는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이며 어떻게 정의내려질 수 있는가? 어떤 면에서 앤더슨씨의 말은 더없이 옳았다. 우린 흔히 셀러브리티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그들의 일부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매체가 전달해주는 정보의 양이 어떤 면에서는 그 셀러브리티의 생명지수인 셈이다. 나는 홀리와 매일 대면했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관계와 교감의 부재를 느끼고 있지만, 일반 대중들의 입장에서라면 오히려 살아있을 때의 홀리보다 지금의 홀리가 더 그들 가까이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 그 애를 만나볼텐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앤더슨씨의 표정은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예전의 그 애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을 기억한다. 라임향 페리에를 홀짝이면서.
- 엉클 샘, 나는 영원히 빛나는 인기를 누리고 싶어요. 
그럴때면 아무 말 없이 웃어주고는 했다. 그 웃음은 '얘야, 네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것 같구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금 다시 홀리가 내게 그런 말을 한다면 나는 그때처럼 웃어줄 자신이 없었다. 
홀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애는 이제 크툴루 레코드사 지하 슈퍼컴퓨터실 B-1룸의 커다란 스크린 안에 존재했다. 방의 네 면을 가득 메운 슈퍼 컴퓨터와 사방으로 연결된 어지러운 케이블, 그리고 난해하게 점멸하는 표시등이 예사롭지 않은 상황을 실감하게 했다. 창백하고 핏기없는 열아홉 살의 홀리. 내가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아주었다가 다시 한 순간에 앗아가버린 우리의 슈퍼 스타. 쌔근거리는 그 애의 숨소리가 내 코를 간지럽혔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생명의 기운이었다.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당연히 다른 한 편으로는 소름끼치는 마음이 일었다. 앤더슨씨가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 그 애에게 말을 걸었다.
- 헤이, 스위티. 이제 그만자고 일어나야지? 누가 왔는질 봐. 아주 반가운 얼굴일꺼야.
  화면 속의 홀리가 가만히 눈을 떴다. 
- 엉클 샘? 정말 엉클 샘이에요?
  그 목소리는 분명 홀리의 것이었다.

 

*


  홀리는 생전의 많은 것을 기억했다. 일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고 더러 실제와 다르게 기억하는 부분도 있었다. 아니다. 사실 그 대목에서 '기억을 한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생전'이라는 말도 잘못되었다. 내 앞에 있는 것은 진짜 홀리가 아닌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하였으니까.   
- 난 그때 내가 보았던 것이 메리 제인의 효과라고 생각했어요.
- 아냐. 넌 그때 윌슨 오페라 호텔 12층 스위트룸에서 스피드볼을 하다가 그랬던 거야. 마리화나가 아니라.
- 그랬나요? 아무튼 굉장히 아름다운 총천연색 무지개를 봤었죠. 마치 만화경 속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어요. 만화경 안에 또 만화경이 있고, 그 안에 또 만화경이 있고……. 
  컴퓨터 프로그램은 입력된 정보 그대로를 출력할 수는 있다. 혹은 조금 더 진보한 수준이라면 입력된 정보에 바탕한 적절한 조합을 결과로 출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입력된 적이 없는 정보가 출력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홀리가 사망하기 몇 분 전에나 경험했을 주관적 경험 - 환각을 컴퓨터가 떠올린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넣었단 말인가? 총천연색 무지개라고? 만화경 속의 만화경이라고?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가 프로그래밍의 결과물인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 그러다가 어느 순간 칠흑같은 어둠이 찾아왔죠.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난 허공에 둥둥 떠 있었고요.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는데…… 신기한 부분은 미세한 방향 감각 같은 것은 있었던 거죠. 난 뭔가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 멀리에서 눈부신 빛의 출구를 보았어요. 순간적으로 알았죠. 저기를 통과하면 지금까지 내가 지내던 세계와는 영원히 작별이구나. 싫진 않았어요. 왜냐면 정말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건 마치 임사체험자들의 경험을 듣는 것 같았다. 홀리의 프로그램 어딘가에 이런 내용이 저장되어 있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누군가 의도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다. 이 방을 나가면 당장 앤더슨씨를 찾아가 따질 생각이었다. 도대체 어떤 정신나간 놈팽이가 프로그래밍을 했으며 그 지시가 어디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냐고.
- 그때 샘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샘이 날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았죠. 마음이 아팠어요. 사실 내가 샘을 많이 힘들게 했잖아요. 말썽부리고 사고친 기억이 영화의 장면들을 잘라낸 것처럼 지나가더라고요.
 
  물론 그건 그랬다. 마지막까지 그 애와 나는 날 선 신경전을 벌였으니까.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십대 스타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다. 그들은 빛나는 재능과 때묻지 않은 영혼으로 성공에 다다르지만 이윽고 어느 순간엔가 살짝 맛이 간다. 예외가 없다. 이 바닥의 생리? 외상 후 트라우마? 외계인 납치? 어느 쪽이 정답인진 모르겠지만 항상 그렇다. 딱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상한 짓을 시작한다. 아주 먼 옛날 브리트니 스피어스, 린제이 로한, 마일리 사이러스가 그랬던 것처럼.
- 그때 마음이 흔들렸어요. 샘을 생각하니 마음 한 구석이 찡해지더라고요. 거의 빛의 출구 가까이 다가갔던 순간이었는데 다시 까마득한 나락으로 되돌려졌어요. 내 몸에 묶인 밧줄 같은 것이 있어 끌려가는 느낌이었죠.


   나는 끊임없이 속으로 되뇌었다. 스스로를 세뇌시키려는 듯이. '이건 진짜 홀리가 아니야. 단지 정교하게 설계된 유사 의식이 단순히 수십만개 픽셀 위를 부유하는 것 뿐이야' 라고. 다시 한 번 나는 다짐했다. 정말로 이 미친 짓거리의 담당자가 누군지 찾아내서 요절을 내주리라. 
- 엉클 샘, 날 용서해줄 수 있어요?
  스크린 위에 투영된 홀리의 얼굴은 눈물을 흘렸다. 
-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냐.
- 고마워요. 내일 또 찾아와 줄 수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B-1룸과 나란하게 자리한 B-2룸은 '프로젝트 홀리(가칭)'에 투입된 전문가들의 작업실이었다. 부활한 홀리의 B-1룸 메인 스크린 픽셀 수만큼의 전문가들이 하얀색 랩 코트를 입고 분주하게 오갔다. 크기며 시설만 보면 백악관의 '시츄에이션 룸'을 방불케했다. 차이가 있다면 사방의 벽면이 24인치 정도의 작은 모니터로 도배가 되어 있단 점이었다. 각각의 화면들은 인터넷에 업로드되었거나 앞으로 업로드될 예정인 화면들을 출력하고 있었다. 그 안에서 홀리는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고, 패션 컨셉트에 대한 회의를 했으며, 새로운 곡을 녹음했고, 새로운 광고에 출연하였으며, 유튜브에 올릴 비디오 로그를 녹화했고, 세계 각지에서 라이브 공연을 했다. 샌프란시스코, 뉴욕, 런던, 파리, 로마, 마드리드, 시드니, 도쿄…… 그 애는 여기 있었지만 그 모든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내가 이 정신 나간 짓거리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말이다. 신기술의 놀라움에 경탄하면서도 한편으로 회의감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스타성이라는 가치를 구성하는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는 희소성이다. 우리가 스타와의 직간접적 접촉에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그들이 길 거리에 널린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기술은 바로 그 희소성을 훼손한다. 짙은 밤하늘에 단 하나의 별이 밝게 빛나는 순간은 경외롭다. 헌데 그 별이 눈길 주는 곳마다 널려 있다면 과연 어떻까?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젊고 경력이 일천했을 때는 에이전트라고 순수하게 에이전트 역할만 할 처지가 아니었다. 로드 매니징까지 겸한 적도 많아 직접 스타를 데리고 발로 뛰는 일도 허다했다. 그 시절에는 산타모니카에서 롱비치까지 겨우 몇십 킬로미터 거리의 스케쥴을 맞추려고 레이싱 영화 몇 편을 찍어야 할 처지였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이 2038년 여름이었다. 그 저능아 놈들 - 그 빌어먹을 4인조 보이 밴드 <스위트 카르마>를 두고 하는 말이다 - 공연 시간을 맞춰주느라고 하루에 신호 위반 딱지를 다섯 개나 끊은 날이었다.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은 그 날의 공연이 <스위트 카르마>의 마지막 공연이 되었기 때문이다. 잉카 개구리를 숭배하는 신흔 종교에 빠져 벌어들인 돈을 모두 교주님에게 바친 그들은 다음 날 780여명의 신도들과 함께 루이지애나 촌구석의 한 농장에서 집단 자살로 영생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다시 곱씹어봐도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저능아'라는 말도 그 개자식들에게는 아깝다. 뭐? 지들이 21세기의 <듀란 듀란>이 되겠다고?     
 
  당시의 자살 사건은 언론의 큰 이목을 끌었다. 녀석들에게는 (780여명의 다른 신도들에겐 아마 없었을) 열렬한 소녀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헐리우드 리포트>와 <더 선>이 <뉴스위크>와 <르몽드>가 되는 기적의 체험이 이어졌다. 나로서는 죽을 맛이었다. 스타가 멍청한 짓을 하거나 그 결과로 뒈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하지만 두 명 이상의 멤버가 한 날 한 시에 뒈지는 일은 (아무리 엔터테인먼트 업계라고 할지라도) 교통 사고를 빼면  극히 드물다. 에이전트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다. 놈들의 몰살 (거친 표현이지만 당시 내 마음 속의 회오리를 정확히 반영한 단어는 이것이었다)은 소녀팬들의 덜 여문 영혼에 큰 울림을 남겼다. 전국에서 모방 자살(Copycat Suicide)이 이어지며 큰 사회 문제가 되었다. 여고생 수십명이 문제의 루이지애나 농장에서 사이비 종교와 같은 방법으로 자살해서 다시 한 번 <헐리우드 리포트>와 <더 선>이 <뉴스위크>와 <르몽드>의 반열에 올랐다. 역시 에이전트로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면에 있어 홀리의 경우엔…… 모방 자살이 없기는 했지. 십대들의 불완전한 인식 능력으로 판단하기에도 죽음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킬만한 구석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애의 죽음에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었어요'식의 말랑한 감수성이 개입할 구석이 없었단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밝고 명랑한 이미지의 소녀 팝스타가 호텔에서 마약을 하다가 (정확히는 스피드볼을 맞다가) 다시 깨어나지 못하다니. 헐리우드 전문 픽서(Fixer)들을 대동하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내가 목도했던 충격적 광경. 젖은 빨래처럼 널부러진 그 애의 공허한 눈동자. 그 앞뒤로 있었던 너저분한 사이드 쇼들이 언론에 나가지 않도록 나는 내가 아는 모든 끈을 동원하여야 했지만 그럼에도 전후맥락은 누구의 눈에도 그리 아름답게 보일 그림은 아니었다. 
 
- 홀리와 이야기는 잘 나누었나?
  앤더슨씨가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 그랬습니다. 다만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더군요. 
- 이상한 말?
- 사고가 있던 그 날을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사체험자 같은 소리를 하고 있고요. 미세한 방향 감각? 눈부신 빛의 출구? 까마득한 나락? 그 애가 그런 표현을 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너털 웃음을 터뜨렸다.
- 이 친구야. 그 앤 죽었어. 자네도 알다시피. 옆 방에 있는 건 그냥 컴퓨터 프로그램이야. 스스로를 홀리라고 믿고 있는. 자넨 지금 프로그램의 목소리가 진짜 홀리의 영혼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고 이상하단 건가?
- 아니 그건 그렇다고 쳐도…… 당신들이 '저 애'를 만들었다고 한다면 굳이 저렇게까지 만들 이유가 있느냐는 겁니다.
- 별 걸 다 신경 쓰는군. 일종의 설정이고 스토리야. 저 앤 자기가 홀리라고 생각하는데 진짜 홀리가 죽었다고 생각하면 말이 되지 않지 않겠나. 논리 오류를 피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한거야.
- 존 덴버를 비롯해 다른 유령 가수들도 그렇답니까?
- 나야 모르지. 궁금하면 유니버셜이나 소니 BMG에 가서 물어보게나.
 
  돌아서 나왔다. 더 이상의 이야기가 의미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앤더슨씨가 따라 나와 내 팔을 잡았다.
- 샘, 내 말을 들어보게. 잠깐 같이 걷지. 워너뮤직그룹에서는 이 프로젝트에 굉장히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홀리가 9회말 역전 홈런이 될 거라고 생각해.
- 그럴지도 모르겠죠. 인터넷 컨텐츠의 복제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분명 20세기 가수들을 다루는 것보다 유리하긴 할 겁니다. 재료가 월등히 많으니까요. 하지만 9회말 역전 홈런이요? 에이, 그 정도까진 아니죠.  
- 아니, 그 이상이야. 모르겠나. 잘 생각해봐. 죽은 레전드를 되살려선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저 애로는 할 수 있어.  
- 전 좀 회의적입니다. 어차피 이 유행도 일시적일 것이고요. 결국엔 다시 살아있는 가수들이 주도권을 잡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두꺼운 안경 안에서 다시 한 번 희미하게 미소지었고 그 늙고 주름진 손으로 나의 늙고 앙상한 손을 잡고 흔들었다.
- 머지 않아 자네도 알게 될꺼야. 위에서 저 애에게 그렇게 큰 기대를 품는 이유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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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이후 나는 다시 크툴루 레코드에 가지 못했다. 앤더슨씨가 더 이상은 나를 부르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부활한 홀리를 상대하는 것이 두려웠던 부분도 있었다. 자연히 나는 은퇴와 에이전시의 처분 문제에 집중하며 정신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홀리에 대한 소식은 각종 음악지와 연예지를 통해서만 간간히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내 예상대로 유령 가수들의 신드롬은 채 일 년을 가질 못했다. 재조합이 가능한 컨텐츠는 한정되어 있었고 갈대와 같은 대중들은 쉽게 식상해하였기 때문이다. 11월이 되자 존 덴버의 새 앨범은 빌보드 앨범차트 69위로 내려갔다. 짐 모리슨은 87위까지 떨어졌으며 나머지 유령 가수들은 모두 차트에서 사라졌다. 메이져 레이블들도 다시 관망세로 돌아서 마이클 잭슨과 휘트니 휴스턴 등 진행 중이던 대형 프로젝트를 보류했다. 12월을 목표로 앨범을 준비중인 홀리에게는 역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오늘 머리를 감았었나? 잘 기억나지가 않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머리칼은 바짝 마르고 푸석푸석하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어김없이 머리 위에는 제비집이 큼직하게 자릴 잡았다. 제길……. 에이전시를 정리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 모양이다. 그땐 일이 워낙 바쁘다보니 이따금 까먹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아니었는가 보다. 할 일이 없는 백수 신세인 지금도 나는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기 일쑤다. 머리를 감았는지, 양치질을 했는지, 점심은 먹었는지, 가스를 잠궜는지, 빨래는 돌렸는지, 화장실 물을 내렸는지…… 등등. 아무래도 원래부터 성격의 일부였던 게 아닌가 싶다. 한편으로는 평생에 걸쳐 남의 인생과 커리어를 챙겨주는 일을 해왔던 사람이 정작 자기 인생을 돌보는 데는 놀랄만큼 서투르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게 느껴진다. 욕실에 들어가 물을 틀고 머리를 숙여 샤워기 아래에 들이 밀었다.

 

*


  홀리의 3집 앨범 은 그 해 12월 5일에 발매되었다. 빌보드 앨범차트 57위로 데뷔를 했고 첫번째 싱글 ''이 빌보드 싱글차트 94위에 오르는데 그쳤다. 역대 유령 가수들 중 가장 나쁜 성적표였다. 2주차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앨범차트 89위로 밀려났고 싱글차트에서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더 이상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진 않았지만 내겐 여전히 감이라는 게 있었다. 시장의 반응이 이렇다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언론에서는 '프로젝트 홀리(이 가제를 아직도 사용하는지 모르겠지만)'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죽은 가수들을 다시 소환해내는 유행 자체의 한계를 지적하는 분석이 많았다. 처음에나 신기할 뿐 이내 쉽게 식상해질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구체적으로 홀리의 사례에 국한을 하자면 대다수가 전략적 실패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특히 <롤링스톤>의 기고가인 팀 애쉬모어는 다음과 같은 아티클을 통해 "한 마디로 타이밍을 놓쳤다"라고 주장했다. 

 

'(전략) 업계의 관행처럼 죽은 가수에 대한 애도의 감정이 미처 사그라들기 전에 베스트 앨범을 냈다면 이렇게 참담한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워너와 크툴루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홀리를 인터넷 속에서 되살리는데 8백만 달러와 6개월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던 것이다. 그 엄청난 비용과 많은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믿기 어려울만큼 생생한 컨텐츠야 물론 높이 평가한다. 단지 여기서의 패착은 한 가지 요약 가능하다. 홀리가 더 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를 대중들이 망각하게 되었단 사실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음악 팬의 43%가 홀리의 사망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36%는 질문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 애가 인터넷 생태계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음을 복기하자면 그리 놀라운 사실도 아니다. 앨범 발매 전 3~4개월 동안 우리는 어느 웹사이트에 들어가도, 어느 인터넷 방송에 접속해도, 그 앨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의 결과는 그 과도한 노출의 역효과라고 볼 수 있다. (후략)'  

 

  12월 18일에는 세부 장르 차트에서조차 홀리의 이름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덕분에 내 마음도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영역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마음 한 구석으로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부디 진짜 그 애만을 기억해주기를!) 다른 한 구석에서 분명 안타까움의 감정도 느끼고 있었다. 두 가지 마음 중 어느쪽이 더 옳다거나 더 강하다고는 쉽게 말할 순 없는 문제였다. 나는 그 애를 친손녀를 대하듯이 사랑했고 내가 사랑했던 그 애는 렌더링 캐릭터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홀리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구독 버튼도 눌렀다. 나라도 응원해주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홀리의 영상들은 시장의 차가운 반응을 이미 반영하고 있었다. 그 애는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마치 앨범의 실패가 미치는 영향이 온 몸으로 전달되는 듯 했다. 가만, 이게 말이 되나? 저 애는 진짜 홀리가 아니라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하지 않은가. 렌더링된 캐릭터 따위가 앨범 판매량이나 공연 수익이나 트위터에 몇 번 언급되었는지를 신경쓰진 않을 것이다. 그러다 저 스스로의 우울감에 빠져 마르고 병든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다. 맙소사! 이 또한 한낱 연출된 쇼다. 분명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워너뮤직그룹은 과연 이를 통해서 무얼 얻으려는 걸까? 동정? 연민? 멸시? 분노? 고통? 조롱? 

 

*


  12월 23일에는 새로운 영상이 전달되었다. 파격적으로 외모를 바꾼 홀리의 모습이었다. 트레이드 마크와 같았던 사랑스러운 빨간 머리칼을 천하다시피 노골적인 파란색으로 염색하고 귀가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랐다. 언뜻 보면 과격한 운동을 하는 남자 아이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른 나뭇가지처럼 몸은 앙상해서 기타를 들고 있는 모습조차 불안해 보였다. 홀리는 쇼파 위에 기대어 있었다. 아! 눈이 풀려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눈동자. 테이블 위가 롤링 페이퍼와 비닐 백과 파이프 따위로 지저분한 것도 당연했다. 그 뒤로 넓고 쾌적한 거실과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보였다. 나는 그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꿈에서라도 잊을 수가 없었다. 파리의 윌슨 오페라 호텔. 홀리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그 장소. 아주 센 주먹에 턱을 한 대 얻어 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었다. 넋이 나간 듯 영상을 바라보다가 크툴루 레코드에 전화를 걸었다. 앤더슨씨를 바꾸라고, 당장 그 자식을 대령하라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통을 쳐도 시원찮을 판에 나도 모르게 저자세가 취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앤더슨씨의 비서는 당당하게 말했다. 사장님은 출타 중이시라고.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깨무는 내 눈 앞에서 홀리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혀를 제대로 가누지 못해 시원찮은 발음으로 노래를 부르겠노라 선언했다. 짐 모리슨의 'Light My Fire'였다.
 

You know that it would be untrue 
You know that I would be a liar 
If I was to say to you 
Girl, we couldn't get much higher 
 
Come on baby, light my fire 
Come on baby, light my fire 
Try to set the night on fire  

 

  멋지군! 유니버셜과 협약을 맺어 '진짜' 유령 짐 모리슨까지 깜짝 출연 시킨다면 정말 역사상 최고의 크리스마스 이브 이브가 되겠어.
 
  바로 그 순간에 영상 속에서 한 남자가 홀리에게 다가 오는 것이 보였다. 물론 짐 모리슨은 아니었다. 나이가 꽤 들어보였다. 사실 노인이었다. 그는 소변색 액체로 가득찬 주사기를 꺼내서 테이블 위의 다른 주사기와 바꿔치기를 하였다. 한 눈에 봐도 꽤 많은 양이었다. 이미 이것 저것 좀 잡다하게 섞어 피운 탓인지 제 정신이 아니었는지 주사기가 바뀐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우리의 히로인은 그게 그냥 헤로인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게 스피드볼임을. 노래를 멈추고 몽롱한 표정으로 팔에 고무줄을 묶었다. 주사기 속의 액체가 부드러운 살을 뚫고 그 애의 혈관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잠시 후 그 애는 헛소리를 지껄이다가 발작을 하고 발작을 하다가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 짓을 13분 동안 반복했다. 그 사이에 영상의 뷰어 수는 13만 명에서 2,956만명으로 늘어났다. 트위터 따위를 타고 '꽤 볼만한 게 있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5초 후 뷰어는 다시 4억 5,697만명까지 늘어났다. 이 행성에 존재하는 사람들 스물 다섯명 중 한 명 꼴로 이 영상을 보고 있단 뜻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더 선>이 <뉴스위크>, <르몽드>가 되는 건 여기에 비하면 기적도 아니었다. 이윽고 홀리는 물 속에서 막 건져낸 미역처럼 축 늘어졌다. 눈을 뜬 채로 말이다. 텅 빈 눈동자 속에 의미없이 샹들리에가 반사되어 맺혔다. 나는 정확히 그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버릴 그 장면을, 정확히 그 자리에서 목격한 사람은 나와 내가 대동하여 데리고 갔던 전문 픽서들 밖에 없었다.
 
  노인을 적당한 난장판을 유지한 채 자신의 흔적만을 정리했다. 방금 홀리가 부르다가 만 바로 그 노래를 아무렇지도 않게 흥얼거리면서. 'Girl, we couldn't get much higher……, higher, higher.' 나는 그 노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더 잘 알 수 없을 것이다. 감지 않은, 혹은 감는 걸 잊어버려 사방으로 뻗친 머리. 방금 자다 일어나 침대에서 바로 나온 것 같은 부시시한 머리. 매일 아침 출근 길에 남들 인생을 챙겨주기 위해 집을 나서며 엘레베이터 거울 안에서 항상 발견하게 되는 그 빗질 안된 머리.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유령 가수 홀리의 3집은 재평가를 받을 것이다. 23일과 24일 양일간 총 69억명이 문제의 영상을 보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유례없는 빌보드 역주행이 시작될텐데 어쩌면 2주 안에 앨범차트 10위 안에는 가뿐하게 들어갈지 모른다. 싱글차트에서 관건은 정상을 정복하느냐의 여부일 뿐 최상위권 랭크는 당연할 것이다. 플래티넘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 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홀리는 존 덴버도 버디 홀리도 아니었지만 3일 후 부활했을 때는 어쩌면 그들보다 더 유명한 전설이 되어있을 것이다. 짐 모리슨과 재니스 조플린을 합쳐도 이만큼 강력한 상징은 아니었다. 내 경력과 명예를 걸고 장담한다. 더 이상 업계에서 활동하고 있진 않았지만 내겐 여전히 감이라는 게 있었다. 시장의 반응이 이렇다는 건 정말 정말 정말 좋은 징조다. 

(2015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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