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도서관
낙농콩단

비밀의 도서관

by 김영준 (James Kim)

  며칠 전 도서관을 방황하던 중, 나는 책장과 책장 사이의 오목한 부분에서 뭔가를 발견하였다. 그것이 비밀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었음을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솔직히 나는 살짝 감동하였다. 겉으로는 한없이 적막하고 숨 막히게만 보이는 이 조용한 도서관에도 조금은 신비로운 부분이 아직 남겨져 있구나 싶어서였다. 그리고는 (참으로 마땅하게도) 이내 호기심이 일었다. 물론 내가 무슨 인디아나 존스쯤 되는 것은 아니지만, 용기를 내어 모험을 시작했다. 통로는 길고도 험했다. 벽에는 축축한 이끼가 가득 끼어 있었고, 바닥은 풍화된 돌부스러기로 잘근거렸다. 이거야 원. 마치 중세적 왕궁이 은밀히 간직하고 있던 비밀통로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듯 뜻하지 않은 모험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다. 당장 옷이라도 지을 수 있을 만큼 촘촘히 엉킨 거미줄을 헤치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고여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물 웅덩이를 뛰어 넘자, 정말로 거짓말처럼 비밀의 방이 나타났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아늑한 공간에 육각 배열로 고서들이 촘촘히 꽂혀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매일 드나들던 도서관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비밀의 방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것들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도 없고, 접할 수 없는 종류의 책들이었다. 이를테면 1645년에 불란서에서 출판된 쥘리 피에르의 <눈물의 관악 5중주>나 1701년에 이태리에서 출판된 돈 지오반니의 <마차를 멈추지 마시오>같은 소설 등이 있다. 이런 것들은 지금 와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구해낼 수가 없는 것이며, 구할 수 있다면 그 편이 더 이상하다 할 만한 것들이다. 비교적 최근의 책으로는 해리포터의 스핀-오프 격으로 쓰였으나, 저작권 소송에 휘말려 미처 출판되지 못한 <해리 포터와 일사부재리: Harry Porter and Double Jeopardy>, <해리 포터와 전략 비축유: Harry Porter and Strategy Petroleum Reserve>, <해리포터와 QT간격 연장 증후군: Harry Porter and Long QT Syndrome>등이 있었다. 허락된다면 가지고 나가서 한 번쯤 읽어보고 싶었으나, 대출 시 담보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경고문에 움찔하여 다시 내려놓았다. 아무튼 이런 비밀의 방이 존재한단 사실에 감탄할 수밖에. 

  

 

  그 중에서 단연 내 눈길을 끄는 것은 <마음을 울리는 소고기 스프>라는 책이었는데, 세계 각국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명시(名詩)를 번역하여 한데 묶은 시집이었다. 비록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한 수, 한 수에 담겨있는 풍부한 서정성과 세련된 미적 감각만큼은 그 어느 대문호의 작품 못지않다는 것이 이 책을 영접한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라고 서문에 적혀있다. 그래서 초판 발행 시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뻔하였으나 일부 시의 안쪽에 담겨있는 반사회적이고 불온한 내용 때문에 전량 회수되어 참혹하게 불태워다는, 그래서 아쉽지만 지금은 그저 몇 권의 필사본을 제외하고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정도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울림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을 접한 순간부터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과거인들의 절절한 비명 때문이라는, 옮긴이의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평생 한 번이나 볼까 말까 한 책을 마주했는데, 그냥 다시 꽃아 두기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비밀의 방을 수호하는 전설의 사서 - 불 뿜는 꼬마돼지의 날카로운 눈을 피해 가며, 품 속에 넣어간 메모지에 필사(必死)적으로 필사(筆寫)하였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게 적어온 중에 몇 수를 골라 소개할까 한다.

 



마이크로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엄마가 사다주신 마이크로 제도 샤프.


마이크로 제도 샤프.


아아, 마이크로 제도 샤프.


오오, 마이크로 제도 샤프.


예예, 마이크로 제도 샤프.



 

나노



참 우습지.


백 오십 센티미터나 되는 
너도 어쩌지 못하는 내가


나노를 공부한다고
앉아있으니

 



매월 5일



속이 두 번 쓰려


널 위해 뭔가를 살 때 한 번


그 카드 결제일이 다가올 때 한 번


매월 5일은 내 카드 결제일


눈물의 카드 결제일



 

영시(英詩)



The train down for Danggogae, 


Danggogae. is now approaching. 


Please wait behind the yellow line.


You may get on the train when the doors are open.
 


 

 

친구



한 남자가 길을 걷다가 
맨홀에 빠졌다네
벽이 너무 가팔라서 
도저히 나올 수가 없었지

의사가 지나가자 남자는 소리쳤지
"이봐요! 의사 선생님! 도와주세요!"
의사는 처방전을 써서 던져주곤 가버렸다네

신부가 다가오자 남자는 소리쳤지
"신부님, 맨홀에 빠졌어요. 좀 꺼내주시겠어요?"
신부는 기도문을 써서 던져주고 가버렸다네

다행히 이번엔 남자의 친구가 지나갔지
"이봐, 나야. 나 좀 꺼내줄래?"
친구는 맨홀로 뛰어들었다네.
남자가 말하길
"미쳤어? 이제 둘 다 빠졌잖아" 
친구가 대답하길
"어, 정말 그렇네"



 

여흥 (餘興)



사바랏디
두비두비 라이다
뚜 렛 빠리데파
디란디란 오우워움
사바랏디
두비두비 라디닷
뚜 렛 빠리데파 
디란디란 두루둠
사바릿디
두비두비 레리렛
뚜 렛 빠리데파
디란디란 두루두루
뚱 뚜리따리 두비두비 쓰리둠



 

또 영시(英詩)
ln this part of the test,


you will hear a question spoken in English,


followed by three responses, also spoken in English. 


The questions and the responses will be spoken at just one time. 


They will not be printed in your test book, 


so you must listen carefully to understand what the speaker says. 


you are to choose the best response to each question.
 
  

 

  비밀의 방을 빠져 나갈 때 꼬마돼지는 철저하게 내 몸을 수색했다. 아마 저 아름답고도 희귀한 책들이 밖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벨트 안 쪽에 잘 접어놓은 메모지가 발견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니 그 돼지는 내가 힌두교도인지 물었다. 나는 유해교반(乳海攪拌) 따위에 대해서는 절대 알지 못하며, 소를 먹지 않으면서 돼지는 통째로 구워 먹는 사고방식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꼬마돼지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 돼지는 다시 내가 기독교도인지를 물었다. 나는 돼지가 되새김질을 하지 않고 발굽이 쪼개져 있다는 이유로 돼지의 살을 먹지도 않고 그 죽은 고기는 만지지도 않는다는 주장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돼지는 내가 회교도인지를 물었다. 나는 회교도는 아니지만, 불살생과 채식을 원칙으로 하는 엄격한 자이나교도라고 답했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줄줄 읊어대는 나의 거짓말에 꼬마돼지는 크게 기뻐했다. 진실로 정말 오랜만에 해보는 거짓말이었다. 영국 호그와트 유니버시티로 유학 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2005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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