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젼 유행어에 대처하는 방법
by 김영준 (James Kim)카페 손님들이 조잘조잘 대면서 주문을 시작했다. 일단 커피를 시켰고 그 다음에는 커피에 곁들일 케이크를 고르려고 했다. 여기서 순순히 아무 케이크나 집어서 조용히 값을 치르고 갔더라면 이 이야기는 시작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크를 고르는 과정이 어떤 이유에서 여의치가 않았는지, 아니면 아르바이트생이 말을 한번 걸어보고 싶을 만큼 차밍하고 나이스했는지, 무리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 여기 딸기 케이크가 맛있어요? 초코 케이크가 맛있어요?
그러자 그 아르바이트생이 히죽 웃으며 답하길,
- 음... 그때 그때 달라요.
아니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르바이트생은 그저 케이크의 맛이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때와 상황과 먹는 이의 입맛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아주 일상적인 표현으로 지적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손님들이 뒤집어졌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박수를 치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허파에 바람이 들어간 것은 비단 그들 뿐만이 아니어서, 나머지 모든 아르바이트생들도 차마 숨을 쉬지 못하고 웃어대었다. 마치 배트맨의 숙적 조커가 웃음가스를 카페 안에 불어넣기라도 한 모습이라고 해도 전혀 과정이 아니었다. 덧붙여 남달리 업무에 충실한 카페의 매니저는 그 사실을 즉시 사장님에게 보고했고, 카페의 사장님도 그 이야기를 듣고는 파안대소를 하며 뛰쳐나와 문제의 아르바이트생을 크게 상찬했다. 그 후로 사장님의 성은을 입은 그 아르바이트생은 '재치덩어리'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 숨가쁜 영광의 순간들에서 나는 추수가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니 주문도 못했다.) 어째서 그러고 있었느냐면 할 말이 없는데, 도대체 뭐가 우스운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딸기 케이크가 더 맛이 있어요"나 "초코케이크가 더 달콤하지요" 따위의 대답을 하면 재미가 없는 것일까? 문득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며칠이 지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그때 그때 달라요"라는 말이 최근에 인기 있는 한 코미디 프로그램의 유행어였고, 순전히 그 말을 일상적인 상황에서 끄집어낸 것만으로도 그렇게 웃음을 터뜨릴만한 일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사연으로 나는 새로운 문명을 접하는 원시인들처럼 뻘쭘하게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 해당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자기네 집 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그렇게 어색해하는 것도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단 한번도 웃지를 못했다. 도무지 어디에서 웃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굉장히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화면 속의 방청객들은 너무 우스워서 웃다가 눈물을 흘리는데, 나는 너무 졸렸던 나머지 눈을 비비다가 눈물을 흘리다니 말이다. 마치 완전히 다른 세계의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쯤해서 그치면 다행이겠지만, 텔레비전을 꺼버린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온 세상의 사람들이 내가 당연히 그 프로그램을 보았을 것이라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꺼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꺼낸 쪽은 꺼낸 대로 맞장구쳐주지 않으니까 답답하고, 듣는 내 입장에서도 뭐가 뭔지를 모르겠는데 아무튼 웃으라니 어색하고 난감한 노릇이다.
오늘 강의시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경영학 교수님께서,
- 인천공항의 이자비용이 고정원가와 변동원가중에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그때 그때 달라요.
학생들이 모두 배를 잡고 숨도 못쉬고 웃었다. 아니, 조커가 여기에도 웃음가스를 불어넣은 거야?
용의 눈알을 그려 넣는 결정적인 일은 그다음에 이어졌다. 내가 무표정하게 있으니 옆에서 웃어대던 선배가 내 귀에다 대고 조그맣게 속삭여주었던 것이다.
- 그때 그때 달라요.
그리고서 선배는 다시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하나님 맙소사,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나를 빼고 다 미친 것인가? 무슨 맥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그때 달라요"라는 말이 웃음을 부르는 마법의 주문도 아니고 이렇게 난감해서야. 정말 이래저래 피곤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나, 천부적으로 차가워서 웃을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어렸을 적에는 얼마나 코미디를 좋아했는지, 할아버지께서 교육방송의 바둑 프로그램을 보고 계시면 아장아장 걸어가서 '웃으면 복이와요'로 채널을 돌리곤 했었단 말이다. 정말이다.
(2004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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