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렉 어르신을 달래는 방법에 관하여: 어 트리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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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렉 어르신을 달래는 방법에 관하여: 어 트리퀄

by 김영준 (James Kim)

  달렉(Dalek) 어르신을 수리하는 것이 과연 좋은 생각인지에 대하여 고민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세대를 넘어 서로의 견해 차이를 극복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나의 순진한. 실험은 이미 두 번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몇 번이나 데스 레이를 맞을 뻔했다. 다시 고장난 달렉 어르신을 수리하고 (상당한 수리 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일단 차치하기로 하자) 전원을 넣어 동작하도록 만들었을 때 과연 어르신과 나는 평화로운 논쟁으로 서로를 설득할 수 있을까? 나는 내 의견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르신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상식과 원칙에 있어서는 서로의 입장이 달라서는 안된다는 생각이고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에 대한 지나친 감정 이입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가령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슬쩍하여 지갑은 버리고 현금만 꺼내어 사탕을 사먹었다면 자신의 행동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소매치기가 누구냐에 따라 기준이 달라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가 영 그렇지가 않다.

 

  무엇이 원인이냐를 따지자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일 것이다. 달렉 어르신의 유튜브와 페이스북 타임 라인의 경우 팟캐스트 진행자들과 인플루언서들로 도배가 되어 있고 (어처구니가 없지만) 내 말 보다는 그들의 말을 더 신뢰하셨다. (두고 봅시다. 나중에 조 로건이나 터커 칼슨, 숀 해니티가 어르신 수발을 들 것 같습니까?) 어르신을 수리하여 공장초기화 상태로 되돌리더라도 한 번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시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또 언쟁이 시작될 것이 분명하고 머지않아 나는 또 데스레이를 맞을 위기에 처할 것이다.

 

  갑자기 생각이 난 사실이었는데 과학자들은 분석 장비의 인터넷 연결을 고의로 끊어놓는 경우가 왕왕있다. 의외로 이런 고가의 정밀한 분석 장비들을 돌아가게 하는 소프트웨어는 최초 지정된 환경을 벗어나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자동 업데이트를 통해 오퍼레이팅 시스템의 버전이 달라지면 동작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과거 버전의 오퍼레이팅 시스템을 유지하다 보니 보안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아 바이러스의 공격에도 한없이 취약해지는 문제도 있다. 이에 착안하여 나는 달렉 어르신을 수리하기 이전에 와이파이 모듈을 들어내어 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인터넷 연결을 통해 왜곡된 정보를 다시 받아들이시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깨끗한 상황에서 편견 없이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을 해보셔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시게 될지 궁금하였다. 상당한 비용을 들여 어르신을 수리하였고 공장 초기화 상태로 돌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르신이 돌아오셨을 때 나는 민감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면 4년 동안 한 나라를 대표했던 사람이 재선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지지자들을 선동하여 의회를 습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정상이냐고. 이건 코끼리냐 당나귀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

 

  어르신은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며 불 같이 화를 내셨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있느냐는 말씀이었다. 도대체 어떤 작자가 그런 선동을 했느냐고 하셨고 문제의 그 이름을 이야기하자 깜짝 놀라면서 ("아니, 지금 대통령이 조지 W. 부시가 아니야?") 어떻게 부동산 장사를 하던 TV 쇼 진행자 따위가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을 차지하였느냐며 혀를 끌끌 차셨다. 심지어 그런 일을 벌이고도 4년 후 다시 당선되었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으셨다. 

 

  나는 아주 만족했다. 그래, 이래야 서로 이야기가 되지.

 

  하지만 평화는 아주 잠시 뿐이었는데 나의 부주의한 실수 때문이었다. 어쩌자고 와이파이 모듈은 제거하였는데 이더넷 포트는 남겨놓았던 걸까? 며칠 후 어르신을 모시고 외출을 하였는데 누군가 랜선을 어르신의 이더넷 포트 안에 꽂았다. 아니 글쎄, 그 포트가 자기 포트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게 빌어먹을 말이 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마가'가 어쩌고들 하더니 정말 마가 낀 것 같다. 아무튼 내가 뭐라 반응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데 그때 이미 어르신의 눈자루에 불이 심상치 않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 초점 없는 동공 안에 지나가는 것들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다음 벌어진 일은 뭐 다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뜸 너는 프로-트럼프냐 안티-트럼프냐 물으셨는데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어르신은 나를 엑스터미네이트(Exterminate) 시키겠다 또 선언하셨다. 건스틱을 내렸다 올렸다를 반복하시고 급기야 내게 데스 레이도 몇 번 쏘셨다 (다행히 이번에도 맞지 않았는데 이제 나도 피하는데 이력이 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온동네 달렉 어르신들이 몰려와 나를 엑스터미네이트(Exterminate) 시키겠노라고 건스틱을 내렸다 올렸다 난리법석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에게 둘러싸여 나는 구석까지 몰려갔다. 다급해진 나는 닥치는 대로 앞뒤가 안맞는 부분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가령 자기가 이긴 선거는 정당하고 자기가 진 선거는 부정선거라는 주장은 참 편리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말이 더 어르신들의 화를 돋웠는지 길길이 날뛰며 사방에 데스 레이를 쏘아대셨다. 이제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는데, 갑자기 그 순간 (우리 어르신을 포함한) 모든 달렉 어르신들이 하나둘씩 스파크를 튀기고 연기를 내다가 단체로 그 자리에 멈춰 서셨다. 아, 맙소사. 결국 또 논리적 오류를 만나서 고장이 나버리신 것이다. 

 

(202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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