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렉 어르신을 달래는 방법에 관하여: 어 시퀄

  그렇다. 알고 보면 이게 다 도널드 J. 트럼프 때문이다. 트럼프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달렉(Dalek) 어르신은 트럼프를 지지하셨는데 (아, 미 대선에 투표권이 있으시냐고? 그럴 리가!) 이유인 즉 민주당이라면 보통은 빨갱이당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피의자'로 수사를 받던 트럼프가 '검사' 출신의 해리스에게 정말로 승리하더니 자신을 수사하던 특별검사들을 모두 물러나게 압박하고 기소를 포기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사법리스크를 벗어나는 모습에서 아차차, 어쩐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불길한 예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다른 어떤 나라에도 비슷한 행동을 하고도 남을 대단히 위험한 작자가 있단 말이지!) 거기다 트럼프가 자유세계 동맹국들에게 관세를 올리겠다고 하고 방위비 분담으로 나토를 압박하며 우크라이나에는 협력을 지원을 끊겠다고 공언하는 마당에, 푸틴은 트럼프를 '해결사'라고 치켜세우고, 아주 잘 지내는 사이라는 김정은과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자 급기야 세계관에 균열이 오면서 정체성 혼란을 겪으시게 되었던 것 같다.

 

  어르신은 미합중국, 공화당, 트럼프, 밴스, 나토,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 유엔군, 캐나다, 호주, 이스라엘, 일본, 우크라이나, 민주주의, 자본주의, 대기업, 사업가, 그리고 한국의 빨간당이 한 편이라고 생각하셨다. 한편 민주당, 바이든, 해리스, 북한, 중국, 이란, 러시아, 바르샤바 조약 기구,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 이란, 팔레스타인, 하마스, 헤즈볼라, 탈레반, 아사드, 공산주의, 사회주의, 노조, 간첩, 범죄자, 그리고 한국의 파란당이 한 편으로 반드시 ‘엑스터미네이트(exterminate)’해야 할 존재들이라고 생각하셨단 말이다. 사실 (차마 말씀드릴 수는 없었지만) 이 해괴한 나눗셈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도 난감하다. 이란은 두 번 등장하는데 우크라이나는 양쪽 팀에 모두 속해있으며, 특히 독일 등에 있어서는 업데이트가 시급한 문제가 있다. 말하자면 금방이라도 터질 수 있는 아슬아슬하게 금이 간 제방과도 같은 것이었데, 여기에 도널드 J. 트럼프가 나타나서 네덜란드의 소년처럼 힘차게 주먹을 밀어넣은 것이다. 구멍을 막는 대신 완전히 터뜨렸다는 점에서 소년과 차이가 있겠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번에도 말을 잘못하면 또 화를 내실테니까. 어르신은 삐삑 삐삐삑 소리를 내며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셨고 성조기와 태극기와 건스틱을 세웠다 내렸다를 반복하셨다. 그리고 또 사방으로 레이져를 쏘아대기 시작하셨다. 가까스로 날아오는 레이저를 피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매일 데스 레이를 맞을 걱정을 하면서 이렇게는 못살겠다고. 그래서 홧김에 고백했다. 나는 대선에서 해리스와 월즈를 지지했다고 (아, 나에게 미 대선에 투표권이 있느냐고? 그럴 리가!) 그리고 테일러 스위프트는 ‘내셔널 트레져'라고. 격노하신 어르신께서는, 오냐, 커밍아웃 잘 들었다, 기꺼이 너도 엑스터미네이트(exterminate)시키겠다고 길길이 폭주를 하시다가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해 그 자리에 멈추셨다. 스파크가 튀기고 연기가 났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눈자루에 불이 꺼져 있었다. 논리적 오류를 이겨내지 못해 결국 고장이 나신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니 이게 다 누구 때문이겠는가.

 

(202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